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요한복음 제 13 강
세상의 빛
말씀 요한복음 9:1-41
요절 요한복음 9:5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오늘 말씀은 요한복음에 나온 예수님의 자기 선언, 2번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세상의 빛이라고 선언하십니다. 그런데 나는 세상의 빛이다 는 말씀은 8장과 9장에서 반복되어 나옵니다. 왜 예수님은 이렇게 자신이 세상의 빛이심을 강조하셨을까요? 그리고 8장에서의 의미와 9장에서 의미는 어떻게 다를까요? 이시간 우리가 세상의 빛 되신 예수님을 잘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이 길 가시다가 날 때부터 맹인된 사람을 보셨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장애인을 보통 맹인으로 봅니다. 듣지 못하는 청각장애인, 말을 하지 못하는 농인, 앞을 전혀 못 보는 맹인 중에 선택하라면 아무도 맹인을 선택하진 않을 것입니다. 이처럼 맹인은 장애인중 최대로 불행한 조건을 가진 이들입니다. 게다가 본문의 맹인은 구걸한 것(8)을 볼 때 헬렌 켈러처럼 부잣집에 태어난 것도 아닌 흙수저 맹인이었습니다.
이런 맹인을 볼 때 제자들의 질문이 무엇입니까?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2) 그들은 도대체 이런 불행한 인간조건을 가지고 태어난 것은 누구의 잘못때문인지 심각하게 질문했습니다. 아마 이 질문은 맹인 자신이 수없이 마음속에서 했던 질문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누구의 잘못으로 그는 이렇게 태어났을 까?” 아마도 자신의 잘못은 아닐 것입니다. 태어날 때 부터 맹인인데, 엄마뱃속에서 아이가 잘못을 했으면 얼마나 했겠습니까? 그리고 아무리 잘못을 했다 한들 그것 때문에 맹인이 되었다면 그것은 너무 가혹합니다. 그 부모의 잘못으로 자식이 맹인이 될 수는 있을 텐데 그런 경우, 그 또한 너무나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시대 최대 이슈는 공정입니다. 이대남들은 자신들만 군대가는 것에 대해 불만을 터트릴 정도입니다. 그런데 날 때부터 불리한 조건으로 태어난 것을 생각하면 하늘이 원망스럽고 세상이 너무 불공평하고 억울하다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누구는 재벌 2세로 태어났습니다. 건물을 가지신 부모님의 자녀로 태어났습니다. 누구는 IQ 150으로 태어났습니다. 별로 공부를 않고 명문대에 들어갔습니다. 누구는 얼짱, 여신의 몸매를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나는 가난한 부모님 밑에서 태어났습니다. 머리도 좋지 않습니다. 얼굴도 잘 생기지 않았습니다. 몸매도 평균이하입니다. 사람들이 지나간 후 나를 보기 위해 고개를 돌린 경우는 한번도 없었습니다.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 세상은 너무 불공평하고 억울하다 못해 분노가 치밀어 옵니다.
못난 자신의 운명을 탓하고 부모를 탓하고 하나님이 계시다면 하나님을 향해 따지고 싶습니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불리한 조건을 가지고 태어났으니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비참하게 살다가 죽을 수 밖에 없다는 신념이 운명주의입니다. 이 운명주의가 사람을 어떻게 만듭니까? 무기력하게 하고 아무런 도전도 못하게 합니다. 저주의식에 갇히게 합니다. 이런 운명주의는 크기는 다를 뿐 모든 사람에게 있습니다. 제자들의 운명주의는 무엇이었을 까요? 약소국 식민지 백성으로 태어났다는 것, 그리고 갈릴리 출신이라는 것, 가방끈이 짧다는 것 등의 운명주의가 있었습니다. 특히 갈릴리 출신들은 아무리 능력발휘를 해도 유대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이스라엘사회의 주도적 인물들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 맹인의 처지는 어떤 면에서 이스라엘의 처지요 제자들의 처지를 대변한다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3) 예수님은 누구의 죄 때문에 그렇게 불행해 보이는 인간조건을 가지고 태어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의 최악의 인간조건을 통해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때로 인간의 좋은 인간조건은 인간의 영광을 드러내고 그의 교만을 부추깁니다. 하지만 열악한 인간조건은 하나님이 그 인생에 개입하시고 그의 은혜와 능력과 영광을 나타내는 조건이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때가 낮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생명이 주어져서 일할 수 있는 시간을 말합니다. 밤이라는 것은 죽음을 말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일을 하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뭔가 보람 있는 일을 하면서 인생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 일중의 제일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일을 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몸보다 마음이 문제입니다. 생각이 부정적이고 어둡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8장에서 그 어둠은 인생의 방향과 가치를 찾지 못해 죄의 세력에 끌려다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9장에서 어두움은 운명주의 때문에 의욕과 열정, 자신감을 잃어 어떤 일도 도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려면 먼저, 마음의 어둠을 물리쳐야 합니다. 마음의 어둠을 물리치려면 빛이 필요합니다. 희미하고 작은 빛 가지고는 안됩니다.
