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신년 제 3 강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자
말씀 / 요한일서 3:1-24
요절 / 요한일서 3:18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신년3강으로 기독교 최고 덕목인 사랑에 대해 배우게 되어 감사합니다. 요한일서의 저자는 사도요한입니다. 교회 역사를 보면 그는 말년에 몸이 매우 병약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설교할 때마다 "서로 사랑하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말했다고 합니다. 마더 배리 선교사님도 수년전에 어디를 가시든 요한복음13장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반복하여 전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선교사님, 그 말씀 이제 다 아는데 언제까지 전하려고 하세요?" 여쭈니, "여러분이 서로 사랑할 때까지입니다"라고 하신 것이 기억이 납니다. 우리는 젊기 때문에 무슨 일을 많이 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자 합니다. 그러나 실상 우리 주님이 가장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서로를 사랑하는 것이라 믿습니다. 그 사랑에 기초하여 열심히 일을 해야 되겠지요. 본문에서 사도한은 우리가 하나님의 참 사랑을 실천하도록 권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배우고 올 한해 사랑의 목자들로 성장하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 사도요한은 1절을 감탄사로 시작합니다. "보라!"(KJV 'Behold') 그는 우리 신자들이 어떤 사람들인가를 말하려다가 감격에 겨워 '보라!'하며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도대체 어떤 자들이기에 그렇습니까? 우리가 누구죠?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우리 신자들도 겉으로 보면 세상 사람들과 별로 다를 바가 없습니다. 믿음으로 산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허물과 죄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지 않는 자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the children of God)라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자녀'라는 말도 원어를 보면 '휘오스'(양자)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 '테크나'(친자)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법적으로는 하나님께 입양되었지만, 그 관계성에 있어서는 하나님이 친히 나으신 친자녀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참으로 놀라운 사실입니다. 죄로 인해 심히 타락한 죄인들이, 하나님의 전적인 보호와 사랑을 받고, 하나님의 모든 것을 상속받는 친자녀가 되었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도 그 말을 하고서는 믿어지지 않는지 다시 한 번 "우리가 그러하도다!"(That is what we are!)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이러한 놀라운 신분의 소유자인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까? 1절 상반절을 다시 한 번 보십시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놀라운 사랑을 베푸셨기 때문입니다. 베푸셨다는 것을 영어로 'lavished'로 표현하고 있는데, 사랑 폭탄을 마구 쏟아 부으신 것을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상사병이 걸린 분과 같습니다. 사랑에 눈이 멀으셔서, 그저 우리를 구원하겠다는 한 가지 생각 밖에 없으셨습니다.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 죽게까지 하시면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이 사랑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이 사랑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또한 하나님의 이러한 사랑의 대상이 된 우리들은 얼마나 존귀한 자들입니까? 영국 여왕의 아들인 찰스 왕세자는 여왕의 아들이라는 것 하나 때문에 어디 가든지 사랑과 존경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황태자, 황공주인 우리는 얼마나 더 존경과 사랑을 받아 마땅합니까? 그런데 세상은 우리를 알아주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1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 세상이 하나님이 얼마나 존귀한 분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 분의 자녀를 존귀한 자들로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자들이 세상에서 무시 받고 심지어 미움받을 때, 그런 것에 괘념하지 말아야 합니다. 왕 중의 왕되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그들을 도리어 불쌍히 여겨야 하겠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 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실제 삶에서 자녀가 아니었을 때나 자녀가 되었을 때나 별 차이가 없게 보입니다. 이는 영적으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아직 육체를 입고 이 세상 가운데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장차 자녀로서의 완전한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영광!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때 우리 신자들은 그와 같은 영광스런 모습으로 변화됩니다(고전 15:49-52). 사도 요한은 변화산에서 예수님의 참 모습을 보았습니다. 초라한 옷을 입고 계셨던 예수님은 세상의 그 어떤 사람도 그와 같이 희게 할 수 없는 영광스런 모습으로 변형되셨습니다. 주님의 얼굴은 해와 같이 빛났습니다. 우리는 장차 주님과 같이 변화되어 그 영광스러운 모습을 얼굴과 얼굴을 맞대어 볼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진정한 소망입니다.
