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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1년 민수기 5강 `광야 길을 인도하시는 하나님⁠`(민수기 9:1-10:36)2021-10-18 0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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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기 5강


광야 길을 인도하시는 하나님


말씀 민수기 9:1-10:36
요절 민수기 9:17 구름이 성막에서 떠오르는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곧 행진하였고 구름이 머무는 곳에 이스라엘 자손이 진을 쳤으니


오늘 말씀은 시내산에서 9개월 정도 머물렀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월절 의식을 치루고 광야로 나아가는 내용입니다. 그들이 광야의 길을 가기 전에 유월절 의식을 치룬 이유는 무엇이었을 까요? 그들은 어떻게 광대한 광야에서 길을 찾으며 약속의 땅까지 무사히 갈 수 있습니까?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광야같은 세상에서 승리와 안전과 쉼을 얻는 삶을 사는 비결을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때는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한지 다음 해 첫째달 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시내 광야에서 모세에게 뭐라 말씀하셨습니까? 그 내용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유월절을 정한 기일에 지키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유월절은 언제 지키도록 되어 있습니까? 1월 14일입니다. 1월 14일 해질 때에 지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유월절을 모든 규례대로 잘 지키도록 말씀하셨습니다.

이 명령을 받은 모세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달했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명령을 따라 하나님이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다 지켰습니다.


그런데 시체와 접촉하게 되어 부정하여져 유월절을 지킬 수 없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유월절을 못지키게 되었을 때, “안 지키니 편해서 좋네” 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모세와 아론에게 찾아와 부득히 유월절을 지키지 못하고, 하나님께 헌물도 드리지 못해 너무나 안타까운데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하소연했습니다.


이에 모세는 어떻게 답합니까? “율법대로 해야지 별수 있겠냐” 하지 않고 여호와께서 어떻게 말씀하시는 지 물어보고 답을 주겠노라 말했습니다. 이런 모세에 대해 배울 점이 무엇입니까? 모세는 백성들의 요청에 대해 귀를 기울이고 특히 선한 요청의 경우,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보려 했습니다. 그는 율법의 전수자였지만 율법적이지 않았고 율법의 정신을 찾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어떤 답을 주셨습니까? 그들이 요청한 경우에다가 더하여 여행을 하다가 피치 못하게 참여하지 못한 경우까지 배려하여 한달 후 같은 날에 유월절을 지키도록 방향을 주셨습니다. 즉 2월 14일에 보강유월절을 지키도록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떻게든 이스라엘 자손이 유월절을 지키도록 한 것을 볼 때, 이스라엘 자손이라면 유월절을 반드시 지켜야 하고 유월절을 지키는 것은 은혜요 특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유월절에는 무엇을 하죠? 어린 양을 잡아 그 어린 양을 무교병과 쓴 나물과 함께 먹게 되어 있습니다. 무교병과 쓴 나물은 애굽의 고난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죽임당한 어린 양은 소중하기에 그 고기를 다음날 아침까지 남기지 않고 다 먹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유월절 준수에 대해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피치 못한 일도 아닌 경우에 제때에 유월절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이스라엘 백성에서 끊어질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유월절 의식에서 백성들은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며 하나님께 감사의 헌물도 드립니다. 유월절을 지키지 않는 사람이 이스라엘 자손에서 끊어진다는 말은 무슨 의미입니까? 어떤 사람이 참 이스라엘 사람인가 여부는 혈통보다도 유월절 준수 여부에 있다는 것입니다. 유월절은 타국인들도 지킬 수 있기에, 만약 타국인들이 유월절을 지키고 헌물을 드린다면 그들도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인 반면에 이스라엘 사람이어도 유월절을 지키지 않으면 그는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즉 유월절을 지키는 자가 진정한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유월절 준수가 얼마나 중요합니까? 하나님은 유월절을 영원히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어떤 이단교회는 유월절을 대대적으로 지킵니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유월절은 예수님이 유월절 어린양이 되심으로 성만찬으로 바뀌었습니다. 동물 어린 양 대신에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성만찬이 진정한 유월절이요 유월절의 완성입니다. 성만찬은 예수님이 제정하신 의식으로 사도바울은 우리가 주님이 오시는 그 날까지 성만찬을 행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은 성만찬을 행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이고 성만찬을 행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닙니다. 성만찬은 주님의 살과 피를 의미하는 물리적인 빵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는 것보다 예수님의 죽으심의 의미를 알고 그 은혜를 기념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죽음이 날마다 내게 생명의 양식이 되고, 내가 사는 힘이 되는 사람, 그가 바로 오늘날 유월절을 지키는 사람이요 참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말씀을 묵상함으로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실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행진에 앞서 유월절을 지키게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앞으로 그들은 광야의 길을 걸으며 여러 어려움을 접합니다. 그럴 때 그들이 주님이 베푸신 구원의 은혜를 기억하는 것이 얼마나 힘이 됩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의 치하에서 신음하며 부르짖을 때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애굽에서 구원해 내셨습니다. 그들을 살리기 위해 많은 어린 양들이 피 흘려 죽게 하셨습니다. 그 어린 양의 피가 문설주과 인방에 칠해졌던 구원의 밤을 기억하면 이스라엘은 자신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자신들을 위해 선한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께서 앞으로도 변함없이 그들을 인도하시고 승리주실 것을 믿게 됩니다. 신약의 성도들은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님이 자신들을 위해 피흘려 죽으신 것을 기억할 때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므로 다가오는 모든 고난을 이길 수 있습니다. 빌립보서 1:6절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로마서 8:32절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라는 말씀이 바로 구원의 은혜를 기억하는 것이 어떤 힘을 주는 지 알려주는 말씀들입니다.