요절 말씀인 5절을 보십시오.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예수님은 자신을 세상의 빛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세상의 빛이라고 하면 이해하기 쉽게 태양을 생각하면 됩니다. 태양이 뜨기 전 세상은 어둡습니다. 뭐가 뭔지 분간이 안됩니다. 열정과 에너지가 있어도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오시기 전 세상의 모습이며 예수님을 만나기 전 한 사람의 삶의 실존입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게 되면 세상이 밝아집니다. 예수님의 빛은 너무나 밝아서 밝히지 못할 어두움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모든 내외적 어둠이 물러갑니다. 세상은 대낮처럼 밝아지고 마음은 희망과 기쁨과 감사와 자신감으로 차오르게 됩니다. 자신의 불행한 인간조건에 두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심지어 그 불행하게 여기던 인간조건을 긍정적으로 보고 슬픔과 운명의 이유가 아니라 감사와 기쁨의 제목으로 삼습니다.
6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예수님이 왜 이런 행동을 하시는 것입니까? 예수님이 맹인의 눈을 뜨게 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냥 말씀으로만 하시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러면 깔끔하고 좋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셨습니다. 침과 진흙이 눈뜨는 데 효력이 있는게 아닙니다. 이것은 제자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시고자 함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가진 게 없고 처한 현실이 열악하여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운명주의와 부정적인 생각을 고쳐 주기를 원하셨습니다. 침은 누구에게나 있고 진흙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과 어디에나 있는 것을 가지고 그것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셨습니다. 그러니 제자들도 아무리 부족해도, 어떤 열악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의 셋집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는 거대한 로마복음화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복음전하러 갈 수 없으니 오는 사람들을 영접하고 섬겼습니다. 특히 자기를 감시하러 오는 시위대병사들을 하나님이 보내신 양들로 여기고 말씀으로 섬겼습니다. 이렇게 바울은 로마 복음화를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침과 진흙을 이기는 일을 했습니다. 그렇게 했을 때 250년 후에 로마제국의 철옹성이 사도바울의 침과 진흙 앞에 무너졌습니다. 로마가 기독교제국이 되어 전 세계 복음화에 쓰임 받는 대반전이 일어났습니다.
우리가 지금 어떤 처지에 있습니까? 나는 얼마나 부족한 사람입니까? 그럼에도 내가 빛 되신 예수님을 믿을 때 일 할 수 있습니다. 할 일이 보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기도의 침과 말씀의 진흙을 이겼을 때 모두가 갈릴리 출신의 한계를 뛰어 넘어 세계로 나아가 인류의 스승들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빛되신 예수님을 바라봄으로 마음의 억울함과 낙심과 좌절을 이기고 감사와 기쁨과 희망가운데 주의 일과 세상 일을 잘 감당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맹인의 눈을 고쳐주지 않으시고 그에게 믿음과 순종의 세계에 눈뜨게 하시려고 그에게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는 방향을 주셨습니다. 이에 맹인은 요한복음 2장의 하인들처럼, 왕의 신하처럼 주님께 순종합니다. 그가 실로암 못에 가서 씻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정말로 눈이 뜨여졌고 그는 밝은 눈으로 왔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에 있어서 예수님이 하필이면 맹인을 왜 실로암 못으로 보냈습니까?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입니다(7). 실로암 못은 왜 보냄을 받았다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을 까요? 실로암 못은 BC 8세기에 히스기야 대왕이 만들었습니다. 그는 앗수르 군대로부터 예루살렘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해 성 밖 기혼 샘에서 530미터의 암반터널을 통해 성안에 물을 끌어들였습니다. 그 끌어들인 물을 받아 만든 못이 실로암 못입니다. 그러니까 실로암 못은 기혼 샘에서 보냄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 많이 나오는 단어중 하나가 ‘보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별명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로부터 우리 인생들에게 보냄을 받으신 분입니다. 결론적으로 실로암 못은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우리 인생들은 이 그리스도 예수께 와서 그 눈을 씻으면 그 눈이 밝아집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을 만나면 모든 것이 뚜렷해집니다. 모든 것이 구분이 되고 분간이 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을 만나면 우리는 더 이상 더듬거리는 삶을 살지 않습니다. 어디가 길이냐 방황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면, 예수님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2021년 여름수양회가 눈앞에 있습니다. UBF 여름 수양회는 예수님을 제시하는 곳이기 때문에 실로암 못입니다. 여름수양회는 그동안 조금이라도 말씀을 받았던 분들이 와서 그 눈을 씻으면 밝히 보는 곳입니다.
