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요한복음 1강
말씀이 육신이 되어
말씀/ 요한복음 1:1-18
요절/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
봄학기 요한복음 말씀을 공부하게 되어 감사합니다. 요한복음을 시작하기 앞서 요한복음은 당시 헬라 문화권에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요한복음의 사상적 배경은 구약성경입니다. 특히 1장에서는 창세기와 잠언 말씀이 배경이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요한복음을 듣고 이해하는 사람은 헬라 문화권에 깊이 젖어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설령 정통 유대인이라 할지라도 헬라 문화권에서 헬라적인 사고를 하는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우리로 치면 정통 한국인이고 한국말도 하고 김치도 먹지만 이민 2세, 혹은 3세이기 때문에 내면적으로는 서구인의 사고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이민 3세에게 무언가 가르치려면 서구적인 표현방식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그들의 사고방식을 이해하는 가운데 가르치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이처럼 요한복음은 헬라 문화권에 있는 사람들이 구약성경에 기반한 복음진리를 가장 쉽게 또 정확하게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마음으로 기록되었습니다. 곧 타문화권의 사람들이 복음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기록된 책입니다. 그러므로 과거 전혀 기독교를 접해보지 못했던 사람, 성경을 머리에 털나고 처음 읽어보는 사람도 마태복음의 족보를 읽으면서는 졸립다가도 요한복음을 읽으면 무언가를 느끼게 됩니다. 요한복음에 기록된 빛과 진리, 생명에 관한 말씀은 기독교에 대한 배경지식이 전혀 없어도 마음에 무언가 깊은 울림을 줍니다. 또 그런가 하면 평생을 성경을 읽던 사람도 요한복음을 읽으면 마치 성경을 처음 읽는 것같은, 끝을 알 수 없는 깊이를 느끼게 됩니다. 자 그러면 이 신비한 책인 요한복음을 함께 열어볼까요?
1-3절을 보십시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요한복음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이 말씀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라고 기록된 창세기 1:1절과 매우 유사합니다. 특이한 점은 요한복음에서 말씀은 원문상 ‘로고스’라고 기록된 것입니다. 말씀이라는 헬라어에는 로고스도 있지만 레마라는 단어도 있습니다. 물론 로고스는 말하다는 뜻을 가진 ‘레고’의 명사형으로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당시 헬라 문화권에서 로고스는 매우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저자가 그 의미와 구별해서 사용하려고 했다면 ‘레마’라는 단어를 썼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자는 의도적으로 로고스라고 표현합니다. 이는 마치 동양 문화권에서 길을 표현할 때 ‘길’이라고 말하지 않고 ‘도’라고 표현한다면 그것이 단지 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참된 진리를 의미하는 것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당시 헬라인들에게 로고스는 무엇을 의미했을까요? 헬라인들은 먹고 사는 것에 관련된 일은 전쟁포로로 잡아온 노예들에게 다 시키고 본인들은 우주만물, 또 인간의 내면을 연구하며 나름대로 진리를 탐구했습니다. 그들이 탐구한 것에 의하면 우주만물을 누군가가 생각을 가지고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인간 역시 누군가가 혹은 무엇인가가 인간 안에 자신의 생각을 심어놓았다는 것입니다. 인간 안에 있는 이성이나 양심의 소리 등이 그 증거입니다. 또 우주만물의 해와 달과 별의 운행법칙을 누군가가 혹은 무엇인가가 생각을 가지고 정해놓았다는 것입니다. 헬라인들은 그 누군가 혹은 무엇인가를 ‘로고스’라 불렀습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헬라인들과 정반대로 진리에 대한 연구는 과학자들이나 사상가들에게 맡겨놓고 본인들은 열심히 돈벌어 먹고 사는 일에 매진합니다. 하지만 바쁜 일상의 삶을 잠시만 내려놓고 내 존재의 근원에 대해, 또 우주만물의 근원과 그 운행의 원리에 대해 생각해보면 참 신비하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동양에서는 음양오행의 원리로 만물의 이치를 설명했습니다. 낮에는 양의 기운인 태양이 뜨고 밤에는 음의 기운인 달이 뜹니다. 남자는 양의 기운을 받아 태양처럼 힘찬 반면, 여자는 음의 기운을 받아 밤하늘에 곱게 떠 있는 달같은 자태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의 신체도 태양인, 태음인, 소양인, 소음인 같은 방식으로 분류합니다. 음식에도 태양빛을 많이 받고 자란 양의 기운을 가진 음식이 있고 음의 기운을 가진 음식이 있으므로 잘 분류해서 먹어야 합니다.