그러면 이런 소망을 가진 자는 어떤 삶을 살게 됩니까? 3절을 보십시오.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장차 영광스런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한 복락을 누리는 이 소망을 갖고 사는 자는, 주님을 만날 때를 고대하며 자기를 준비합니다. 최근에 한 형제님이 결혼 소개식에 참석했습니다. 그는 평소에는 수염도 덥수룩하고, 운동복 바지에, 이불 같은 점퍼를 입고, 산적처럼 다니던 형제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신부될 자매님을 만나러 간다니 깨끗이 이발을 하고, 면도도 하고, 멋진 수트를 입고 꽃미남이 되어 나타났습니다. 신부를 만날 소망 가운데 자신을 준비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신자들은 마치 신랑을 위해 자기 몸을 단장하는 신부처럼 자기를 깨끗하게 합니다. 날마다 더욱 성결하고 거룩한 삶을 살아갑니다.
4절을 보십시오.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죄를 짓는다', '불법을 행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이는 하나님의 계명의 말씀을 어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의 말씀을 깨뜨리며 황야의 무법자처럼 살아갑니다. 그들은 나름대로의 법을 지킵니다. 나름대로의 법과 세상의 가치관을 따라 살아갑니다. 그러다가 결국 하나님의 계명을 깨뜨리며 불법을 행하고 마는 것입니다. 1세기 당시 그런 사람들 중에 영지주의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신령한 지식을 얻은 자들이요,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미 영혼의 구원을 얻었으니 육체적으로는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을 때, 불법을 행하며 살다가 영원한 심판을 받을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대속을 이루셨습니다.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를 멀리 옮기사(시103:12) 우리의 죄를 없이 하셨습니다.
이로 인해 우리 신자들의 죄와의 관계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6절을 보십시오.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는 믿는 신자들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신자는 죄를 범하지 않는다는 이 말씀은 좀 이상합니다. '믿는 자는 죄를 짓지 않는다?' 우리는 실제로 매일 죄를 짓지 않나요? 물론 신자들도 날마다 죄를 짓습니다. 여기 6절에서 말하는 '범죄하지 않는다'는 현재형 동사로 사용하고 있는데, 그 의미는 우리가 '계속하여' 범죄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NIV 에서는 'keeps on sinning(계속하여 죄를 짓는다)'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즉, 신자도 연약하여 시험에 들기도 하고 죄를 짓지만, 상습적으로, 반복하여 죄를 짓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죄 가운데 머물러 있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는 마치 독이 든 음식을 먹은 사람이 토해 내지 않으면 괴롭듯이 죄를 토해내지 않으면 견딜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범죄하고도 아무런 양심의 가책이나 고통을 느끼지 않고 계속하여 죄를 짓는다면, 그는 예수님을 보지도 못하였고 알지도 못하는 자입니다. 이 사실이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우리 신자는 죄를 지으면 바로 양심의 고통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때 즉시 하나님께 나아가 회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즉시로 용서해 주십니다(요일1:8,9).
하나님의 자녀는 계속하여 죄에 거하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그러한 존재가 되었습니까? 9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 신자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과 하나님이 나으신 것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만드신 것은 하나님과 속성이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으신 것은 하나님과 속성이 같은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사람이 무엇을 만들면 그것은 사람과 다른 속성의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나은 것은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할 때의 영어 표현이 'the begotten Son'입니다. 하나님이 나으신 아들로서, 그 아들도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나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속성을 가진 자로 계속하여 죄에 거할 수는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나으실 때 하나님의 씨가 우리 안에 심깁니다. 이 씨는 성령을 가리킵니다(롬 8:11; 고전 3:16). 사도 바울은 로마서 8:9절에서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로서 나는 순간 성령이 그 사람 안에 들어오십니다. 그 안에 거하시고 그를 영원히 떠나지 아니하십니다(히13:5b). 그 사람 안에 내주하셔서 영적소원과 능력을 주셔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 하십니다(빌2:13). 성령은 진리의 영으로서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범죄하면 우리의 양심을 책망하십니다. 회개하도록 촉구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형상에 이르기까지 계속하여 우리를 성화시켜 나가십니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로 범죄할 수 없는 자가 되게 하시고 우리를 성화시켜 나아가시는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드러나나니 무릇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그 안에 성령이 있는 사람은 죄에 거하지 못하고 성화되어 나갑니다. 반면에 그 안에 성령이 없는 사람은, 그런 소원과 회개의 역사가 없습니다. 죄를 지어도 회개하지 못하고 돌이키지 못합니다. 이런 점에서 성령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와 그렇지 못한 마귀의 자녀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병아리 감별사라는 직업이 있습니다. 부화 후 30시간 이내의 병아리가 암컷인지, 수컷인지 감별하는 직업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은 어떻게 감별할 수 있을까요? 아주 간단합니다. 죄를 회개하고 돌이켜 의를 행하는 것과 형제를 사랑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성령께서 거하시면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의를 행하고, 형제를 사랑하게 됩니다. 성령께서 원하시는 대로 살게 됩니다. 죄인들을 하나님의 자녀 되게 하사 성령의 소원대로 살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감사 찬송드립니다.
