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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2년 추수 감사절 특강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시편 23:1-6)2022-11-21 0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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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추수감사절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말씀 / 시편 23:1-6

요절 / 시편 23: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022년 추수감사절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를 생각하면 늘 감사할 뿐입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지으셨고 지금도 만물을 붙들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오늘도 기동하고 있습니다. (행17:28) 보는 것, 숨 쉬는 것, 자고 깨는 것, 그 어느 하나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약 3천 년 전 이 땅에서 살았던 다윗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의 목자이셨다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목자로 모시고 살았을 때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고백합니다.


이는 그가 왕으로써 모든 권세를 누려서 그랬다는 것일까요? 아무 문제없이 늘 평화로운 시절을 보내서 그랬을까요? 아닙니다. 다윗의 생애를 보면 평화로운 때가 거의 없었습니다. 그는 사울 왕의 대적이 된 후부터, 그가 왕이 된 후에나, 압살롬의 반역과 그 뒤에도 끊임없이 일어나는 반란으로 폭풍 같은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도 아들 아도니아의 쿠데타 음모, 그리고 그 가운데 솔로몬을 왕으로 세우는 숨 가쁜 정치적 소용돌이 가운데 있었습니다. 다윗의 생애는 한 마디로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그는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고백한 것입니다. 그는 심령에 하늘의 평화를 누렸습니다. 이는 그가 하나님을 자기의 목자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자기 인생을 돌아볼 때 한 마디로 이렇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나는 참 좋은 목자를 만났습니다. 나는 만족합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고백이 나오기를 기도합니다.


1절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여호와(Jehovah)는 하나님이 출애굽기 3:15에서 밝히신 자신의 이름으로 그 뜻은 "스스로 있는 자"(I AM)입니다. 구약성경에 이 이름이 6천 번 이상 나옵니다. 유대인들은 이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 없다하여 '아도나이'(나의 주님이란 뜻)로 읽고, 가톨릭에서는 '야훼', 우리 개신교에서는 '여호와'라고 읽습니다. 유대인들은 여호와라는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못했지만 다윗은 그 여호와 하나님과 깊은 개인적인 관계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본문에 "우리"라는 단어는 한 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6절 밖에 안 되는 짧은 시에 '나', '나의' 라는 말이 14번이나 나옵니다. 그만큼 하나님을 친밀히 모신 그의 삶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소년 시절에 목자였습니다.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떼에서 새끼를 물어 가면 그것을 따라가서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낸 좋은 목자였습니다. (삼상17:34,35) 이런 그가 "여호와는 나의 목자이시다"라고 고백합니다.


양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들소 같은 동물은 때에 따라 목초지를 찾아 본능적으로 이동해 가는 데 양은 그렇지도 못합니다. 양은 목표를 향해 가지 않고 방황하는 것이 그 특징입니다. 양은 스스로를 보호할 수도 없습니다. 덩치가 크거나 뿔이 있거나 보호색이 있지도 않습니다. 맹수가 나타나면 할 수 있는 일이 그저 도망가는 것뿐인데 달리기도 빠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양은 생존을 위해 목자를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목자는 어린 아기를 돌보는 엄마의 마음으로 양들을 돌봅니다. 그래서 목자 없는 양은 불쌍하고 위험합니다. 목자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양에게 아무 목자나 있으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의 필요를 위해 양을 이용하는 목자, 곧 삯꾼을 목자로 둔 양들은 불쌍합니다. 양을 사랑하고 그들을 이끌고 보호할 수 있는 능력 있는 목자를 만나야 합니다. 양의 생존은 전적으로 어떤 목자를 만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양은 목자를 선택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좋은 목자를 만나는 것은 큰 복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라는 다윗의 고백은 "나는 좋은 목자를 만났다. 나는 복을 받았다"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이 여호와를 목자로 삼은 결과가 무엇입니까?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내게는 모든 것이 풍성하다. 나는 만족하다"라고 고백합니다. 지금도 부족함이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목자이신 여호와께서 모든 필요한 것을 충분하게 공급하여 주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사람마다 자신의 목자가 있습니다. 자신의 필요를 채워 주는 어떤 존재가 있습니다. 당시에는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이 아니더라도 신의 위치에 올려놓은 무언가가 있습니다. 돈이나 명예, 외모나 학벌, 언변이나 지식 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우리의 진정한 필요를 채워주지 못합니다. 우리의 목자가 되지 못합니다. 오직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잘 아십니다. 또한 그 분은 전능하셔서 못하시는 것이 없으십니다. 이 하나님만이 우리의 참 목자가 되십니다. 여호와를 목자로 모심으로 부족한 것이 없다고 고백한 다윗은 그 구체적인 내용을 이어지는 구절들에서 말합니다. (2절; 쉼을 주심, 3절; 영혼을 소생시키심, 4절; 보호하심, 5절; 풍성한 공급)


