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수 감사절 특강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아가며 말씀 시편 95:1-11 요절 시편 95:2 우리가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아가며 시를 지어
즐거이 그를 노래하자 유대 3대 절기가 유월절, 맥추절, 초막(장막)절인데 모두
감사절입니다. 유월절은 구원의 은혜를 감사하는 절기이고, 맥추절과
초막절은 추수를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맥추절은 봄 추수 감사, 초막절은
가을추수 감사라 할 수 있습니다. 초막절이라고 할 때는 광야생활을 기억하며 감사하는 의미, 수장절이라고 하면 곡식추수와 저장을 감사하는 의미로 붙여진 이름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이 초막절에 불리웠던 감사의 노래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감사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배우고자 합니다. 또한 어떻게 하면 감사가 넘치는 삶을
살 수 있는 지 그 비결을 배우고자 합니다. 우리가 감사의 사람이 되어 어떤 순간에도 감사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우리 자신도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의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외치자” 시인은 회중들을 장막절의 감사예배
자리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회중을 향해 여호와께 노래하며, 즐거이
외치자고 말했습니다. 침묵하고 다운되어 있지 말고 즐겁게 외치라는 권면입니다. 여기서 외친다는 말은 큰 함성을 발하거나 환호하는 것을 말합니다. 전쟁을
하는 군대는 함성을 자주 질러 무기력과 두려움을 날려 버리고 파이팅 스피릿으로 무장합니다. 시인은 이렇게
우리가 감사로 무장하여 삶에서 파이팅하고 승리하기를 원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향해 ‘구원의 반석’이라
합니다. 시편에는 반석이란 말이 17번 나옵니다. 반석은 평평한 바위나 커다란 바위를 뜻합니다. 반석위에 서 있으면
흔들림이 없습니다. 이런 면에서 반석은 우리가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게 우리의 마음을 붙들어주시는
하나님을 잘 표현한 것입니다. 또한 반석은 커다란 바위로 고대의 모든 싸움에서 반석뒤에 숨으면 안전했습니다. 어떤 화살이나 어떤 창도 반석뒤에 숨은 자에게 해를 끼칠 수 없었습니다. 그러면에서
반석은 그를 의지하는 자의 방패요 피난처가 되시는 하나님을 잘 표현하는 말입니다. 2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아가며 시를 지어 즐거이 그를 노래하자” 시인은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 감사함으로
나아가자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왜 우리가 감사함으로 하나님앞에 나아가야 합니까? 하나님이 우리가 감사하는 것을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감사하면
우리도 행복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감사하지도 않는데
감사하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고 그런 감사를 하나님도 기쁘게 받으시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진정한 감사를 드릴 비결은 무엇입니까? 첫째로, 특별한 감사제목을 찾아보는 것입니다. 그냥 가만이 있어도 감사와 감격이 되는 제목들이 있습니다. 그것을
생각하면 하나님께 자동으로 감사하며 우리 마음도 훈훈해집니다. 둘째로, 일상에 대해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특별한 것만 감사할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것을 감사하면 감사제목이 늘어납니다.
대런 목자님은 혀암으로 현재 말도 하기 어렵고 먹지도 못합니다. 어떤 분은 병상에 누워
마음껏 호흡하지 못하고 산소호흡기를 차고 있습니다. 우리는 코로나 상황을 통해 일상이 얼마나 축복이었는
지를 새삼 알게 되었습니다. 정부와 민간이 모두 일상의 회복을 위해 그렇게 애쓰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면에서 우리는 지금 누리고 있는 또 다른 일상에 대해 당연하게 여기지 않고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셋째로, 깊이 생각하여 감사제목을 찾는 것입니다. 깊이 생각하면 불평제목이었던 것도 감사제목으로 바뀝니다. 시인은
자신이 시인이어서인지 감사의 시를 지어 감사하자고 제안했습니다. 시는 자신의 느낌, 생각이나 사상을 함축적이며 운율적인 언어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시란
즉흥적으로 나오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깊은 묵상을 통해 한편의 정갈하고 함축적인 시가 탄생합니다. 그러니까
제대로 된 시를 쓸려면 생각을 깊이 해야 합니다. 마음의 우물에 생각의 두레박을 깊이 내려, 맑고 깨끗한 깨달음들을 길러내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 의외로 피상적으로는 불평제목이었던 것이 감사제목으로 바뀌는데 그중에 대표적인 것이 하나님이 내게
허락하지 않는 것에 대한 생각입니다. 대개 내가 원하나 하나님이 주시지 않는 것은 커다란 불평제목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내게 주시지 않는 것이 다 나쁜 것인가요?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를 허락지 않으셨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피상적으로 생각할 때는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는 것은 불평과 원망의 이유가 되었습니다. 사탄의 유혹을 받자 그런 생각이 굳어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많은 것들을 허락하시면서 유독 선악과를 허락하지 않은 것은 그들이 미워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잘되는 것이 싫어서도 아니었습니다. 왜 선악과를 따먹지 못하게
하신 것입니까? 금지된 것, 허락되지 않는 것에 하나님의
더 깊은 사랑이 담겨져 있었습니다. 그것은 영적 질서를 세우고 그들이 하나님을 경외하게 함이었습니다. 삶의 좌표를 세워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계속 행복을 누리도록 함이었습니다. 광야를 행진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허락되지 않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때로는
