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부활절 말씀 제 2 강
홀연히 다 변화되리라
말씀/ 고전15:35-58
요절/ 51,52절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전반부에서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부활의 확실성과 첫열매인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성도들도 부활한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오늘 말씀 15장
후반부에서는 ‘우리 몸이 어떻게 부활하는가?’, ‘어떠한
몸으로 오는가?’ 부활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의 부활 신앙을 견고히 하며 우리가 힘써 행할 일이 무엇인지를 배우길 기도합니다.
35절을 봅시다.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 고린도 성도들중에 두 가지 질문을
하였습니다. “죽고 나서 어떻게 부활하는가?”, “어떤 몸으로
오는가” 그들이 이런 질문을 하게 된 배경에는 ‘육체는 악하고
영은 선하다’는 헬라 철학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헬라
사상은 나의 진정한 자아는 영혼이고 몸은 껍데기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나의 영혼이 육체에서 빠져 나와야 진정한 자유를 얻는다”고 가르쳤습니다. 독배를 마셨던 소크라테스도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헬라철학이 활발했던
고린도에서는 이런 사상이 더 팽배했습니다. 특히 몸이 다시 살아난다고 주장하는 것을 저급한 사상이나
초등학문으로 여겼습니다. 요즈음 학교에서 진화론을 배운 학생들에게 ‘창조론’을 말하면 과학적이지 않다거나 유치한 이론으로 보는 것과 비슷합니다. 엘리트주의와
좋은 가문을 추구하는 고린도문화의 유혹이 고린도 성도들의 부활 신앙을 흔들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대한 바울의 대답이 뭡니까? 36절을 봅시다. “어리석은 자여 네가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어리석다고
합니다. 왜 어리석다고 할까요? 누가 여러분에게 ‘야~, 이 어리석은 놈아~’ 이렇게
말하면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바울의 이 말은 비교적 심한 책망입니다.
부활을 의심하고 믿지 못하는 것이 어리석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세계를 조금만
자세히 관찰해 보아도 부활의 진리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는, 네가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합니다. 우리는 올해 벚꽃 구경을 하면서 ‘정말 아름답네.’, ‘참 좋다~’ 이렇게 말하고서 디카를 찍습니다. 하지만 이 벚꽃이 어디로부터 온 것입니까? 벚나무 씨가 땅 속에
묻혀 죽고 싹이 나고 자라 벚나무가 되고 꽃을 핀 것이 아닙니까? 씨가 반드시 땅 속에 묻혀 죽어야만
합니다. 죽지만 그 씨가 사라진 것이 아니죠. 더 높은 차원으로
업그레이드된 것입니다. 이처럼 부활도 같은 원리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은 씨앗과 같습니다. 이 땅에서 살다가 죽으면 썩고 없어집니다. 그러나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니라는거죠. 하나님 나라에서 영광스러운 몸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꽃처럼 아름답게, 나무처럼 울창하게, 별처럼 영롱하게, 해처럼 영광스럽게, 다시 살아납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입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 그 뜻대로 그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십니다. 우리가 땅에 씨앗을 심을 때 정말 작고 보잘 것이 없습니다. 또 비슷 비슷합니다. 여기 보십시오. 이것들이 씨앗들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나온 꽃들을 보십시오.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얼마나 화려합니까? 그 향기는 또 어떠합니까? 누가 이렇게 하였습니까? 서애란, 이안나사모님이 이렇게 꾸몄지만 이 꽃들을 만드신 분은 하나님입니다.
38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그 뜻대로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창1:11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땅은 풀과 씨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었습니다. 이렇게 말씀 한마디로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육신이 아무리 죽어 완전히
썩어져 먼지가 된다 할지라도 영광스러운 몸을 입혀 완전한 형체로 이끌어내지 못하시겠냐는 그런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부활하게 될 때에 어떠한 몸으로 살게 됩니까? 39절을
읽겠습니다.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나는 새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의 육체라. 하늘에 속한 육체도 있고 땅에 속한 육체도 있으나” 하나님은 각
피조물을 만드실 때 각자가 살아가는 장소에 맞게 창조하셨습니다. 새는 하늘에서 살 수 있도록 날개를
주셨습니다. 물고기는 물에서 살아야 하기 때문에 지느러미나 비늘등 거기에 맞게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각 피조물을 만들고 난 후 무엇이라 소감을 말하셨나요? ‘보시기에
좋았더라’하였습니다. 각 피조물을 창조하실 때마다 감탄하시고
기뻐하시고 복을 주셨습니다. 인간을 만드실 때는 한발 더 나아가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하셨습니다. 인간이 이 땅을 살아가기에 적합하도록
또한 만물의 영장이 되도록 몸을 만드시고 축복하셨습니다. 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 나라에 들이실
때 그 나라에 맞게 새 창조의 역사를 이루지 않겠습니까? 천국에서 우리가 새롭게 된 모습을 보시고서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실까요? 아마 “보시기에 심히 심히 진짜
진짜 좋구나” 이러지 않을까요? 이 땅에 보낸 인간의 모습도
아름답지만 그것보다 더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모습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도 기쁘고 우리도 기쁠 것입니다.
