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예수님
말씀 요한복음 12:1-19
요절 요한복음 12:14,15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보고 타시니, 이는 기록된 바 시온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값비싼 향유로 향유부음을 받으십니다. 이 예수님은 어떤 분이실까요? 또한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데 군마가 아닌 어린 나귀를 타고 입성하십니다. 이 예수님은 우리에게 어떤 그리스도, 어떤 왕이 되실까요? 그것이 우리의 삶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이시간 우리가 어린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예수님을 잘 배울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때는 유월절, 곧 예수님이 돌아가시기 엿새 전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베다니에 도착하셨습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5리 곧 2km 되는 곳이었습니다. 이곳은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었습니다.
거기서 예수님을 위한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다른 복음서에 보면 잔치는 나병환자였다가 나음 받은 시몬이란 사람의 집에서 이루어졌습니다(막 14:3). 마르다는 열심히 잔치 음식 서빙을 하였고 나사로는 예수님과 함께 앉아 있었습니다. 나사로가 죽은 것을 봤던 사람들은 놀라워하며 나사로와 예수님을 번갈아 보며 신기해하고 기뻐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잔치 중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3절을 보십시오.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나사로의 동생 마리아가 등장하더니 지극히 비싼 향유인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님의 발에 부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닦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나드는 인도산으로 당시 최고급 향유였습니다. 귀한 손님이 왔을 때 한 방울 떨어뜨리거나 귀한 분의 장례시에 시신에 바르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왜 마리아는 예수님에게 이렇게 값비싼 향유를 부었을까요? 이는 마리아가 예수님을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분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마리아의 헌신은 단순한 감사와 사랑의 표현 넘어 동방박사들같은 경배자의 모습입니다. 마태, 마가 복음서에 보면 향유를 머리에 부었다고 하였는데 사도요한은 발에 부은 것을 강조했습니다. 아마 머리에도 붓고 최종적으로는 발에 부은 것 같습니다. 보통 발은 수고와 헌신을 상징합니다. 사도요한은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의 성육신에 의미부여를 많이 하는 데, 예수님의 발은 하늘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겸손과 헌신을 뜻하므로 발에 향유를 부은 것은 예수님의 성육신에 대한 찬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가장 낮은 발에 붓고 자신의 머리털로 그 발을 닦은 것은 예수님을 가장 높이고 자신을 가장 낮추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향유를 한 방울 정도 떨어뜨리면 그 사람만 기분 좋을 정도인데 향유를 한 근(1파운드, 450~600g)이나 부었기에 온 집안에 향내가 가득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값비싼 향유를 부은 것을 보고 제자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다른 복음서에 보면(마26, 막14장), 제자들과 주위사람들이 마리아의 행위를 ‘허비’로 보고 화를 내며 비난했습니다. 이들의 비난은 상식적으로 타당한 점이 있었습니다. 우선 방법적인 면에서 허비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 현금으로 드리든지, 옷을 맞추어 드리거나 했으면 실질적인 유익이 되었을 것입니다. 또 한 방울만 떨어뜨려도 되는 데 과도하게 한 근을 다 부어버렸습니다. 한 방울만 떨어뜨리고 나머지는 자신의 장래를 위해 쓰거나 향유를 붓더라도 최소한 바닥에 비닐이라도 깔아 재활용이 가능하게 했으면 욕을 덜 먹었을 것입니다.
5절을 보면 가룟유다가 특히 마리아를 비난했습니다.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가룟 유다는 마리아의 행위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가룟유다는 물질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실물경제에 밝았습니다.
