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사도행전 제 16강
메시지
이제는 다 회개하라 하였으니
말씀/ 사도행전 17:1-34
요절/ 사도행전 17:30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여행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무엇을 보았고, 느꼈고, 행동했고, 말했는가’ 입니다. 오늘 말씀은 바울의 제
2차 전도여행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는 내용입니다. 특히 아덴에서 바울이 본 것, 느낀 것, 행한 것, 말한
것이 무엇인가?를 살펴보고 그의 복음 정신과 믿음을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제1장. 데살로니가와 베뢰아
전도(1-15)
바울과 실라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렀습니다(1). 데살로니가는 마게도냐의
수도로서 가장 크고 번창한 도시였습니다. 이곳은 풍부한 농경지가 있는 마게도냐와 동쪽에 있는 육로, 해로를 연결시켜주는 로마의 전략적 요충지입니다. 키케르는 ‘우리 영토의 심장부’라고 했습니다.
바울과 실라도 ‘발칸 반도를 복음화 하는데 있어 데살로니가가 전략적으로 얼마나 중요한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빌립보에서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는
등 그렇게 고초를 당하고서도 무려 160km나 떨어져 있는 이 도시에 사력을 다해 들어왔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장 2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먼저 빌립보에서 고난과 능욕을 당하였으나 우리 하나님을
힘입어 많은 싸움 중에 하나님의 복음을 너희에게 전하였노라”(살전2:2)
바울이 비록 짧은 기간 이곳에 머물렀지만 후에 데살로니가 전서와 후서를 써서 돕습니다. 또한
디모데를 파송하여 돕습니다. 나중에 바울이 재방문하려고 하지만 사단이 막았다고 표현합니다. 이처럼 바울이 엄청 신경을 쓴 곳이 바로 데살로니가입니다. 그만큼
세계선교, 유럽선교에 있어 이 지역이 중요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곳에는 빌립보와 달리 유대인의 회당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평소 습관대로
회당에 가서, 삼 주 동안 안식일마다 성경을 가지고 강론했습니다(2).
‘강론하다’라는 말은 ‘토론하다’, ‘설득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는
세 안식일마다 성경으로 그들과 토론하며 설득했습니다.
어떻게 설득했나요? 3절을 보십시오.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증언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그는 성경을 완전히 열어서 설명하고 증명하면서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십니다.” 선포합니다. 구약성경은 그리스도께서 반드시
고난을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셔야 한다고 예언했습니다(사
53:5). 유대인은 이 메시지 자체에 대해서는 이의가 없었습니다. 다만 ‘그 그리스도가 누구냐?’는 겁니다.
바울은 그 그리스도가 예수님이라고 증언합니다. 이것이 그가 전한 메시지의 핵심이며 성경의
핵심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전해야 할 핵심이기도 합니다. 그러자
많은 경건한 그리스 사람들과 적지 않은 귀부인들이 말씀에 감화를 받고 바울과 실라를 따랐습니다(4). 대
성공이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유럽에서 2번째 교회가 세워집니다. 데살로니가전서를 보면 바울이 어떻게 데살로니가 교회를 개척했는가? 그
결과가 무엇인가가 나옵니다.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라~. 또 너희가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됨이라.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고,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느니라’ (살전1:5-8)
이를 사단이 가만 둘리가 없죠. 유대인들을 시기케 하여 장터에서 깡패들을
동원하여 도시를 소란케 합니다(5). 야손의 집에 침입하여 바울과 실라를 사람들 앞에 끌어내려고 찾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바울과 실라를 찾지 못하자 야손과 형제들을 끌고 갑니다(6a).
시청 관원들에게 큰 소리로 고소합니다.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사람들이 여기에 왔어요. 그런데 야손이 그들을 맞아드렸습니다.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기를 ‘다른 임금 곧 예수라는 이가 있다’ 합니다. 이건 분명 반역입니다.”(6b-7). 그들은 종교 문제를 정치 문제화하여
사람들을 선동합니다. 군중과 도시 당국자는 이 말을 듣고 소동하였습니다(8). 당국자는 야손과 형제들에게 보석금을 받고 놓아줍니다(9). 아마 ‘다시는 바울과 실라를 집에 들이지 말고 접촉도 하지 말라’는 조건을
내걸고 석방한 것 같습니다.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형제들이 밤에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피신시킵니다.(10).
베뢰아에 도착한 그들은 무엇을 합니까? 피신해 왔음에도 늘 그랬던
것처럼 유대인 회당에 들어가 성경을 가르칩니다.
