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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1년 부활절 특강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요한복음 11:1-57)2021-04-05 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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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부활절 특강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말씀/ 요한복음 11:1-57
요절/ 요한복음 11:25,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Happy Easter! 부활의 밝은 새 아침을 허락하신 주님께 감사와 찬송을 돌려드립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의 마음에 부활 생명의 기쁨과 생명력이 충만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어떤 병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자매 마르다의 마을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닦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버니더라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베다니 마을에 나사로라는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아주 가까운 마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내려오실 때면 종종 이곳 베다니 마을 나사로의 집에 숙박하셨습니다. 나사로에게는 마리아와 마르다라는 두 자매가 있었는데 특히 마리아는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닦은 일로 아주 유명했습니다. 예수님이 자기 집에 오실 때면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는 정성을 다해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예수님 일행을 섬겼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예기치 못한 불행이 찾아왔습니다. 그것은 오빠 나사로가 병이 든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몸살 감기여서 한 며칠 땀 빼고 푹 쉬면 나을 줄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폐렴 증세를 보이며 상태가 점점 악화되었습니다. 사경을 헤매는 오빠를 보며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는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 간청했습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이 들었습니다.” 

4-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는 예수님이 사랑하는 나사로를 위해 만사를 제쳐놓고 곧바로 이곳 베다니 마을로 오실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시는대신 소식을 전한 사람을 통해 두 자매들에게 말씀만 주셨습니다. 그것은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머무셨습니다. 

우리는 때로 주님의 도우심이 가장 필요할 때 실제적인 도움을 주는 대신 단지 약속의 말씀만 주시는 것을 체험합니다. 이는 그 약속의 말씀을 붙드는 법을 배우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눈에 보이는 상황보다 약속의 말씀을 붙드는 과정을 통해 성장합니다. 주님은 문제 자체의 해결보다 우리의 믿음이 성장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자녀를 키울 때에 자녀의 문제를 그때그때 즉각 해결해주고 도와주면 자녀가 성숙한 어른이 될 수 없습니다. 이와같이 주님은 우리의 어리고 연약한 믿음을 키워주시기 위해 약속의 말씀을 붙들도록 인도하십니다. 

이틀이 지난 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베다니 마을이 있는 유대로 가자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깜짝 놀라 말했습니다.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합니까?” 이에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낮이 열 두 시간이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않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 낮은 열 두 시간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안심하고 여기 저기 다니며 필요한 일을 합니다. 빛 되신 예수님이 함께 하는 사람은 낮이 열 두 시간이 보장된 것처럼 그의 생명이 하나님이 맡겨주신 일을 다 끝마치기까지 보장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혹시 죽지 않을까 두려워하거나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말씀을 하신 후 예수님은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겠다.” 이 말은 들은 제자들은 “주여 잠들었으면 곧 낫지 않겠습니까?” 여쭈였습니다. 저자 요한은 예수님이 나사로가 죽었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표현하신 것인데 제자들이 알아듣지 못하였다고 멘트합니다.

예수님은 알아듣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나사로가 죽었다고 명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나사로가 있던 베다니에 있지 않은 것을 제자들을 위해 기뻐한다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그들로 하여금 믿게 하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무엇을 믿게 될 것인지 목적어는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본 사건의 중심 테마가 믿음인 것을 암시하셨습니다. 한편 살벌한 유대로 내려가는 것에 두려움을 느낀 도마는 비장한 어투로 다른 제자들에게 말했습니다.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예수님이 베다니에 도착하셨을 때 나사로는 이미 죽어 무덤에 있은지 나흘이나 되었습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약 2km 떨어진 가까운 곳이어서 예루살렘에 사는 많은 유대인들이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를 위로하기 위해 방문해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21,22절을 보십시오.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마르다는 예수님이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해 마을 입구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말하였습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마리아의 이 말을 통해 알 수 있는 바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마르다가 예수님을 시간과 공간의 한계 안에 갇힌 분으로 생각했다는 사실입니다. 마르다는 오라비 나사로가 죽어갈 때 만약 그 때 예수님이 그 자리에 계셨더라면 오라비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오라비가 죽어갈 때 그 때에 예수님은 그 자리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 공간의 한계를 예수님도 어떻게 하실 수 없었습니다. 다음으로 마르다는 나사로가 이미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죽음의 시간은 지나갔습니다. 한번 지나간 것은 그 누구도 돌이킬 수 없습니다. 이것을 오늘날 과학자들은 열역학 제 2법칙 곧 엔트로피 법칙으로 설명합니다. 엔트로피는 곧 무질서도를 의미합니다. 세상 모든 만물은 무질서도가 더 증가하는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예를 들어 맑은 호수물에 검은 잉크 한 방울을 떨어뜨리면 그 검은 잉크는 무질서도가 더 큰 쪽으로 움직입니다 .다시 말해 잉크가 호수에 무질서하게 퍼져나갑니다. 그 반대로 잉크가 질서있게 잉크는 잉크대로, 맑은 물은 맑은 물대로 모여드는 일, 곧 무질서도가 스스로 감소하는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마르다가 열역학 제 2법칙을 알았을리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경험으로 한 번 죽은 사람, 더 나아가 죽은지 나흘이 지나 부패가 시작된 시신이 다시 살아나는 일은 결코 일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일지라도 이미 죽어버린 오라버니에 대해서는 더 이상 하실 수 있는 일이 없다고 인정했습니다. 그녀는 다만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죽은 오라버니는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으나 만약 지금 응답이 가능한 다른 무엇인가를 구하면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으시고 주실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마르다는 예수님을 시간과 공간의 한계 안에 가두어 두었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예수님이 슬픔으로 가득한 그녀의 마음에 참된 위로가 되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보다 시간과 공간을 장악하고 있는 그 무엇인가가 그녀를 압도하였습니다. 현재 시간과 공간을 장악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죽음입니다. 