우리의 몸이 어떻게 변화되는지 42-44절을 읽습니다.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니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
이 일이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거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이루어집니다. 45-49절까지를 읽겠습니다.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사람이 아니요 육의 사람이요 그 다음에 신령한 사람이니라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무릇 흙에 속한 자들은 저 흙에 속한 자와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들은 저 하늘에 속한 이와 같으니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으리라”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만드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서 생령이 되었습니다. 아담은 땅에서 와서 흙에 속한 자입니다. 우리는 아담의 후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흙에서 왔고 흙으로 돌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마지막 아담’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왜 ‘아담’이라고 했을까요? ‘예수님도
아담과 다름없는 인간의 몸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죠. 우리와
똑 같은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고 사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마지막 아담’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이 무슨 뜻이죠? 첫 사람 아담이 범죄함으로 우리에게 죄가
들어오고 그것을 이어받아 썩을 몸, 죽을 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죄의 사슬을 끊고 새로운 시작을 하는 아담이 되신다는 것이죠. 그리고 ‘마지막’은 ‘말세’를 뜻합니다. 예수님의 초림부터 재림까지가 말세입니다. 우리는 지금 마지막의 때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지막 아담은 또한
살려주는 영이 되었다고 나옵니다. 이 말은 첫 사람 아담처럼 생명을 부여 받은 자가 아니라 본인이 생명을
주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생명을 주는 창조주 하나님이 되신다’ 이
말이죠.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이것을 나타내는 포퍼먼스를 하십니다.
시편2:7절과 히1:5절에서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네가 너를 낳았다’고 나옵니다. 여기서 ‘내 아들’은
누구를 지칭합니까? 예수님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를 낳았다고
표현합니다. 아니, 성자 예수님은 영원히 계신 분인데, 어떻게 낳을 수가 있나요? 이것은 예수님의 부활을 표현한 것입니다. 죽은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다시 살리신 것을 낳았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오셔서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요20:23)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은 우리가 새 몸을 받을 때 부활의 보증이 되어 주십니다.(요15:26;
16:7). 만약 성령이 없는 사람은 어떻게 될까요? 여러분은 유정란과 무정란의 차이를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생명이 있고, 없고입니다. 유정란은 생명이 있기에 거기에서 새 생명이 탄생하고, 무정란은 생명이
없기에 그냥 죽습니다. 사도 요한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그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일5:11,12) 예수님께서
보내신 성령이 없으면 그는 무정란과 같이 생명이 없습니다. 영원한 사망입니다.
우리는 첫 사람 아담의 후예로서 흙에 속한 사람입니다. 더불어서 예수님을
믿으면 하늘에 속한 형상을 입습니다.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이 땅을 살아가지만 다른 점은 하늘 시민권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아담은 하늘에서 나셨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말합니까? 우리는 땅에서 났지만
예수님은 하늘에서 영원전부터 계셨던 분이란 뜻입니다. 그 분은 ‘잠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하늘로 올라 가셨습니다. 이 땅에 오신 것은 ‘잠시’일
뿐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땅에서의 삶은 ‘잠시’입니다. 나그네와
같습니다. 백 년을 산다해도 짧은 ‘잠시’입니다. 영원한 시간을 우리는 하늘에서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부활신앙을 가진 자는 이 땅에서 ‘나그네’와 같은 삶을 삽니다. ‘우리의 본향은 하늘이다’ 이것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우리는 하늘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몸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50절을 보면,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아무리 하늘의 시민권이 있어도 현재의 몸으로는 결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새 몸, 하나님 나라에 적합한 몸을 입는 것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부활의 몸을 언제 갖게 됩니까? 예수님의 재림의 때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비밀이라고 했습니다. 51-52절을 읽습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잠은 죽음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재림하면 죽음이 더 이상 위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동안 있다가 물고기가 그를 토해 내었듯이 사망이 성도들을 삼키지 못하고 다 토해 냅니다. 주님의
재림을 알리는 마지막 나팔이 ‘빵빵라~ 빵빵바~ 빵빵라~’ 울려퍼질 때, 성도들은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게 됩니다. ‘순식간’은 눈 깜짝할
사이를 말합니다. 우리가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날때는 열 달을 채우고 나오지만 그 때는 모든 성도들이
순식간에 부활의 몸으로 ‘짠~’하고 변화됩니다. 그 때가 언제다? 예수님의 재림의 때다. 믿는 사람은 죽어 낙원에 가 있는 사람들과 함께 영화로운 몸을 덧입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렇다면 안 믿는 사람은 그때 어떻게 될까요? 믿지 않는 자는 죽으면
먼저 음부로 갑니다. 부자와 나사로 비유에서 예수님께서 부자가 죽은 후 음부에 갔다고 말씀하셨습니다.(눅16장) 그곳에서 고통하며
슬피 울며 이를 갈죠. 그리고 예수님의 재림하면 어떻게 되죠? 계20:13-15절을 읽겠습니다. “바다가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 이 땅에 있는 믿지 않는 자들은
음부가 토해낸 죽은 자들과 함께 그들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습니다. 그리고 불못에 던져 집니다. 이것을 둘째 사망이라 했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생명의 부활과 사망의
부활로 나뉘는 변곡점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렵고 떨림으로 또한 소망가운데 예수님의 재림을 갈망해야
하겠습니다. 부활신앙은 곧 재림신앙입니다.
