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요한복음 20강 내 안에 거하라 말씀/ 요한복음 15:1-27 요절/ 요한복음 15: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오늘 말씀은 요한복음에 나타나는 예수님의 위대한 자기 선포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열매맺는 삶을 살 수 있는 놀라운 비밀을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2절을 보십시오.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예수님은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 라고 하셨습니다. 포도원을 가꾸는 농부가 포도나무에게 기대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극상품 포도열매입니다. 무화과나무, 감람나무, 포도나무는 지중해성 기후에 잘 자라는 나무들입니다. 그중 포도나무에서 나는 포도열매는 포도주를 만드는데 쓰였습니다. 물로 희석한 포도주는 일상생활에서 음료수로 사용되었고 고급 포도주는 잔치집에서 기쁨과 흥겨움을 가져다주는 귀한 음료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극상품 포도열매가 나오기까지 농부가 반드시 해주어야 하는 과정이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농부가 열매맺지 않는 가지는 제거하고 열매맺는 가지는 “깨끗하게 한다”라고 표현되었는데 농사 전문 용어로 이것을 전정작업이라고 합니다. 포도농사법 교본에 보면 전정에는 동계 전정이 있고 하계 전정이 있습니다. 동계 전정은 겨울에 잎이 나기 전 미리 가지를 쳐 주는 작업니다. 보통 한 가지에 두 개 내지 세 개의 순을 남겨놓고 나머지는 쳐 버린다고 합니다. 이것은 그 정도가 가장 적절하고 그 이상의 순이 있을 경우 최고급 품질의 열매를 맺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동계 전정을 마치면 이후 하계 전정을 해야 하는데 하계 전정은 구체적으로 새가지 고르기, 순지르기, 송이다듬기 및 송이솎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봄철 발아기가 되면 농부는 아주 약한 새가지, 지나치게 웃자란 새가지, 부정아 및 숨은 눈에서 나온 새가지를 제거합니다. 이러한 가지들은 잎만 무성하고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입니다. 이런 가지들을 남겨 둘 경우 포도나무는 영양분이 분산되어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이후 순지르기를 합니다. 순지르기는 가지 하나에 나있는 여러 잔가지들을 쳐주는 작업입니다. 순지르기를 하지 않을 경우 꽃으로 가야 할 영양분이 잔가지가 성장하는데 소모되므로 꽃이 피어나지 못하고 땅에 떨어지는 이른바 꽃떨이 현상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순지르기를 해주어야 합니다 . 이후 포도송이가 자라기 시작하면 포도알이 콩알 정도 크기가 되었을 때 송이 다듬기 및 송이솎기를 해 줍니다. 이것은 송이의 윗 부분과 중간 부분의 적절한 위치에서 송이를 일부 제거해주는 작업입니다. 만약 아깝다고 이 작업을 해주지 않으면 포도알이 성장한 후 서로 밀착되어 비대칭으로 모양이 불량해지고 포도알의 가운데로 틈이 벌어지는 열과현상이 발생하며 착색이 균일하지 않게 됩니다. 이러한 송이는 상품성이 없어져 농부는 농사를 망치게 됩니다. 그러므로 농부는 아깝지만 장래를 생각하여 반드시 송이 다듬기 및 솎기를 해 줍니다.
이 모든 과정이 바로 농부가 열매맺지 않는 가지는 제거하고 열매맺는 가지는 깨끗하게 해주는 작업입니다. 아무런 열과 현상이 없고 색깔도 균일하며 좌우 대칭이 아름답게 된 극상품 포도 열매가 맺히기까지 겨울부터 농부는 이와같은 수고를 하고 정성을 쏟습니다. 농부의 수고는 마치 어머니가 아이를 기르는 것과도 같습니다. 비유에서 예수님은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고 하셨습니다. 5절을 보면 제자들은 ‘가지’라고 하셨습니다. 포도나무, 농부, 가지 - 이 셋은 공통된 하나의 목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극상품 포도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비유가 오늘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의 존재 목적과 의미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인생의 존재 의미와 목적이 무엇일까?’ 이것은 예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생각했던 중요한 질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인생의 존재 의미와 목적이 자아를 실현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마치 해바라기의 존재 목적이 해바라기 꽃을 피우는 것인 것처럼 사람이 존재하는 목적은 자기가 가진 개성을 표현하고 자아를 실현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을 현대 버전으로 바꾸어 말한다면 각자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입니다. 정리해 보면 이렇습니다. 내가 진짜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 - 이것이 내가 존재하는 이유이고 목적이다. 정말 멋있는 말이고 우리의 가슴을 뛰게 합니다. 내가 가수라면 내가 부르고 싶은 노래를 부르는 것이 내가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내가 화가라면 내가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리는 것이 내가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내가 피아니스트라면 내가 치고 싶은 곡을 치고, 내가 작가라면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쓰는 것이 바로 내가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열광하고 좋아할 수 있는 설명입니다. 