디모데 후서 3강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말씀 / 디모데 후서 4:1-22
요절 / 디모데 후서 4:7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모든 것이 불확실하여 어떤 사람은 확실한 것은 모든 것이 불확실하다는 사실뿐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확실한 것이 하나 있는 데 그것은 사람이 언젠가 반드시 죽는다는 것입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입니다. 죽을 때 사람들은 다양한 모습으로 죽습니다. 어떤 사람은 공포에 떨면서 죽어갑니다. 어떤 사람은 후회에 가득차서 죽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바울은 어떻습니까? 그는 죽음을 앞두고 무슨 말을 했습니까? 우리는 그의 말을 통해 어떤 삶을 살았을 때 정말 후회가 없고,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고 볼 수 있는 지를 배웁니다. 우리도 모두 우리 삶을 마치는 그 날 사도바울과 같은 확신에 찬 고백을 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하나님 앞과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사도바울은 사역자인 디모데에게 엄한 명령을 내립니다. 여기서 ‘엄명’이란 가볍게 하는 말이 아니라 법정에서 처벌이 따르는 명령을 내릴 때 쓰는 말입니다. 우리가 무슨 말을 할 때 무엇을 두고, 누구를 걸고 하느냐에 따라 그 말의 무게가 달라집니다. 바울은 지금 하나님과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우주의 재판장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두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하는 명령은 이 우주에서 가장 진지하고 무거운 명령입니다.
그 명령이 무엇입니까? 2절a를 보십시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말씀전파의 명령입니다. 왜 우리가 말씀전파를 해야 합니까?
첫째, 말씀을 전하는 일은 가장 가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에는 진리가 담겨져 있습니다. 특히 구원의 진리가 담겨져 있습니다. 구원의 진리만큼 소중한 것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또한 말씀은 구원과 함께 사람을 사람답게 만들어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삶을 살도록 돕는 가장 좋은 지혜를 담고 있습니다. 이처럼 말씀을 전하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최고의 유익을 주기에 힘써 감당해야 합니다.
둘째, 말씀을 안 전하면 벌을 받기 때문에 두려움가지고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이 말씀을 부득불 전하는 데 안 전하면 자신에게 재앙이 있다고 말했습니다(고전 9:16). 이 말씀은 사도바울이 그냥 한 말이 아니라 에스겔 3:18,20절에 기초해 말한 것입니다. 에스겔서 말씀은 악인이나 의로운 삶을 살다가 악의 길로 간 사람을 깨우치지 않아, 그들이 파멸당하는 경우, 그들의 핏값을 깨우칠 의무가 있는 사람에게서 찾을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말씀을 안 전하면 이 세상에서, 그리고 하나님 앞에 가서 화가 있기 때문에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이 중요한 말씀전파를 어느 정도로 힘쓰라고 했습니까? 2b를 보십시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말씀 전할 적절한 상황이든 아니든 그것을 불문하고 말씀을 전하라고 했습니다. 말씀을 전하는 데 있어 때를 따지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상황을 재다가 결국 지금만 때인가? 오늘만 날인가? 하여 미루게 됩니다. 한 복음전도자가 레스토랑에 갔는데 서빙 하는 웨이터의 얼굴이 너무 어두워 보였습니다. 성령께서 그에게 말씀을 전하라고 부담을 주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식당에까지 와서 내가 복음을 전해야 하는 가 싶어 그 부담을 무시하고 밥을 먹고 식당을 나왔습니다. 그러나 마음에 걸려 다시 식당에 들어가 주인에게 좀 전에 자신을 서빙 했던 그 웨이터가 어디 있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침통한 표정으로 그 웨이터가 그를 서빙 하는 것을 끝으로 윗층에 올라가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알려 주었습니다. 그 사건 후 그 복음전도자는 때와 분위기를 가리지 않고 말씀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말씀을 전하지 않아도 마음에 무거움이 없고 양심에 거리낌이 없다면 그는 정말 구원받은 사람인지 의심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정말 영생을 좌우하는 말씀을 받고도 그 말씀을 전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그러기에 어떤 사람이 말씀을 전하고 있다는 것은 그가 정말 구원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말씀을 전하고 있지 않다는 것은 그 반대의 경우를 증명한다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정말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말씀을 전하므로 말씀 받고, 구원받은 성도임을 입증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말씀전파는 생전 처음 보는 사람에게 간단한 복음진리를 전하는 것부터 시작하여 성경공부를 하는 양이나 자녀들에게 사랑과 온유와 인내로 말씀을 가르치는 것을 다 포함합니다.
