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사도행전 15 강
말씀 / 사도행전
15:36-16:40
요절 / 사도행전 16:9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우크라이나 대통령 볼로디미르 젤렌스키는 세계를 향해서 외칩니다: 우리를
도와달라(도포모 쉬치남 Допоможіть нам Dopomozhitʹ nam)! 특히, 세계 최고의 무기생산능력이 있는 대한민국을 향해서 우리를 도와달라고 외칩니다.
그의 부탁은 너무나 간절합니다. 왜냐하면, 나라의
운명이 걸려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외침이 과거에도 있었습니다. 바울은 제2차 전도여행에서 환상 중에 마게도냐 사람의 간절한 호소를 듣습니다: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그 당시는 전쟁이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왜 우리를 도우라고 했을까요? 왜냐하면, 그들의 영혼이 걸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구원과 영원한 심판이
걸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 저자 누가가 기술한 사도행전의 발자취를 따라서 바울과 함께 전도여행을 하고자 합니다. 바울과 함께 제2차 전도여행을 하면서 주님께서 주시는 교훈을 받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서로 심히 다투었습니다(15:
36~41).
15: 39절을 읽겠습니다(시작):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바울은 이제 막 안디옥을 출발하려고 하였습니다. 출발 직전에 고성이
오가는 언쟁이 있었습니다. 무슨 일이 벌어졌나요? 제1차전도 여행을 마친 후 바울과 바나바는 약 1년 동안 안디옥 교회에
머무르면서 말씀 역사를 섬겼습니다. 시간이 흐른 후 제1차
전도여행에서 개척한 교회들을 돌아보며 믿음을 잘 지키도록 권면할 필요를 느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바나바에게
형제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함께 심방을 하자고 했습니다. 바나바는 ‘굿
아이디어’ 하며 맞장구쳤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마가를
전도여행에 동참시킬 것인가 라는 문제였습니다. 왜냐하면 마가는 이전에 전도여행을 할 때 버가라는 곳에서
한마디 상의도 없이 갑자기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은 이런 마가에 대해서, “한 번 도망간 사람은 두 번도 도망간다구요. 절대로 함께 해서는
안되죠!” 라고 하였습니다. 바나바는 자기의 생질이기도 한
마가에 대해서 특별한 애정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도대체 마가를 데리고 가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냐구요. 누구나 한 두 번은 실수를 할 수도 있는 것이지, 사람이 뭐 로봇인가요?” 하고 따졌습니다. 바울과 바나바의 주장은 모두 일면 타당한 면이
있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자신들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피차 갈라서게 되었습니다. 영적인
사람들이라고 해서 다툼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서로 자신을 낮추지 않으면 피차 갈라서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막 10:43~44절입니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런 갈등 상황에 부닥칠 수 있습니다. 믿음의
형제들과 견해가 다르고 갈등에 빠질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자기를 주장하기 보다는, 먼저 낮아지고 종이 되어서, “그렇군요 그렇게 하시지요!” 라고 하면서 형제를 섬길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둘째, 유대인을 존중하였습니다(16:
1~5).
16:3절을 읽겠습니다(시작): 바울이 그를 데리고 떠나고자 할새 그 지역에 있는 ‘유대인으로
말미암아’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하니 이는 그 사람들이 그의 아버지는 헬라인인 줄 다 앎이러라
바울 일행이 제일 먼저 도착한 곳은 더베와 루스드라입니다. 그곳에는
디모데라고 하는 제자가 있었습니다. 디모데는 유대인 어머니와 헬라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다문화가정의
자녀입니다. 문화충격으로 인하여 마음에 상처가 많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어머니 유니게로부터 신앙의 유산을 물려 받았습니다. 성경 말씀대로 살면서
형제들로부터 칭찬을 받았습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전도여행에 동참시켰습니다.