물이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편한 길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때로는
자극적이고 다양한 맛을 내는 고기가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그들이 믿음을 배우고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려는 하나님의 사랑이 담겨져 있었습니다. 그러니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원망과
불평을 쏟아내는 자리는 사실은 감사와 찬양을 드려야 할 포인트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지 않는 것
때문에 마음이 슬프고 신앙생활에 회의를 하고 있습니까? 그러나 사실은 바로 그 포인트가 가장 큰 감사제목일
가능성이 큽니다. 이상을 보면 우리가 감사와 찬양을 드리기 위해서는 첫째로, 특별하게
주신 것과 일상에 대해 헤아려 보고 감사하며 둘째로, 하나님이 주시지 않는 것들에 대해 묵상하며 생각을
바로 잡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주신 것 못지 않게 주시지 않는 것에 더 큰 하나님의 사랑이 깃들어
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주신 것에도 감사하고 주시지 않는 것에는 더 큰 감사를 드리게 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모든 일에 감사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불만가득, 침울하고 우울하게 하나님을 섬기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스펄젼 목사님이 촛불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면 전기불을 주시고 전기불을 주신 것에 감사하면
달빛을 주시고 달빛을 주신 것에 감사하면 태양빛을 주시고 태양빛을 주신 것에 감사하면 천국의 빛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 반대는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태양빛을 주시는 데도 감사하지 않으면
우리의 삶은 달빛으로 떨어지고, 달빛을 주신 것에 감사하지 않으면 우리의 삶은 전기불, 촛불, 호롱불로 떨어지고 나중에는 암흑이요 지옥의 어둠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사탄은 우리가 침울하고 우울하게 살다가 지옥의 어둠속에 떨어지게 하려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적극적으로 감사제목을 찾아야 하겠습니다. 주신 것도
감사, 주시지 않는 것도 더 감사, 이래도 감사하고 저래도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감사송을 아십니까? 어떤 접속사에도 감사를 붙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감사, 그래도 감사, 그러나
감사, 그러므로 감사, 그렇지만 감사, 그럼에도 감사, 그러니까 감사, 그리아니하실지라도
감사,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 골로새서 2:7절을 보면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매일 감사, 쉬지말고 감사, 범사에 감사, 아주
그냥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적극적으로 감사할 때 우리 삶에서 모든 어둠이 사라집니다. 마귀의 시험도 역사할 여지가 없어집니다. 우리가 항상 감사할 때
우리는 감사의 빛을 밝히는 태양같은 사람들이 됩니다. 3-5절을 보십시오. “여호와는
크신 하나님이시오 모든 신들보다 크신 왕이시기 때문이로다. 땅의 깊은 곳이 그의 손 안에 있으며 산들의
높은 곳도 그의 것이로다 바다도 그의 것이라 그가 만드셨고 육지도 그의 손이 지으셨도다.” 우리의 감사제목은
여호와 하나님이 크신 하나님이요 세계의 통치자란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계는 하나님의 것이 아닌
것이 없으며 하나님의 통치가 미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가장 깊은 곳도, 가장 높은 곳도, 바다도 육지도 모두 하나님의 것이며 하나님의 섭리와
그 통치가 미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믿을 때 우리는 감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감사치 못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가 가진 것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고 우리는 그의 자녀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사람입니까?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입니다(고후
6:10). 과거 안요셉 선교사님은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없는 집안의 장남으로 큰 부담감을 가지고 서울에 상경했습니다. 그리고 같은 과에 다니는 유수한 집안의 동료들과 비교할 때 아무것도 내세울 것 없는 자신으로 초라하고 위축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분이 창조주 하나님을 자신의 아버지로 만나게 되었을 때 감사찬송이 넘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세계를 그 손안에 두신 하나님을 의지하여 세계를 섬기는 외교관 목자의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저는 자립적으로 개척역사를 섬기려고 할 때 걱정이 많습니다. 물질문제에
대해 걱정을 많이 했는 지 꿈에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나타나셔 저를 은행으로 인도하여 저를 위해 저축해 놓은 돈이 얼마인데 그것을 찾아 쓰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꿈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저에게 지난주 국제온라인포럼에서 제게 물질이 필요할 때 때마다 공급해 주셨던 하나님을 기억하게 하셨습니다. 특히 부자이웃을 통해 백지수표를 주시고 전세금문제를 해결해 주셨던 하나님을 기억하게 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이번주 전국재정부 대회에서 제가 헌금생활을 통해 체험한 하나님을 간증하도록 하심으로 제가 물질의
주관자가 하나님이심을 다시 기억하도록 하십니다. 온 세상의 것이 다 그의 것인 하나님께서 포천UBF를 축복하시고 필요한 것을 풍성하게 채워주셔 경기북부권의 대학생들을 넘어 장차 북한의 대학생들을 먹일만한
풍성한 센터가 되게 하시기를 믿고 기도합니다.
