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히브리서 특강 1강 매일 피차 권면하라
말씀/ 히브리서 3:1-19 요절/ 히브리서 3:13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 CPM(Chosen People Ministries, 선백받은 민족 선교회) 선교회에 대해 혹시 들어보셨습니까? CPM 선교회는 1894년 헝가리계 랍비였던 레오폴드 콘이 미국에 와서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메시아로 영접하게 된후 동포인 유대인들에 대해 목자의 심정을 갖고 복음을 전함으로 시작되었습니다. 현재 이 선교회의 대표는 유대인인 미치 글레이저 박사입니다. 이 분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후 어머니에게 이사야 53장을 읽어드렸습니다. 유대교인이었던 어머니는 나한테 신약 성경은 읽지 말라고 했습니다. 글레이저 박사는 알았다고 구약 성경 이사야서를 읽어드리겠다고 말씀드리고 다시 이사야 53장을 읽어드렸습니다. 어머니는 화를 내며 신약성경을 읽지 말라고 하는데 왜 자꾸 신약성경을 읽느냐고 했습니다. 글레이저 박사는 제가 방금 읽은 것은 이사야 53장에 기록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사 53:1-6)
유대인들은 지금도 강력한 왕으로 오시는 메시야, 유대 민족을 세계에서 으뜸이 되는 나라로 세워주실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 53장에 예언된 메시야의 모습은 사람들의 죄를 대신하여 고난받으며 죽어가는, 제사에 바쳐지는 한 마리 어린 양과 같은 메시야입니다. 아들이 읽어준 말씀을 들은 어머니는 이것은 틀림없이 예수에 대한 기록이라고, 마치 신약 성경 말씀같다고 했습니다. 이후 글레이저 박사는 “이사야 53장 해설(Isaiah 53 Explained)”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이 책을 통해 고난받는 어린 양은 많은 유대인 학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이스라엘 민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메시야에 대한 모습을 예언한 것임을 강력히 증거했습니다.
글레이저 박사는 유대인들이 요청하면 이 책을 무료로 보내주고 있는데 지난 2년의 기간에 무려 8천명의 유대인들이 책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이 책을 통해 수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현재 뉴욕에서 사역하고 있는데 뉴욕의 브루클린에만 100만명의 유대인들이 있으며 이들이 고난받고 죽으신 예수님을 메시야로 영접할 수 있도록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히브리서가 기록된 당시에도 전세계에 흩어진 유대인들 가운데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고 영접한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이들 가운데 예수님을 배반하고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려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된 데에는 여러가지가 있었을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동포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장사를 하는데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알려져 하루 아침에 손님이 뚝 끊기게 된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아들을 유대인 학교에 입학시키려고 했는데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입학거절이 되기도 했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믿었지만 여전히 가난과 질병 등으로 고생하면서 과연 예수님을 믿을 필요가 있을까 회의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런 그들에게 절대로 예수님을 배반하지 말고 처음 가졌던 그 믿음을 끝까지 지키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도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는 이 믿음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 깊이 생각해 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현재 히브리 성도들은 각자 깊이 생각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에 주된 손님이었던 동포들이 가게에 발길을 끊었습니다. 그들은 이 문제로 인한 경제적 손실을 깊이 생각했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에 자식을 원하던 학교에 보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깊이 생각했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믿었지만 여전한 경제적 어려움, 현실의 어려움, 질병 문제가 있어 그 문제를 깊이 생각했습니다. 사람이 눈 앞의 문제만 깊이 생각하면 마음이 어두워집니다. 우울증이 찾아옵니다. 매사에 짜증이 나고 신경질이 납니다. 깊은 손해의식에 시달립니다. 