오늘날 과학자들은 우주만물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를 발견하고 있습니다. 뉴튼이 사과나무가 땅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이래 눈에 보이는 대부분의 현상들은 뉴튼의 법칙으로 설명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광활한 우주는 뉴튼의 법칙으로 설명이 안되었습니다. 그래서 아인슈타인이 상대성 이론으로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과학적 측정 기술이 발전하면서 분자, 원자의 세계, 10의 마이너스 9승의 세계인 나노의 세계에 대한 연구가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이 나노의 세계는 마치 소우주와 같습니다. 원자 하나가 얼마나 작습니까? 그 원자의 중심에 원자핵이 있고 그 원자 주변을 전자가 맴돌고 있습니다. 원자핵의 크기를 서울광장에 있는 축구공이라면 전자의 크기는 수원에 있는 먼지 하나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원자 하나가 얼마나 광활한 세계입니까? 원자 하나가 마치 하나의 소우주와 같습니다. 그리고 그 원자의 세계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놀라운 질서정연하면서 신비한 법칙들이 존재합니다. 그것을 연구하는 것이 양자역학입니다. 그런데 그 원자가 수없이 많이 모여 우리 눈에 보이는 물체들을 형성합니다.
서울과 부산의 거리가 얼마인지 아십니까? 약 400킬로미터입니다. 서울을 출발하여 동일한 위도를 따라 지구를 한 바퀴 돈다면 이 거리의 100배입니다. 그러니까 서울에서 부산 가는 것을 1,00번 정도 반복하면 지구를 한 바퀴 돌게 됩니다. 달은 서울-부산 거리의 1,000배 정도의 거리에 있습니다. 태양까지의 거리는 서울-부산 거리의 100만 배입니다. 태양이 멀리 있는 것 같지만 태양계에서 가장 가까운 별까지의 거리는 지구-태양 거리의 100만 배입니다. 우리 은하에서 가장 가까운 안드로메다 은하에 가려면 지구-태양 거리의 1,000억 배를 가야 합니다. 우주에는 이런 은하가 1,000억 개 정도 있습니다. 원자와 전자의 세계에서 우주의 세계에 이르기까지 이 얼마나 광활합니까! 이 광활한 우주에도 질서 정연하면서도 신비한 법칙들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우리 인간 안에도 새겨져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선과 악에 대한 내면의 소리, 혹은 양심의 소리입니다. 7,8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아이들도 무언가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 ‘그건 공평하지 않아’라고 말합니다. 그의 내면 안에 정의에 대한 기준이 있습니다. 수천년 사람들의 기록, 특히 그들이 만들어놓은 법전을 살펴보면 그들의 정의에 대한 기준이 오늘날 법전에 녹아있는 정의에 대한 기준과 거의 같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인류학자들은 어느 시대, 어느 문화를 막론하고 정의에 대한 기준이 있으며 비록 표현 방식은 조금씩 달라도 근본적인 기준 자체는 거의 같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만약 인간이 스스로 이런 기준을 정했다면 그것은 시대에 따라, 문화에 따라, 또 각 사람에 따라 다 달라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어떤 시대, 어떤 문화든 이 정의에 대한 기준은 거의 같습니다.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도 거짓말하고 속이고 도둑질하는 것이 정의롭지 않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습니다. 도둑질이나 사기를 치며 사는 사람도 자기 자녀에게는 자기가 사기를 쳐서 돈을 벌어온다는 사실을 숨기기 원합니다.