그런데 11절을 보십시오. "우리는 서로 사랑할지니 이는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 우리는 서로 사랑할지니 -‘We should love one another.’ 하나님의 자녀는 그 안에 심겨진 씨로 말미암아 형제를 자연스럽게 사랑하게 되지만, 또한 우리는 힘써 사랑해야 합니다. 무슨 말일까요? 누가 사랑하는 것이죠? 성령께서 우리로 사랑하게 하시는 것인가요? 우리가 사랑해야 하는 것인가요? 답은 둘 다 '예스'입니다. 성령이 하시는 것이요, 동시에 내가 하는 것입니다. 형제를 사랑하는 것, 실제적인 삶에서 우리가 해야 합니다. 힘써야 합니다. 그런데 나의 힘으로 하지 않고 성령이 주시는 힘과 능력으로 해야 합니다. 자기 힘으로 할 때 사랑하기도 힘들고, 설사 하더라도 자기가 영광을 받고 교만해집니다. 그러나 성령을 의지하여 사랑할 때, 참으로 사랑할 수 있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우리가 이 비밀을 잘 배우길 기도합니다. 성령에 의지하여 힘써 형제를 사랑하기를 기도합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은 처음부터 들은 소식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마지막 날 밤에 유언으로 주신 계명입니다. 사도 요한은 베드로에 대한 시기심과 경쟁심이 많았고 혈기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동역자들을 사랑할 수 없었습니다. 이런 그가 예수님의 사랑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서론에 말씀드렸듯이 그는 입만 열었다 하면 서로 사랑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사람들이 다른 말씀 좀 해 달라고 하여도 결론은 “서로 사랑하라”로 끝났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계명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을 관통하는 진리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 바로 그 순간부터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이 한 가지 계명을 마음으로 영접하고 옆에 있는 동역자들을 뜨겁게 사랑하기를 기도합니다.
사도 요한은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가 말합니다. 13,14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여도 이상히 여기지 말라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세상은 마귀에게 속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하나님의 자녀를 미워해도 이를 이상히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도리어 그들을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죠?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갔지만,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마치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 사랑하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것처럼 들리는 데 그것은 아닙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는 그 행위를 볼 때, 이미 우리는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것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곧 사랑하는 것이 생명에 들어간 증거요 표라는 것입니다. '들어갔다'는 말은 현재완료형으로 벌써 들어갔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믿는 그 순간에 이미 생명에 들어갔습니다. 구원이 이미 확정적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구원의 은혜가 지속되는 것입니다(요 5:24). 우리 신자는 이미 영생을 얻었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고, 장차 심판에 이르지 않습니다.
이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형제를 사랑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거꾸로 말하면,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옮겨진 사람들은 당연히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형제들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국경을 넘어서 예수 믿는 형제들을 사랑하게 됩니다. 민족과 문화와 나이와 성별을 초월하여 서로 사랑하게 됩니다. 반면에 형제에 대한 사랑이 없는 자는 불신자들이요 여전히 사망에 머물러 있는 자들입니다. 15절을 보십시오.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미워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없어지면 좋겠다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그는 살인한 자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한 자요 그 속에 영생이 없는 자입니다.
16절을 보십시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예전에 우리는 친구 간의 사랑, 연인들의 사랑이 참 사랑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다가 친구들은 각자 자기의 길을 가고, 연인들의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 되고 말았습니다. 부모의 사랑이 위대하기는 하지만, 그것도 본능적인 사랑이요 많은 경우 대리 만족적인 사랑이요, 조건적인 사랑입니다. 세상에는 참 사랑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우리는 비로소 참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사랑의 원자탄을 경험하였습니다. 그 사랑 앞에 무릎을 꿇게 되었습니다. 죄인을 위하여 아들을 보내시고, 죄인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신 그 사랑에 감격하여 날마다 울며 찬송을 합니다.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 다 형용 못하네 저 높고 높은 별을 넘어 이 낮고 낮은 땅 위에 죄 범한 영혼 구하려 그 아들 보내사 화목제로 삼으시고 죄 용서하셨네”(404장)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사랑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기초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 그 사랑을 아는 감격에 기초한 마땅한 행동입니다. 하나님의 참 사랑을 받은 우리는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예수님도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고 하셨습니다(요15:13). 우리 모임은 1980년대 이후 하나님의 은혜로 놀라운 열정으로 세계선교를 섬겼습니다. 그러한 뜨거운 열정으로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는 공동체가 되기를 소원해봅니다. 우리 가운데 형제를 위해 목숨을 내 놓는 본이 있기를 소망해 봅니다. 그러한 사람들 중에 제가 한 명이기를 소망해 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영웅적으로 누구를 위해 죽는 일도 위대하지만, 실제적인 삶에서 나의 생명의 요소인 나의 시간과 에너지, 나의 물질을 희생적으로 사용하여 형제들을 섬기는 것이 구체적으로 목숨을 주는 생활입니다.