지나온 삶에 대한 회의가 생깁니다. 그런데 이때 눈을 들어 예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습니다. 한 농부가 있었습니다. 그는 밭을 갈다가 밭에 감추어진 보화를 발견했습니다. 옛날 어떤 부자가 자신의 보화를 이곳에 숨겨놓았는데 전쟁이 일어났거나 아니면 질병 등으로 이곳에 보화가 감추어졌다는 사실이 잊혀지게 되었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나 농부가 밭을 갈다가 곡괭이 끝에서 울려퍼지는 소리를 통해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당장 집으로 달려가 모든 재산을 정리하여 그 밭을 샀습니다. 이를 통해 그는 보화를 자기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보화를 소유한 농부의 기쁨이 어떠합니까! 여러 사정상 그 보화를 당장 현금화하기는 어렵지만 그는 보화를 소유하게 된 것으로 인해 큰 기쁨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밭에 감추인 보화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얼마나 소중한 분인지 잘 모릅니다. 그가 얼마나 놀라운 약속의 말씀을 주셨는지, 큰 구원을 약속하셨는지 모릅니다. 알더라도 그것을 믿지 않기에 모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성춘향과 이몽룡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몽룡은 성춘향을 사랑했고 그에게 약속의 말을 남기고 과거 시험을 보러 떠났습니다. 이후 남겨진 성춘향을 변사또가 유혹했습니다. 춘향이 만약 변절하고 변사또의 유혹에 넘어갔더라면 그녀는 편하게 안락하게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춘향은 몽룡이 남긴 약속의 말을 붙들고 끝까지 정절을 지켰습니다. 하지만 마침내 나타난 이몽룡의 몰골은 비참했습니다. 보잘 것 없었고 거지와 같았습니다. 그럼에도 춘향은 몽룡을 향한 정절을 지키고 끝까지 배반하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몽룡은 과거에 급제하여 암행어사가 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암행어사의 신분을 밝힌 이몽룡은 온갖 못된 짓을 한 악한 변사또를 심판하였습니다. 마침내 끝까지 정절을 지킨 춘향은 몽룡의 사랑하는 부인이 되었습니다. 만약 춘향이 몽룡의 비참한 몰골만을 보고 그를 배반했더라면 그녀는 큰 후회를 하였을 것입니다. 예수님도 비참한 몰골을 한 이몽룡처럼 잠시 가난하고 고난받는 종의 모습을 하였습니다. 이에 비해 악한 세상은 변사또처럼 크고 강해 보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 반대입니다. 예수님은 온 우주에서 가장 크고 위대한 분입니다. 때가 되면 온 세상은 예수님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온 세상이 예수님의 발아래 있게 됩니다. 우리가 비록 현재 삶에 크고 작은 고난이 있다 하더라도, 변사또의 유혹과 같은 유혹과 시험이 있다 하더라도 우리에게 큰 구원을 약속하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할 때 그 모든 시험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마음에 큰 위로를 받고 끝까지 승리할 수 있게 됩니다.
2-6절을 보십시오. “그는 자기를 세우신 이에게 신실하시기를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한 것과 같이 하셨으니 그는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 만한 것이 마치 집 지은 자가 그 집보다 더욱 존귀함 같으니라 집마다 지은 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 또한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언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종으로서 신실하였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로서 그와 같이 하셨으니 우리가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고 있으면 우리는 그의 집이라” 현재 그들이 다시 돌아가려고 하는 유대교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로 치는 이가 모세입니다. 그런데 그 위대한 모세도 예수님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어떤 훌륭한 건축물이 있고 그 건축물을 디자인한 건축가가 있습니다. 건축물이 더 위대하겠습니까? 건축물을 디자인한 건축가가 더 위대하겠습니까? 당연히 건축가가 더 위대합니다. 건축물은 지진이 일어나거나 해일이 발생하면 무너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건축가가 있는 한 건물은 언제든지 다시 세워질 수 있습니다. 모세는 건축물이 위대한 것처럼 피조물 중 위대한 사람이었지만 예수님은 그 건축물을 디자인한 분처럼 더욱 위대한 분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집에 종으로 충성했으나 예수님은 아들로 충성했습니다. 