그 때, 바울은 디모데가 할례를 받도록 하였습니다. 이유는 그 지역에 있는 유대인 때문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할례를
중요시하여, 할례를 받지 않은 자와는 상종도 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복음 안에서 할례에 대해서 자유로왔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을 존중하고 섬기는 마음에서 디모데가 할례를 받도록 하였습니다. 바울의
자세는 고전 9:19~20절에서 잘 나타나 있습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마
7:1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바울은 예수님의 마음을 본받아 유대인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섬기고자 노력하였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마음을 본받아 주위의 동역자들의 형편이나 캠퍼스 지성인들의 입장을 이해하고 섬기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성령의 인도함을 따랐습니다(16:
6~10).
16장 9절과 10절을 읽겠습니다(시작):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16:10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바울 일행은 브루기아와 갈라디아를 거쳐서 무시아까지 오면서 복음을 증거하였습니다. 이제 비두니아 지방으로 가고자 방향을 잡았습니다. 바울은 제1차 전도여행 때 아시아 지역에서 말씀을 증거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말씀을 듣고 하나님께로 돌이켰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아시아 지역 중 북쪽에 위치한 비두니아로 가고자
하였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는 바울이 비두니아로 나아가는 것을 막으셨습니다. 바울이 준비해서 길을 나서니깐, 갑자기 폭설이 와서 모든 길들이
꽉 막혀 버렸습니다. 얼마를 기다린 후 눈이 녹고 나서 가려고 하니,
이번에는 독감에 걸렸는지 몸이 불같이 뜨거웠고 끙끙 앓아 눕게 되었습니다. 얼마간 몸을
추스르고 회복해서 가고자 하니, 이제는 갑자기 지진이 나서 다시금 도로가 끊겼습니다. 성령께서는 다양한 수단으로 바울의 길을 막으셨습니다.
바울은 할 수 없어서 드로아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드로아에 있을 때
밤에 환상이 보였습니다.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바울에게 손 짓을 하면서 외쳤습니다: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Ελάτε στη Μακεδονία και βοηθήστε μας! 엘라테 스티 마케도니아 캐 보이티스테 마스 Eláte sti
Makedonía kai voithíste mas”).”
마게도냐는 지금의 그리스라는 나라의 북쪽 지역입니다. 헬라 문명의
중심지로서 의미는 ‘숭배’라는 뜻을 지닙니다. 마게도냐 사람들은 말 그대로 지혜를 숭배하였고, 길거리마다 소크라테스,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등을 추종하는 철학자들이 넘쳐 났습니다. 물질적으로도
모든 것들이 풍요로왔습니다. 세계 각처에서 수입한 다양한 보석들로 건물들이 장식되었고, 상점에는 세계의 진귀한 상품들과 천하진미의 식재료들로 넘쳐 났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무슨 도움이 필요할까요? 그들은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왔으나
영적으로 고통 가운데 있었습니다. 아무리 물질적으로 풍족하더라도, 하나님을
떠나면 인간의 내면은 불안하게 됩니다. 렘 2:13절은 말씀하십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은 채워지지 않는 갈급함으로
목말라 합니다. 어찌나 불안한 지, 자신들도 알지 못하는
신들을 만들어놓고 살려달라고 부르짖고 구원해 달라고 섬겼습니다. 그 증거의 하나가 바로 점을 많이 보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성적으로도 타락하였습니다. 성은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할 때 아름답고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모를 때 성을 우상으로 숭배하였습니다. 대부분의 신전에는 매춘부들이 있었고, 제사를 드린 후에 매춘부들과 성적 관계를 맺었습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그들의 영혼은 매말라 갔고, 어두움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을 아시고 성령께서는 바울이 소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기 보다는 유럽으로 나아가도록 하셨습니다.
바울의 플랜은 소아시아에서 흥황한 역사가 있자, 소아시아의 오지인
비두니아로 나아가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더
큰 플랜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복음역사는 하나님의 플랜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 플랜은 바울의 플랜과는 달랐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환상을 보여 주셨습니다: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복음역사에 있어서 나의 플랜보다는 성령의 플랜을 영접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1980년대에 우리 선배목자님들은 우리나라와 가까운 동남아시아로 나아가고자
하였으나, 성령께서는 독일과 미국으로 인도하셨습니다. 1990년대에는
러시아와 동구권으로 성령의 바람이 불었고, 2000년대에는 중남미와 아프리카로 성령의 바람이 불었습니다.
