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요한복음 14강 나는 선한 목자라
말씀 / 요한복음 10:1-42 요절 / 요한복음 10: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오늘 본문은 9장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9장에서 예수님은 태어날 때부터 맹인이었던 사람의 눈을 열어주셨습니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이 사건을 목격하고도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내신 분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내신 분, 특히 구세주를 의미하는 그리스도로 인정할 경우 그 사람은 유대인 공동체에서 쫓아내기로 결정했습니다. 맹인이었던 사람은 이를 두려워하지 않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했습니다.
10장은 동일한 사건을 경험했는데 왜 어떤 사람(예를 들어 본문의 맹인)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고백하는데, 왜 어떤 사람들(예를 들어 본문의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거부하는지 그 이유를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1-5절을 보십시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예수님의 이 말씀은 팔레스타인 마을이면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장면입니다. 당시 목자들은 대부분 영세한 소규모였기 때문에 낮에 양에게 풀을 뜯게 하고 밤이 되면 공동 우리에 양을 넣어 두었습니다. 공동 우리에는 문지기를 고용하여 양들을 도둑이나 이리 떼로부터 지키게 했습니다. 아침이 되어 목자가 오면 문지기는 문을 열어주었고 목자는 양들의 이름을 하나씩 불러내었습니다.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목자와 양 사이에는 깊은 신뢰의 관계가 맺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목자가 앞서 가면 양들은 목자의 뒤를 따라갔습니다.
예수님이 이 비유를 통해 주시려는 메시지가 무엇이었을까요? 6절을 보면 비유를 들은 당사자들은 전혀 그 의미가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7-18절은 이 비유에 대한 예수님의 자세한 설명입니다. 7-10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비유의 해설에서 예수님은 예수님 자신이 양의 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양의 문이라고 하신 말씀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양의 눈높이에서 이 말씀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양의 하루는 문에서 시작하여 문에서 끝이 납니다. 양은 하루 일과를 마치면 양의 우리가 있는 문으로 들어갔습니다. 양에게 있어 팔레스타인의 밤은 매우 위험합니다. 밤이 되면 배가 고픈 맹수들이 양을 잡아 먹으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습니다. 또 양을 훔쳐가려는 도둑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에게 잡혀가면 양은 생명을 잃게 됩니다. 하지만 목자의 인도함을 받아 문으로 들어가는 순간 양은 안전한 곳에 거하게 됩니다.
양은 겁이 많아 두려움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않으면 절대로 눕지 않는다고 합니다. 두려움 가운데 벌벌 떨면서 밤을 지새고 나면 양은 쇠약해지게 됩니다. 하지만 목자의 인도함을 받아 문으로 들어가는 순간 양은 목자가 눈에 보이지 않아도 안심하고 온 몸의 긴장을 풀고 자리에 누워 편히 쉴 수 있습니다. 다음날 아침이 되면 양은 자기의 이름을 부르는 목자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러면 양은 문밖으로 나옵니다. 문 안이 안전하다고 해서 양이 하루종일 문 안에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다가 운동부족과 영양결핍으로 죽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양은 아침이 되면 문밖으로 나와 목자의 인도함을 따라 푸른 초장 맑은 시냇물이 있는 곳을 향해 길을 떠납니다. 그곳에서 마음껏 꼴을 먹고 물을 마시는 가운데 살이 포동포동 오르고 온 몸에 윤기가 흐르게 됩니다.
이처럼 양의 삶은 문을 중심으로 밤에는 그 문 안으로 들어가 평안함과 안전함을 누리며 낮에는 그 문 밖으로 나와 꼴을 먹고 물을 마십니다. 문은 양에게 생명의 상징과 같습니다.