2절입니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다윗은 골리앗과의 싸움 이후 이스라엘의 전쟁 영웅이 되었고, 결국 사울 왕의 시기의 대상이 됩니다. 하루는 사울이 악령이 들어 다윗을 불러 수금을 타게 하였습니다. 이때 사울은 다윗에게 단창을 던졌습니다. 다윗은 가까스로 피하였고 사울의 창은 벽에 박혔습니다. (삼상19:8-10) 다윗은 가족들에게 돌아갔으나 거기도 위험하였습니다. 그래서 라마를 거쳐 골리앗의 고향 블레셋의 가드로 피신합니다. 이곳에서 그는 아기스 왕을 속이기 위해 미친 행세를 합니다.

(21:7-15) 아둘람굴, 엔게디광야를 거쳐 황무지에서 피난살이를 합니다. 거기서도 어떤 사람들이 밀고하여 사울은 광야의 깊은 곳까지 다윗을 추격합니다. 그의 일생은 한 마디로 도망자의 신세였습니다. 외적으로 그에게는 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가운데서도 다윗은 고백합니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여기서 풀밭(네오트)은 '거처'를 말하는데 풀이 많은 초장을 의미합니다. 쉴 만한 물가는 잔잔히 흐르는 물을 말합니다. 우리가 양과 관련된 이미지를 보면 언제나 서 있는 모습입니다. 누워있는 모습의 사진은 거의 없습니다. 양은 기본적으로 잘 눕지 않습니다. 겁이 많아서입니다. 자신이 완전히 안전하다고 느끼지 않으면 눕지 않습니다. 또한 먹을 것이 충분하지 않으면 눕지 않습니다. 쉼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목자이신 하나님은 다윗을 고난 가운데서도 푸른 풀밭에 누이십니다.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사 마음껏 마시게 하십니다.

 

아모스8장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쪽에서 동쪽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돌아다녀도 얻지 못하리니 그 날에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다 갈하여 쓰러지리라" 말세에 사람들은 굶주림과 기갈에 시달립니다. 이런 주림과 기갈은 빵이 없어서가 아니고 물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영적 굶주림과 영적기갈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영적인 빵과 영적인 생수를 풍성하게 주십니다. 우리로 참 쉼을 누리게 하십니다. 오늘날 사람들도 참 쉼을 찾아다닙니다. 밤새도록 게임을 합니다. 자극적인 유트브 영상을 봅니다. 시사 뉴스나 정치평론을 샅샅이 듣고 보며 남들이 알지 못하는 정보들을 누립니다. 대박을 노리며 주식 투자를 합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하나님 아닌 다른 곳에서는 진정한 쉼을 누릴 수 없습니다. 평안한 환경에 처하는 것과 평안함을 누리는 것은 다릅니다. 하나님 없이는 평안한 환경에 있어도 평안을 누리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참 쉼을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수고하는 인생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11:28) 다윗은 어떤 어려운 환경에서도 여호와를 믿었습니다.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목자이신 하나님을 신뢰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그에게 참 쉼을 주셨습니다. 실제적인 위험도 넉넉히 극복하도록 해주셨습니다.