7-11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광야에서 시험하던 날에 거역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거기서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여 증험하고 사십 년 동안 나의 행사를 보았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이 세대에게 노하여 이르기를 그들이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내 길을 알지 못하는도다 하였고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그들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였느니라” 히브리서 저자가 언급한 이 사건은 민수기 13장과 14장에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출애굽의 위대한 지도자 모세의 리더쉽 아래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침내 430년의 노예생활을 끝내고 이집트를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광야를 거쳐 마침내 하나님이 약속하신 약속의 땅 가나안 입성을 눈앞에 두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 먼저 정탐꾼을 보내 그 땅의 형편이 어떠한지 정탐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마침내 정탐꾼들이 정탐을 끝내고 그 땅에 대해 보고했습니다. 그 보고 내용이 어떠했습니까? 정탐꾼들은 그 땅은 과연 하나님이 말씀하셨던대로 젖과 꿀이 흐르는 좋은 땅인 것을 인정했습니다. 그런데 그 땅에 거주민이 이미 살고 있으며 그들은 기골이 장대하고 우리는 그들에 비하면 메뚜기같았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특별히 ‘메뚜기’라는 말이 마음에 깊이 꽂혔습니다. 메뚜기는 발로 한 번 밟아버리면 찍 소리도 내지 못하고 죽습니다. 메뚜기, 우리가 그런 메뚜기라니 이 한 마디 말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얼마나 위대한 일을 하셨는지 전부 다 잊어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열 가지 재앙을 통해 바로의 마음을 낮추셨는지, 하나님께서 하늘 문을 여시고 우박과 번개를 내리시고 태양을 감추어 캄캄한 어둠이 임하게 하셨는지, 메뚜기 떼를 보내 바로의 논과 밭을 쑥대밭이 되게 하셨는지, 바로를 포함한 이집트의 모든 첫째 아들이 다 죽도록 하셨는지, 넘실대는 홍해를 가르시고 그들을 홍해를 육지같이 건너게 하셨는지를 ‘메뚜기’라는 한 단어를 듣고 다 잊어버렸습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하나님과 모세에게 속았다고 생각하고 돌을 들어 모세를 쳐 죽이고 다시 이집트로 돌아갈 마음을 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들에게 진노하시고 모세와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들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전부 다 진멸하려 하셨습니다. 모세는 동포들을 용서해주시도록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기도를 받으시고 그들을 용서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40년간 광야를 헤매도록 하셨습니다. 40년이 지나 악한 마음을 품었던 이들이 다 죽고 난 후 그들의 자녀들이 가나안에 들어가도록 하셨습니다.
우리 조상들이 남긴 속담 중에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의 속은 모른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참 신비하기도 하면서 또 간사하기도 합니다. 열 길 물속보다 더 깊기도 하면서 한 뼘의 찰랑거리는 물처럼 가볍기도 합니다. ‘메뚜기’라는 단 한 마디에 하나님이 베푸신 그 크신 은혜를 까맣게 잊어버렸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우리도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사건 하나에 지금까지 가졌던 믿음을 다 잃어버리고 원망과 불신과 불만과 불평에 가득한 마음이 될 수 있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너희는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조심할 것이요”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님을 거절하거나 배반하는 것을 악한 마음이라고 표현합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 예수님을 거절하거나 배반할 때 살아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지게 된다고 경고합니다. 혹 그들 중에 누가 이렇게 되지 않을까 조심하라고 권면합니다.