예수님이 나는 양의 문이다 말씀하신 것을 좀 더 쉽게 풀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어떤 가족이 있습니다. 그 가족이 가정의 가장인 아버지에게 말합니다. “여보, 당신은 우리 집안의 대들보에요.” 예전의 집은 대들보가 집의 구조의 중심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대들보가 무너지면 집이 무너지게 됩니다. 이제 예수님이 “나는 양의 문이다.” 말씀하신 의미가 조금 더 와 닿죠? 양의 삶에 있어서 양우리의 문은 안전함과 생명의 보증이요 중심축입니다. 예수님은 한 가장이 그 집안의 대들보인 것처럼, 양에게 있어 문이 되십니다. 요즘 사람들에게 있어 양의 문은 안정된 직장입니다. 밤이 되면 사람들은 직장에서 퇴근하여 집으로 갑니다. 직장에서 별 문제없이 잘 근무하는 한 평안한 마음으로 집에서 푹 쉴 수 있습니다. 아침이 되면 열심히 일해 돈을 벌 마음으로 힘차게 직장을 향해 출발합니다. 이런 평안한 일상을 보내던 어느날 직장에서 갑자기 구조조정 이야기가 돌기 시작합니다. 하루 아침에 안정된 직장에서 짤릴 수 있다는 위기감이 듭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푹신한 침대 위에 누워도 전혀 푹신하지 않습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고무를 씹는 것 같고 아무런 맛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마음에 미래에 대한 염려와 불안이 쓰나미처럼 밀려듭니다. 이처럼 안정된 직장은 그것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사람들의 마음에 안전함과 평안함을 가져다주기도 하고, 불안과 염려, 두려움을 주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양의 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자신을 통해 양들이 구원을 얻으며 풍성한 생명의 꼴을 얻는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안정된 직장, 혹은 돈이 우리 삶의 중심축인 것 같지만 실제로는 예수님이 우리 삶에 진정한 안전함과 평안함, 풍성함을 가져다주는 중심축이 되신다는 의미입니다.
대들보가 평소에는 보이지 않지만 그 집의 안전함을 담보해주는 것처럼, 양의 문이 양 보기에 하루 두 번 보일 뿐이지만 양의 안전함과 생명의 풍성함을 담보해주는 것처럼 예수님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을지라도 우리 삶의 안전함과 평안함, 생명의 풍성함의 보증이 되십니다. 엊그제 군에 막 입대한 둘째 아들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내용인즉 화이자 백신을 맞을 예정인데 부모님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화이자 백신 맞고 사망한 군인도 있다고 하던데 본인 생각은 어떠냐고 물어보았습니다. 둘째 아들은 ‘뭐 별일 있겠어. 괜찮겠지. 그냥 맞을래’ 라고 하였습니다. 그 대답 속에 담긴 뜻은 그가 사실상 통계를 믿는다는 의미였습니다. 복권당첨되는 것이 길 가다가 벼락 맞을 확률보다도 낮다고 합니다. 그것은 웬만하면 복권을 한 두 장 쯤 사도 당첨될 일이 거의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 것처럼 확률 통계상 백신 부작용으로 사망할 일은 거의 없으니 확률을 믿고 맞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그에게 그래도 사람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 생명의 주관자이신 주님께 나아가 기도하고 또 혹 마음에 아직 회개하지 못한 죄가 있으면 진실한 마음으로 회개하고 나의 죄를 위해 대신 죽으신 주님의 십자가를 의지하여 신앙고백하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응 알았어. 걱정 마.’라고 했습니다. 우리 인간의 생명은 육신의 생명도 있지만 영혼의 생명도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인간을 양으로 비유하는 이유입니다. 양은 많은 점에서 일반적인 동물과 다릅니다. 일반적인 동물은 양에 비해 훨씬 자립적입니다. 자립적이라는 것은 누구의 도움없이 혼자서 스스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죠. 얼룩말은 사자보다 약하지만 떼를 지어 생활하면서 빠른 주력을 가지고 있기에 사자가 나타나더라도 한 두 마리만 희생되고 전체 공동체를 보존할 수 있습니다. 이에 비해 양은 개 두 마리가 하룻밤 사이에 292마리의 양을 물어죽인 사건이 있을 정도로 적의 공격에 취약합니다. 일반적인 동물은 자기가 알아서 자기 갈 길을 찾고 자기 먹을 것을 찾습니다. 그런데 양은 머리가 없는 것인지 눈이 있어도 분별력과 판단력이 약해 자기 갈 길을 찾지 못합니다. 풀을 먹어도 이것이 독초인지 먹어도 되는 풀인지 분별하지 못해 종종 독초를 먹고 사망합니다. 