향유를 보자 한근쯤 되고 가격이 300 데나리온이라고 금새 파악했습니다. 300 데나리온은 노동자 300일 품삯으로 노동자들이 안식일과 비오는 날, 아픈 날 등 일을 못하는 날들이 있기에 노동자 1년 연봉이었습니다. 이것은 당시 여자가 노동하지 않던 시절에 한 처녀가 가지고 있는 금액으로 적지 않은 금액입니다. 때문에 학자들은 마리아가 결혼지참금으로 향유를 보관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합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자신의 결혼보다 더 소중히 여겼으며 반면에 가룟 유다는 물질이 귀한 것은 알았지만 예수님이 얼마나 귀한 분인가는 알지 못했습니다. 6절을 보면 가룟유다는 가난한 자들을 언급한 것은 말뿐이고 실제는 자신이 제자단의 재정부장으로서 현금으로 들어온 경우 그 물질을 유용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고 사도요한은 코멘트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마리아의 행위를 어떻게 보셨습니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7). 예수님은 마리아의 행위를 지지하며, 자신이 죽고 장례를 할 날을 위해 이 행위가 의미가 있도록 하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번역을 보면, 마리아는 주님의 장례를 대비하여 간직한 그 향유를 지금 주님의 발에 부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6일후 마리아와 우리 인생들을 위해 향유보다 귀한 피를 쏟으십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피의 향유를 흘리신 것이 맞다면 우리가 드리는 어떤 값비싼 헌신도 아깝지 않습니다. 우리도 지난 날 주님을 위해 헌신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혹시 아깝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가룟유다는 비닐이라도 깔고 향유를 부었으면 다시 수거할 수 있었을 텐데 생각했을 것입니다. 우리의 지나간 헌신은 회수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헌신은 허비였을까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러내린 그 값비싼 피가 땅으로 주르르 흘러내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보혈은 허비가 아니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헌신도 결코 허비가 아닙니다. 주님이 받으셨습니다. 주님이 받으셨으면 됐습니다. 이것이 바로 가룟유다같은 사람은 알 수 없는 주님과 나의 허비입니다. 원래 사랑은 그렇게 계산하지 않고 서로로 향해 쏟아 붓는 허비적 성격을 가지며 그 쏟아붓는 것 자체가 의미요 가치입니다. 마리아 행위와 가룟유다의 말을 통해 거듭난 사람은 예수님의 가치를 알고 예수님 자체를 사랑하지만,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며 구제나 봉사 등 도덕윤리적 활동에 더 의미부여를 한다는 사실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은 가룟유다가 형식적으로나마 가난한 자들의 구제에 대해 말했기 때문에 가난한 자들에 대한 구제는 좋은 방향이며 앞으로 늘 기회가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가난한 자들에 대한 구제도 좋지만 예수님의 죽음은 1회적인 것으로 기려야 할 가치가 있고 마리아의 헌신은 주님의 죽음에 대한 결코 과하지 않는 행위였음을 증거하셨습니다.
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루살렘과 인근각처에서 베나디에 왔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과 예수님이 살리신 나사로를 보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에 대제사장들은 나사로까지 죽이고자 모의했는데 그 이유는 나사로 때문에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튿날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유월절 닷새 전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이번 명절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신다는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맞을 준비를 했습니다. 13절을 보십시오. 그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예수님을 맞으러 나가 외쳤습니다. “호산나” “호산나” 종려나무는 푸르게 쭉쭉 뻗은 가지로 승리와 번영을 상징하며 왕과 장군의 개선식에 사용되었습니다.
그들이 무엇이라고 외쳤습니까?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13b) 호산나는 ‘지금 우리를 구원하소서’ 라는 뜻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는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의 왕 그리스도를 뜻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의 왕임을 확신하고 열렬히 환영하며 자신들을 구원해 달라고 외쳤으며 그들이 이렇게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확신한 것은 특별히 죽은 나사로를 살린 표적때문이었을 것입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데, 어린 나귀를 타십니다. 왜 예수님은 평소처럼 걸어 가시지 않고 굳이 이렇게 나귀를 타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구원의 왕이 입성하실 때 어린 나귀를 타신다는 스가랴서 예언의 말씀을 이루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는 자신이 구약성경에 약속된 구원의 왕, 그리스도이심을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리스도는 하필 나귀 그것도 어린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 것일까요? 어린 나귀를 타신 예수님은 초라하다 못해 그 모습이 뒤뚱뒤뚱 우스꽝스럽기까지 했을 것입니다. 왕으로서 권위나 폼이 나지 않아 제자들이 실망했을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세상 왕들은 크고 멋진 말을 타고 입성합니다. 특히 백마를 타고 백성들을 높은 데서 내려보며 입성합니다. 말을 타면 위압적이며 말을 타고 빠르게 움직이며 사람을 긴장시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왕의 경우는 말보다는 노새를 탔습니다. 다윗 왕이 솔로몬을 왕으로 세울 때 자신의 노새에 솔로몬을 태우라는 방향을 주었습니다(왕상 1:33). 노새는 말과 나귀의 교배종인데 말보다는 키가 낮고 나귀보다는 큽니다. 노새와 나귀는 말에 비해 느리게 움직입니다. 때문에 노새와 나귀는 겸손과 평화를 상징합니다. 이스라엘은 신정국가로서 왕이 하나님아래 있습니다. 왕이라고 해도 하나님의 종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신명기에 보면 왕은 그 마음이 형제위에 교만해서는 안된다고 되어 있습니다(신 17:20a)
하지만 예수님은 노새나 나귀도 아니고 어린 나귀를 타셨습니다. 만왕의 왕인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어린 나귀를 타시다니요? 이것은 예수님은 자신을 모든 사람들보다 낮추신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한없이 높으신 분이지만 자신을 한없이 낮추고 인생들을 겸손히 섬기시는 분입니다.