17,18절을 보십시오.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당시 재물이 많은 성도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굶주리고 헐벗은 형제들을 볼 때 측은지심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막상 자기 물질로 도와주려다보니 아까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 이런 마음이 계속되면 내가 손해를 보게 돼! 큰일 나!" 그래서 도와줄 마음을 닫아버렸습니다. 물질 욕심이 형제에 대한 사랑을 밀쳐내어 버린 것입니다. 그는 '저런 사람을 도우면 더 가난해지니까 그냥 두어야 해. 의존심을 키우면 안 돼. 영적으로 잘 되는 것이 중요하지 잘 먹고 잘 입는 것은 뭐가 중요해?" 물론 그런 상황도 있기는 하지만 이런 것이, 자기의 욕심 때문에 도와줄 마음을 닫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형제를 사랑한다고 말로만 합니다. 야고보 선생도 말했습니다.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약 2:15,16)" 쌀이 떨어지고, 가스가 끊겨서 방에 불을 땔 수 없는데, 말로만 '식사 잘 하세요.', '가스를 틀어 방을 따뜻하게 하세요' 라고 한다면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말로만 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한다고 말만 하시고 독생자를 보내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마음 문을 닫고 도와주지 않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그의 속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재물을 주신 것은 혼자 잘 먹고 잘 살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궁핍한 형제를 도와주라고 주신 것입니다. 자기가 쓰고 남은 것이 있으면 다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쓰라고 하나님이 넉넉히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도와줄 마음을 닫아 버리면 하나님의 뜻도 이루어지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할 기회도 놓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영지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고차원적인 신령한 비밀이 아닙니다. 사랑은 지금 내 눈 앞에 있는 형제의 춥고 배고프고 헐벗고 궁핍한 것을 구체적으로 도와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불쌍한 사람을 보면 “아, 저 사람 불쌍하다!” 라고 말합니다. 그 말을 하면서 스스로 위로합니다. 그리고는 나는 그래도 저 사람을 불쌍히 여겼고 그런 말을 했으니 그래도 나은 사람이지 하며 그냥 갑니다. 이러한 말로만 하는 사랑은 참 사랑이 아닙니다.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는 것이 참 사랑입니다.
행함과 진실함으로 형제를 사랑할 때 우리가 무엇을 알게 됩니까? 19a절을 보십시오.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형제를 사랑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내가 진리에 속했구나!'라는 확신을 심어 주십니다. 또한 그렇게 형제를 사랑하면 우리 마음은 주 앞에 굳세게 됩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안정감을 갖는다, 쉼을 누린다는 뜻입니다. 내가 설사 형제를 도와주는 것이 좀 부족하더라도, 하나님은 나의 진심을 아시기 때문에 스스로 자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무한한 신뢰 가운데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자유와 평안을 누립니다.
그래서 또한 어떤 특권을 누리게 되나요? 21b,22절을 보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담대하게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합니다.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받습니다. 한 마디로, 형제 사랑을 실천하는 자는 기도의 능력자가 됩니다. 기도는 입술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삶으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인 형제 사랑을 실천하기보다 자기 유익만을 위해 '주세요' '주세요' 기도할 때 하나님이 주시겠습니까? 그런 자기 정욕을 위하는 기도는 응답되지 않습니다(약4:3). 기도는 입술과 함께 삶으로 하는 것입니다. 형제 사랑의 삶이 뒷받침 해주는 기도는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기도에 응답하시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를 더욱 많이 행하게 하십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과거에 사랑이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주신 사건을 통해 참 사랑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날마다 이 사랑을 더 깊이 깨닫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말과 혀로만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형제들을 사랑하기를 기도합니다. 올 한해 우리가 참 사랑의 사람으로 성장하게 하시며, 우리 모임이 아름다운 사랑의 공동체가 되게 해 주시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