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종로2부 여름수양회 주제1강 (송다윗) 내가 왕이니라 말씀/ 요18:28-19:16 요절/ 요18:37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 하신대”
주춤했던 코로나가 다시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가뜩이나 더운 날씨에 마스크까지 써야 하니 얼나나 답답하고 힘드십니까? 무엇보다 우리를 위축되게 하는 것은,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불안한 미래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영끌’이라도 해서 아파트를 사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코로나와 불안한 현실에서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이 시간 ‘내가 왕이니라’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코로나 팬더믹 시대를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28-29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예수를 가야바에게서 관정으로 끌고 가니 새벽이라 그들은 더럽힘을 받지 아니하고 유월절 잔치를 먹고자 하여 관정에 들어가지 아니하더라 그러므로 빌라도가 밖으로 나가서 그들에게 말하되 너희가 무슨 일로 이 사람을 고발하느냐.”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한밤중에 긴급 체포하였습니다. 이후 대제사장 가야바의 관정에서 밤샘 심문을 한뒤 ‘신성모독죄’를 뒤집어 씌웠습니다. 그리고 새벽 이른 시간, 빌라도 총독이 머무는 관정으로 예수님을 끌고 왔습니다. 그런데 관정 안에는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날이 유월절 준비일이고 더럽힘을 받지 않고 잔치에 참여하기 위해서입니다. 겉으로는 거룩한척 하나 속으로는 예수님에 대한 미움과 살인으로 가득한 그들의 위선과 이중적인 모습을 사도요한은 고발하고 있습니다. 결국 빌라도가 새벽잠을 깨고 밖으로 나와야 하는 웃지못할 일이 벌어졌습니다. 빌라도는 평소에는 가이사랴에 있는 관정에 머물렀지만 유월절 같은 명절에는 소요를 예방하고 진압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머물렀습니다. 빌라도는 묻습니다. “너희가 무슨 일로 이 사람을 고발하느냐’
30-31절을 보십시오. “대답하여 이르되 이 사람이 행악자가 아니었더라면 우리가 당신에게 넘기지 아니하였겠나이다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가 그를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한이 없나이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행악자’로 고발합니다. 행악자란 심성이 바르지 못하고 악한 자란 뜻이지만, 여기서는 로마에 대항하여 지속적으로 반란을 꾸민 자라는 의미입니다. 이는 반란에 예민한 빌라도를 자극하여 재판권을 넘기려는 유대인들의 의도입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시기심 때문에 고발하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너희가 그를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며 재판권을 다시 유대인들에게 넘겼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말합니다.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한이 없나이다.’ 그들은 사형권이 없다고 주장합니다.이 말이 사실일까요? 아닙니다. 스테반도 돌로 죽였던 그들이, 맘만 먹으면 얼마든지 예수님을 쥐도 새도 모르게 제거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왜 이런 말을 한 것일까요? 32절을 보십시오. “이는 예수께서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가려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그것은 십자가형으로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서입니다. 십자가는 로마가 반란범을 잔인하게 죽여 경감심을 주기 위해 고안한 사형방법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수님은 여기에 영적인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그것은 ‘나무에 달린 자마다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자’ 라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예수가 하나님이 보낸 메시야라면 어떻게 하나님의 저주의 상징인 십자가에 죽을 수 있단 말인가? 그는 메시야가 아니라 반역자, 반란범에 불과해! 라는 메시지를 백성들에게 각인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정말 유대인답게 머리가 잘 돌아갑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만 할고 둘은 몰랐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 죽음은 하나님이 이미 계획하신 것이고, 예수님께서도 여러 차례 언급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니리’(요3:14)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요12:32)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십자가 죽음의 길을 가신 것입니까? 갈라디아서 3:13절은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3:13) 그것은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저주의 상징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가 율법의 저주에서 자유롭게 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십자가를 통해 예수님이 메시야가 아님을 드러내려 했지만 오히려 그것이 예수님이 진정한 메시야, 그리스도이심을 완성케 한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에 담긴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생각치 못한 놀라운 방법으로 구속역사를 이루십니다. 