왜, 말씀전하기가 힘듭니까? 3,4절을 보십시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 여기서 때는 말세의 어느 때를 말합니다. 이때는 자기를 사랑하고 하나님 사랑하기보다 쾌락을 더 사랑하는 때입니다(3:1-4). 이 때 사람들은 바른 교훈을 받지 않고 대신에, 자신의 죄악된 욕망을 합리화시켜줄 가르침들을 좋아합니다. 이것을 바울은 자기 가려운 귀를 긁어줄 교훈을 듣기 좋아하는 세대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들이 듣기 좋아하는 가르침이 무엇입니까? 허탄한 이야기들입니다. 허탄한 이야기들이란, 그 내용도 허탄하고 그 이야기를 따르게 되면 삶도 허탄해지는 그런 이야기들입니다. 이렇게 사람들이 허탄한 이야기는 즐겨 들고, 진리에 대해서는 귀를 막고 있으니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좀 전도를 하면 들어주는 사람들도 있어야 신이 날 텐데 말입니다. 말씀을 전하러 다가서면 자리를 뜨며 전도자를 회피합니다. 말씀을 듣고 싶지 않다고 시위라도 하듯 모두 귀를 막는 이어폰을 끼고 있습니다.
그러니 전도자들이 전도할 의욕을 상실합니다. 이 때 전도자들이 전도자의 직무를 하나 둘씩 놓아버리고 그들도 세상일에 몰두하기 쉽습니다. 이러기 쉬운 디모데와 말씀사역자들에게 바울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5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신중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여기서 ‘신중하여’ 라는 말은 ‘정신을 차리라’는 말입니다. 말씀전파가 어렵다고 말씀전파를 포기하고 세상일에 정신 팔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말씀을 듣지 않는다고 말씀전하기를 그만두면 소는 누가 키웁니까? 행여라도 숨어있는 구원을 갈망하는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그러기에 바울은 디모데에게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계속하라고 명령했습니다. 부흥의 때에는 마치 떨어진 이삭을 줍듯이 비교적 쉽게 전도자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전도가 안 될 때는 고난을 받으면서 전도자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박해와 배척을 받더라도 전도해야 합니다. 욕을 먹고 레이저 눈빛을 받아도 전도해야 합니다.
이렇게 고난을 받으며 전도할 때 우리는 부흥의 시대에 태어난 사역자들을 부러워하며 시대를 잘못 태어난 것을 원망하거나 한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고난을 받으며 전도할 때 우리는 예수님을 많이 배우는 유익을 누립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고 거짓으로 욕먹고 비방당할 때 기뻐하고 뛰놀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쉽게 전도하면 이 땅의 양을 얻는 기쁨이 있지만, 어렵게 고난을 받으며 전도하면 우리는 하늘에서 받을 상을 예비합니다. 우리가 전도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전도의 열매를 얻는 것은 부차적인 것이요 하나님께 순종하여 하나님 앞에 떳떳이 서는 것이 더 큰 목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열매가 있든지 없든지 고난을 감당하며 전도자의 직무에 충성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늘의 상급을 바라보며 헌신하기를 기도합니다.
6절을 보십시오.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사도바울은 이제 자신의 삶이 끝자락에 이른 것을 알았습니다. 전제는 액체로 부어지는 제사로 대개 전체제사의 마지막 순서에 이루어집니다. 이는 바울의 삶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쏟아 부어진 삶이었다는 것과 이제 바울의 인생이 막바지에 이르렀다는 것을 뜻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세상을 떠날 시각이 가까웠다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AD 67년에 세상을 떠납니다. 그런데 현재는 AD 66년 몇 월로서 그가 세상 떠날 날이 몇 개월 남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자신이 세상을 떠날 날이 거의 가까웠다는 것을 감지하는 것도 축복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나이가 많아 세상을 떠날 날이 가까이 왔는데도 여전히 세상욕심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러다가 영원한 삶을 대비하지 못하고 갑자기 죽는 경우는 매우 불행한 케이스입니다.
