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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1년 히브리서 특강 2강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히브리서11:1-22)2021-08-29 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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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히브리서 특2강 (이아브라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

말씀/히브리서11:1-22
요절/히브리서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우리는 고아의 아버지이며 삼 만번 기도응답 받은 한 사람을 알고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죠지뮬러입니다. 그가 청소년의 때에 도둑질과 거짓말, 불한당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열 여섯 살때 빚을 갚지 못해 감옥에 갇히기도 했습니다. 사기와 문서 위조로 다시 한번 수감생활을 하였습니다. 출옥 후에 전국각지를 다니며 다른 사람의 돈으로 대학공부를 하고 졸업을 하였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뒤 그의 삶이 변화되었습니다. 사람들을 이용하고 속이고 의지하던 것을 버렸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여 믿음으로 살고자 결단하였습니다. 1836년 4월 죠지뮬러는 가진 재산이 한 푼도 없었지만 고아원을 세웠습니다. 그 다음 해에는 고아원을 두 군데 더 세웠습니다. 그가 죽을 때에 그가 돌보는 고아의 수가 수 천명이나 되었습니다. 고아들을 매일 먹인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요즈음 한 두 명의 자녀를 키우는데도 힘들다고 하는데 그럼에도 그는 사람들에게 “좀 도와 주세요.” “헌금 좀 해 주세요” 손 벌리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그는 빈 접시를 식탁에 올려놓고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늘 기이한 방법으로 필요를 공급해 주셨습니다. 그가 돌보는 아이들은 굶거나 헐벗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임종을 앞둔 그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어떻게 돈 한푼 없이 이런 위대한 일을 할 수 있었습니까?” 죠지뮐러가 말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빌4:19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는 말씀을 하나님께서 이루신 것입니다. 저는 단지 이 말씀을 믿고 주장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믿음을 기쁘게 받으시고 그의 인생을 축복해 주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입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까?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의 믿음을 점검하고 새롭게 하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믿음이 무엇입니까? 첫 번째로,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하였습니다. ‘바라는 것’은 ‘미래에 될 일’을 말합니다. ‘실상’이란 ‘객관적 실체로 나타나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어떤 소년이 꿈을 꾸었습니다. 부모와 형들이 자기에게 절을 한다는 꿈이었습니다. 이 소년은 이 꿈 때문에 형들의 미움을 받아 애굽의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시위대장의 총무로 열심히 섬겼는데 모함을 받아 감옥에 갇혔습니다. 현실은 그의 꿈과 정반대 뱡향으로 흘러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하고 맡겨진 일에 충성을 다했습니다. 때가 되자 하나님은 그를 애굽의 총리로 세우셨습니다. 온 세상에 기근이 왔습니다. 그를 노예로 팔았던 형들이 곡식을 얻으러 애굽에 와서 총리가 된 그에게 절을 하였습니다. 그가 꿈을 꾼지 15년이 지난 후 그 꿈은 현실이 되었습니다. 믿음이란 이처럼 미래에 되어질 그 일을 현재 손에 쥔 실체로 바라보고 현재를 살아가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믿음이란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증거’입니다. ‘증거’는 영어로 ‘assurance’로 ‘확신’입니다. 그러므로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증거’는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확실하다고 믿는 것을 말합니다. 예전에 어떤 증권사에서 “보이는 것만 믿으세요”란 광고 글귀를 낸 적이 있습니다. 이 말이 타당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은 우리 눈으로 보는 세계는 아주 작은 일부분에 불과합니다. 인류가 허블 망원경을 제작하여 우주로 보내 바깥 세상을 보니 어떠하였습니까? 인류가 그동안 보지 못했던 어마어마하게 넓게 펼쳐진 광활한 우주 공간과 그것을 채우고 있는 천체들을 보고서 과학자들이 다 놀랬습니다. 수천억개의 은하계와 각양각색의 우주의 모습, 모양, 빛깔, 크기들... 경외심이 들 정도입니다. 반대로 현미경으로 마이크로 세계를 보면 어떻습니까? 또 다른 새로운 세계가 펼쳐집니다. 저는 면봉으로 제 잇몸에 있는 치태(Plaque)를 긁어 현미경으로 본 적이 있습니다. 보니 거기에는 띠처럼 길다랗고 구불구불한 세균들이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순간 소름이 돋았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수많은 세균과 바이러스, 미생물들이 우리와 함께 공존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실 생활에서도 실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유용하게 활용하는 것들이 많습니다. TV, 스마트폰, 네비게이션과 같은 것들은 보이지 않는 전파를 이용합니다. 병원에서 사용하는 엑스레이선, 전자렌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즈음 가상세계(메타버스), 가상화폐등 보이지 않는 실체들이 우리 삶속에서 경험되어지고 있지 않습니까?