3절입니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소생시키는 것은 죽어가는 것을 살리는 것입니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라는 것은 다윗의 영혼이 거의 죽은 상태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언제 그의 영혼이 죽은 것같이 되었나요? 죄를 범하여 목자이신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깨어진 때였습니다. 다윗이 왕이 된 후 그는 잠시 평화를 누렸습니다. 외적으로는 부와 권세를 누리는 부족함이 없는 상태, '내 잔이 넘치나이다'의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때 그는 넘어집니다. 자신의 군대가 여전히 전쟁을 수행 중인데 그는 한가로이 궁전 옥상에서 거닐다가 정욕의 유혹을 받습니다. 밧세바를 데려다가 동침하는 간음죄를 짓고 맙니다. 충신 우리아의 아내를 범하는 그 끔찍한 죄에 그치지 않고 이를 은폐하려고 시도하다가 결국 우리아를 전쟁터에서 내몰아 죽게 만드는 살인죄까지 저지릅니다. 이러한 다윗의 죄는 여호와를 업신여기는 것이었습니다.


범죄한 그의 영혼은 어떠했습니까? 단순히 쉼을 잃어버린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시편32:3,4는 말합니다.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 그가 죄를 품고 있을 때 종일 신음하였습니다. 끙끙대었습니다. 그의 뼈가 쇠하여져갔습니다. 하나님의 손이 그를 짓눌렀습니다. 공동번역은 4절을 이렇게 말합니다. "밤낮으로 당신 손이 나를 짓눌러 이 몸은 여름 가뭄에 풀 시들듯 진액이 다 말라빠지고 말았습니다." 그의 몸과 영혼이 완전히 탈진된 것입니다. 왕으로서 화려한 궁중에 살지만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의 영혼은 죽은 자와 같았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선지자 나단을 통해 그의 죄를 드러내시고 회개하도록 도우셨습니다. 나단이 갑자기 왕궁에 들어가 다윗에게 "당신의 죄를 회개하시오!"하였더라면 다윗은 "저 놈을 당장 죽이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죄를 회개하도록 돕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나단에게 지혜를 주셨습니다. 나단은 다윗에게 양이 매우 많은 한 부자와 암양 한 마리밖에 없는 가난한 사람의 비유를 들려줍니다. 다윗의 죄를 절묘하게 드러낸 후에 말합니다. "당신이 그 사람이라". 이 말은 여러 사람들이 있는 가운데 소리친 것이 아닙니다. 그의 죄를 드러내고는 조용히 그의 마음 중심에 찌른 말입니다.


다윗이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라고 고백하자 나단은 말합니다.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이다" 하나님은 그가 회개하자마자 그를 용서해주셨습니다. 그의 모든 죄짐을 풀어주셨습니다. 깨어졌던 사랑의 관계성을 회복시켜주시고 목자 되신 하나님의 품에 다시 안아주셨습니다. 다윗의 영혼을 소생시키셨습니다. 사냥꾼의 올무에서 벗어난 새처럼 그는 죄의 사슬에서 풀려났습니다. 이런 그는 노래하였습니다.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32:1,2)


오늘날 사람들은 과거 어느 때보다 풍요로운 때를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죄로 인해 그 영혼에 생명력이 없습니다. 우리도 때로 모든 것이 귀찮고 의욕이 떨어질 때가 있습니다. 영적 침체를 느낍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영혼이 생명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우리의 영혼이 어떻게 소생될 수 있을까요? 먼저 세상을 사랑하는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입니다. 이는 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죄는 사람의 영혼을 포승줄로 묶습니다. 거머리같이 달라붙어 진액을 빨아먹습니다. 그러나 회개하면 사함을 받습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하나님을 마음에 첫자리에 모실 때 영혼이 소생됩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을 굳게 의지하고 바라보아야 합니다.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습니다.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지만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습니다. 그는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고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합니다. (사40:31)