6절을 보십시오.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이번에 시인은 우리를 경배자의 자리로
초청합니다. 감사의 삶을 사는 데 있어 경배신앙이 왜 중요합니까? 경배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의 삶속에서 하나님의 높으신 주권을 인정하고 그것을 따르고 복종하는 삶을 삽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최고로 여깁니다(사 55:8,9).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이 자신을 어떻게 인도하든지 그것을 받아들이고 감사합니다. 이런 주권신앙, 경배신앙을 가진 분이 바로 욥이었습니다. 욥은 칭송받던 의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그가 그 모든 것을 하루아침에 다 잃었습니다. 재산과
자녀들 10명을 잃었습니다. 명예는 땅에 떨어지고 몸은 병들었습니다. 이럴 때 그의 아내가 그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이때 욥은 “그대의
말이 한 어리석은 여자의 말과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라고 하며 입술로 하나님을 원망하는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욥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비결은 그가 하나님을 지극히 높이고 자신은 그 앞에 무릎을 꿇고 경배하는 경배신앙의 소유자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완전한 경배와 복종의 자세는 욥 1:21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이요
취하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이렇게 우리가 경배신앙을 가질 때 언제나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특히 자신을 낮추시고 자신에게 아무것도 주시지 않고 심지어 있던 것마저도 빼앗아가실 지라도 찬송하고 감사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께 무릎꿇은 경배신앙이 아니라 하나님을 자신앞에 무릎을 꿇리고 자신의 수하에 두고 하나님을
부리는 신앙도 있습니다. 이런 신앙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이 종처럼 자신이 원하는 것을 다 해주어야만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합니다. 하나라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안해주면 하나님께 쏘리한 마음을 품습니다. 경배신앙이 감사하는 생활의 비결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수하에 두고
부리는 신앙이 아니라 정말 하나님앞에 굽혀 경배하는 신앙을 가짐으로 어떤 일에도 감사하는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시인은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7a에서 말씀합니다. 7a를 읽겠습니다. “그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오 우리는 그가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의 손이 돌보시는 양이기 때문이라” 하나님은 가장 높으신 분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그분의 양입니다. 다시말하면 하나님이 우리의 목자이십니다. 목자는 양을 어떻게 돌봅니까? 인격적으로 사랑하며 돌봅니다. 특히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릴 정도로 양들을 사랑합니다. 목자는 양들 앞서 인도하는 데 그것은 양들에게 본을 보이며 자신이 먼저
위험한 상황에 나서기 위함입니다. 목자는 지팡이와 막대기로 양들을 위협하는 것들을 물리칩니다. 목자가 양들을 가장 좋은 곳으로 인도한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는 사실입니다.