말씀을 듣는 베뢰아 사람들의 반응이 무엇입니까? 11절을 읽습니다.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그들은 마음이 너그러웠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고상했다’, ‘말씀 앞에서 마음이 확 트여있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또한 말씀을 받을 때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들였습니다. 이는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이 말씀을 쑥쑥 잘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좋은 마음 밭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성경의 가르침 그대로 귀를 열어 들었고 마음을 열어 받아들였습니다. 또한 말씀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였습니다. 성경과
대조하면서 ‘이것이 정말 맞는가’ 검토했다는 것이죠. 이것이 성경을 올바르게 배우는 자세라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어떤
사람처럼 말씀을 들을 때 ‘이념의 프레임’을 앞세우며 반발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아멘’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머리로 영접한 후에 그것을 되새김질하여
가슴으로 받아들이고, 최종적으로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그들은 ‘Lectio Divina(거룩한 독서)’를 삶에서 실천했습니다.
그러한 일을 ‘날마다’ 했습니다. 날마다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대로 살기 위해서 애를 썼습니다.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는 삶’ 이것이 어떤 점에서 중요합니까? 우리 신앙의 기초를 말씀 위에 두기에 세상 풍조에 요동하지 않습니다. 건강한
믿음의 사람으로 자라게 합니다. ‘옳고 그름’에 대한 분명한
기준을 제시해 줍니다.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된 일’에 대한 분명한 경계선을 보여주죠. 우리의 영적 생명을 건강하게 하고, 우리의 생명을 더욱 풍성하게
합니다. 개인뿐만 아니라 가정과 세상을 변화시키는 디딤돌이 됩니다. 올해
우리 종로2부가 365일 일용할 양식 먹기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특별히 인생의 기초를 잘 놓아야 하는 청년들이 매일 일용할 양식 먹기를 잘 실천하면
좋겠습니다.
영국의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 1320~1384)는
라틴어 성경을 영어로 최초로 번역했습니다. 그가 내건 유명한 구호가 있는데,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였습니다. 미국의 링컨 대통령이 이 말을 인용해
연설해서 더 유명해졌죠. 위클리프는 성경을 국민이 바르게 배운다면,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를
만들 수 있다.”라고 주장했습니다.
그의 영향을 받은 체코의 얀 후스(Jan Hus, 1372~1415)는
라틴어 성경을 모국어인 체코어로 가르쳤습니다. 그는 대중 앞에서 설교를 통해 가르침을 설파했습니다. 특히 그는 성만찬 때 포도주를 성직자와 평신도가 함께 나눠마셨습니다. 전에는
성직자만 포도주를 마셨습니다. 그 결과 교회 안에서 ‘계급화’가 사라지고 평등이 자리 잡았습니다.
이런 영향은 자연스럽게 종교개혁운동으로 이어졌습니다. 종교개혁운동은
성경을 바르게 배우고 가르치는 데서 시작했습니다. 독일의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도 독일어로 성경을 번역했습니다. 그는 오직 성경의 권위를
앞세우면서 성경에 어긋나는 가르침을 거부했습니다.
스위스 종교개혁을 이끌었던 울리히 츠빙글리(Ulrich Zwingli,
1484~1531)도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말씀이며 그 권위는 어떤 종교회의나
교부의 주장보다도 더 높다.”라고 했습니다. 그의 가장 주목할
만한 공헌 중 하나는 1519년부터 마태복음에서 시작해 신약성경 전체를 강론한 겁니다. 그는 성경 본문에 기초한 설교를 처음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장 칼뱅(Jean Calvin, 1509~1564)은 마르틴
루터, 울리히 츠빙글리가 시작한 종교개혁을 완성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누구든지 창조주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선 성경을 이정표이자 교사로 삼아야 한다.”라면서 성경을 상고하는 일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의 영향으로 조선의 선교사들도 성경을 상고하는 일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초대 한국교회는 ‘사경회(Bible
Study Conference)’가 있었고, 그것이 교회 부흥의 원동력이었습니다. 우리 UBF의 뿌리도 성경을 상고함에 있습니다.
그런데 요즈음 성경을 상고함이 많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유투브나 게임, 넥플릭스 영화등 즐길거리가 많아져서 성경을 보는 시간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을 상고하는데 힘써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죄인이고, 그 죄인이 구원받고 의롭게 되는 것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예수님을 믿음으로만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알 수 있는 길이 무엇입니까? 오직 성경을 배움으로 이루어집니다. 누가 성경을 가르칠 수 있나요? 성경 교사인 우리가 가르쳐야 합니다. 성경을 가르치려면 날마다 성경을
상고해야 합니다.
베뢰아 사람들이 성경을 상고할 때 그 열매가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믿었습니다(12). 그들 중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도 적지 않았습니다. 말씀을 듣고 공부하면 누구든지 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데살로니가에 사는 유대인들은 바울이 베뢰아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사실을 알고 쫓아와 군중을 선동하여
소란을 피웁니다(13). 형제들은 바울을 바닷가로 보냈고, 실라와
디모데는 아직 베뢰아에 머뭅니다(14). 바울은 안내자를 따라 아덴으로 갑니다.