15절을 보십시오. 홍해 사건때부터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이스라엘과 함께 했습니다. 그런데 성막이 지어진 다음에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그들가운데 있는 성막 위에 임재했습니다. 이 현상은 그들이 약속의 땅에 이르기까지 항상 그러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과 함께 하심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요절 말씀인 17절을 보십시오. 구름이 성막에서 떠오른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곧 행진하였고 구름이 머무는 곳에 이스라엘 자손이 진을 쳤으니. 이 말씀은 이스라엘 자손이 광야행진을  어떻게 했는 지 가르쳐 줍니다. 구름이 성막에서 떠오르면 그들은 행진했고 구름이 머물면 행진을 멈추고 그곳에 진을 쳤습니다. 그러니까 구름이 이스라엘 백성의 행진에 대한 여호와의 명령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행진했고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진을 쳤습니다. 19-23절을 보면 좀 더 자세히 설명되어 있습니다. 구름이 성막위에 머무는 날이 오랠 때 예컨대 1년동안 구름이 움직이지 않으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1년 동안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구름이 성막위에 머무는 날이 적을 때에는 반대로 했습니다. 예컨대, 저녁부터 아침까지 12시간 구름이 머물고 아침에 구름이 떠오르면 반나절 밖에 쉬지 못했을지라도 그들은 일어났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렇게 광야를 행진하게 하신 하나님을 통해 우리가 무엇을 배울 있습니까?


첫째로,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태초에 아담과 하와는 거룩한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지만 사탄의 꼬임을 받아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을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합니다. 종교란에 기독교인 혹은 크리스천이라고 적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살지 않고 자기 맘대로 삽니다. 무엇을 결정할 때, 시류를 따르고, 자기욕심을 따릅니다. 하나님의 뜻을 절대로 묻지 않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하루를 시작할 때도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고 그냥 하루를 시작합니다. 이렇게 산다면 그들은 명목상 하나님의 백성일뿐 실제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닙니다.  

둘째로, 빠르든 느리든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최고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그 높으신 뜻에 따라 그 백성들의 가고 서는 것, 속도를 결정하십니다. 때로는 전광석화같이 빠르게 진행하시고 때로는 황소걸음이나 거북이 걸음으로 인도하시고, 때로는 아예 멈춰 서십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으십니다. 이때 그 백성들은 약속의 땅을 향해 빨리 진도가 나가지 않으므로 답답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광야는 360도가 길이면서 또한 멸망일 수 있습니다. 앞에 어떤 적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빨리 가고 싶다고 해서 빨리 갈 수도 없습니다. 광야의 상황과 길을 잘 알고 계시는 분은 광야를 다 내려다 보시는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걸음을 온전히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베스트임을 믿고 그 인도하심을 따라가야 합니다. 우리가 볼 때는 답답해 보여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베스트입니다. 사 55:8,9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는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한국 사람들은 빨리 빨리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빨리 하는 것이 잘 하는 것이요 성공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빨리 위로 올라가고, 빨리 앞으로 나아가려 하고 그것이 안되면 답답함과 낙심가운데 거합니다. 그러나 ‘빨리’ 가 진리는 아닙니다. 어떤 아버지와 아들이 한 도시를 향해 가고 있었는데 아버지는 산천을 다 구경하고 친척들을 만나며 여유있게 시간을 보내며 가려 했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급한 아들은 답답해 하며 아버지에게 불평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그렇게 느리게 가는 바람에 그들은 가려던 히로시마 도시가 원자폭탄에 맞아 멸망하는 상황에서 목숨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요셉과 모세와 다윗은 하나님의 훈련을 오래 받고 영광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백성들의 요구에 따라 급하게 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빨리 왕이 된 것이 독이 되었습니다. 결국 내면과 믿음이 안된 사울은 사람들의 평판과 자리에 집착하게 되었고 시기심의 종이 되었습니다. 이런 그는 악령에 시달리다 불행하고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천천히 가시면서 성도들에게 이루고자 하시는 뜻이 있습니다. 코로나 사태로 전세계가 멈추어 선듯하고 우리는 빨리 코로나가 끝나지 않아 답답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코로나 사태를 통해 전 인류에게 메시지를 주셨고 우리가 여러 가지 면에서 영적 유익을 얻도록 하셨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양들이나 자녀들을 섬기며 달팽이처럼 천천히 움직이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이 KTX정도는 아니지만 최소한 황소걸음 혹은 기준을 낮추어 거북이 정도의 걸음으로 양들이나 자녀들을 인도하셔야 보람을 가지고 섬길 수 있지 않는 가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아예 움직이시지 않고 멈추어 서 계신 듯 보였습니다. 이런 하나님은 제게 달팽이 같으신 하나님 입니다. 달팽이처럼 말입니다. 달팽이가 얼마나 느리게 가는 지 아십니까? 어떤 식물은 달팽이보다 빠른 속도로 성장한다고 합니다. 달팽이가 성대가는 데 21시간이 걸립니다.