이 시의 저자인 다윗도 목동출신으로 유명한 시편 23편에서 하나님이
자신의 목자이시기에 자신의 삶에는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했습니다. 공동번역에는 “아쉬움이 없어라~” 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을 목자로 둔 사람처럼 아쉬울 게 없고 부러울 게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처럼 신앙생활이란 하나님의 구체적이고 인격적인 돌보심을 받는 생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나의 인격적인 목자이며 나의 삶을 구체적으로 인도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을 때 우리는 어떤 상황가운데도 감사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현재의 상황을 밝게 해석할 수 있는 힘을 가집니다. 우리가 현재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해 아쉬워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결핍과 환란을 통해 나의 죽은
영혼을 소생시키고 계실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나를 택하신 그날부터 당신께 부르실 그날까지
나를 버리지 않고 항상 함께 하시며 인도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믿기에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의 노래를 즐거이 부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저는 이번 국제온라인포럼 발표를 하며 하나님이 나의 목자가 되사 나의 삶을 인격적으로 인도해 오셨음을 다시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태어날 때 저는 위로 두명의 형들이 죽었기에 염려가운데 태어났습니다. 이때 동네에서 유일하게 교회에 다니시던 고모님이 저를 위해 죽지 않도록 기도해주시고, 아궁이의 불을 지피며 제가 불타는 주의 종이 되도록 기도해주셨습니다. 고모님이
유아인 저를 업고 교회에 가서 주일학교 학생들에게 말씀을 가르치는 동안 교회 장의자에 뉘어 놓았지만 저는 하나님도 모른 체, 초등학교 4학년까지 살았습니다. 그리고
고모님은 시집가고 우리 동네에는 아무도 믿는 자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초등학교 4학년때 저는 처음으로 기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힘세고 못된 애들로
인해 하늘을 향해 알지 못하던 하나님을 찾으며 이 세상에 강하고 선하신 재판장같은 분이 있어야 하는 가 아닌가 하며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저의 기도를 받으시고 다음 주에 저를 어린이 성경학교에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저는 하나님을 만나고 그 힘으로 학교생활을 담대하게 감당하게 되었습니다. 대학에 들어올 때는 정말 진리와 사명이 있는 곳으로 인도함받기를 원했습니다.
고3이지만 틈틈이 성경을 창세기부터 열왕기까지 읽었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가슴에 품고 성대에 처음 온 날 하나님은 두 천사와 같은 선배님들을 제게 보내어주셨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대학생성경읽기선교회에서 나왔다고 하면서 성경을 공부해 보지 않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가슴에서 성경을 꺼내 제가 성경공부를 하기원한다고 하니 그날부터 저는 성경공부를 하게 되었고 결국
진리와 사명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저는 대학생성경읽기선교회의 목자가 되었는데 이것은 어쩌다가
그냥 된 일이 아닙니다. 저의 목자이신 하나님이 저를 의의 길로 인도하신 것이었습니다. 제가 신앙생활할 때 힘든 적들이 몇 번 있었습니다. 너무 힘들어 이
모임을 떠나야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제가 신앙서적을 읽으면 꼭 제게 합당한
말씀을 주셔서 저의 영혼을 소생시키셨습니다. 그러면 어느새 제 영혼은 어떤 고난과 어려움도 감당할 내면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저는 성대 온 날부터 오늘날까지 36년간
가장 의미있고 가치있고 보람있는 진리의 전파자요 목자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이 하나님은 저를 오래 사용하셨으니 이제 저와 굿바이하실까요? 토사구팽하실까요? 저의 삶이 마치는 날까지 저와 동행하십니다. 하나님은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고자 했으나 마게도냐 사람의 환상을 통해 바울을 새로운 사명지로 부르신 것처럼 저를 포천으로 부르시고 새 일을 행하고자 하십니다. 그동안 저를 종로에서 사용하신 하나님께서 포천에서도 사용하시고 통일한국을 위한 전진기지를 세우는 데 귀하게
쓰실 줄 믿습니다. 우리 모두가 자신을 인격적으로 택하시고 인도하고 계신 목자이신 하나님을 깊이 신뢰함으로
언제나, 어떤 경우에나 항상 감사와 찬양이 넘치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7b-11절은 광야의 길을 갈 때 하나님께 원망 불평하다가 결국 하나님께
쓰임받지 못했던 출애굽 1세대 처럼 되지 말라는 경고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충분히 많이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또한 하나님이 안계시는 것처럼 보이는
상황들도 분명 허락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들은 하나님이 그 백성들에게 믿음의 인내와 감사를 배우도록
허락하신 삶의 지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사탄에게 미혹당했습니다.
미혹이란 사기군에 속는 것인데요 감사를 배울 가장 좋은 포인트에서 원망과 불평을 쏟는 것입니다. 사탄은
때마다 우리를 속여 감사의 자리를 원망의 자리로 혼동하게 합니다. 미혹당하면 어떻게 됩니까? 염전노예로 끌려가거나 장기적출을 당합니다. 감사를 배우지 못한 출애굽 1세대 이스라엘 백성은 결국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감사를
배우지 못한 사람은 결국 믿음과 내면이 성장하지 못함으로 하나님의 역사에 쓰임받을 수 없습니다. 결론입니다. 하나님은 감사를 기뻐하십니다. 감사가 우리를 행복하게 합니다. 쓰임받게 합니다. 우리가 피부에 와닿는 감사제목과 일상의 감사제목들을 잘 찾아 감사하며 특별히 하나님이 주시지 않는 것들에게
대해 더 크고 더 깊은 감사를 드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나의 목자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범사에
깊이 감사하는 감사의 사람들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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