한 번 뒤집어져 배가 하늘로 향하면 절대로 자기 힘으로 일어서지 못하고 그대로 누워있다가 배에 가스가 차서 사망합니다.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자기들끼리 알력이 심합니다. 보통 늙은 암양이 보스 노릇을 하는데 약하거나 어린 양을 머리로 사정없이 받아버립니다. 목자가 이 문제를 잘 조정해주지 않으면 어린 양들이 스트레스를 받아 죽게 됩니다. 결정적으로 양은 계절을 따라 목초지를 이동해야 하는데 양에게는 이런 능력이 절대로 없습니다. 게으른 목자를 만난 어떤 양떼가 있었습니다. 게으른 목자는 철을 따라 목초지를 이동하는 것이 귀찮아 1년 내내 양들을 한 곳에 방치했습니다. 그 결과 배고픈 양들은 풀을 뿌리채까지 파먹어 목초지가 황량하게 되었습니다. 양들이 늘 지나다니던 길은 움푹 패였고 그곳에 지저분한 물이 고였습니다. 양의 배설물로 오염된 물을 마신 양들은 각종 병을 앓고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갔습니다. 이에 비해 양들을 사랑하고 부지런한 좋은 목자를 만난 양무리들은 철을 따라 목초지를 이동합니다. 봄에 초장에서 꼴을 먹다가 여름이 되면 그곳을 떠나 고지대로 갑니다. 고지대로 가는 과정이 때로 험난하고 위험합니다. 다윗이 시편 23편에서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라고 노래한 바로 그 장면입니다. 고지대로 가는 과정에서 때로 갑자기 비와 우박이 쏟아지기도 합니다. 천길만길 낭떠러지로 떨어질 위험도 있습니다. 이런 위험 가운데 목자는 그 지팡이와 막대기로 양들을 보호합니다. 마침내 고지대에 이른 양들은 오직 그곳에서만 맛볼 수 있는 풍성한 꼴과 맑은 샘물을 마실 수 있습니다. 다시 가을이 되면 목자는 양들을 데리고 하산합니다. 겨울이 되면 가장 저지대에 머물며 겨울에도 자라나는 저지대의 꼴을 먹입니다. 양은 진화론적인 관점에서 이해가 되지 않는 특별한 동물입니다. 개도 집에서 기르다가 야생으로 보내면 들개가 되어 알아서 적응하는데 양은 목자가 없으면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러데 바로 이것이 성경이 우리 인생들을 양에 비유하는 이유입니다. 인간에는 동물에게 없는 특별한 점이 있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실 때 다른 동물들과 달리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셨습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영혼의 존재로 지으셨다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동물의 마음을 다 알 수 없지만 주의깊게 관찰해 보면 동물은 여러 면에서 인간보다 더 자립적이고 멘탈도 더 강합니다. 동물은 어미가 일정 기간만 케어해주면 삶의 대부분을 알아서 잘 살아갑니다. 적의 위협이나 공격 앞에서 웬만큼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습니다. 죽음 앞에서도 동물들은 인간보다 훨씬 의연해 보입니다. 죽을 때가 되면 숲속 조용한 곳을 찾아가 죽음을 맞이합니다. 이에 비해 인간은 마치 양처럼 소심하고 두려움이 많습니다.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고 자기가 가야 할 길을 스스로 찾지 못합니다. 한 사람의 인생의 길이를 생각해 볼 때 당장 내일은 얼마나 가까운 미래입니까. 그런데 그 내일 일을 알지 못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동물들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한다는 사실로 인해 초조해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해 초조해하고 불안해 합니다. 내일 어떻게 될까 두려워하여 그 두려움을 해소하기 위해 비트코인을 하는 등 뭔가 대비책을 세우려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내일 일은 커녕 당장 5분, 아니 5초 뒤의 일도 확신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대부분의 재난 사고는 불과 수초 사이에 발생합니다. 저도 지금까지 살면서 수초 사이에 삶에서 죽음으로 넘어가는 경험을 수차례 하였습니다. 한 번은 고속도로에서 운전을 하다가 빗길에 미끄러져 차가 통제가 안되고 한 바퀴 빙 돈 후 대형 트럭에 부딪힌 적이 있습니다. 그 수초 사이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 서 있었습니다. 그 때 그 느낌과 감정은 지금까지 잊혀지지 않습니다. 죽음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현실이고 누구나 다 죽지만 그 죽음 앞에서 일말의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처럼 우리 인생들은 두려움 많고 갈 길 몰라 방황하는 한 마리 어린 양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우리를 위해 양의 문으로 오셨습니다. 