자! 영적 세계는 어떻습니까?  ‘하나님, 성령, 천사, 마귀, 천국과 지옥,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기도하시며 우리 처소를 예비하시는 예수님’. 이러한 것들이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실재합니다. 이것들은 오직 믿음의 눈으로만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중에 예수의 부활을 자기 눈으로 확인해야만 믿을 수 있다고 한 도마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이때 예수님이 나타나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였습니다. 믿음이란 보이지 않는 것들을 신뢰하고 보는 것처럼 확신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과 비슷한 것들이 있습니다. 어떤 한 청년이 “저 자매와 반드시 결혼할 줄 믿습니다.” 매일 한시간씩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청년이 좋아했고 기도했던 그 자매는 그 청년이 아닌 다른 형제와 결혼했습니다. 그 청년은 화가 나서 교회를 떠나버렸습니다. 그 청년은 과연 믿음이 있었을까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내가 하나님을 이렇게 열심히 섬겼으니 하나님은 내가 바라는 것을 해 주실 것이다’ 이런 전제속에서 믿음을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믿음은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보증수표를 받아내는 것이 아닙니다. 내 소원을 이루는 것도 아닙니다. 이러한 것들은 자기 최면, 자기 신념, 자기 확신입니다. 그 중심에는 ‘내’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그 중심에 ‘하나님’이 있습니다. 나의 소원이 이루어질 것이다라는 확신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고 의심하지 않고 확신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합니다. 약속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확신과 행위만이 참된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가 바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과 말씀에 합당한가를 점검하고 일치시켜 믿음으로 주장하여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이루십니다. 


2절 말씀을 보십시오.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증거를 얻었다는 말은 하나님께 인정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우리 청년들은 어떤 사람을 인정하시나요? 공부 잘하는 사람, 외모가 좋은 사람, 돈 많이 버는 사람, 사회적 지위나 명성이 있는 사람입니까?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인정하십니까?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살지 않고 뒤로 물러가는 사람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히10:38). 히브리서 저자는 선진들이 믿음으로 살아 하나님께 인정을 받은 것처럼 너희도 믿음으로 살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3절을 다함께 읽겠습니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믿음의 선진들의 사례를 들기전에 먼저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창조되었음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창조 신앙을 믿는 믿음이 믿음의 세계로 들어가는 첫 출발이요 관문이기 때문입니다. 서울대 의대를 다니던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캠퍼스를 걷다가 UBF 사모님을 만났는데 성경공부 초청을 받았습니다. 그는 사모님에게 ‘성경에 처녀가 잉태하여 아이를 낳았다는 그런 믿지 못할 내용이 나오는데 무슨 성경공부를 해요?’하며 거절했습니다. 그러자 사모님은 물러서지 않고 ‘그러니까 성경공부를 통해 사실인지 아닌지 알아보아야 할 것 아니에요’하며 설득을 했습니다. 그 말에  청년은 ‘좋아요. 한번 해보죠.’ 동의하고 성경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첫 성경공부는 창세기 1장 말씀이었습니다. 사모님은 창세기1장 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말씀을 이렇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창1장1절은 성경전체를 이해하는 열쇠(KEY)입니다. 성경을 읽다가 혹시 이해가 안되는 기적이나 의문이 있으면 이 말씀으로 적용해 보세요. 그러면 의문이 풀릴 것입니다.’ 그리고서 1장 1절을 외우게 했습니다. 그 대학생은 여러번 웅얼웅얼거리며 외웠는데 말씀이 북처럼 울려 그의 영혼을 깊이 터치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사실이 믿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이 광대한 천지를 말씀으로 만드신 분이,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내신 분이 능히 처녀 몸에서 아기를 낳게 하실 수도 있겠구나’ 이해가 되었습니다. 그 외에 성경에 나오는 이성으로는 믿기 어려운 여러 의문들이 쉽게 풀리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창조신앙을 갖게 될 때 이성이나 과학으로 이해할 수 없는 성경의 사건들이 이해되고 믿어지게 됩니다.