저는 1986년, 그러니까 35년 전 여름수양회에 갔습니다. 그곳은 돼지막사가 옆에 있어 돼지똥 냄새가 나고, 수양관에는 파리도 많았습니다. 죽은 파리들을 치우고 자리에 앉아야 말씀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저는 저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을 나의 그리스도로 만났습니다. 그때는 수양회를 4박 5일했는데, 마지막 날 아침 갈릴리 바닷가에서 저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는 주님의 질문앞에 저는 쏟아지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강의가 끝나자마자 수양관옆 시냇가에 가서 흐르는 시냇물에 눈을 씻고 또 씻었습니다. 그리고 하늘을 바라보았는데 세상이 완전히 달리 보였습니다. 마음은 뿌듯하고 행복감이 차오르고 넘쳤습니다.
저는 최근에 양들에 대한 실망감으로 이렇게 여름수양회에서 눈을 씻고 밝히 보는 것은 아주 오래전이나 가능했던 일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지난주 선교후보 입소식을 했는데 한 2세 선교사가 발표한 인생소감을 들었습니다. 그녀는 2017년 지금으로부터 4년 전 가장 의지하던 어머니가 뇌출혈로 소천하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무엇으로도 메울 수 없는 허전함과 슬픔으로 마음을 잡을 수 없었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막막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를 불쌍히 여기시고 여름수양회에서 만나주셨습니다. 누가복음 23:34절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이 예수님의 기도말씀을 듣는 데 그 말씀이 자신을 위한 기도로 들렸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려 큰 고통 중에서도 자신을 위해 기도드리셨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말씀을 듣고 소감을 쓰면서 자신의 모든 죄문제를 고백하며 이런 죄인을 사랑하셔 새 생명으로 살도록 예수님이 기꺼이 죽으셨다는 것이 너무나 놀라웠습니다. 죄사함의 은혜가 생생히 다가올 때 말로 표현 못할 기쁨이 솟아 나고 눈물이 멈추지 않았습니다. 세상에서 줄 수 없는 참 만족, 기쁨, 그리고 평화가 예수님에게서 오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어머니에 대해서도 효도 한번 제대로 못하고 떠나보냈다는 죄책감이 있었는데, 죄책감도 씻겨 내려가고 오히려 천국 소망이 분명해지게 되었습니다. 이런 변화가 너무도 신기했고 자신도 스스로 믿기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이 자매님은 공부도 포기했었는데 지금은 서울대와 동경대와 북경대에서 공부를 마치고 아버지가 아프리카 선교지에서 기관총 강도를 4번이나 당하였기에 선교사의 삶에 회의적일 수밖에 없었는 데, 예수님을 만나고 영적인 눈을 뜨이자 아버지의 선교지보다 더 어려운 나라로 기꺼이 나아가며, 믿음으로 선교가정도 이루고자 결단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여름수양회는 아직도 유효한 실로암 못입니다. 우리가 기도를 많이 하고 그동안 조금이라도 그 눈에 침과 진흙을 바른 양들을 여름수양회에 초청하여 그들이 예수님을 만나고 영적인 눈을 뜨도록 섬길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2021년 여름수양회가 감격적인 실로암 못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맹인이 눈을 뜨는 표적은 구약성경에서 그리스도의 표적으로 예언되어 있는 데(사 35:5) 예수님은 날 때부터 맹인이었던 이 사람의 눈을 뜨게 하심으로 자신이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이심을 증명하셨습니다.
맹인이 눈을 뜨는 표적이 얼마나 큰 표적인지 사람들 중에는 믿지 않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 맹인이 정말 맞어? 아니여 그럴 리가 없어. 비슷한 사람 이겠지!” 그때 그는 자신이 바로 맹인이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어떻게 눈이 뜨여졌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예수라는 분이 진흙을 이겨 눈에 바르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순종했더니 보게 되었다고 간증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이 눈뜬 맹인을 데리고 바리새인들에게 갔습니다. 이는 바리새인들이 종교경찰이요 영적 지도자요 재판관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었고 마침 예수님이 그 맹인을 고치신 날이 안식일이라 문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 가운데 이 사람 때문에 예수님에 대해 논쟁이 일어났는데,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자가 어떻게 하나님이 보내신 자라 할 수 있느냐 하는 주장과 죄인이 어떻게 이런 놀라운 표적을 행할 수 있겠냐는 주장이 충돌했습니다.
