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사도행전 제 17 강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말씀 / 사도행전 18:1-23
요절 / 사도행전 18:9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오늘 말씀은 바울의 고린도 교회 개척에 관한 내용입니다. 고린도는
로마 총독이 거주한 아가야 지방의 수도였습니다. 신흥 항구도시로 무역과 상업이 발달하였습니다. 그래서 고린도 사람들은 부유하였습니다. 사치와 향락 문화가 발달하였습니다. 성적으로 방탕했습니다. 그곳에 있는 아프로디테 신전에는 1,000 여명의 여사제들이 있었는데 대부분이 매춘부들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고린도는 복음화 되기 어려운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사역으로 이곳에 큰 복음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난 비결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이를 배워 고린도와
같은 우리 시대를 섬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바울은 아덴에서의 사역을 마치고 고린도에 도착했습니다. 아덴이 철학의
중심지라면 고린도는 상업의 중심지였습니다. 바울이 고린도에 왔을 때 누구를 만나게 됩니까? 2절입니다. "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한 사람을
만나니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 고로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새로 온지라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 본도(Pontus)는 그 뜻이 "바다"인데 소아시아 북부 흑해 연안의 지방을 지칭합니다. 그곳 출신의 아굴라는 유대인이었는데 그의 아내는 브리스길라였습니다. 브리스길라는
로마 귀족들이 흔히 사용하던 이름으로 그녀는 로마인이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들은 글라우디오 황제의
유대인 추방령에 따라 로마를 떠나 고린도로 오게 되었습니다. 이 유대인 추방령은 AD49년에 내려졌습니다. 로마에 사는 유대인들이 '크레스투스'(Chrestus)라는 사람의 선동으로, 계속해서 폭동을 일으켰기 때문이었습니다.
아굴라 부부의 직업은 천막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당시에 로마 군대에
천막을 공급하는 수요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바울도 천막을 만드는 기술이 있었습니다. 원래 유대인들은 자녀들에게 성경 지식뿐 아니라 기술을 한 가지씩 가르쳤습니다.
어디가든지 생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함이었습니다. 바울의 고향 길리기아 다소는 천막과
벽걸이 커튼을 만드는 기술이 매우 발달하였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복음 역사에 아무런 장애가 없게
하려고 자비량의 길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아굴라 부부를 만나 그 일을 동업하게 된 것입니다.
아굴라 부부는 성령 강림 오순절에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영접한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로마로 돌아와서 세운 교회를
통해 예수를 믿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후에 아굴라 부부가 바울의 평생 동역자가 된 것을 보면, 바울과 공동생활을 하며 제자로 양육을 받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이 12제자들과 함께 사시면서 제자양성을 하신 것 같이 바울은 그들과 공동생활을 하면서 그들이 영적으로 성장하도록
도왔습니다. 바울은 동역자의 중요성을 잘 알았습니다. 아굴라
부부를 사랑하였고 빼어난 복음의 일꾼이 되도록 섬겼습니다. 그들도 바울을 사랑하며 적극적으로 동역하였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동역자로서 가장 아름다운 부부는 바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일 것입니다. 교회에는 실제로 이러한 동역자 부부가 많이 필요합니다. 자기 일을
열심히 하면서도 언제나 든든한 조력자가 되는 부부. 성도의 필요를 돌아보고 적극적으로 돕는 부부. 복음 사역이 일어나는 곳이면 어디든지 항상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부부. 영적으로
배움이나 격려가 필요한 성도가 있으면 조용히 데려다가 가르쳐주는 부부. 이런 동역자 부부가 필요합니다. '마음이 맞는 신실한 세 가정만 있으면 교회는 문제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 정도로 충성된 동역자를 찾기는 쉽지 않습니다.
바울은 브리스길라 아굴라에 대해 로마서 16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그들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도 내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그들에게 감사하느니라" 그들은
자기들의 목숨을 바칠 정도로 바울을 동역한 것입니다. 이러한 동역자들이 있기에 고린도 개척이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합심 동역의 역사입니다. 겸손히
자기를 낮추고 생명의 동역을 할 때 하나님의 역사는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 이러한 아름다운
동역의 역사가 활발히 일어나기를 기도합니다.
2.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힌 바울
5절입니다.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부터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언하니"
16, 17장을 기억해보면, 바울은 마게도냐인의 환상을 보고 유럽으로 건너와 빌립보에 도착했습니다. 그 후 데살로니가, 베뢰아, 아덴, 고린도로 이동하였습니다. 바울이 먼저 이동하고 실라와 디모데가 뒤
따라 온 것이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에 있을 때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부터 내려왔습니다. 구체적으로는 디모데가 데살로니가로부터 내려왔고 실라는 빌립보에서 내려왔습니다.