게임에서는 설령 게임 캐릭터가 죽어도 다시 살릴 수 있습니다. 게임을 종료시키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면 됩니다. 그러나 현실 세계에서는 한 번 죽으면 그것을 그 누구도 그 무엇도 되돌릴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죽음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우리가 눈으로 보고 느끼고 체험할 수 있는 것들 중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죽음보다 더 강한 것은 없습니다. 현대 자본주의 시대에서 한 번 사업에 실패하여 빚더미에 내몰린 사람이 다시 재기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요즘 한 연예인이 30년간 모든 재산 관리를 친형에게 맡겼다가 최근 형이 그 재산을 전부 자기 가족 명의로 빼돌린 것을 발견하고 형을 고소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고등학생인 형의 딸이 인터넷에서 이 소식을 접한 친구들에게 왕따를 당하고 그 충격으로 정신과 진료를 받게 되었습니다. 과연 이 두 형제가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매우 어려워보이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죽음은 그 누구도 그 무엇도 다시 그것을 회복할 수 없고 되돌이킬 수 없습니다. 죽음이 가진 그 엄혹함을 알기 때문에 사람들은 음주운전으로 교통사고가 나서 가장이 죽어도 합의금을 받고 그 사람의 처벌을 원치 않는다는 합의서를 써줍니다. 세상 그 누가 사랑하는 남편, 사랑하는 아빠를 음주운전으로 빼앗아간 사람을 돈을 받고 처벌을 원치 않는다는 합의서에 내 손으로 싸인을 해 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죽음은 그 무엇으로도 되돌릴 수 없다는 사실을 알기에 합의서에 싸인을 해 줍니다. 

현재 마리아의 마음은 눈 앞에 계신 예수님보다 이 죽음의 세력에 더 크게 압도되어 있습니다. 그녀의 마음은 죽음이 가져다주는 슬픔에 압도되어 있습니다. 두려움과 슬픔은 매우 유사한 감정이라고 합니다. 사람이 아주 뜨거운 것과 아주 차가운 것을 접할 때 비슷한 느낌을 받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아주 뜨거운 국물을 마시고 ‘어 시원하다’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처럼 두려움과 슬픔은 유사한 감정에 해당합니다. 사람이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심장 박동이 빨라지거나 불규칙해집니다. 몸에 일종의 마비 증상이 옵니다. 슬픔에 사로잡히면 우울하고 푸른 하늘이 잿빛으로 보입니다. 슬픔과 두려움은 낮과 밤이 교차하듯 차례로 찾아옵니다. 두려워하다가 결국 파국이 올 것 같다는 확신이 들면 두려움이 슬픔으로 바뀝니다. 슬퍼하다가 약간의 소망을 발견하고 기운을 냅니다. 그러나 그 소망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은 상황으로 인해 또 다시 두려움이 찾아옵니다. 마리아의 마음은 사랑하는 오빠를 잃은 슬픔과 이제 오빠 없는 하늘 아래 이 세상을 두 자매가 홀로 남아 살아가야 한다는 두려움에 가득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마르다에게 놀라운 약속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예수님의 말씀에 마르다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마르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조문하러 온 하객들이 “언젠가는 오라버니를 다시 만날 날이 올 것입니다.”라고 말하며 위로하는 의미로 이해했습니다. 예수님의 약속의 말씀은 마르다에게 작은 위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에 있는 극한 슬픔과 두려움에 근본적인 위로가 되지 못했습니다.