하나님은 다윗의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그를 의의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의의 길이란 '의로운 길'이라는 의미도 되지만 '평탄의 길', '형통의 길'을 뜻하기도 합니다. (공동: ‘곧은 길’)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은 의의 길, 곧은 길입니다. 하나님은 회개한 다윗을 의롭고 평탄한 길, 형통의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신 1차적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기 이름을 위하여"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의지하는 자를 축복하심으로 약속의 말씀을 신실하게 지키십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4절입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여기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는 '매우 짙은 그늘', 또는 '흑암'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죽음을 상징합니다. 이런 어두운 골짜기는 산지가 많은 팔레스틴에서 쉽게 발견됩니다. 그런 곳에서 목자 없는 양떼들은 사나운 짐승의 먹이가 되고 맙니다. 그러나 양들이 목자와 함께 있으면 두렵지 않습니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다윗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니는 것과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자기와 함께 하심을 확신했습니다. 양떼를 인도하는 목자는 지팡이와 막대기를 들고 있습니다. '지팡이'(미쉬에네트)는 양들을 인도하기 위한 도구이며, '막대기'(쉐베트)는 공격해 오는 맹수들을 대항하는 무기입니다. 목자의 지팡이와 막대기를 보는 양은 평안함을 누립니다. 다윗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 때에도 목자 하나님을 굳게 믿었습니다.


우리도 살다보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 때가 종종 있습니다. 예기치 않은 실직이나 가정문제, 질병의 골짜기를 갈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면 “아, 내 인생은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닌가? 하나님이 나를 버리신 것은 아닌가?” 하는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심히 불안합니다. 우리는 바로 그 때 마음을 담대하게 하여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붙들어야 합니다. 기도하며 믿음을 지키면 반드시 하나님의 영광을 봅니다. 팔레스타인에서 목자는 다른 목초지로 이동할 때 지름길로 가기 위해 양들을 음침한 골짜기로 인도하기도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 나은 것을 주시기 위해, 우리를 더 강하게 키우시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하게도 하십니다.

저는 영국에서 5년 반 주재원으로 근무한 후 본사 발령을 받았습니다. 본사에 들어오면 임원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평신도 선교사로 살기 위해 사직하였습니다. 당시 IMF 때로 사람들은 직장 염려가 많았던 때였기에 여러 사람들이 저를 걱정해주었습니다. 실제로 그 이후 저는 때때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걷는 것 같았습니다. 런던에서 작은 컴퓨터 회사를 운영하였는데 직원으로 일하는 선교사들의 월급을 주지 못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 때는 잠을 자지 못하였습니다. 버스비를 아끼기 위해 걸어서 몇 개 정류장을 걸어가서 타기도 했습니다. 물질 문제는 결코 만만한 문제가 아닙니다. 목을 죄어 오는 것과 같은 염려에 시달리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저의 목자가 되셔서 모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하게 하셨습니다. 현재 어려움을 겪는 분들이 있으면 말씀을 붙들고 하나님께 담대히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구하면 성령의 충만을 주십니다. 성령님이 나를 다스리시면 먹구름이 사라지듯 모든 염려와 걱정이 물러갑니다. 우리로 실제적인 믿음을 배우게 하시며 반드시 승리를 주십니다.


5절입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다윗은 하나님이 자기를 귀한 손님으로 영접하셨다고 고백합니다. 그것도 "원수들의 목전"에서 그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원수의 목전에서' 라는 말을 생각해보십시오. 한번은 다윗이 엔게디 광야에 있을 때 사울은 무려 삼천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벼룩이라도 찾으려는 자세로 샅샅이 찾으러 왔습니다. 다윗이 굴에 숨어 있을 때는 그 굴 앞에까지 진을 쳤습니다. 원수가 그의 목전까지 온 것입니다. 그는 원수들에 의해 패배하여 죽임을 당하게 될 거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와중에 반전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이 개입하십니다. 원수들로 하여금 '동작 그만' 시켜놓으시고 한 장면을 연출하십니다. 그를 둘러싼 원수들이 보는 앞에 진수성찬이 차려집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머리에 기름을 부으십니다. 잔에 부어주십니다. 다윗은 고백합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그는 잔이 그냥 가득 찼다가 아니라 '넘친다'고 고백합니다. 너무 많아서 흘러넘친다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다윗을 넘치게 축복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결국 다윗을 크게 축복하사 이스라엘의 왕으로 굳게 세우셨고 그 후손 가운데 메시야가 나게 하십니다. 그의 목자가 되사 그에게 강건함과 영적인 깨달음을 주시고, 훈련과 연단을 통해서 성숙한 종이 되게 하십니다. 그가 하는 모든 일을 형통하게 하십니다.