우리가 이 시대를 향한 성령의 플랜에 귀를 기울이기를 기도합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환상을 보여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요즈음 대학생들을 보면 잘 먹고 자라서 그런지 키도 크고
외모도 수려합니다. 집안도 좋고 부모님으로부터 사랑도 많이 받고 자랐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무슨 도움이 필요한 것 같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내면을 살펴보면 장래에 대한 염려와 걱정으로 고통받고 있습니다. 스펙을
쌓고자 분주하게 생활하지만, 내면에는 불안과 초조로 가득합니다. 작은
어려움에도 절망하고 포기하기를 잘 합니다. 저마다 다양한 죄문제를 안고 끙끙대고 있습니다. 그들의 내면에서는 “캠퍼스에 와서 우리를 도와주세요!” 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영적인 눈과 귀를 열어
주셔서, 캠퍼스 지성인들의 도움을 바라는 애절한 소리를 들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넷째, 주께서 루디아의 마음을 여셨습니다(16: 11~15).
16:14절을 읽겠습니다(시작): 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서 바울 일행들은 드로아에서 배를 타고 사모드라게로 나아갔고 또 네압볼리를 거쳐서 빌립보에
도착하였습니다. 빌립보는 마게도냐의 첫 도시입니다. 빌립보는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 빌립의 이름에서 유래했습니다. 바울이 빌립보에서 며칠을 묵으면서 이곳저곳을 다녀
보았습니다. 안식일에 기도하려고 기도장소를 찾는데, 마침
여자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바울은 말씀을 증거하였고, 그
중에서 루디아라는 여인이 말씀을 영접하였습니다. 루디아는 자신의 집을 열어서 복음의 전초기지로 사용하도록
하였습니다.
사실 빌립보에서 역사를 섬기고자 할 때, 맨 땅에 헤딩을 하는 것처럼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 지 몰랐습니다. 그러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하십니다. “마 19:26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사람으로는 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개척
역사를 이루고자 할 때 동역자들도 보내 주시고, 필요한 물품도 다양한 방법으로 공급해 주십니다.
우리가 캠퍼스 역사를 섬기고자 할 때, 막막할 때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자들을 예비하십니다. 국민대와 상명대 캠퍼스 가운데도, 루디아와 같은 아름다운 믿음의
동역자들을 허락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다섯째, 감옥에서도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였습니다(16:16~25)
16:24절과 25절을
읽겠습니다(시작): 그가 이러한 명령을 받아 그들을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을 차꼬에 든든히 채웠더니 16:25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성령의 역사가 있는 곳에는 악령도 역사를 합니다. 귀신들린 여종은
귀신의 능력을 빌어서 바울 일행이 어떤 사람들인지 알았습니다. 그래서 가는 곳마다 따라다니면서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당신들에게 전하는 사람들입니다” 라고 외쳤습니다. 그 말의 내용은 사실에 부합됩니다. 그렇지만, 귀신들린 여종이 시끄럽게 악기를 울리면서 자지러지고 찢어지는
악마의 목소리로 떠들므로 모든 듣는 사람들이 경악을 하였습니다. “아 하하하~!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당신들에게 전하는 자들입니다~. 아 하하아~!” 바울은 그 여종의 방해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너무 괴로운 나머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 여종 속에서 역사하는
귀신을 쫓아 내었습니다. 여종은 제 정신을 되찾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종으로부터 신통한 점을 보는 능력도 사라진 것이었습니다. 여종의
주인들이 더 이상 그 여종의 점을 통해서 돈벌이를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바울 일행을 상관들에게
고발하였습니다. 상관들이란 도시의 치안과 질서를 유지하는 책무를 맡은 일종의 당시 치안판사들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바울일행을 고발하면서 고발장에 돈벌이를 못한다고 적지 않고, 사회질서를
문란하게 한다고 왜곡되게 적었습니다. 바울 일행은 억울하게 고발 당하고 졸지에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복음이 전파될 때, 그 지역 사회의 유지들과 갈등을 빚을 수도 있습니다. 특히, 잇권을 잃게 되는 자들이 저항하고 교묘하게 올무를 씌우고