25,2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예수님은 죽음권세에 사로잡혀 슬퍼하고 절망하는 마르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예수님의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첫째, 예수님은 죽음보다 더 크고 강하신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나에게는 부활의 능력과 생명의 능력이 있다”고 말씀하는 대신 “내가 곧 부활이요 생명(I am the resurrection and the life.)”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죽음이 크고 강한 것은 시간과 공간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시간과 공간을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시간과 공간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시간과 공간의 한계 안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원하신다면 얼마든지 엔트로피 법칙을 초월해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실 수 있습니다. 죽음에서 생명을 불러올 수 있습니다. 

죽음의 세력은 무시무시한 핵폭탄과 같습니다. 핵폭탄이 떨어진 곳은 존재하는 모든 것이 다 무로 돌아갑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이 떨어졌는데 바닥에 사람이 서 있었던 그림자만 남아버린 시신의 사진이 있습니다. 원폭의 강렬한 열에 녹아 사람이 순간적으로 사라없어지고 희미하게 길 바닥에 사람 모양의 그림자만 남아있는 사진입니다. 이처럼 죽음의 핵폭탄이 터질 때 한 사람의 존재 자체가 완전히 사라지고 다만 그 사람에 대한 아련한 기억만이 그림자처럼 살아있는 사람들의 마음에 남아있을 뿐입니다.

헤밍웨이는 죽음이 가져오는 이 허무함을 그의 단편소설 “깨끗하고 불빛 환한 곳”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습니다. 늦은 밤, 손님이 모두 떠난 카페에서, 귀가 들리지 않는 한 노인이 홀로 술을 마시고 있었습니다. 젊은 웨이터와 중년 웨이터가 함께 노인을 주시합니다. 그는 지난 주에 자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한 노인이었습니다. 젊은 웨이터는 자신의 퇴근을 지연시키는 노인이 맘에 들지 않아 투덜댑니다. “지난 주에 자살에 성공했으면 좋았을 텐데.” 중년의 웨이터는 그를 부드럽게 나무랩니다. 노인이 떠난 후 중년의 웨이터는 그 노인의 마음을 알 것 같았습니다. 그것은 허무였습니다. 노인은 너무도 허무했고 그 허무로 인해 빛이 필요했습니다. 또 약간의 깨끗함과 질서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찾은 곳이 “깨끗하고 불빛 환한 곳”인 술집 카페였던 것입니다. 훼밍웨이는 깨끗하고 불빛 환한 곳이라는 상징적 표현을 통해 깨끗하고 불빛 환한 카페에 있지 않으면 죽고 싶을만큼 허무한 그 허무의 힘을 이와같이 문학적으로 표현하였습니다. 문학가들 중 헤밍웨이처럼 허무의 강한 힘과 능력을 느끼고 체험한 이들 중 다수가 그 허무함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로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얼마 전 제 나이 또래의 한 대학교수가 한창 일할 젊은 나이에 지병으로 사망하였습니다. 그는 젊은 날 유학을 다녀와서 교수로서 왕성하게 활동하던 중이었습니다. 그가 얼마나 많은 공부를 했으며 그의 머리 속에 얼마나 많은 지식이 들어있었겠습니까. 그가 그 지식을 습득하기 위해 젊은 날 얼마나 오랜 시간 공부를 했을까요. 얼마나 수많은 날들을 책과 씨름하며 분투했을까요. 그런데 그 많은 지식들이 그의 죽음과 함께 다 사라졌습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죽음이 허무와 슬픔 두려움, 어두움, 우울함을 무기로 모든 사람을 다스리고 지배하는 이 세상에 부활이요 생명으로 오셨습니다. 죽음보다 더 크고 강한 자로 오셨습니다.

둘째, 예수님은 그를 믿는 자에게 지금 현재 부활 생명이 되십니다. 본문의 사건은 예수님의 능력을 보여주는 하나의 표적(sign)이기 때문에 죽은 자가 언제나 지금 이 세상에서 부활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부활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을 때 지금 현재(I AM the resurrection) 내 마음에서 죽음의 세력이 영원히 물러나게 됩니다.