그렇다면 인간 안에 새겨져 있는 이런 정의의 기준, 내면의 소리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광활한 우주만물은 도대체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으며 그 안에 새겨진 그 모든 신비한 법칙들은 어디에서 온 것입니까?
요한복음의 저자 사도 요한은 이 모든 것이 로고스로부터 출발했다고 말합니다. 우주 만물에 로고스의 숨결이 미치지 않은 곳이 하나도 없습니다. 내 마음 깊은 곳을 바라볼 때, 정의와 공평과 참된 사랑, 인생의 참된 의미와 가치를 추구하는 내 자신을 바라볼 때 그곳에 로고스의 손가락이 남겨놓은 흔적이 있습니다. 한치의 오차도 없이 뜨고 지는 태양을 바라볼 때, 과학자들이 발견하여 놓은 그 놀라운 결과물들을 읽어볼 때 로고스의 위대한 생각의 흔적을 더듬어갈 수 있습니다.
요한은 이 로고스가 태초, 곧 시간과 공간이 존재하기 전, 영원 이전부터 존재했다고 말합니다. 그 로고스는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그 로고스가 곧 하나님입니다.
4절을 보십시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로고스 안에 생명이 있었습니다.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입니다.
생명은 얼마나 신비한 것입니까? 오늘날 이 생명을 연구하는 학문의 분야가 생물학, 혹은 생명공학입니다. 학자들은 인간이 눈에 보이는 모습의 인간인 것은 세포 안에 기록된 DNA 정보 때문이라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인간의 몸은 세포로 이루어졌는데 각 세포마다 DNA가 있습니다. 세포 한 개 안에 있는 DNA의 정보량이 어느 정도 될 것 같습니까? 무려 전 세계 인구 절반에 해당하는 사람들의 이름을 기록해 놓은 것과 비슷한 분량입니다. 그런데 이 세포는 자기 복제 및 분열을 합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DNA를 그대로 복제하여 새로운 세포를 만들어 냅니다. 우리 몸에 이런 세포가 무려 30조개가 있다고 합니다. 30조개의 세포가 세계 인구 절반에 해당하는 사람들의 이름만큼의 분량을 그대로 베껴 새로운 세포 안에 기록합니다. 이러한 일이 거의 매일 매일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러면 그 DNA의 모든 내용을 전부 분석해내면 생명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과학자들이 게놈 프로젝트를 통해 DNA 지도를 만들었지만 그것으로는 생명이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생명은 무엇입니까? 본문에서 생명은 원문상 ‘조에’인데 이는 육체의 생명을 가리키는 ‘프쉬케’와 구별하여 참되고 영원한 생명을 의미합니다. 이 생명은 단순한 유전자 정보가 아니라 사람들의 영혼에 빛이 됩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무신론자인 피터 왓슨이 몇년 전 The Age of Nothing이라는 책을 저술했습니다. 이 책은 ‘신이 없다는 것이 입증된 시대, 다시 말해 신이 없는 세상을 어떻게 살아나갈 것인가’ 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의 말에 의하면 “도스토예프스키나 T.S. 엘리엇, 사무엘 베케트같은 작가들은 신이 사라진 후 남겨진 황량한 세계를 바라보며 느낀 참담함을 작품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는 “신이 사라진 스산하고 암울한 황무지에서 허우적거리며 마냥 기다리는 대신” 무언가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찾아볼 것을 제안합니다.
그는 거의 성경책만큼 두꺼운 책의 내용을 통해 무신론자가 그래도 나름대로 삶의 의미와 가치를 느낄 수 있는 여러가지 대안을 제시합니다. 하지만 그 대안의 무게감이 성경이 주는 것을 따라지 못하는 것을 본인도 인정합니다. 그래도 어쨌든 신은 존재하지 않으니 니체를 원망하지 말고 이렇게라도 노력해보자고 독자들을 다독입니다.