저주의 상징 십자가가 구원의 길이 되게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이런 십자가에 담김 놀라운 비밀을 알고 말합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십자가로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신 하나님의 지혜를 찬양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방법으로 복음역사를 이루십니다. 우리가 사람의 지혜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지혜를 믿음으로 코로나 시대에도 복음역사를 충성되게 감당하기를 기도합니다. 33절을 보십시오. “이에 빌라도가 다시 관정에 들어가 예수를 불러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결국 빌라도는 예수님을 관정으로 끌고 와 직접 심문합니다. 그의 첫 질문이 무엇입니까?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이 질문은 예수님이 이스라엘을 로마로부터 해방시킬 정치적인 왕인지를 묻는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왕이 없었습니다. 원래 왕이었던 헤롯대왕이 죽고 그의 세아들이 나라를 분할하여 분봉왕으로 다스렸습니다. 특히 유대와 사마리아를 통치하던 아켈라오는 폭정으로 폐위되어, 빌라도가 대신 총독으로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백성들은 예수님을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면서 왕으로 추대하였습니다. 그래서 빌라도에게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이 맞는지를 확인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를 죽일 경우 민란이 일어날 수 있고, 혹 죽이지 않아도 반란범을 감싼다는 모함에 빠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이 무엇입니까? 34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냐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하여 네게 한 말이냐.”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이야는 빌라도의 질문에 답을 하기보다 오히려 빌라도가 예수님에 대해 개인적으로 알고 싶은 것인지를 묻습니다. 한마디로 그를 영적으로 도와 주려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보기에 빌라도는 로마 총독이기 전에 진리를 알지 못해 방황하는 불쌍한 영혼입니다. 그도 구원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흥! 내가 유대인이냐’ 네 나라 사람과 대자상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왕이 맞는지 빨리 말해!’하며 추궁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세상 나라에 매여 있는 빌라도를 영적인 나라, 예수님의 나라로 인도코자 합니다. 3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그러면 예수님의 나라는 어떤 나라입니까? 예수님의 나라는 세상에 속한 나라가 아닙니다.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는 것은 세상의 통치방법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세상 나라의 통치방법은 어떻습니까?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는 모택동의 말대로 세상 나라는 ‘힘의 논리’로 다스려집니다. 당시 세계 강대국 로마는 ‘Pax Romana’ 곧 로마의 의한 세계평화를 외쳤습니다. 그러나 말을 듣지 않는 나라와 민족은 잔인하게 죽이며 협박하였습니다. 이런 로마의 지배를 받는 사람들은 진정한 평안이 없습니다. 오늘날 세상 나라는 어떻습니까? 여전이 ‘힘의 논리’로 다스려집니다. 그 힘의 근원이 칼에서 돈으로 바뀌었을 뿐입니다. 돈을 무기로 총성없는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세상 나라는 영원하지 않습니다. 많은 나라들이 그 힘을 자랑햇지만 지금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반면 예수님의 나라는 어떻습니까? 그 나라는 의와 사랑과 평화의 논리로 다스려집니다. 그래서 그 나라 백성은참 만족과 진정한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 나라는 영원합니다. 예수님은 그 나라의 왕이십니다. 그래서 원하시면 12군단이나 더 되는 종들을 보내 유대들과 로마를 쓸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면 세상 나라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더욱이 십자가를 통한 만민구원역사를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떤 점에서 왕이 되십니까? 다함께 37절을 읽겠습니다.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하는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 하신대.” 예수님은 왕이십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왕되심을 여러 곳에서 언급합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9:6)” 동방박사들도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마2:2)” 말하였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다윗 왕의 혈통으로 나신 분으로, 족보를 중요하게 보는 유대인에게 예수님은 왕이 맞습니다. 또한 영적으로도 성삼위 하나님의 제2격으로써 왕이십니다. 그러나 이러한 조건보다 예수님이 왕이 될 수 있는 이유는 다른데 있습니다. 그것은 스스로 왕이심을 입증하셨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그것을 입증하셨습니까? 첫째, 자기를 낮추심으로 입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 영광과 지위를 버리시고, 이 땅에 육체를 덧입고 오셨습니다. 그것도 연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저자요한은 말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가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둘째, 자기를 비우심으로 입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종처럼 사셨습니다. 