제2장. 아덴 전도(16-34)
바울의 아덴 전도를 네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겠습니다. 바울이 본 것, 느낀 것, 행한 것, 말한
것입니다.
1. 바울이 본 것
16절을 보십시오. “바울이
아덴에서 그들을 기다리다가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하여.” 바울은 헬라 최고의
지성과 문화를 자랑하는 도시, 아테네에 왔습니다. 아테네(Athens)는 여신 ‘아테나(Athena)’에서
유래했는데, ‘아테나’는
‘하늘의 여왕’이란 뜻으로 제우스의 외동딸이며, 아테네의
수호신입니다. 아테네에는 아크로 폴리스에 파르테논 신전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거대한 금과 상아로 만들어진 아테네 여신상이 서 있습니다. 그 신상의 번쩍이는 창끝은 64km 떨어진 곳에서도 보였다고 합니다. 그 외 아폴로, 제우스, 아프로디테, 헤르메스, 디오니소스, 포세이돈등 많은 신상들이 있었습니다. 올림푸스의 모든 신들이 거기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아름다웠습니다. 돌과 놋쇠, 금과 은과 상아와 대리석으로 만들어졌으며 그리스의 가장
솜씨 좋은 조각가들에 의해서 우아하게 만들어졌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본 것이 무엇입니까? 이러한 도시의 아름다움도, 솜씨 좋은 조각가들의 우아한 작품도 아니었습니다. 그 도시에 가득한, 다른 말로 하면 우상들로 완전히 뒤덮힌 도시를
보았습니다. 로마 풍자시인 크세노폰은 ‘아테네에는 그 나라의
나머지 모든 지역에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신들이 있었으며, 거기에는 사람을 발견하는 것보다 신을 발견하기가
더 쉽다’라고 하였습니다. 성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지 못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아무리 아름답게 꾸며져 있다 할지라도 바울을 감동시키지 못하고 도리어 답답하게 하였습니다. 이러한 영적인 눈이 우리에게도 있습니까?
2. 바울이 느낀 것
이를 본 바울의 반응이 무엇입니까? 크게 격분하였습니다. ‘격분하다’는 말은 헬라어로 ‘파로크쉬노’(paroxyno)인데, 여기서 발작(paroxysm)이란 단어가 파생되었습니다. ‘파로크쉬노’란 단어는 성경에서 통상적으로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에 대해, 특별히
우상숭배에 대한 그 분의 반응을 표현할 때 사용되었던 단어입니다. 그 옛날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께
십계명 돌판을 받아들고 이스라엘 진으로 내려왔을 때 그들이 금 송아지를 만들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낸
신이다’하면서 춤추며 뛰놀고 있었죠. 그때 모세가 격분하여
십계명 돌판을 던져 두 조각이 나게 한 것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또 예수께서 성전에서 사람들이 돈을
환전하며 짐승들을 사고 파는 것을 보고서 분노하사 상을 엎으시고 채찍을 만들어 짐승들을 쫓아내셨습니다. 바울은
지금 아덴 사람이 아무리 고상한 철학을 논하고 찬란한 문명을 꽃피웠지만, 그들이 창조주 하나님을 모르고
헛된 우상을 섬기고 있는 모습을 볼 때 격분하였습니다. 너무나도 화가 나고 슬프고 분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영광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사42;8)했던 말씀이 생각났을 것입니다. 그 분의 이름의 명예와 영광을 위해 그는 격분한 것입니다. 우상을
섬기는 세상을 보면서 우리도 이러한 격분을 하고 있습니까? 헨리 마틴(Henry
Martin)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영광 받으시지 않는다면 나는 계속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만일 그 분이 항상 치욕을 당하셔야 한다면 그것은 내게 지옥일 것이다”
3. 바울이 행한 것
바울이 참을 수 없는 격분으로 인해 무슨 행동을 합니까? 17절을
봅시다.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장터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 바울은 영적으로 무지한 이들에 대해서 안타까운 심령을 가지고 만나는 사람마다 붙들고 변론을 하였습니다. 이처럼 영적인 분노가 일어나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특히 그는 누구와 논쟁합니까? 에피쿠로스 학파와 스토아 학파 철학자들입니다(18). 에피쿠로스학파는 신들이 인간과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어 인간사에 관심도 없고 아무 영향력도 끼치지 않는다고
생각했어요. 그들은 유물론적 사고를 하였는데, 세상은 우연히
만들어졌으며 죽음 뒤에는 심판도 부활도 없다고 주장했어요. 그래서 살아있는 동안 쾌락을 추구하는 것을
최고의 목적으로 삼았습니다. 반면 스토아학파는 신이 있지만 범신론적으로 인식하였습니다. 만물에 다 신이 있다는 것이에요. 그들은 이성을 중요시 했고,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행복하게 사는 비결은
스스로를 포기하고 자급 자족하며, 운명을 거스르지 말고 자발적으로 순종해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숙명론, 복종, 고통
감수를 강조했습니다.