오늘날 현대 지성인들은 스스로 똑똑하다고 생각하면서 자신들의 생각 속에서 신의 존재를 지워버렸습니다. 그 결과가 어떠합니까? 마치 집 안에 있는 모든 창살을 검은 커튼으로 가려버린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사람이 인생을 살면서 힘들고 어려워도 그래도 신이 이 세상에 나를 태어나게 하신 뜻이 있으리라, 아무리 어렵고 힘든 일을 만나도 그래도 나의 삶에 신이 주신 어떤 목적이 있으리라 선하신 뜻이 있으리라, 이 어려움 뒤에 신이 예비하신 밝고 아름다운 미래가 있으리라 생각하는 것은 마치 캄캄한 집에 어둠을 뚫고 빛이 들어오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신이 없다고 생각함으로 사람들은 깊은 어둠에 거하게 되었습니다. 이 어둠 속에서 뭔가 해보려고 발버둥치지만 발버둥치면 칠수록 더 깊은 어둠에 빠지게 됩니다.
사람들은 스스로의 힘과 의지와 노력으로 내면의 어둠을 거둬낼 수 있는 빛을 만들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다른 것은 몰라도 이 빛은 인간 스스로 제조해 낼 수 없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 빛은 오직 로고스 안에만 있기 때문입니다. 태양빛은 촛불이나 원자력 등을 이용해서 대체할 수 있을지 몰라도 우리 영혼을 비추는 이 생명의 빛은 오직 로고스 안에만 있습니다.
요한복음 1:4절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이 말씀은 오늘날 우리 모임이 세계적인 선교단체로 성장하게 된 원동력이 된 말씀이기도 합니다. 1960년대, 70년대 가난했던 우리 청년들은 돈을 벌어 가장 노릇을 하기 위해, 동생들을 대학에 진학시키기 위해 서독으로 간호사로, 광부로 나아갔습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힘들고 험한 일을 하면서, 이억만리 떨어진 조국의 가족들을 생각하면서 밤마다 눈물로 베개를 적셨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요한복음 1:4절 말씀이 임했습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그들의 마음은 돈을 벌기 위해 이억만리 외국에 와서 일하는 자신의 모습으로 인해 슬프고 어두웠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그들의 마음에 임했을 때 놀라운 빛이 임했습니다. 그들의 삶에 주님께서 두신 선하고 아름다운 뜻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들의 눈에는 슬픔과 운명의 눈물대신 하염없는 감격의 눈물이 흘렀습니다. 그들은 동료 간호사들에게 이 말씀을 전하기 시작했고 이들이 우리 모임의 초대 선교사들이 되었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날 우리 청년들에게도 생명이요 빛이 됩니다. 우리 청년들은 제대로 된 알바 자리 하나 구하기도 힘듭니다. 요즘 알바하고 있는 둘째 아들 다니엘을 보니까 알바 면접에서 몇 번이나 떨어지고 좌절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겨우 하나 구했는데 두 주만에 짤릴 위기에 처했습니다. 코로나 시대에 빨리 군대에 가려고 신청을 했는데 계속 떨어지다가 군에 가기 위해서 몇 일 동안 자원봉사 활동을 하였습니다. 자원봉사 활동을 하면 무슨 점수가 적립이 되어 군대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군대를 가기 위해 처절한 투쟁을 하는 아들을 보며 정말 이 시대 청년들이 살기 힘들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서독에서 치매 환자들의 용변을 처리하는 일을 하며 동생들의 학비를 벌었던 간호사들이 흘렸던 눈물을 닦아주었던 그 고로스의 생명, 그 로고스의 빛은 오늘날 힘든 세상을 살아가는 청년들의 마음에 흐르는 눈물도 닦아줍니다. 어두운 그들의 내면에도 생명의 빛을 비추어줍니다. 봄학기 요한복음 말씀을 통해 이 생명의 빛이 우리의 내면에 흘러 넘치기를 기도합니다.