하여간 하나님은 제가 달팽이처럼 움직이시는 하나님을 영접하게 하심으로 많은 것을 배우게 하고 계십니다. 제가 사람을 존재자체로 사랑하며 멀리보고 돕는 법을 배우고 있어 감사합니다. 


목요한 목자님과 일대일 하면서 목요한 목자님은 자신의 집에서 10분 거리인 대학에 가는 데 4년이 걸렸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분을 통해서 다른 분들을 소망가운데 도울 수 있는 힘을 얻었습니다. 또 저는 메시지를 준비하며 우연히 대기만성의 아이콘 권율장군에 대해 알게 되었고 돕는 사람들에 대해 소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권율장군은 영의정의 아들로 태어났는 데, 어릴 때 비범하여 아버지에게 큰 기대를 주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라면서 공부보다 여행과 지리연구에 관심이 있어 이곳저곳 돌아다니기만 하였습니다. 그러자 주위 사람들이 답답해 하며 그에게 나이가 40이 되었는데 아직도 그렇게 한량처럼 지내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그는 강태공은 나이 80이 되어 비로소 자신을 펼쳤거든 자신의 나이는 그 반밖에 안되는 데 무엇이 그리 조급하냐고 반문했습니다. 이런 그는 그에게 소망을 둔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내가 너를 낳았구나” 란 말을 남기자 충격을 받고 금강산에 들어가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46세에 병과에 15등 정도로 합격하여 종9품 벼슬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천운이 따라 다녔습니다. 전라도 광주 목사를 하다가 기회가 되어 임진왜란 3대 대첩중 하나인 행주대첩을 승리로 이끌었고 56세에 도원수가 되었습니다. 그가 이렇게 된 배경에는 여행과 지리연구도 도움이 많이 되었습니다.


권율장군은 믿음의 사람은 아니지만 우리가 사람을 키울 때 그가 천천히 변화되더라도 인내하면서 키워야 하겠다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뜻대로 잘 자라지 않는 사람들은 우리의 권율로 여기고 인내심있게 키워나가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KTX처럼 빠르게 축복의 자리로 인도해주시는 하나님만 좋아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달팽이처럼 인도하시더라도 그 가운데 깊은 은혜와 사랑과 축복이 있음을 알고 감사함으로 그 인도하심을 따라가며, 섬기는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10:1-10절은 하나님께서 은 나팔 둘을 만들어 신호체계를 세우신 내용입니다. 나팔 두 개를 동시에 불면 온 회중이 회막 문앞에 모이고 하나만 불면 지휘관들만 모입니다. 나팔을 크게 불면 동쪽 진영들이 행진하고 두 번째로 크게 불면 남쪽 진영들이 행진합니다. 이렇게 행진을 시작할 때는 나팔 소리를 크게 붑니다. 반면에 회중을 모을 때는 큰 소리를 내어 불지 않습니다. 그것은 회중을 놀라게 해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크게 불때는 행진을 명할 때, 그리고 전쟁을 하러 출정할 때입니다. 이럴 때는 분명하고 힘차게 불러야 사람들이 담대히 앞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공동체에 방향을 주는 나팔은 제사장들만이 불게 했습니다. 아무나 불게 되면 큰 혼란이 오기 때문입니다.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 때 분명한 메시지가 전달되도록 정확하게 불어야 했습니다. 오늘날 제사장의 나팔소리는 교회의 영적 지도자, 메신저의 말씀선포입니다. 말씀은 정확하게 선포되어야 합니다. 말씀을 선포하는 자가 자기도 무슨 소리인지 모르게 횡설수설해서는 안되고 분명한 성경적 사상을 찾아내어 포인트있게 그것을 전달해야 합니다.