53절은 성도들이 장차 얻게 될 구원의 최종 단계를 이야기 합니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여기서 강조되는 말은 ‘입는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흔히 구원을 생각할 때 육신을 벗어버리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육신이 불완전하기 때문이죠. 그런데 본문은 우리의 부활을 ‘몸을 벗는다’ 하지 않고 ‘몸을
입는다’라고 나옵니다. 기독교의 부활 신앙은 몸을 벗는 것이
아니라 몸을 입는 것입니다. 성경 어디에서도 부활이 몸을 벗는 것이라고 나오지 않습니다. 이는 현재의 몸이 장차 나타날 부활의 몸과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 아니라 상관이 있다는 것입니다. 씨가 나무가 되듯이 현재의 몸은 미래의 부활체와 완전히 다른 형체이지만 연속성이 있습니다. 영지주의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욕된 몸, 죄악된 몸이니 아무렇게나 되어도 상관없고 영혼만 구원받으면 되지~ ’ 이렇게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육체를 방종에 내 버려두는 것은 결코 성경이 말하는 부활신앙이 아닙니다. 요한일서3:2,3은 말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부활의
영광을 소망하며 성화의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 즉
우리가 부활의 몸을 가질 때 더불어서 일어나는 일이 무엇입니까? 54절을 읽겠습니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사망이 사망 선고를 받고 사망이 우리의 밥이 됩니다. 이 얼마나 신나는 일입니까? 55-57절은 승리자의 노래입니다. 바울의 심정으로 사망을 조롱하듯이, 그리고 주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지금 우리는 죄 때문에 고통스럽고 죄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영적 싸움을 하느라 힘듭니다. 그러나 마침내 승리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승리를 우리의 승리로
만들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부활 신앙은 이처럼 죄에 대해 승리의 확신을 갖는 것입니다.
구원에는 3단계가 있죠. 칭의(Justification), 성화(Saintification), 영화(Glorification).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우리의 영화가 이루어집니다.
자! 그러면 부활신앙을 소유한 우리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58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가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첫째로,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부활을 부정하는 자들,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교만한 자들. 이들의 말에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33절에서 바울은 그렇게 말했습니다.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오늘날에도 악한
동무들이 많습니다.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우리는
이런 세상의 유혹과 인간적인 말들에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견실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얼마 전에 토네이도가 미국을 강타해서 수많은 집들이 날아가 버렸습니다. 우리
인생에도 이런 시련의 토네이도가 불어 닥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신앙 위에 굳게 서는 자는 결코
흔들리지 않습니다. 골로새서 2:6,7절에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고 했습니다. 뿌리를
박아야 합니다. 예수님께 뿌리를 박아야 합니다. 부활신앙, 천국소망에 뿌리를 박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가 고린도전서 15장을 암송하고 입을 통해 선포하기를 추천드립니다.
둘째로, 주의 일에 더욱 힘써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를 위해 수고한 것이 결코 헛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하늘의 상급에 대해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설교의
3분의 2가 상급에 대해 말한다는 신학자도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9:6절에서도 “적게 심은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은 심은 자는 많이
거둔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주와 복음역사를
위해서 수고하고 헌신하는 것을 절대로 없어지지 않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다 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영광스러운 상급으로 면류관으로 보상해 주실 것입니다. 이 땅에 사는 날 동안에도 축복해 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주의 일을
열심히 할 때 흔들리지 않고 믿음에 견고히 서게 됩니다. 이런 말이 있죠. ‘달리는 자전거는 넘어지지 않는다’.
우리 한번 사도 바울을 생각해 봅시다. 그가 주를 위해 얼마나 열심히 일했습니까? 얼마나 많은 열매를 거두었습니까? 얼마나 잘 달렸습니까? 하지만 그가 어느 지점에 이르러 자신이 한 일을 계산한 적이 있습니까? 자신이
한 업적을 살피느라고 하던 일을 중단한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가
한 고백을 떠올려 보십시오. ‘내가 한 일 곧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린다’고 했습니다. ‘오직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좇아간다’고 했습니다(빌 3:13-14). 부활
신앙을 가진 자는 바로 이런 삶을 삽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부름의 상을 얻기 위해 열심히 달려갑니다. 기회는 단 한번 뿐입니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합니다.(요일2:17) .
결론입니다. 우리가 부활할 때 우리가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떠한
몸으로 오는지를 배웠습니다. 예수님이 재림할 때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것입니다. 이 소망을 가진 자는 믿음에 견고히 서서 흔들리지 않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씁니다. 우리 모두 부활 신앙을 덧입고 한 번 뿐인 인생, 각자의
부름의 상을 얻기 위해 달려가기를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