4절부터는 믿음의 선진들의 다양한 형태의 믿음의 증거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4절에는 아벨의 믿음이 나옵니다.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습니다. 아벨과 가인이 둘 다 제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아벨의 제사만 받으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믿음입니다. 아벨이 믿음으로 제사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예배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나타나심 앞에서 우리가 가진 최선으로 것으로 그 분을 높이는 의식입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믿음의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온라인예배라고 소홀함이 있지는 않은가 살펴보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아벨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사를 드렸지만 오히려 순교를 당하였습니다. 그의 순교는 그의 삶 전체를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죽었으나 믿음의 영향력은 살아 하나님의 구속역사에 쓰임받고 있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옭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에녹의 믿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이었습니다. 에녹이 살던 시대가 어떤 시대입니까? 타락하고 악이 가득찬 시대였습니다. 유대전승에 의하면 에녹은 모든 세대의 회개의 표본이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가 오랜기간 회개하며 주님과 친밀한 사귐을 유지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이 땅에 두지 않고 하늘로 옮기심으로 그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였다는 것을 증거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까?

6절을 보십시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첫째, 하나님이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어려움을 당하거나 일이 잘 풀리지 않을때 “하나님은 살아 계시는가?”의심하기 쉽습니다. 세상에서 악인이 득세하고 의인이 고난과 박해를 받을 때 과연 하나님이 세상을 주관하시는가? 내 인생  왜 이리 꼬이나?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이때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현재의 상황을 주관하고 계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선하십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시며 깊은 관심을 갖습니다. 내 생각과 내 계획보다 더 높고 더 뛰어난 분이십니다. 나의 삶을 베스트로 인도하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인식하고 그 분을 신뢰하고 의탁하는 것이 믿음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을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자꾸 찾아오면 좋아합니다. 상담을 요청하고, 자꾸 물어보면 좋아합니다. 대하16:9에서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에게 능력을 베푸신다고 하였습니다.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을 주십니다. 상은 누구나 좋아합니다. 내가 인정받는 것이기에 기분이 좋습니다. 노력의 댓가로 받는 보상이기에 더 좋은 상을 받기 위해 더욱 분발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상을 여러 가지 형태로 주십니다. 아브라함에게는 믿음의 조상이라는 칭호를 주셨고 요셉에게는 총리자리를 주셨습니다. 모세에게는 이 땅에서 고생했지만 하늘나라의 영광을 주셨습니다. 다니엘에게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는 영광을 주셨습니다. 각 사람이 받는 영광에도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해의 영광이 있고 달의 영광이 있고 별의 영광이 있는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릅니다(고전15:41). 그리고 모든 믿음의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영생이라는 상을 주십니다. 사도 바울은 부름의 상을 얻기 위해 달려간다고 했습니다. 그가 주와 복음을 위해 열심히 산 이유가 하나님께 상 받기 위함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의 인생을 마무리하면서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4:7,8)” 예수님도 자신이 받을 영화를 위해 성부 하나님께 다음과 같이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17:5)

사랑하는 2,7부 동역자 여러분! 여러분의 소망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상을 받아야 합니다. 마지막 날 하늘 시상식 자리에서 ‘OOO’ 나의 이름이 호명될 때 이 땅에서의 모든 수고와 슬픔은 눈 녹듯 녹아내릴 것입니다.


7절은 노아의 믿음을 말합니다.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홍수로 온 땅을 심판하실 것이라는 경고를 받고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습니다. 노아의 믿음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경외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액면 그대로 믿었습니다. 아직 보지 못한 일에 대한 확신을 가졌습니다.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였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노아가 방주를 만들 때 ‘말씀대로 다 준행하였다’고 반복하여 나옵니다. 재료나 방식 모든 것을 하나님이 일러준대로 했습니다. 사람들은 노아가 산 중턱에 배를 만드는 것을 보고 모두 비웃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을 물로 심판할 때 노아의 믿음이 옳았다는 것이 나타냈습니다. 그를 비웃던 세상의 불신앙을 정죄하였습니다. 그는 믿음을 따라 의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마치 종처럼 대하며 ‘이것 해 줘’ 요구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그 분의 뜻에 굴복하여 그 명령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하셨으며 하라고 하신 일을 다 이루셨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경외하는 믿음을 갖기를 기도합니다.