나팔 부는 것은 이렇게 회중들에게만 메시지를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도 메시지를 주었습니다. 전쟁을 하러 나갈 때는 나팔 소리를 듣고 여호와께서 그들을 기억하시고 함께 하사 승리주시기를 요청하는 의미가 있었습니다. 또한 절기 때 부는 나팔에는 “하나님께 헌물을 드리니 하나님께서 봐주십시오” 라는 의미가 담겨 있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사람들뿐 아니라 하나님과 커뮤니케이션도 잘해야 함을 보여줍니다. 제사장들은 이렇게 회중에게 뿐 아니라 하나님께 기도의 나팔을 적기에 불어 하나님의 개입과 임재를 가져올 책임이 있었습니다.


11-28절은 이스라엘이 실제 광야로 행진한 것을 적고 있습니다. 그들은 출애굽 2년 2월 20일에 시내산에서 출발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동, 남, 서, 북진 순으로 1-4대를 이루어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1-2대 사이에는 게르손, 므라리 자손이 성막을 메고 행진했고 3-4대 사이에는 고핫자손들이 중요 성물들을 메고 행진했습니다. 유다지파가 전체 선두에 섰고 르우벤과 에브라임과 단지파가 진영의 선두에 섰습니다. 하지만 33절을 볼 때 최선두에는 법궤가 있었고 행진 중심에는 성막기물들이 위치했으므로 이 행진은 여호와의 군대의 행진이고 여호와가 이 행진의 대장이시니 이 행진은 가장 강력하고 든든한 행진이었습니다.


29-32절은 모세가 처남 호밥에게 동행을 요청한 내용입니다. 호밥은 광야에서 잔뼈가 굵은 광야전문가였습니다. 모세는 그에게 하나님이 약속의 땅에서 내리실 복을 소개하며 그 복을 함께 누리자며 동행을 권고했습니다. 본래 호밥은 그런 모험을 하기보다는 고향과 친족에게 가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모세가 그를 이스라엘의 눈이라고 하면서 꼭 필요한 사람이니 제발 같이 가자며 아쉬운 소리를 하며 설득하자 마음을 바꾸어 동행자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이렇게 얻을려면 모세처럼 그 대상을 높이고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호밥은 이스라엘과 동행하며 이스라엘의 눈이 되어 주었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이스라엘의 눈은 무엇이었습니까? 33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여호와의 산에서 떠나 삼일 길을 갈 때에 여호와의 언약궤가 그 삼일 길에 앞서 가며 그들의 쉴 곳을 찾았고. 이 말씀을 보면 여호와의 언약궤가 진정한 이스라엘의 눈이었습니다. 언약궤는 이스라엘이 다음 진칠 곳을 정확히 찾아주었습니다. 이를 보면 결국 하나님의 언약궤로 상징하는 하나님의 임재가 이스라엘의 눈, 오늘날로 하면 네비게이션이었습니다. 옛날에는 길을 찾을 때 지도를 보고 찾았습니다. 그러나 네비게이션이 발명된 후에는 네비게이션만 있으면 어디를 가도 걱정이 없게 되었습니다. 특히 요새는 실시간 네비게이션이 생겨서 길이 막히는 곳을 피해 가야할 곳을 더 잘 제시해 줍니다.


사람이 만든 네비게이션은 종종 실수를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십니다. 때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굽어 돌고, 거꾸로 가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불안하고 걱정이 됩니다. 실패하고 망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가장 좋은 길, 빠른 길로 인도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갈 때 사람들이 보기에는 어리석어 보이지만 그것이 참으로 기가막힌 인도하심이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오 놀라운 구세주 예수 내 주 참 능력의 주시로다 큰 바위 및 안전한 그 곳으로 내 영혼을 숨기시네” 우리가 때마다 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임재와 인도하심을 믿고 그 인도하심을 구하여 광야같은 인생 길에서 베스트의 길을 걸어가기를 기도합니다. 구체적으로 날마다 말씀과 성령의 인도를 받기를 기도합니다.


35,36절을 보면 모세는 궤가 떠날 때, 멈출 때 하나님의 역사와 임재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모세는 때마다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기도는 변함없이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는 비결입니다. 우리가 모세와 같이 때마다 기도하는 가운데 길을 찾고 승리하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입니다. 광야같은 인생 길을 하나님이 앞장 서서 인도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베스트임을 믿고 불평하거나 낙심하지 않고 감사하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잘 따라 가기를 기도합니다. 완전한 네비게이션이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날마다 구하고 따라가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감탄하는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