이에 그들은 다시 한 번 맹인에게 그의 눈을 뜨게 한 사람에 대해 그 자신은 어떻게 생각하는 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주저없이 선지자라고 대답했습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이 보내셔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분입니다. 이에 유대인들은 그 맹인이 처음부터 맹인이었다는 것부터 의심하고 부모를 불러 사실관계를 확인하려 했습니다. 부모들은 그 맹인이 자신들의 아들인 것과 맹인으로 태어난 것이 사실이라고 팩트체크를 해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아들이 어떻게 해서 눈을 뜨게 되었는 지는 자신들은 모르니 본인에게 물어보라고 말꼬리를 돌렸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말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한 것을 알았기에 몸을 사린 것이었습니다.
이에 바리새인들은 맹인이었던 사람을 두 번째 불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하고 자신들은 예수님이 죄인인줄 안다고 하며 그들이 원하는 자백을 강요했습니다. 이에 그 눈뜬 맹인은 그들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으며, 부정할 수 없는 한 가지 아는 것을 증언했습니다. 그는 살기 위해 진실을 부정하거나 은혜를 배신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다시 바리새인들은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며 취조하듯 물었습니다. 이에 맹인이었던 사람은 왜 같은 질문을 반복하여 묻는 지 그들도 예수님의 제자 되려고 하는 것인지 그들을 풍자하며 말했습니다. 이에 그들은 맹인 되었던 사람을 욕하며 그는 예수의 제자나 자신들은 모세의 제자라고 하며 예수님과 그 제자 됨을 폄하했습니다.
이에 맹인 되었던 사람은 “이상하다” 라고 말하며 왜 순수하게 생각하면 금방 답이 나오는 것을 가지고 그러는 지 답답한 듯 말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상식만 가지고 있어도 예수님을 잘 분별하고 영접할 수 있음을 알게 됩니다.
이에 바리새인들은 그 맹인으로부터 훈계를 받은 것으로 기분이 나빠, 그를 비하하고 책망했습니다. 죄가운데서 태어난 주제에 자신들을 감히 가르친다며 쫒아내었습니다. 즉 출교를 시켰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가 쫓겨 난 것을 알고 그를 찾아 오셨습니다. 이 맹인이었던 사람은 은혜를 배신하지 않았고, 예수님도 충성된 그를 배신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를 찾아와 그를 위로를 주시고 그에게 힘을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14:21b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예수님은 자신 때문에 고난당하는 사람들을 반드시 찾아오시고 자신을 나타내 주십니다.
예수님은 맹인 되었던 그 사람을 만나시고 어떻게 그를 도와주셨습니까? 그에게 인자를 믿느냐고 말씀 하셨습니다. 인자는 예수님이 본래 로고스이셨으나 사람의 몸을 입고 낮아져 오셔 그 육체로 우리 죄값을 친히 치루시고 우리를 구원하심을 강조하는 그리스도의 대명사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만나고 경배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육적인 눈을 뜰 뿐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로 만남으로 영적인 눈도 뜨게 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만나는 것이 최고의 복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그리스도가 되사 그를 하나님 아버지께로 인도하시며 그의 평생에 동행하시며 그의 목자요 친구요 아버지가 되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영적인 눈을 띄어 주신 다음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39) 이 말씀을 보면 눈을 뜨고 못 뜨고의 기준이 예수님입니다. 우리가 영적인 눈을 뜨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나의 맹인된 것을 인정하고 주님 앞에 나오면 됩니다. 그러나 자신이 맹인이 아니며, 본다고 하면 그는 여전히 죄가운데 있으며 그는 계속 흑암속에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다방면에 책을 읽고, 우주와 원자와 양자물리학을 공부했다 할지라도 그가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를 거절하면 그는 똑똑한 체 해도 사실은 1cm 앞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깜깜한 흑암속에 사는 사람입니다. 왜, 이렇게 예수님을 모르면 영적 맹인이 될 수 밖에 없습니까? 예수님을 모르면 그를 보내신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을 모르면 모든 것을 모를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그리스도 예수님을 만나야 비로소 세상을 제대로 봅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세상의 빛이십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모든 것이 밝아지고 분명해집니다. 어둠, 특히 운명주의가 사라집니다. 무기력하던 사람이 열정적인 사람으로 바뀝니다. 우리가 세상의 빛 예수님을 바라봄으로 생각이 밝아져 의욕과 열정을 가지고 새롭게 침과 진흙을 이기기를 기도합니다. 여름수양회가 실로암 못이 되어 영적 눈을 뜨는 감격들이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