5-13절은 이 로고스가 세상에 왔다는 놀라운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로고스가 세상에 오다니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이것은 너무도 놀라운 일이어서 사람들이 보고도 깨닫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먼저 세례 요한을 보내셔서 사람들로 하여금 로고스를 믿도록 도와주셨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로고스를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그 결과 믿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중에 세례 요한의 증거를 듣고 이 로고스를 깨닫고 믿은 자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14절을 보십시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말씀 곧 로고스가 육신이 되었습니다. 육신은 헬라어로 사륵스 영어로는 flesh입니다. 헬라인들은 세상 만물의 가치와 숭고함을 단계별로 설정하였습니다. 가장 숭고하고 가치있는 것은 idea의 세계입니다. 육체보다 정신이 숭고하고 정신도 다 같은 정신이 아니고 지극히 숭고한 정신이 있습니다. 그 idea의 세계에 도달하는 것이 헬라인들의 삶의 목표였습니다. 그들의 사고 안에서 사륵스, 곧 육신은 가장 낮은 차원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천지만물을 창조한 로고스가 육신이 되었습니다. 아마도 헬라인 독자들은 이 부분을 읽으면서 너무 놀라 뒤로 까무라쳤을 것입니다. 위자 뒤로 넘어져 정신을 잃었다가 한참 뒤 깨어나 정말인가 하면서 다시 이 부분을 읽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만큼 이 말씀은 놀라운 선언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다니!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 옆에 하나님과 함께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계시던 로고스께서 이 땅에 육신이 되어 오셨습니다. 요한복음의 저자 요한은 자신과 함께 먹고 마시며 대화했던 그 분(예수)께서, 그의 이름을 불러주시고 사랑이 가득한 눈길을 자신을 바라보셨던 예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던,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 옆에 하나님과 함께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계셨던 그 로고스임을 깨달았을 때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벅찬 감격과 희열로 그의 눈에서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을 것입니다. 그의 입에서 끝없는 찬양과 감사가 흘러넘쳤을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절과 더불어 이 14절의 말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이 말씀은 우리 모임의 모든 선교사님들과 목자님들의 삶의 좌표가 되는 말씀입니다. 나이지리아의 윤안드레, 레베카 선교사님들은 모든 것이 편리한 한국에서 살 수 있지만 모든 것이 열악한 나이지리아로 젊은 날 선교사로 나아갔습니다. 그곳에서 수시로 전기가 끊어지고 물이 끊어져 어려움을 겪어야 했습니다. 한 번은 샴푸로 머리를 감다가 수도가 끊어져 생수병으로 머리를 감기도 했습니다. 또 밤중에 자다가 전기가 나가 너무 더워 시멘트 바닥을 찾아 그곳에 얼굴을 비비며 잠을 청하기도 했습니다. 윤레베카 선교사는 힘들고 열악한 나이지리아 생활을 하면서 마음이 어려워지기보다 오히려 높고 높은 하늘보좌를 떠나 낮고 낮은 이 땅에 낮아져 오신 예수님의 성육신의 은혜를 생각하며 깊은 감동과 은혜를 받았습니다. 한 번은 집에서 일하던 현지인 가정부가 지갑에서 자꾸 돈을 훔쳐가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때 윤안드레 선교사는 그를 야단치거나 해고하는 대신 월급이 적어서 그런가 보다 하고 오히려 월급을 올려주었습니다. 이 모습을 곁에서 지켜본 현지인 대학생들은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성육신하신 예수님의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16-18절은 성육신하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요한의 감격적인 고백입니다. 은혜 위에 은혜였습니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왔습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의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독생하신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 수 있습니다.
결론입니다. 살기 힘든 시대 가운데 우리의 마음에 깊은 어둠이 있습니다. 이 어둠을 몰아낼 생명의 빛은 로고스가 되신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이 예수님을 통해 생명의 빛이 우리 영혼을 비추기를 기도합니다. 더 나아가 성육신하신 예수님을 배워 우리도 이 생명의 빛이 필요한 영혼을 찾아가 전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