8-12절은 유대인들의 가장 위대한 조상 아브라함의 믿음의 본을 말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순종입니다.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을 때 즉각적으로 순종하였습니다. 그는 가야 할 목적지도 알지 못한채 오직 하나님만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그 명령에 순종하여 떠났습니다. 그런데 그가 믿음으로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갔을 때 현실은 어떠하였습니까? 이미 가나안 원주민들이 뿌리를 내리고 살고 있었습니다. 발 붙이고 살 땅이 조금도 없었습니다. 현실은 냉혹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어떤 삶을 살았습니까? 9절을 보십시오.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불평하거나 슬퍼하지 않았습니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그리워하며 보따리를 싸서 돌아가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믿음으로 약속하신 땅에 그의 하우스 처치를 세우고 그곳에 거류하였습니다. 동일한 약속을 받은 그의 아들 이삭, 손자인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습니다. 장막은 일시적인 거처입니다. 요즈음 말로 하면 월세나 전세로 사는 것입니다. 그는 안정이 없이 살았습니다. 자신 뿐만 아니라 아들, 손자에게까지 그러한 삶이 이어졌습니다. 자식과 손자가 고생하면 마음이 흔들릴 수 있는데, 아브라함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10절을 보십시오.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하나님께서 설계하시고 건축하신 영원한 하늘의 처소를 소망하였기 때문입니다. ‘터가 있는 성’이란 ‘고정된 영구한 집’을 말합니다.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이 거할 집이 이 땅이 아닌, 하늘에 있음을 알고 그것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요즈음 집값이 폭등함으로 상대적인 위화감으로 마음이 힘들어지는 목자님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본향을 소망하는 믿음이 있기에 힘든 현실을 인내로 이겨내고 주와 복음을 위해 헌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11절은 사라의 믿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동역이 중요합니다. 부부가 한 믿음의 동역을 할 때 기업을 함께 받게 됩니다.
12절은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믿음의 후손들이 번성케 되었음을 말해줍니다. 나 한 사람이 중요합니다. 남이야 어떠하든 내가 믿음으로 살아갈 때 수많은 믿음의 열매가 맺히고 믿음의 계승역사가 일어납니다.


13-22절까지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으로부터 요셉까지 그들이 바라보았던 진정한 약속의 땅이 어디인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아브라함, 사라, 이삭, 야곱은 모두 가나안땅과 그 후손에 관한 약속을 받은 자들이었으나 그 약속의 성취는 보지 못한 채 죽었습니다. 하지만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였습니다. 이 말은 그들이 믿음의 눈으로 보니 미래에 하나님께서 약속을 실행할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기뻐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 약속은 일차적으로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하여 차지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것은 그리스도가 오셔서 성취한 구원을 말합니다. 아브라함은 그리스도의 때를 즐거운 마음으로 기다리다가 보고 기뻐하였습니다(요8:56). 더 미래로 나아가면 우리 구주 예수님께서 종말의 때에 우리를 영원한 도성, 천국으로 맞아 들일 것을 바라보고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성도들은 세상에서 어떤 사람입니까? 외국인과 나그네입니다. 아브라함은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거류하는 자’(창23:4) 라고 했고, 야곱은 바로를 만났을 때 ‘내 나그네 길....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창47:9) 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속에서 성도의 정체성은 나그네요 외국인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본향, 우리의 집은 어디에 있습니까? 다함께 16절을 읽겠습니다.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우리의 본향, 우리 집은 하늘에 있습니다. 믿음의 선진들이 세상을 살아갈 때 한결같이 하늘에 있는 본향 집을 그리워하며 그 집에 들어갈 것을 학수고대하며 살았습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어지는 것을 결코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 불리어지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셨습니다. 혹시 여기서 하늘 본향을 그리워하는 분이 있으면 손들어 보십시오. 그렇다면 하나님은 ‘OOO의 하나님’이라고 불리우는 것을 결코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당신을 위하여 예비하신 한 성, 곧 천국으로 맞아들이실 것입니다.

요즈음 사람들이 수명이 길어지고 의학이 발달하고 잘 먹고 잘 살게 되면서 천국 설교가 별로 인기가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본향, 우리의 집이 있는 천국을 알아야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 방향을 잡게 됩니다. 천국이 어떤 곳입니까? 성경학자들은 ‘천국은 세상과 동일할 것이다’고 합니다. 천국에도 하늘이 있습니다. 천국에도 땅이 있습니다. 천국에도 삼라만상이 있습니다. 천국에도 몸을 입고 사는 인간이 있습니다. 세상과 다르지 않습니다. 다르다면 모든 것이 새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새 하늘과 새 땅을 만드십니다. 우리는 더럽지 않고 썩지 않고 쇠하지 않는 영광스런 몸을 입습니다. 우리가 거할 천국의 환경은 어떤 곳일까요? 계21:5에서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고 했습니다. 만유를 새롭게 회복시켜주십니다. 에덴동산의 모습일까요? 아니요. 그것보다 더 완벽하고 완전한 모습으로 만물을 완전히 새롭게 합니다. 우리가 그곳에서 즐기면서 살게 될 것입니다.