6절입니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여기서 '인자하심'은 '헤세드'로 언약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을 의미합니다. 또한 '따른다'는 것은 적군을 쫓아가는 것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 평생에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나를 추격해올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이에 다윗은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고백합니다. 이는 지금부터 영원토록 하나님과의 더 깊은 영적 교제에 들어가게 될 것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세상 것에 눈을 돌리지 않고 오직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목자로 모시며 살기를 결단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지난 인생을 돌아볼 때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은 비록 허물과 죄가 많았지만, 하나님은 항상 선하셨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좋으신 분이셨습니다. “참 좋으신 나의 하나님!” 이러한 체험 가운데 앞으로도 평생 동안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 그리고 이로 인한 모든 은혜와 축복이 자기와 함께 할 것을 확신하며 찬양하고 있습니다.


오늘 시편 23편은 장차 그리스도에 의해 성취될 메시아 시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0:11에서 다윗이 "여호와는 나의 목자이시다"라고 말한 그 여호와가 바로 자신이심을 선포하십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우리는 이 예수님의 양입니다. 목자 예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히 우리에게 거할 것을 믿습니다. 이 믿음은 아무 근거가 없는 소위 정신승리를 외치는 것이 아닙니다. 근거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리신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내려오라고 외쳤습니다. 내려와서 자신을 구원하라고 외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려오지 않으셨습니다. 그 나무에서 몸을 떼지 않으셨습니다. 죽을 때까지! 이것이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로부터 결코 떠나지 않는다는 증거입니다. 그의 십자가에 죽으심은 팩트입니다. 그는 우리를 결코 떠나지 않으시고 우리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십니다. 이 예수님의 사랑을 믿을 때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도 우리를 낙심하게 하지 못합니다. 우리를 절대적으로 영원히 사랑하시는 그 사랑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항상 넉넉히 이깁니다. (롬8:36,37)


지난 한 해도 코로나로 인해 어둡고 힘든 해였습니다. 경제위기가 닥쳐 삶이 팍팍해졌습니다. 이태원 참사로 국민들의 마음이 낙심되었습니다. 캠퍼스 역사도 봄날이 오려면 아직 먼 것 같이 보입니다. 현실만 보면 감사할 것이 별로 없게 보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어려움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우리의 목자가 되어 주셨습니다. 고난 가운데 믿음을 배우게 하시고 기도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데에 있어서 커가게 하셨습니다. 진리의 말씀을 좇아 사는 축복, 고난을 통해서 성숙케 하시는 축복, 죄사함과 영생의 축복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더욱 깊이 배우게 하셨습니다.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목숨을 버리신 예수님은 나를 죽도록 사랑하시는 나의 목자이십니다. 우리는 참 좋은 목자를 만났습니다. 나의 목자 예수님으로 인해 우리는 만족합니다.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고백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나의 목자이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결론입니다. 다윗은 누구보다 고난이 많았지만 목자이신 하나님 안에서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하늘의 평강과 기쁨을 누렸습니다. 두려움 없는 능력의 삶을 살았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우리에 대한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증명하셨습니다. 우리의 참 목자이심을 증명하셨습니다. 우리가 목자 예수님을 믿음으로 어떤 상황, 어떤 시련 가운데서도 감사가 넘치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모든 시련을 넉넉히 이기는 믿음의 사람들로 축복해주시길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