더 나아가 히브리서 저자는 그들이 이렇게 되지 않도록 실제적인 권면의 말씀을 줍니다. 그 권면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13,14절을 보십시오.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라고 말씀합니다. 우찌무라 간조 같은 이들은 무교회주의를 주장했습니다. 특별히 눈에 보이는 유형 교회를 만들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각자 자기 집에서 혼자 하나님과 교제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 교회가 더 소중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저자는 눈에 보이는 유형 교회의 중요한 역할에 대해 말씀합니다.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라”는 말씀은 참으로 실제적이고 중요한 지침이 되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첫째, 자주 만나는 것의 중요성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자주, 또 정기적으로 서로 만나라는 것입니다. 부부간이라도 서로 오랜기간 떨어져 있으면 사이가 서먹해집니다. 어떤 부부는 자녀 교육을 위해 자녀와 아이들 엄마를 미국이나 캐나다 같은 해외로 보내고 아버지는 한국에 남아 5년, 10년 오랜 기간 떨어져 지냅니다. 그럴 때 부부의 관계가 서먹해지게 됩니다. 서로에 대한 이해도가 낮아지고 사랑이 자기도 모르게 식게 됩니다. 성도들도 이와 같습니다. 서로 자주 만나야 합니다. 자주, 또 정기적으로 만날 때 서로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고 깊은 사랑이 싹트게 됩니다. 오늘날 팬데믹으로 서로 만나는 것이 쉽지 않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줌 모임을 통해 만날 수 있습니다. 또 전화나 카톡을 통해서도 교제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팬데믹 가운데서도 자주 만나는 분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팬데믹으로 인해 거의 1년 가까이 소식도 잘 모르고 대화도 없이 지낸 분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기초로 그동안 소식을 끊고 살았던 동역자들에게 전화도 하고 카톡도 하고 또 줌모임을 통해 만남의 시간을 가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서로 말씀으로 격려하는 것의 중요성입니다. 아까도 말씀드렸던 것처럼 사람의 마음이 참으로 신묘막측합니다. 사람의 마음은 하나입니다. 이것은 마치 컴퓨터 스크린이 하나인 것과 같습니다. 컴퓨터가 여러가지 일을 할지라도 스크린에 나타나는 장면은 하나입니다. 물론 멀티 창을 열어놓을 수 있지만 그래도 어쨌든 스크린은 하나이고 현재 눈에 보이는 장면이 전부입니다. 사람의 마음도 이 컴퓨터 스크린과 같습니다. 지금까지 많은 작업을 했고 많은 일들을 했을지라도 지금 현재 내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것은 한 가지 장면이고 그 한 가지 장면은 가장 최근에 일어난 일일 가능성이 큽니다. 다시 말해 인간은 가장 최근에 일어났던 일을 중심으로 마음이 사로잡히게 되고 그 일이 그의 생각과 사고를 지배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인생을 짧다고 느끼는 이유도 지금까지의 일은 다 마음에서 사라지고 가장 최근의 일만 마음에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내가 지금까지 제 아무리 위대한 믿음의 체험을 하고 신앙의 체험을 했다 하더라도 지금 현재 나의 마음이 한 순간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고 내 자신도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위대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기근이 들어 이집트로 갔을 때 사람들이 예쁜 자기 아내를 취하려고 자기를 죽일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아내를 누이동생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결과 정말로 아내를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모세의 위대한 동역자였던 아론도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간 후 오랜기간 내려오지 않고 백성들이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달라고 집요하게 요구했을 때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었습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우상숭배의 큰 죄를 범하게 만들었습니다. 날 때부터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았으며 이스라엘의 구원자요 사사로 세움받았던 그 위대한 사사 삼손도 들릴라의 미모와 여성의 매력에 빠져 자기가 가진 힘의 근원을 그녀에게 알려주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눈이 뽑히고 감옥에서 맷돌을 돌리는 비참한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위대한 영웅 다윗도 한 순간 무슨 마음이 들었는지 간음을 행하고 더 나아가 살인죄를 범했습니다. 바로 여기에 성도의 교제의 중요성이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유형 교회의 중요성이 있습니다. 성도가 매일 만나 피차 말씀으로 권면할 때 마음이 큰 힘을 받게 됩니다. 일단 다른 성도에게 내가 가진 내면의 어려움을 말하는 것 자체로 우리 마음을 힘을 받습니다. 누군가 나의 아픔과 어려움을 들어주고 공감해준다는 것 자체가 마음에 마치 초강력 에너지를 공급해주는 것과 같습니다. 더 나아가 나에게 방향이 되는 말씀을 들으면 그야말로 시들어가던 밭의 풀이 단비를 맞은 것처럼 살아나게 됩니다. 