다음으로 어떤 이들은 우리 인생의 존재 의미와 목적이 행복해지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행복’이 무엇인가 정의하기 쉽지 않습니다. 영어권에서 행복 곧 happiness 는 happen에서 나왔습니다. 곧 어떤 좋은 일이 생기면 행복해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쓰는 한자 행복(幸福) 역시 요행으로 복이 된다는 뜻으로 일본에서 happiness를 행복으로 번역한 것이 우리나라에 그대로 차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행복이란 말도 결국 어떤 좋은 일이 생길 때 느끼는 마음의 상태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남자가 좋은 부인을 얻으면 행복합니다.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자가 좋은 남편을 만나면 행복합니다. 자기가 간절히 원하던 바램이 그대로 이루어지면 행복합니다. 제가 오랜기간 알고 지내던 친척 누나가 있습니다. 그분이 어느 날 이혼한다고 하여 깜짝 놀랐습니다. 아니 그렇게 오랜 기간 연애하고 서로간의 애정이 깊은 상태에서 마침내 결혼에 골인했는데 왜 이혼을 했는지 물었습니다. 그 질문에 그 분은 (영어를 아주 잘 하는 분이었는데) 영어로 대답했습니다. “I got married because I wanted to be happy. But I am not happy now. Why do I have to continue this marriage if I am not happy?” 그 분의 말을 듣고 깊은 생각에 잠기게 되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오늘날 사상적으로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몇몇 이들의 설명에 의하면 존재의미와 목적 그런 것은 애초에 없다라고 말합니다. 저 산이 왜 저기에 있는가? 그 존재 의미와 목적은 없다. 산은 태고적부터 저기에 저렇게 있었다. 존재의미와 목적 그런 것은 없는데 자꾸 그것을 찾으려고 하는데서 삶의 비애와 고통이 시작된다. 너의 삶은 너에게 우연히 던져진 것이다. 모든 것은 우연이고 모든 것은 너에게 던져졌다. 그러므로 의미와 목적을 찾지 말고 그냥 너에게 주어진 삶을 받아들여라.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모든 번뇌와 고민과 고통은 사라지고 마음에 평안이 임하게 된다.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러한 여러 설명에 대해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성경은 우리의 존재 목적이 있다고 말합니다. 더 나아가 그 존재목적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는 것이 인생의 존재 의미이고 목적이다 - 이 말은 우리에게 잠시 바쁘게 살아가던 삶에서 멈추어 서서 깊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는 것이 내가 존재하는 이유이고 목적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할까? 12절을 보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는 '사랑의 열매’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전서 13장에서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씀을 하였습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우리는 우리의 삶을 최종적으로 정리할 때 내 삶이 사도 바울이 말한 이 사랑이 있었는가 돌아보아야 합니다. 또한 지금 현재 내 삶에 이 사랑이 있는가 돌아보아야 합니다. 만약 없다면 열매 없이 잎만 무성한 삶을 산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이 사랑의 마음을 주시도록, 이 사랑의 열매가 맺힐 수 있도록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하는 것도 좋습니다.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좋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불행하고 비참한 삶을 살기 원하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행복하기 원하십니다. 그러나 참된 행복은 열매맺는 삶에 찾아옵니다. 예전에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복음송가가 유행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습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로서 그 사랑을 남에게 베풀기 위해 태어났습니다. 우리가 사랑의 열매맺는 삶을 삶으로 참된 기쁨과 행복이 넘치는 삶 살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3-5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아까도 말씀드렸던 것처럼 포도나무, 농부, 가지 - 이 셋은 공통된 하나의 목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극상품 포도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사람이 성공하는 것은 어느 정도 자기 혼자만의 힘과 능력으로 될 수 있습니다. 