현재있는 세상과 다르지 않지만 더 좋은 세상입니다. 우주 만물이 그대로 존재하는 환경속에서 우리는 살아갈 것입니다. 보고 듣고 만지고 느끼고 즐기며 살 수 있는 실제적인 장소요 현실이 되는 것입니다. 저명한 개혁주의 신학자 A.A. 하츠는 “천국은 우리와 똑 같은 몸을 가지신 그리스도와 함께 살 영원한 고향입니다. 그러므로 그곳의 구조와 환경과 활동은 반드시 인간적인 성격을 띨 수 밖에 없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사람 살기에 좋은 세상과 별 반 크게 다르지 않다는 뜻입니다. 어떤 신학자가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세상을 좋아합니까? 그러면 반드시 천국을 좋아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천국으로 옮겨가면 세상에서 즐기며 좋아했던 것을 마음껏 즐길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비가 온 뒤 공기를 마실 때 그 상쾌한 기분, 감미로운 음악을 들으며 여유롭게 저녁시간을 보낼 때 얼마나 좋습니까? 이런 좋은 것들이 천국에 다 있다는 것입니다. 천국은 그 정도가 아닙니다.

휠씬 더 좋은 것으로 우리가 즐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불만이 많습니다. 특히 이성 간의 사랑과 결혼생활에서 가장 큰 기대를 하는데 또한 가장 불만이 많습니다. 이러한 불만이 천국에서는 싹 사라지고 완전한 행복이 있습니다. 그래서 C.S. 루이스는 ‘세상에서 아름다운 감동적인 체험을 하였을지라도 천국의 기쁨을 조금 맛 본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어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어린 아이가 우는 이유는 젖을 주는 엄마가 있기 때문인 것처럼 우리가 세상에서 불만과 갈증이 있는 이유는 그것을 만족시켜줄 천국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갈증과 불만족을 느끼는 것은 천국을 바라보도록 하심입니다. 천국에 가고 싶은 소원이 생기지 않습니까? 사람들은 천국을 사모하라고 하면 이것을 현실 도피나 염세주의로 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절대 아닙니다. 위엣 것, 더 완전한 것, 영원한 것을 소망하는 것은 긍정이요 전진입니다. 악하고 일시적이며 허무한 세상에 집착하는 것이 도피주의입니다. 하늘 소망으로 충만할 때 오히려 우리 인생을 값지게 살 수 있습니다. C.S. 루이스가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역사를 더듬어 볼 때 이 세상을 위해 가장 많이 일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천국을 많이 생각했던 그리스도인이 아닙니까?” 폭정과 사치가 난무했던 로마를 기독교 국가로 바꾼 사람이 누구입니까? 천국을 사모했던 사도들과 초대 교회 성도들이었습니다. 숨이 막힐 만큼 어두움이 가득한 중세를 진리로 환하게 비추었던 사람이 누구입니까? 사람들에게 삶의 의미와 삶의 의욕을 불러 일으켰던 종교개혁가들이 아닙니까? 150년전 우상숭배와 나쁜 악습가운데 고통하던 이 나라 이 백성들을 바꾼 사람이 누구입니까? 조선을 사랑하여 꽃다운 청춘을 바친 파란눈의 선교사들과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치던 우리 조상 믿음의 선진들이 있었기에 우리가 믿음의 반열에 참여하였고 이 나라가 세계선교를 감당하는 나라요 선진국 반열에 들어간 것이 아닙니까?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데 가장 많은 역할을 한 사람은 역설적이게도 세상을 많이 생각했던 사람이 아니라 천국을 가장 많이 생각했던 사람이라는 것을 역사는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타락하여 더 이상 천국을 생각하지 않을 때 기독교는 세상에서 그 힘을 잃게 됩니다. 천국을 사모하십시오. 그러면 세상도 얻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무엇을 소망하고 무엇을 추구하고 있는가를 점검해보고 하늘에 있는 나의 본향, 나의 집을 소망하고 바라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아름다운 약속의 소망들을 믿음으로 굳게 붙잡음으로 그 소망이 우리의 삶에서 구체화되고 위대한 열매로 맺혀지길 기도합니다. 또한 믿음의 선진들과 같이 어떤 상황과 조건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과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믿음의 길을 걸어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믿음의 계보를 잇는 자 되기를 기도합니다. 천국 소망으로 충만하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