우리 삶의 중심축이 되기 위해 오셨습니다. 이제는 돈이 아닌 예수님이 여러분의 삶의 중심축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돈이 필요없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돈은 우리의 삶에 필요합니다. 그러나 우리 삶의 대들보가 될 수는 없습니다. 삶의 폭풍 앞에서, 영혼의 문제 앞에서 돈은 종이 쪼가리에 불과합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길을 잃고 방황하는 양과 같은 우리 인생들의 참된 문이 되십니다. 11-15절을 보십시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 달아나는 것은 그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보지 아니함이나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예수님이 자신을 양의 문이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이 양들의 진정한 삶의 축이 되신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예수님이 자신이 양들의 선한 목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양들의 선한 목자가 되신다는 말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앞에서 양은 그 어떤 동물보다 연약하고 자립적이지 못하며 목자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동물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또 인간은 그런 점에서 양과 같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인간의 처지가 이와같다보니 스스로를 양들의 목자라고 자처하는 이들이 인류 역사상 많이 나타났습니다. 그중 철학가와 사상가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상가들 중 한 사람이 니체입니다. 그가 양들에게 삶의 대안으로 제시한 것이 ‘초인(Uebermensch)’이 되는 것입니다. 초인은 날아가는 화살과 같습니다. 초인은 지금 현재의 상황에 결코 만족하지 않습니다. 현재 상황에 짓눌려 포기하지도 않습니다. 초인은 마치 목표물을 향해 쉼없이 날아가는 화살과 같습니다. 초인은 하나의 목표를 이루면 그 목표에 만족하지 않고 다시 새로운 더 높은 목표를 세웁니다. 끊임없이 자기계발을 하고 자기 한계를 스스로 뛰어넘는 노력을 합니다. 또 니체는 ‘밑바닥 인간’과 ‘빼어난 인간’을 말했습니다. 밑바닥 인간은 삶의 기존 관습에 따라 기존 사회가 제공하는 가치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낙타처럼 수동적인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 관습이나 전통적 가치관을 거부하고 사자처럼 적극적으로 모든 삶을 자신의 판단 아래 치열하게 꾸려나가는 사람을 “빼어난 인간”이라고 했습니다. 빼어난 인간으로 살기 위해서는 스스로 가치를 만들어내야 하고 그 가치를 스스로 이루기 위해서는 홀로 모든 것을 해 나갈 수 있는 ‘힘에 대한 의지’를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니체의 의하면 우리의 삶은 끊임없는 되풀이로 이루어졌습니다. 삶 속에서 위대한 것이든 사소한 것이든 끊임없이 역겨울 정도로 되풀이 됩니다. 빼어난 인간은 그 되풀이되는 삶 가운데 어린아이같은 순진무구함으로 평범한 일상에서 놀랍도록 새로운 면을 찾아내고 감탄합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살아있음을 느끼는 바로 그 순간, 현재입니다. 이런 그의 사상은 비록 구체적으로 니체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알지 못하더라도 수많은 현대 젊은이들의 삶에 깊이 침투해 있습니다. 어떤 모양으로든 현대의 젊은이들은 니체가 말한 ‘초인’이 되기를 추구하고 밑바닥 인간의 삶에서 벗어나 빼어난 인간이 되기를 갈구합니다. 평생 자기의 짐도 아닌 남의 짐을 이유도 모른채 짊어지고 살아야 하는 낙타의 삶에서 벗어나 자기가 정한 기준과 생각대로 마음껏 살아갈 수 있는 사자의 삶을 추구합니다. 이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힘이 있어야 하고 그 힘을 주는 것이 ‘돈’이라고 생각합니다. 돈, 그러니까 힘을 얻어 꿈을 이룬 다음에는 자칫 그 삶이 반복적인 것 같고 무료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매일 반복되는 파티, 반복되는 향연의 삶이 지겨울 수 있습니다. 그 때에는 또 그때 가서 반복되는 삶 가운데 나름대로 새로운 즐거움을 찾아내면 됩니다. 