체코의 신한나 선교사님은 젊은 날 남편을 잃고 과부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남편을 잃은 슬픔이 너무 컸습니다. 그 슬픔과 아픔을 가눌 길이 없었습니다. 그때 그는 성경을 펴 욥기 말씀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욥기 말씀을 읽던 중 욥기 41:11절 말씀을 받게 되었습니다. “누가 먼저 내게 주고 나로 하여금 갚게 하겠느냐 온 천하에 있는 것이 다 내 것이니라” 이 말씀을 읽는 순간 남편이 죽음 권세에 패하여 죽은 것이 아니라, 그의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데려가셨다는 사실이 깨달아졌습니다. 

아름다운 장미 정원을 가꾸는 정원사가 있습니다. 어느날 보니 정원에서도 가장 눈부시게 아름다운 장미 한송이를 누군가가 꺾어 간 것을 발견했습니다. 정원사는 놀라 절규하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누가 이 아름다운 장미를 꺾어갔는가!” 이때 집사가 와서 말합니다. 그 장미를 꺾어간 이는 바로 이 정원의 주인님이십니다. 그때 정원사의 슬픔과 분노가 사라졌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눈부시게 아름다운 장미와 같은 젊은 한나 선교사님의 남편을 꺾어간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분은 남편의 생명의 주인이셨습니다. 이것을 마음 깊이 영접하였을 때 한나 선교사님의 마음에 남편을 잃은 슬픔과 아픔이 사라졌습니다.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그녀의 마음에 가득차게 되었습니다.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주시는 부활의 생명과 기쁨이 그녀의 마음을 다스리게 되었습니다. 이후 그녀는 체코에 머물러 남편대신 사업을 하면서 선교사역을 힘있게 감당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시작한 지금 이 순간 부활 생명의 생명력을 얻게 됩니다. 육신은 비록 잠시 잠들지만 부활 생명은 영원합니다. 우리 안에 슬픔이 있습니까? 두려움이 있습니까? 허무함이 있습니까? 우울한 마음이 있습니까? 부활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영접하시기를 기도합니다. 부활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지만 여전히 마음에 우울함과 슬픔이 있는 분이 계십니까? 연약한 믿음을 더 크고 강한 믿음으로 키우시길 기도합니다. 어떻게 연약한 믿음이 더 크고 강해질 수 있습니까? 주님이 주시는 말씀을 액면 그대로 믿으시길 바랍니다. 제자들은 나사로가 잠들었다는 예수님의 비유를 문자 그대로 해석했습니다. 반면 마르다는 지금 네 오라비가 살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먼 미래의 일로 해석했습니다. 연약한 믿음은 예수님의 말씀을 자기 생각과 자기 고집의 물로 희석시키거나 비유적인 의미로 그 뜻을 완전히 바꾸어 받아들입니다. 크고 강한 믿음은 예수님의 말씀을 말씀하신 의도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예수님은 당신께서 말씀하신 의미 그대로 부활이요 생명이십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십니다. 시간과 공간의 법칙을 초월하여 죽은 자에게 생명을 주십니다. 또한 살아서 그를 믿는 자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의 말씀을 믿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부활 생명되신 예수님이 내 안에 오심으로 내 안에 있는 모든 두려움, 슬픔, 어두움, 허무가 사라지고 부활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감사가 충만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부활 생명되신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마르다는 지금까지 “아나이다”를 반복하다가 이번에야말로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다고 신앙고백하였습니다. 한편 마르다는 마리아에게 가서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 알렸습니다. 마리아는 급히 일어나 예수님께 나아갔습니다. 마리아를 위로하던 유대인들은 마리아가 곡하러 무덤에 가는 줄 알고 따라나왔습니다. 

예수님이 계신 곳에 이른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말하였습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말을 마친 마리아는 눈물을 비처럼 쏟으며 서럽게 울었습니다. 이 모습을 본 유대인들도 함께 눈물을 흘리며 울었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와 함께 있는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잠시 후면 마리아가 부활 생명이신 예수님을 체험함으로 큰 기쁨을 누릴 것을 아셨습니다. 그러나 지금 현재 날카로운 송곳으로 심장을 찌르는 것 같은 아픔을 느끼는 마리아의 그 아픔을 예수님은 불쌍히 여기시고 그 아픔에 동참하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무자비한 훈련관처럼 우리를 훈련한다고 하면서 우리의 고통에 무관심한 분이 아닙니다. 주님이 주시는 믿음의 훈련을 받으며 아파하고 눈물 흘릴 때에 불쌍히 여기시고 그 아픔에 깊이 동참하여 주십니다. 