목자 없는 양과 같은 무리들을 말씀의 꼴로 섬기시고, 병든 자, 귀신 들린 자를 늦게까지 고치셨습니다. 영적 어린아이 같은 니고데모를 밤늦께까지 카운셀링 해주시고, 정욕의 목마름에 방황하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영생수를 선물로 주시고, 죽은 자와 같던 38병자를 일어나 걷게 하셨습니다. 무엇보다 냄새나는 제자들의 허물을 감당하시며 씻겨 주셨습니다. 셋째, 자기를 주심으로 입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주는 삶을 사셨습니다. 말씀을 나눠 주시고, 오병이어로 배불리먹여 주셨습니다. 간음중에 잡힌 여인을 보호해 주시고, 어둠 속에 있던 맹인에게 생명의 빛을 주셨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기 목숨을 내어 주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자기를 낮추시고, 비우시며 목숨을 주심으로 왕이 될 자격을 스스로 입증하셨습니다. 이 예수님만이 우리 인생의 진정한 왕이십니다. 이것이 진리이며, 이 진리를 증언하기 위해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예수님을 왕으로 섬기지는 않습니다. ‘무릇 진리에 속하는 자는 내음성을 듣느니라’ 진리에 속한 자, 진리편에 선 자들 만이 예수님을 왕으로 섬기며 그 분의 음성을 듣습니다. 이런 점에서 유대인들은 진리에 속한 자가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왕 되심을 거부하였습니다. 그들은 기득권과 사람들의 인정을 왕으로 삼았습니다. 빌라도는 어떻습니까? 자신의 지위와 여론을 왕으로 삼았습니다. 백성들은 세상 권력을 왕으로 따랐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무엇을 왕으로 섬기고 있습니까? 대선주자들은 지지율을 왕으로 삼고 있습니다. 청년들은 취업을 직장인들은 상사가 왕입니다. 무엇보다 물질을 왕으로 삼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왕으로 섬기는 사람은 어떤 삶을 삽니까? 먼저 예수님의 음성을 가장 최우선으로 듣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왕의 말씀으로 경외하며 순종합니다. 또한 예수님 만을 의지합니다. 왕은 힘의 상징입니다.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능력의 왕이십니다. 이 왕이 나의 든든한 백이 되어 주시는데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취업, 직장, 건강, 노후, 물질 모든 것을 맡길 때, 왕이신 예수님께서 그 능력으로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으로 코로나 시대 위축되지 말고, 진리편에서 서서 진리를 증언하는 삶 살기를 기도합니다. 우리의 진정한 왕, 진리의 왕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2. 보라 너희 왕이로다(18:38-19:16) 38-39절을 보십시오. “빌라도가 이르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이르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 유월절이면 내가 너희에게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으니 그러면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주기를 원하느냐 하니.” 빌라도는 ‘죄수 주제에 무슨 진리 타령이야’ 며 예수님의 구원의 손길을 외면하였습니다. 대신, 예수님을 유월절 특사로 놓아 주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아닌 ‘바라바’를 원했습니다. 이렇게 빌라도의 첫번째 협상카드는 실패하였습니다. 그래서 다른 방법으로 예수님을 놓으려 합니다. 그것은 ‘동정심’ 카드입니다. 19:1-3절을 보십시요. “이에 빌라도가 예수를 데려다가 채찍질하더라 군인들이 가시나무로 관을 엮어 그의 머리에 씌우고 자색 옷을 입히고 앞에 가서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손으로 때리더라.” 당시 채찍은 끝에 뼈나 납조각이 박혀 있어, 등을 내리칠때마다 살점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그래서 채찍으로 죽는 죄수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40에 하나감안 39번의 채찍을 맞으시고, 피투성이가 되셨습니다. 그런데 군인들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2-3절을 보십시오. “군인들이 가시나무로 관을 엮어 그의 머리에 씌우고 자색 옷을 입히고 앞에 가서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손으로 때리더라.” 군인들은 먹잇감을 갖고 노는 고양이처럼 예수님을 가지고 놀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모든 아픔, 모욕을 참으셨습니다. 4-5절을 보십시오. “빌라도가 다시 밖에 나가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을 데리고 너희에게 나오나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 하더라 이에 예수께서 가시관을 쓰고 자색 옷을 입고 나오시니 빌라도가 그들에게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이로다 하매.” 빌라도는 예수님이 죄가 없음을 입증하기 위해 채찍질하였습니다. 이정도면 유대인들도 만족시키고 자신도 책임을 면하리라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반응은 어떠하였습나까?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피에 물든 예수님을 본 유대인들은 마치 피를 본 굶주린 늑대처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울부짖었습니다. 점점 격해지는 유대인들의 반응에 빌라도도 흥분하여 말합니다. ‘너희가 친히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 박으라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노라.’ 이 말은 반란범으로 죽이기에는 근거가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이에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죽어야 하는 이유를 말합니다. 7절을 보십시오.