때로는 그것이 전통이나 도덕의 틀을 뛰어넘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힘을 얻은 초인은 마치 수전노 노파를 살해하고도 죄의식을 느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던 라스콜리니코프처럼 어떤 전통이나 도덕의 틀을 뛰어넘어 쾌락을 즐긴다 할지라도 죄의식을 느낄 필요가 없습니다. 돈, 곧 힘이 있기에 재판이나 형벌을 피해갈 수 있고 고대 귀족들에게 특혜가 주어졌던 것처럼 돈이 있는 자에게 어느 정도 특혜가 주어지는 것은 정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니체가 본래 의도한 것이 이런 것은 아니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많은 젊은이들이 그의 사상을 이런 식으로 적용하고 있습니다. 실상 니체가 말한 낙타의 삶에서 벗어나 사자가 되는 길은 기존 관습이나 전통을 벗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죄와 정욕의 굴레에서 벗어남으로 가능합니다. 사람이 낙타처럼 무거운 짐을 지고 굴레에 매여 살아가는 것은 관습이나 전통 때문이라기보다 근본적으로 사람 안에 있는 죄 때문입니다. 죄는 곧 탐심이요, 악한 욕망입니다. 신문의 사회면을 펼쳐보면 매일 매일 사람들의 악한 욕망과 탐심으로 인한 죄의 소식에 끊이질 않습니다. 한 건설회사는 돈을 아끼기 위해 하청에 하청을 주었습니다. 이로 인해 돈을 조금밖에 받지 못한 회사는 돈을 아끼기 위해 안전한 건축 공법 따위는 무시하고 불도저같은 기계로 건물을 밑바닥에서부터 밀어버렸습니다. 그 결과 여러 시민들이 죽음을 당했습니다. 이 악한 탐심의 죄가 얼마나 무섭습니까. 또 어떤 청년은 마음에서 끓어오르는 정욕을 주체하지 못하고 발가락 사이에다 몰래 카메라를 설치했다가 체포되기도 하였습니다. 어떤 청년은 하루 종일 음란한 생각에 시달립니다. 길을 가도 음란한 생각, 책을 보아도 음란한 생각, 누워도 음란한 생각, 밥을 먹을 때에도 음란한 생각에 시달립니다. 그가 사자처럼 살지 못하고 음란의 무거운 짐을 지고 낙타처럼 사는 것은 사회의 전통이나 관습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의 내면 안에 있는 정욕의 죄 때문입니다. 사람이 이 죄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이 죄에 대한 형벌은 죽음입니다. 사람은 양과 같고 죄와 죄의 결과인 죽음은 사나운 맹수와 같습니다. 양이 사자와 싸워서 이길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겠습니까. 양이 사자에게 조금인들 대항할 수 있겠습니까. 양과 같은 인간은 죄와 죄의 결과인 죽음에 대항해 속수무책입니다. 마치 맹수 한 마리가 순식간에 수백마리의 양의 목을 물어뜯어 죽이는 것처럼 인간은 죄와 죄의 결과인 죽음 앞에서 학살당하는 한 마리의 양과 같은 운명입니다. 그런데 양들을 이런 위험으로부터 지켜주는 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양의 목자입니다. 양의 목자에게는 강한 지팡이와 막대기가 있습니다. 목자는 지팡이와 막대기로 양을 해치는 이리나 늑대, 곰을 몰아냅니다. 목자가 지팡이와 막대기로 양을 지킬 때 목자는 자기 생명을 겁니다. 삯을 받고 일하는 삯군 목자는 어느 정도 하다가 자기 목숨이 위험하면 달아납니다. 그러나 선한 목자는 양을 지키기 위해 자기 생명을 겁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선한 목자가 되십니다. 인간은 양과 같이 죄의 유혹과 시험 앞에 약합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죄를 범하고 그 죄의 결과 죽음의 형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양과 같은 이런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자기 생명을 버리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우리가 받을 형벌을 대신 받으시고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이를 통해 양들을 살리셨습니다. 동시에 양들의 선한 목자임을 증명하셨습니다. 22-42절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만물보다 크신 아버지에게서 오셨으며 아무도 그의 손에서 자기 양을 빼앗지 못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결론입니다. 우리 인생들은 양과 같습니다. 특히 죄 앞에서 양처럼 취약합니다. 죄의 유혹과 시험 앞에 양처럼 무기력하게 쓰러지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자기 생명을 드리셨습니다. 이 예수님은 우리의 선한 목자, 참된 목자가 되십니다. 우리에게 선한 목자 예수님을 허락하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 모든 찬송과 감사와 존귀와 영광을 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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