세상 왕들은 자신을 높힘으로 그것을 무기로 백성들을 두렵게 하며 통치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반대입니다. 죽음과 낮아짐으로 섬기십니다. 권위보다 영향력으로 통치하십니다. 어린 나귀를 타신 예수님은 인격적이고 평화적으로 백성을 섬기는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도매급으로 취급하지 않고 인격적으로 섬기십니다. 니고데모는 니고데모에게 맞게, 사마리아 여인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맞게 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얼마나 존중하십니까?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향하여 ‘귀나이’ 자신의 어머니에게 썼던 호칭을 사용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인생들을 인격적으로 섬기심을 잘 보여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3:20절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예수님은 우리가 히키코모리처럼 자기만의 세계로 들어면 답답하다고 망치와 장도리를 가지고 와서 문을 해체시키고 강제로 진입하는 분이 아닙니다. 마음의 문을 열 때까지 기다려 주시고 포기치 않고 노크하십니다.
이와 같은 예수님의 섬김을 받은 사람들은 그 마음에 평화가 있고 감동이 있습니다. 그들은 결국 그 예수님의 존중과 사랑앞에 마음 문을 열고 기쁘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받아들이고 주님과 교제하며 동거하는 삶을 삽니다.
여러분, 다른 사람과 함께 하는 것이 힘들고 불편합니까? 그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둘중에 한 사람, 특히 내가 예수님같이 어린 나귀를 타는 마음으로 다른 사람들을 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백마를 탄 마인드로, 심지어 탱크를 탄 장군의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대합니다. 어떤 분들을 보면, 예수님을 배워 어린 나귀를 탄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대합니다. 그에게는 조금도 권위주의가 없이 섬기는 마음입니다. 이렇게 겸손하게 섬기니 다른 사람들이 그를 조금도 불편해 하지 않습니다. 전에 TV광고에 ‘산소 같은 여자’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산소는 어떤 역할을 합니까? 다른 사람들을 숨 쉬게 하고 살게 합니다. 그러니까 산소 같은 남자, 산소 같은 여자, 산소 같은 엄마, 산소 같은 목자가 있으면 그 관계, 그 집, 그 공동체는 함께 있는 것이 즐겁고 만나면 서로 살아나는 것을 체험합니다.
그런데, 정말 어린나귀를 타는 낮은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대하면 좋다는 것을 알지만 그러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첫째는, 그렇게 되면 내가 무시를 받거나 관계나 공동체도 질서나 구심점이 사라지지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기우입니다. 권위주의는 사라지되 권위가 있으면 되고 통제는 없어져도 영향력이 있으면 됩니다. 평등한 관계가운데도 존경과 사랑과 감사가 있으면 문제가 없습니다.
둘째는, 겸손과 섬김이 교훈을 포기하는 것이 될까봐 염려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겸손히 섬긴다는 것은 교훈을 포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조금씩, 천천히 변화를 도모하며, 잔소리가 아니라 큰 울림소리로 그것을 이루는 것입니다. 잔소리는 믿음을 잃고 기도를 하지 않는 사람이 많이 하는 것입니다. 큰 울림 소리는 믿음을 가지고 그 영혼을 위해 기도를 많이 하고 있는 사람들이 가끔 내는 소리입니다. 잔소리는 별로 효과가 없고 반발심과 짜증만 유발하지만 큰 울림소리는 가끔 내지만 사람을 변화시키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고자질이란 시를 쓴 적이 있는데, 여기서 고자질은 사람에게 말하고 싶은 것을 하나님께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이 고자질은 하나님을 통해 사람을 움직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하는 고자질은 아무리 많이 해도 인간관계가 파괴되지 않고 마음이 평안하고 나의 삶이 여유와 풍성함을 유지할 수 있어 좋습니다. 나도 스트레스를 안받고 잔소리도 안하게 되어 좋습니다.