35절은 성경에서 가장 짧은 말씀입니다. 영어 성경에는 단 두 단어로 되어 있습니다. “Jesus wept.” 예수님이 흘리신 이 눈물은 죽음권세 아래 굴복되어 고통하며 눈물흘리는 모든 인생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눈물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눈물을 본 유대인들은 “보라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말하였습니다. 한편 어떤 이들은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말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예수님은 다시 속으로 비통히 여기셨습니다. 이는 부활 생명이신 주님에 대한 불신이요 큰 모독이었습니다. 

동굴로 된 무덤이 돌로 막힌 것을 보신 예수님은 돌을 옮겨놓으라 말씀하셨습니다. 이때 마르다가 나사로가 죽은지 나흘이 되어 벌써 냄새가 난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그녀에게 예수님은 4절에서 주셨던 약속의 말씀을 상기시켰습니다. 

돌을 옮겨 놓은 후 예수님은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도록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이 기도의 목적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아버지께서 보내신 분으로 믿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43,44절을 보십시오.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말씀을 마치신 예수님은 무덤 입구에 서서 나사로가 있는 쪽을 향해 큰 소리로 외치셨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죽은 나사로의 몸은 무덤 속 어두운 동굴 안에 나흘 간 누워 있었습니다. 사망의 문은 닫히고 빛 한 조각 없는 어둠 속에서, 생명의 호흡은 떠나 영원한 침묵 속에 누워 있었습니다. 구원의 소망도 없이 끝없이 내리는 절망 가운데 그의 몸은 점점 썩어가고 있었습니다. 슬픔과 눈물 속에 영원한 어둠의 나라를 향해 그의 육신은 무너져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이때였습니다. 그의 귀에 거역할 수 없는 주의 생명의 부르심, 애통히 부르시는 주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죽음에서 일어나 생명의 대지로 나오라” “나사로야 나오라, 어둠에서 일어나 새 하늘 새 땅으로 나오라” “나사로야, 나오라 사망권세 이기고 승리하신 주님께 나오라”

주님의 거역할 수 없는 생명의 부르심을 들은 나사로의 육신은 다시 부활하여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쿵쿵 뛰며 무덤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의 얼굴은 수건에 싸여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풀어 놓아 다니도록 하셨습니다. 죽은 나사로가 살아나온 것을 본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 더 나아가 이를 목격한 모든 이들은 예수님이 참으로 생명의 주, 부활의 주님이신 것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나사로는 죽은 지 이미 나흘이나 지나 그의 육신은 부패가 시작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죽은지 나흘이나 지나 부패가 시작된 시신을 새로 살리느니 차라리 흙으로 나사로를 새로 만드는 편이 더 쉬울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만큼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것은 큰 권능의 능력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영생을 얻었습니다. 우리가 죽을 때 우리의 육체는 무덤 안에서 잠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은 주님과 함께 낙원에 있게 됩니다. 부활의 날 주님은 무덤 안에 있는 우리의 육체를 향해 우리 각자의 이름을 부르며 말씀하실 것입니다. “OOO아, 나오라” 이 음성을 들을 때 잠들었던 우리의 몸은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51,52절은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우리에게 이 부활의 소망이 있습니다. 또한 지금 현재 내 안에 부활 생명이신 예수님이 계심으로 부활의 기쁨과 생명력이 충만합니다. 오늘 이 부활절 날 우리 안에 부활 생명이신 예수님으로 인한 기쁨과 생명력이 더욱 충만하여지길 기도합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말씀 붙들고 하루하루 부활 소망과 기쁨 가운데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저희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45-57절에서 이 소식을 들은 종교 지도자들은 드디어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정했습니다. 특히 그 해의 대제사장이었던 가야바가 결정적인 발언을 했습니다. 그는 “나사로를 살리신 이 예수님을 모든 유대인들이 믿고 따르니 로마 편에서 볼 때 이것을 반역으로 여기고 우리를 망하게 할 것이다. 그러니 이 예수를 죽임으로 온 민족을 구원하자.”라는 발언을 합니다. 그는 악한 의도로 말했습니다. 그러나 저자 요한은 하나님이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입을 통해 예수님의 죽음의 참된 의미를 선포하신 것으로 해석하였습니다. 

저자 요한은 결과적으로 예수님이 그의 친구 나사로를 살리심으로 이 사건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게 됨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5:13절에서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대로 예수님은 친구 나사로를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이로써 나사로를 향한 그의 사랑을 확증하여 주셨습니다. 이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이로써 나사로를 사랑하셨던 그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심을 확증하셨습니다. 

결론입니다. 예수님은 부활 생명이 되십니다. 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우리 안에 있는 죽음이 주는 모든 세력이 물러가고 부활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감사와 생명력이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부활 소망 안에서 맡겨주신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저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