세상 떠날 시각이 다가옴을 인지한 바울은 자신의 삶을 어떻게 자평(自評)하고 있습니까? 7절을 보십시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신문에 넬슨 제독에 대한 기사가 나서 보니, 그는 트라팔가 해전에서 전사하면서 “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저는 임무를 완수했습니다” 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그는 조국을 위해서 오른 쪽 눈과 팔을 잃었으며 최선을 다해서 국가를 위해 싸웠습니다. 이런 그는 혈과 육에 관련된 싸움을 잘 싸웠다고 고백했지만, 바울 사도는 자신이 영적 싸움을 잘 싸운 것을 고백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 예수의 병사로 부르심을 받아 고난을 사랑하고 자기생활에 매이지 않고 자신을 모집하신 그리스도를 기쁘게 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생사를 초월하여 그리스도의 좋은 병사의 삶을 살았습니다.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를 존귀케 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또한 믿음의 경주, 사명인의 경주를 완주하고 자신의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런 바울은 자신의 삶에 대해 하나님 앞에서 성공적이었다고 자평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삶은 인간적으로 보면 부정적으로 볼 여지가 많습니다. 그는 지금 로마의 지하 감옥에 투옥되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배신하고 등을 돌렸습니다. 또한 그는 감옥에서 풀려나는 것이 아니라 순교당할 것입니다. 이런 그의 삶은 얼마든지 우울하게 보거나 부정적으로 볼 수 있었습니다.
한 선교사가 선교사의 삶을 마치고 귀국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을 마중나온 사람들도 하나 없이 쓸쓸하게 귀국했습니다. 반면에 때마침 귀국하고 있는 한 정치인을 봤는데 수많은 군중들이 그의 이름을 연호하며 환영했습니다. 이 때 그 선교사는 자신을 초라하게 생각하고 자신의 삶을 후회하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하나님, 이게 뭡니까? 저는 하나님을 위해 그렇게 많이 수고하고 살았는데, 저를 환영하는 사람들이 하나도 없습니다. 저의 인생은 실패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무개 선교사야, 너는 아직 귀국한 것이 아니란다, 네가 정말 내 나라에 귀국하는 날, 나는 너를 성대하게 환영할 것이다”
우리도 하나님의 일을 하며 달려온 지난날의 삶에 대해 부정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자기생활도 없이 살아온 자신의 삶에 대해 안타깝고 한스러워하며 후회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삶에 대해 여한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온전히 순종한 삶을 회고하며 최선, 최고의 삶이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가장 성공적인 삶은 죽음 앞에서 마지막 순간에 흡족하고 당당한 삶입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았을 때 가지는 흡족함이고 당당함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맡기신 일을 완수하심으로 운명하실 때 “다 이루었다” 가장 만족스런 선언을 하고 돌아가실 수 있으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바울처럼 흡족한 마음으로 생을 마감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제 죽음을 앞둔, 바울의 확신이 무엇입니까? 8절을 보십시오.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 도니라” 바울은 자신이 곧 천국에 입성할 것이며 주님이 주시는 의의 면류관을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의의 면류관이 무엇입니까? ‘의’라는 것은 주님의 인정을 뜻합니다. 주님이 바울을 인정해주시는 것입니다. “바울아, 네가 잘하였다.” “네가 잘 살았다” 사람은 인정과 칭찬을 받을 때 행복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인정과 칭찬은 부정확하며 받아도 온전한 만족, 영원한 만족을 주진 못합니다. 그에 비해 주님의 인정과 칭찬은 영원합니다. 그래서 한번 받으면 영원한 만족과 기쁨을 줍니다. 특히 죽음 이후의 인정과 칭찬은 최종적이라는 데 의미와 가치가 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자신이 주님의 인정을 받을 것을 확신했으며 이것을 간절히 기대했습니다.