핍박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감옥에서 기도와 찬송이
울려 퍼지고 있었습니다. 이 무슨 장면입니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마 5: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5:11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5: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복음을 위해서 받는 고난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하사하시는
공로훈장입니다. 반드시 이 땅에서도 백배의 축복이 있으며, 장차
하늘나라에서 엄청난 상급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섯째, 예수님을 믿을 때 구원을 받습니다(16:26~40)
16:30절과 31절을
읽겠습니다(시작): 그들을 데리고 나가 이르되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하거늘 16:31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
기도와 찬송이 울려 퍼지고 있는데,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옥터가 움직이고, 옥문이 열리고 모든 사람의 매인 쇠고랑이 벗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바울과 실라의 기도와 찬송을 들으시고 역사하셨습니다. 기도와
찬송은 옥문을 열고 매인 쇠고랑을 푸는 능력이 있습니다. 당시 로마 법률에 따르면, 죄수가 도망가면 간수가 대신 형벌을 받게 했습니다. 간수는 책임감
때문에 자살하려고 했는데, 바울은 간수를 급히 막았다. 간수는
바울과 실라가 살아 있는 것을 확인하고 무서워 그들 앞에 엎드렸다. 그리고 물었습니다: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바울은 말했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주
예수를 믿으라!
“왜 예수를 믿어야 합니까?” 우리 인간들은 절대적으로 부패하였습니다. 인간들은 죄로 철저하게 오염되었고,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들을 사랑하사 독생자 예수님을
구원의 주로 보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상에서 돌아가시므로 우리가 받아야 할 그 무서운 형벌을
대신 담당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보혈의 피로 말미암아 심판으로부터 벗어났고 의롭다 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장사지낸 지 사흘만에 부활하셔서 하나님 나라로 올라가셨습니다. 부활을
통해서 우리의 영원한 고향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 인생의 나아갈 방향과 우리 인생의 목적지를 보여 주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 복음 진리를 몰라서 세상은 절망하고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바울을 마게도냐로 초청하셨습니다. 마게도냐는 당시 최고로
발달된 문명을 가지고, 모든 면에서 뛰어났습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문명이 발달하고 삶의 조건이 좋을수록 영적으로는 더욱 타락하고 절망하고 있었습니다. 아름다운 환경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기 보다는 우상을 숭배하거나 성적으로 타락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캠퍼스 지성인들은 얼마나 좋은 환경에서 살고 있습니까? 대한민국에
체류할 수 있는 허가를 받기 위해서 지금도 수많은 외국인들이 행정심판이나 행정소송을 제기하면서까지 제발 대한민국에 머무를 수 있기만을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이처럼 많은 외국인들이 그토록 들어오고자 기를 쓰는 아름다운 대한민국에서 살면서도, 이 나라의 캠퍼스 지성인들은 두려움의 종이 되거나 절망하고 있습니다. 허무에
종노릇하면서 각종 도착적인 쾌락에 빠지고 인생을 허비합니다. 이는 하나님을 모르고 우상을 숭배하며 각종
탐심에 이끌리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보다 나은 환경이 아니라 바로 복음입니다. 복음만이 이들을 구원의 길이요 행복의 길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결론입니다:
우리는 바울 일행들의 제2차 전도여행을 함께 하였습니다. 무엇을 보았고 무엇을 느꼈습니까? 마게도냐로 건너 와서 우리를 도우라! 라는 말씀을 통해서 인간 조건이 좋을수록 더욱 더 복음이 필요함을 배웠습니다.
이 시대 캠퍼스는 마게도냐처럼 외적으로 볼 때 모든 것들이 풍부합니다. 그렇지만 영혼은
메마르고 고통 속에서 “우리를 도우라”고 절규하고 있습니다. 캠퍼스 지성인들의 도움을 청하는 소리를 듣고 캠퍼스에 나아가 복음을 전하기를 기도합니다.
다함께 기도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