교황이 예수님을 배우기 위해 한국방문시에 가장 작은 자동차를 타고 청와대 방문을 해서 감동을 주었습니다. 최근에 여당의 대표는 따릉이와 킥보드와 지하철을 탐으로 신선한 충격과 감동을 주었습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예수님을 배우므로 사회가 좀더 감동적이고 행복해지는 것같습니다.
저도 목자인 자로서 더욱 어린 나귀를 타신 예수님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제가 저 자신을 돌아볼 때 모범이란 이유로 마치 알프스 산을 넘는 나폴레옹처럼 “나의 사전에는 불가능이 없다” “나를 따르라” 식의 목자생활을 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대화하기보다는 모임을 통해서 일방적으로 설교하고 기도제목을 제시했습니다. 눈높이를 낮추어 한 사람, 한 사람 어떻게 신앙생활하고, 삶의 현장에서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는 지 경청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면서 잘 따라오지 않거나 협조하지 않는 이들의 겉모습만 바라보고 실망하고 서운해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제가 제시하는 대로 주위에 잘 따라오지 못하는 일들, 연약한 양들과 자녀들을 보여주시고 제가 말을 탄 왕같은 목자생활이 아니라 어린 나귀를 타고 목자 생활해야 함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눈높이를 낮추고 경청하고 그리고 천천히 함께 가는 것입니다. 제가 남은 목자생활이라도 어린 나귀를 타신 예수님을 잘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게 고통과 부담을 주는 고춧가루나 최류탄같은 목자가이 아니라 산소 같은 목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먼저 한 사람 한 사람 위하여 기도하며 대화하는 시간을 많이 가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정치적 성향을 떠나서, 근래 당대표가 된 30대와 대변인 토론 배틀에 나온 고3 학생을 통해기성세대보다 더 훌륭한 젊은 세대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나이가 들면 젊은 사람을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 나이가 든 사람들이 젊은이들로부터 배워야 할 점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지도자들이나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 겸손한 자세로 후배들이나 젊은이들을 대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교통사고가 날 때 어느 일방이 잘못을 한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쌍방과실인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무슨 일이 생길 때 고압적인 자세를 내려놓고 겸손히 잘못한 점을 인정하고 대화하고 서로 배워야 합니다. 이렇게 겸손하게 서로를 대할 때 우리는 우리 사이에 평화가 깃들고 공존이 가능함을 체험하며, 관계나 공동체가 더 발전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어린 나귀를 타신 예수님을 잘 배워 우리들의 관계나 공동체도 모두 겸손과 평화가 깃들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어린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예수님에 대해 제자들은 왜 이렇게 초라한 입성을 하시는 지 실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영광을 얻으신 후 즉, 성령이 강림하신 후에 모든 것이 깨달아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어린 나귀새끼를 타고 입성하신 것은 기록된 말씀을 정확히 이루는 것이며 예수님이 겸손과 평화의 왕이심을 보여주는 것이었음을 이해했습니다.
예수님이 입성하실 때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어 살리신 것을 본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 증언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더 열렬히 주님을 환영했습니다. 예수님은 정말 대세남이 되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든지 바리새인들이 “너희 하는 일이 쓸데없다. 보라 온 세상이 그를 따르는 도다” 이렇게 서로 말할 정도였습니다.
무리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한 것은 잘 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예수님이 어떻게 그리스도가 되는 지를 몰랐다는 것입니다. 이런 그들은 예수님이 다윗 왕같처럼 강력하게 정치적인 그리스도의 길을 걷지 않자,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는 자들로 돌변하였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를 정치적, 경제적 문제 등 이 세상에서 잘 살게 해주고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는 분으로만 생각한다면 예수님께 실망하고 등 돌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문제, 죄문제, 죽음문제. 심판문제에서 우리 인생들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 즉 성서적인 그리스도관을 가짐으로 주님을 끝까지 따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입니다.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시지만 겸손하여 어린 나귀를 타셨습니다. 이 예수님은 눈높이를 낮추어 우리와 대화하시고 인내와 사랑으로 섬겨주십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의 겸손하고 인격적인 섬김을 받으니 마음이 평화롭습니다. 우리도 이 예수님을 배워 다른 사람을 군마가 아닌 어린 나귀를 타고 겸손히 섬기는 가운데 우리가운데 인격적인 사랑과 교제와 평화가 있으며, 우리 공동체가 권위주의, 폭력, 갑질 등에 의해 상처받은 영혼들이 치유되는 공동체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