사람이 만약 이 땅에서 슈퍼스타였다 한들, 주님이 그를 인정하지 않으면 그는 가장 초라한 자이며 불쌍한 자입니다. 이 땅에서 수많은 타이틀과 이력을 가졌다 한들 주님이 그를 인정하지 않으면 그는 영원한 실패자입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습니다(히 9:27).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서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주님의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우리는 바로 이 한 순간을 위해 존재합니다. 이 순간은 모든 사람에게 다가오며 우리 모든 인생들은 바로 이 순간을 향해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주님께 인정받는 바울 같은 사람들이 다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러기위해서는 이 땅에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죽음 앞에 당당했던 사람들은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며 산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명령이 무엇입니까? 첫째로, 서로 사랑하는 것이며, 둘째로,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산 사람들은 주님 앞에 가는 것이 두렵지 않습니다. 유명한 전도자 D.L.무디는 하루에 한명 전도를 하지 않으면 잠을 자지 않기로 결심할 정도로 복음전파에 헌신된 삶을 살았습니다. 어느 날, 그는 하루가 다 끝나가는 데 하나님 앞에 드린 전도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잠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 가로등아래 서 있는 한 사람을 만나고 그에게 말씀을 전하고 들어와 잠을 청했습니다. 이처럼 날마다 주님의 전도명령에 순종하고자 했던 무디는 죽음 앞에 섰을 때 어떤 고백을 한 줄 아십니까? “땅이 물러간다. 천국이 열린다. 내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시는구나! 나를 붙잡지 말라” 그는 세상에 대한 미련도, 죽음이후에 대한 일말의 두려움도 없이 기쁨으로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갔습니다.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이 왔도다” 바울의 죽음 이야기는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한 목자님은 친척의 시신 염을 일부러 자신이 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얼마 후면 자신이 그곳에 누워있을 것을 생각하니 친근하게 여겨지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내가 세상을 떠나 주님께 갈 시각이 작년보다 더 가까워졌습니다. 떠날 시각이 가까웠다는 말은 “The time of my departure is at hand”(KJV)로서 손을 뻗치면 잡을 만큼 가까이 왔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진실로 사망과 자신의 거리는 한 걸음뿐이라고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온 것은 순서가 있지만 세상을 떠나 주님께 가는 것은 순서가 없습니다. 누가 먼저 주님께 갈지 아무도 모릅니다. 최근에 한 선교사는 5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한 아름다운 연예인도 저와 동일한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세상을 떠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바울처럼 주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에 매진하다가 주님이 부르시면 “네, 주님 저를 부르십니까?” 언제든지 주님 앞으로 달려가는 당당한 성도들이 다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9-22절은 바울의 마지막 부탁과 인사 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등지고 배신한 이들에 대한 아픔과 상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것을 다 소화해내었습니다. 바울은 인간의 연약함을 알았기에 허물을 그들에게 돌리지 않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했을 것입니다. 대적자요 박해자도 주님께 맡겼습니다. 바울이 주의 일을 할 때 많은 아픔과 고통, 외로움,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이 가운데 그가 그 모든 아픔과 고통을 감당하고 두려워하거나 염려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이 항상 그의 곁에 서서 그에게 위로와 힘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가 이방인 구원의 사명을 감당하게 하셨고 1차 출옥을 이루셨습니다. 이제는 사명을 완수하였으므로 천국에 들어가게 하십니다. 주님은 바울을 다메섹 도상에서 택하신 그 날부터 그의 모든 순종하는 삶속에서 함께 하셨고, 마침내 그가 죽는 순간까지 함께하십니다. 함께 하시는 주님이 그의 아픔보다 크고, 그가 겪은 고난보다 크고, 심지어 죽음보다 크시기에 그는 모든 어려움을 이기고 믿음의 경주를 완주하고 주님 품에 골인할 것입니다.
결론입니다. 모두에게 세상 떠날 날이 다가 오고 있습니다. 세상을 떠나는 날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이 나를 인정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명령에 순종함으로 당당히 주님 앞에 나아가는 사람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특별히 이기심에 매이지 않고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에 순종하며, 열매가 있든 없든 말씀을 전파하는 삶을 살아 주님께 인정받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