행복해지는 것도 자기 스스로의 노력으로도 어느 정도 성취가 가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맺는 삶은 결코 혼자만의 힘과 노력으로 가능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맺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농부되신 하나님, 참 포도나무 예수님,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의 유기적인 연합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먼저 포도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해 그 포도나무를 정성을 다해 가꾸는 농부의 수고와 헌신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포도나무가 아무리 참 포도나무이고 최고의 포도나무라 할지라도 그 포도나무를 가꾸는 농부가 겨울철부터 시작하여 열매맺는 가을이 되기까지 뙤약볕 아래에서 수고하고 가지를 깨끗하게 해주는 고된 작업을 해주지 않으면 포도나무는 아무런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한편 포도나무에는 뿌리를 통해 흡수된 영양분과 수액을 가지에게 제공할 수 있는 신비한 힘과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포도나무가 아무리 그런 능력이 있다 할지라도 가지가 없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한편 가지는 순을 내고 꽃을 피우고 포도송이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신비한 능력이 있습니다. 하지만 가지에게 아무리 그러한 신비한 능력이 있다 할지라도 그와 연합되어 있는 포도나무가 없다면 가지는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게 됩니다. 이와같이 농부, 포도나무, 가지가 원하는 극상품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농부, 포도나무, 가지의 유기적인 연합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 먼저 모든 것을 계획하신 농부되신 하나님의 수고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최고의 열매를 맺기 위해 모든 것을 기획하고 계획하셨습니다. 오랜 기간 치밀한 준비를 하셨습니다. 다음으로 참포도나무 되신 예수님의 순종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열매맺는 참포도나무가 되기 위해 하늘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낮아져 오셨습니다. 농부되신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은 극상품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참 포도나무가 되셨습니다. 다음으로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것이 필요합니다. 가지가 열매맺기 위해서는 반드시 포도나무에 붙어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포도나무로부터 수액과 영양분을 공급받을 수 있습니다. 그 수액과 영양분을 받을 때 가지는 풍성하고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됩니다. 비유에서 참 포도나무는 예수님, 가지는 제자들입니다. 곧 우리 크리스챤들입니다. 우리에게는 여인이 아들을 낳을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극상품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신비한 능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신비한 능력이 나타나기 위해서는 참포도나무 예수님께 붙어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참포도나무 예수님께 붙어있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첫째, 예수님을 믿는 믿음, 혹은 예수님이 하신 모든 말씀을 믿는 믿음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로고스로 표현되었습니다. 로고스란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태초부터 계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셨습니다. 로고스이신 예수님은 말씀으로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특히 요한복음에서 “나는 … 이니”라는 말씀으로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나는 참포도나무요”라고 하셨습니다. 요한 복음의 다른 말씀에서 예수님은 “나는 선한 목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선한 목자라는 것은 그를 따르는 우리는 곧 양이라는 뜻입니다. 지난 번 말씀에서도 언급했듯이 양은 목자가 없이는 결코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입니다. 양은 늑대나 이리의 공격에 절대적으로 취약합니다. 풀을 먹기 위해서는 철을 따라 목자의 인도함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나는 선한 목자”라고 하셨을 때 그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나는 양이다 이렇게 믿고 목자되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곧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믿는 것이요 그 말씀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나는 사자다. 목자 따윈 필요없어. 내 스스로 힘으로 정글같은 세상을 헤쳐나갈 수 있어.’ 이렇게 객기를 부리지 않고 나는 양이라는 것을 겸손히 인정하고 목자되신 예수님ㅇㄹ 믿고 따르는 것이 곧 말씀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나는 참 포도나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가지이며, 가지로서 참 포도나무 되신 예수님 안에 거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자기 힘과 능력으로 뭔가를 하려고 합니다. 