쑥쑥 자라나게 되고 생명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저는 지난 2002년부터 매년 여름이면 김헬렌 사모님과 동역하여 한국에 와 있는 2세 선교사들을 인솔하여 서울 양화진 선교사 묘지와 광주 양림동 선교사 묘지, 광주 역사 박물관, 여수 애양원을 방문했습니다. 지난 2년간 팬데믹으로 인해 이것이 중단되었는데 올 해에는 줌으로 하게 되었습니다. 한국에 오셨던 선교사님들의 삶을 새롭게 PPT로 정리하고 이것을 줌모임을 통해 나누었는데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선교사님 한 분도 여기에 동참하였는데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선교사님들의 삶을 돌아보면서 이분들이 한국 성도들에게 얼마나 많은 감화와 은혜를 끼쳤는지 보게 되었습니다. 전주에 이보한이라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진사였던 아버지의 첩의 자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첩의 진짜 자식이 아니라 첩이 아들을 낳지 못하기 때문에 대리모를 구했는데 그 대리모가 낳은 아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son of a surrogate mother adopted by a concubine mother”였습니다. 조선 시대 때 서자이기만 해도 많은 천대를 받았는데 서모가 고용한 대리모가 낳은 아들이었으므로 그가 받은 무시와 천대는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그의 마음에는 사회와 사람들에 대한 분노가 가득했습니다. 이런 그가 어느날 강도만난 그의 아버지를 치료하기 위해 온 포사이트 선교사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포사이트 선교사는 그 집을 다시 찾아온 강도들에게 맞아 한쪽 귀가 짤리고 머리뼈에 금이 갔습니다. 이로 인해 한 달 가까이 누워있어야 했습니다. 후유증으로 인해 2년 후 미국으로 돌아가 치료받아야 할 정도였습니다. 마침내 범인이 잡혔습니다. 조선인 관리는 범인을 어떻게 처벌했으면 좋겠냐고 포사이트 선교사에게 물었습니다. 이때 포사이트 선교사는 내가 죽지 않았으니 그를 죽이지 말라고 했습니다. 청년 보한은 포사이트 선교사의 이 말을 전해듣고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아버지인 진사가 포사이트 선교사로부터 받은 은혜를 갚기 위해 우리 집안에 최소한 한 사람은 크리스챤이 되어야 할 것 같은데 누가 내 대신 크리스챤이 될 사람이 있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이에 보한은 손을 번쩍 들고 자기가 예수님을 믿겠다고 했습니다. 포사이트 선교사가 한 용서의 말 한 마디에 그의 마음에 지금까지 서자로 자라며 받은 모든 마음의 상처와 분노가 씻겨져 나가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후 그는 포사이트 선교사가 전하는 예수를 자기도 믿고 더 나아가 자기처럼 무시받는 거지들, 마음이 상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위대한 복음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또 한 번은 포사이트 선교사가 죽어가는 오웬 박사를 치료하기 위해 광주로 조랑말을 타고 올라가던 길이었습니다. 광주 입구에서 그는 추운 겨울날 죽어가는 한 여자 나환자를 발견했습니다. 그는 나환자를 껴안고 조랑말에 태웠습니다. 나환자의 지팡이가 땅에 있는 것을 본 포사이트 선교사는 마침 마중을 나온 최흥종에게 말했습니다. “형님, 그 지팡이 좀 집어주시오.” 머뭇거리는 그를 보며 포사이트 선교사는 피로 전염되지 않으면 전염안되니까 걱정하지 말고 집어달라고 했습니다. 최흥종은 마음에 큰 감화를 받았습니다. “형님, 그 지팡이 좀 집어주시오.” 말하던 포사이트 선교사의 눈빛과 표정을 결코 잊을 수 없었습니다. ‘같은 동포들도 버린 저 여인에게 이런 사랑을 베푸는 저 푸른 눈의 사람은 도대체 누구인가?’ 이후 그는 유산으로 받은 넓은 땅을 나환자들을 위한 병원을 건축하는데 기부하였습니다. 더 나아가 그의 남은 삶을 나환자들을 돌보는 일에 헌신했습니다.
이런 선교사님들의 이야기를 참석자들과 함께 나눌 때 우리 마음에 뜨거운 은혜가 임했습니다. 2세들도 마음에 깊은 감동을 받고 끝없이 선교사들에 대해 여러가지 질문을 했습니다. 모임을 마쳐야 했지만 아무도 모임을 끝내고 싶어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앞으로 히브리서 말씀을 통해 믿음으로 산 분들의 삶에 대해 나누기 원합니다. 이를 통해 큰 격려를 받기 원합니다. 팬데믹 가운데 서로 만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 가운데서도 줌을 통해서라도 서로 만나 서로의 기도제목을 나눌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현재 마음의 상태를 서로 나눌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성령의 인도함 가운데 서로에게 말씀을 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를 통해 큰 위로와 격려를 받기를 기도합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을 믿는 이 믿음에서 우리 모두가 한 사람도 떠나지 않고 끝까지 믿음의 길을 가기를 기도합니다. 이를 통해 주님이 약속하신 큰 구원을 얻고 주님의 안식에 참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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