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우리에게 법이 있으니 그 법대로 하면 그가 당연히 죽을 것은 그가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함이니이다.” 반란범으로 죽이기 어렵다고 판단한 유대인들은 ‘신성모독죄’로 죽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말을 바꾼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아들’이란 말은 오히려 빌라도를 더욱 두렵게 하였습니다. 갑자기 그의 태도가 180도 바뀐 것입니다. 그래서 ‘너는 어디로부터냐’며 예수님의 정체에 대해 묻습니다. 예수님이 묵비권을 행사하자 이번에는 ‘내가 너를 놓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며 타협을 시도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나를 해할 권한이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다 하시니.” 진리의 왕 예수님 앞에서 빌라도의 권세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진리를 모르고 세상에 속할 때 세상 권세에 집착하고, 그것이 전부 자신의 능력인냥 착각합니다. 반면 진리에 속한 사람은 예수님처럼 세상 권세 앞에서도 당당합니다.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모든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왔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담대한 예수님의 태도에 잔뜩겁을 먹은 빌라도는 어떻게든지 예수님을 놓아 이 문제에서 자유롭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 또한 쉽게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빌라도를 협박합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이러하므로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 유대인들이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 그것은 예수님을 석방하는 것은 황제를 반역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빌라도에게 이 말은 정치생명이 끝날 수 있다는 협박이었습니다. 결국 이 말을 들은 빌라도는 어떻게 했습니까? 13-14절을 보십시오.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예수를 끌고 나가서 돌을 깐 뜰(히브리 말로 가바다)에 있는 재판석에 앉아 있더라 이 날은 유월절의 준비일이요 때는 제 육시라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보라 너희 왕이로다.” 고함치는 유대인들, 아무 말 없이 서계시는 예수님, 빌라도는 갈등하였습니다. 무죄임을 알면서도 자신의 앞날을 위해 사형을 내릴 것인가? 아니면 양심의 소리대로 석방시킬 것인가? 이렇게 최후의 순간까지 그는 선택을 망설이며, 다시한번 유대인들에게 묻습니다. ‘보라 너희 왕이로다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 마지막 기회를 주는 그의 질문에 유대인들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15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소리 지르되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대제사장 가야바는 여기에 한술더떠 이렇게 말합니다.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하나님을 왕으로 섬겨야 하는 대제사장이 가이사 외에는 왕이 없다는 말을 한것입니다. 이는 하나님 나라 백성, 언약 백성의 정체성을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결국 빌라도는 예수님을 십자가형에 언도하고 군인들에게 넘겨주었습니다. 이상의 유대인들과 빌라도의 모습을 통해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왕되심을 거부하고 가이사 곧 세상을 왕으로 삼고자 하는 우리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지으시고 그를 위로는 하나님을 섬기고 아래로는 만물의 다스리고 정복하는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하나님의 왕되심을 거부하고 스스로 왕이 되고자하였습니다. 그 결과 우리 안에도 스스로 왕이 되고자 하는 아담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왕되심을 거부하고 반역하는 행악자, 반란자입니다. 이런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야 하는 죄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내시고 우리가 서야 하는 재판자리에 서게 하시고, 대신 심문 받게 하시며 , 대신 십자가에 못 박히도록 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죄에서 석방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요 그 나라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은 우리를 그 나라의 왕 같은 제사장이 되게 하십니다. 벧전 2: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렇게 하나님은 하나님을 왕으로 거부하고 스스로 왕이 되고자하는 행악자와 같은 우리를 하나님은 십자가로 용서하실 뿐만 아니라 왕 같은 제사장이 되게 하십니다. 이렇게 은혜로 왕 같은 제사장이 된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합니까? 첫째, 하나님 나라와 진리를 증언하는 고난을 감당합시다. 둘째, 세상 소망이 아닌 하나님 나라를 소망합시다. 마지막으로 진리의 왕 예수님을 일생 섬기고 따라갑시다. 이 시간 세상의 헛된 것을 왕으로 섬기며 살다 허무하게 죽을 수 밖에 없는 우리에게 진리의 왕 예수님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 찬양 드립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만이 우리의 진정한 왕, 진리의 왕이십니다. 이 예수님을 나의 왕으로 섬기며 코로나와 불안한 시대를 믿음으로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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