자기 힘과 능력으로 보람을 찾고 행복을 찾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포도나무가 아니라 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참포도나무는 예수님 한 분입니다. 우리는 다만 가지에 불과합니다. 가지인 우리가 열매맺기 위해서는 반드시 예수님이 주시는 수액과 영양분이 필요합니다. 이것을 의존적인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사람들은, 특히 청년들은 온전히 내 힘과 능력으로 뭔가를 성취해야 그것이 멋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나무 없이, 농부 없이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우리는 가지이기 때문에 예수님과의 연합이 없이 열매를 맺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둘째, 예수님의 말씀을 실제 삶에서 순종하는 것입니다. 10절을 보면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기초로 볼 때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은 실제 삶에서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14절을 보면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라고 하셨습니다. 곧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예수님은 그 사람을 친구로 영접하십니다. 또 16절을 보면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사람이 드리는 기도는 아버지께서 하나도 빼놓지 않고 다 응답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100% 응답받는 기도의 비밀이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내 욕심과 정욕에 기초해서 기도하면 응답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에 어떻게든 순종하기 위해, 구체적으로 서로 사랑하기 위해 서로 사랑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면 주님께서는 그 기도를 전부 응답해 주십니다. 8절을 보면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기도 응답을 받는 제자를 통해 아버지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본성적으로 이기적이고 죄와 정욕이 가득한 우리가 예수님처럼 참 사랑을 행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신비한 일입니다. 이것은 마치 구정물 통에서 향내가 나는 것과 같습니다. 구정물 통에서 어떻게 향내가 날 수 있겠습니까? 최고급 향수를 들이부어도 잠시 뿐 잠간 있으면 향내는 사라지고 다시 구정물 냄새, 악취가 코를 찌를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참포도나무되신 예수님 안에 거하면 우리를 통해 아름다운 향내가 납니다. 하나님 보좌 곁에 있는 천사들만 맡을 수 있는 그 거룩한 냄새, 그 향기로운 냄새가 우리를 통해서도 나타나게 됩니다. 이 얼마나 엄청난 일입니까.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은 본래 이 목적을 위해 지어졌습니다. 하나님께 나는 그 거룩한 향내, 그 아름다운 냄새가 우리를 통해 나타도록, 극상품 포도 열매를 맺도록 지어졌습니다. 본래 놀라운 능력을 가진 기계가 전원에 연결될 때 그 능력이 온전히 나타나듯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우리 인간에게서 아름다운 향기가 나기 위해서는, 극상품 포도열매가 맺히기 위해서는 참포도나무되신 예수님께 연합되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께 연합되기 위해 예수님의 말씀 안에 거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에 깊이 새기고 그 말씀을 믿음으로 영접하기를 기도합니다. 주님께서 내가 선한 목자라고 말씀하실 때 겸손한 마음으로 내가 양인 것을 인정하기를 기도합니다. 주님께서 내가 참포도나무라고 말씀하실 때 겸손한 마음으로 나는 열매맺을 수 있는 신비한 능력이 있지만 가지에 불과하고 주님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기를 기도합니다. 내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할 힘과 능력이 부족할 때 주님께 도와달라고 간절히 기도하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제가 내 힘과 능력으로 열매맺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는 제 안에 있는 무지와 교만 때문이었습니다. 곧 내 힘과 능력으로 해야 내가 영광받을 수 있으리라는 교만과 내 힘과 능력으로는 결코 열매맺을 수 없다는 사실을 모르는 무지였습니다. 이 교만과 무지로 인해 그동안 열매맺지 못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제가 이 교만과 무지를 회개합니다. 제가 나는 포도나무가 아니고 ‘가지’라는 사실을 깊이 인정하고 겸손히 영접합니다. 제가 포도나무가 아닌 가지임을 깊이 인식하고 참포도나무이신 예수님 안에 깊이 거하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극상품 열매를 풍성하게 맺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입니다. 우리는 가지입니다. 오직 예수님만 우리를 열매맺기 하시는 참포도나무입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께 연합함으로 아름다운 열매맺는 삶 살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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