이들에게 바울이 예수와 부활을 가르치자 그들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어떤
사람은 “이 말쟁이가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려는거야?” 또
어떤 사람은 “그는 외국 신을 선전하는 사람 같다.”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바울을 붙들어 아레오바고로 가면서 이 새로운 가르침이 무엇인지 알려달라고 합니다.
4. 바울이 말한 것
아테네 최고의 법정인 아레오바고에서 바울이 말한 것이 무엇입니까? 먼저
그들이 종교성이 많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많은 신을 섬겼는데, 이름을
모르는 신까지도 섬겼습니다. 바울은 그들이 모르고 있는 그 신이 누구인지 구체화하여 설명합니다. 24절을 봅시다.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그 신은 바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하늘과 땅의 주인이므로 사람의 손으로 만든 신전에서 사시지 않습니다.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이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않습니다(25). 그분은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직접 주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창조 사역은 과거 한 번에 이루어진 사건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지금도 필요한 것을 채워주십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이 하나님의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그분은 한 사람에게서 모든 민족을 만들어 온 땅 위에 살게 하셨습니다(26).
하나님은 한 사람, 아담으로부터 모든 인류를 만드셨습니다.
그들이 사는 시기와 거주할 지역의 경계를 정하셨습니다. 나라의 운명과 영토가 모두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이렇게 하신 목적이 무엇이냐고요? 사람이 그분을 더듬어 찾도록 하심이었습니다(27).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분
안에서 살고, 움직이며, 존재합니다(28). 당시 아덴의 어떤 시인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아들 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께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합니까? 하나님을 사람의
생각과 기술로 금이나 은이나 돌이 새긴 형상 따위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29). 사람이 하나님을 물건으로
형상화하는 일은 하나님을 무시하고 거부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명령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눈감아 주셨지만, 이제는 어디에서나 모든 사람에게 “회개하라.”라고 명령하십니다(30).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세계를 정의로 심판하실
날을 정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31). 하나님은 자기가 정하신 사람을 내세워서 심판하실 터인데, 그를 죽은 사람 가운데서 살리셔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습니다.
그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분은 지금 살아계시고 장차 세상을 심판하러 오십니다.
자! 이러한 바울의 메시지를 듣고서 그들이 어떻게 반응합니까? 어떤 사람은 조롱하고, 어떤 사람은 그 일에 관해 다시 듣고자 했습니다(32). 바울은 메시지를 전하고 그곳을 떠납니다(33). 그러나 몇
사람은 바울을 따르며 믿었습니다(34). 그중에는 관리 디오누시오와 여자 다마리라, 그리고 다른 사람도 있었습니다. 비록 수는 적지만 귀한 열매를 맺었습니다. 이들을 통해 시간이 걸리겠지만 아덴이 복음화 될 것입니다.
저는 대학 1학년 가을 외국인 선교사와 중학교 동창을 통해 롬5:8“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말씀을 전해 듣고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였습니다.
예수님만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요 진리임을 깨닫게 하심을 생각할 때 너무나 감사가 되었습니다. 대학 2학년때 현대 철학을 수강했는데, 철학 교수님이 철학은 진리를 추구하는데
자기는 아직 진리를 발견하지 못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저의 마음에 불이 났습니다. “어떻게 철학교수가 진리를 모르면서 강의를 할 수 있단 말인가?” 수업이
끝나자 철학 교수님을 뒤따라갔습니다. 그리고 할 말이 있다며 교수님을 잔디에 앉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진리되신 예수님을 증거했습니다. 철학교수님은 묵묵히 다 듣고서 ‘알았어’하며 가셨습니다. 그때
저는 알았습니다. “철학이 결코 진리를 알게 하지는 않는다. 오직
성경만이 진리를 말해주며, 성령께서 우리를 진리의 길로 인도하신다” 우리에게
말씀을 열어주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우리 구주 예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그리고 예전의 그
열정이 식어버린 현재의 나 자신을 돌아보며 회개합니다. 우상이 가득한 세상을 보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격분할 수 있는 그러한 눈과 마음 주시길 기도합니다. 안타까운 심정으로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길 기도합니다.
결론입니다. 바울은 아덴에서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았고, 격분했고, 전도했고, 예수와
부활을 전하였습니다. 그리고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도시와 학교, 직장, 가정, 교회에서 우리가 영적 센스를 가져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가
날마다 말씀을 상고하고 말씀대로 살아가고자 먼저 힘써야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