그들이 거의 동시에 고린도에 왔거나 디모데가 약간 먼저 도착한 것으로 봅니다. 그들은 모두
바울에게 힘이 되는 소식을 가지고 왔습니다. 먼저 디모데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환난 가운데서도 기쁨으로
신앙생활에 힘쓴다는 기쁜 소식을 가져왔습니다. 목자 바울을 사모하고 있다는 말을 전해왔습니다. 이 소식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 대한 걱정이 태산 같았던 바울에게 큰 힘이 되었습니다. 또한 실라는 빌립보교회 성도들이 모은 선교헌금을 가지고 왔습니다. (고후11:9; 빌4:14,15) 이 헌금은 제3차 전도여행에 나오는 예루살렘 성도 구제를 위한 헌금이 아니었습니다. 순수하게
바울의 사역을 지원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는 바울에게 매우 유용한 것이었습니다. 바울이 당분간 생계를 위해 일하지 않고 말씀역사에만 전념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빌립보교회 성도들의 기도와 사랑에 큰 위로와 힘을 얻었습니다.
이때부터 바울은 무엇을 합니까? 5절 하반절입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언하니"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혔다'는 말이 무엇일까요? '붙잡혔다'는
말은 '둘러싸다', '가두다', '강권하다'는 뜻입니다. (눅8:45; 눅19:43; 고후5:14)
다른 말로 이는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전하고 가르치는 일에만 전심전력했다는 뜻입니다. 그는
말씀 연구에 올인하면서 진리를 발견하는 기쁨이 넘쳤습니다. 말씀의 샘에서 나오는 생수를 마시는 가운데
힘이 넘쳤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심령에 밀려왔습니다. 이것이
그가 말씀에 붙잡혔다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말씀에 둘러싸이고, 말씀에
갇혔습니다. 말씀에 강권되어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거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가 증거한 것이 무엇일까요? 바울은 후에 고린도교회 개척기를 회상하면서
다음과 같이 고백했습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2:2) 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을 고린도에서 힘써 증거한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배울 점이 무엇입니까? 복음의 일꾼은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힌바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바울을 붙잡은 말씀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는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에 붙잡혔습니다. 주체할 수 없는 감동과
열정으로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전하였습니다. 사실 복음을 전하는 것보다 더 귀한 것이 없었습니다. 이 복음을 듣고 믿는 자마다 죄사함과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온갖 비난 가운데서도 전도하기를 쉬지 않았습니다. 전도자의 삶을 살기
위한 모든 고생을 감당하였습니다. 자기 목숨을 주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그가 먼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에 붙잡혔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히는 삶입니다. 말씀에
둘러싸이고, 말씀에 갇히고, 하나님의 말씀에 강권되는 삶입니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렘20:9) 말씀을 전하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포기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그럴 때마다 그의 중심이 불이 붙는 것 같고 골수에 사무쳐 여호와를 선포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바울도 고전9:16에서 말합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이라" 부득불
한다는 것은 NIV로 "I am compelled to
preach" 입니다. 강권되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도들도 유대 공회원들에게 "우리는 말하지
않을 수 없노라"(행4:20)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힌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말씀을 깊이 파고 묵상하여야겠습니다. 말씀을 깊은 감동으로 받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가르칠 때 지식만이 아니라 성령의 깊은 감동과 능력으로 전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3. 디도 유스도의 집에 머문 바울
바울이 복음을 담대히 증거하였을 때 유대인들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그들은
도리어 바울을 대적하며 비방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기가 죽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들을 향해 옷을 털었습니다. 옷을 턴다는 것은 그가 전하는
복음에 순종하지 않는 그들과는 상관이 없다는 표시요, 그들이 심판을 받아도 바울은 더 이상 책임이 없다는
선포였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경고합니다.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이 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 바울은 그들에게 경고하고 이제 부터 이방인 선교를 하기로 방향을 잡았습니다. 이에 바울은 회당 옆에 사는 디도 유스도라 하는 사람의 집으로 옮겼습니다. 빌립보에서의
루디아의 집과 같이 디도 유스도의 집이 고린도 선교사역의 Base Camp 가 되었습니다.
선교 역사를 섬기며 한 집에 머무르며 그 집을 중심으로 제자 양성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을 전도여행을 보내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
집에 유하며 주는 것을 먹고 마시라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옮기지 말라"
(막10:7) 주님이 원하시는 선교 방법은 한 집에 머무는 것입니다. 그 집 사람들을 먼저 제자로 양성하는 것입니다. 많은 수의 사람들을
섬기기보다 그 집에 오는 소수의 제자들을 세워나가는 것입니다. 바울은 디도 유스도의 집에 머물며 성실하게
제자들을 한 사람씩 세워나갔습니다.
그랬을 때 그 결과가 어떠했습니까? 8절입니다. "또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집안과 더불어 주를 믿으며 수많은 고린도 사람도 듣고 믿어 세례를 받더라" 고린도의 유력한자 회당장 그리스보와 그 온 가족이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회당장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것은 그 도시에 큰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그의
회심을 기점으로 수많은 고린도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고전1:14-16) 그야말로 고린도의 영적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이는 무리들에게
배격당한 것에 낙심하지 않고 디도 유스도의 집에서 소수의 사람들을 세워 나간 바울의 사역의 결과였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일어납니다. 믿음을 갖고 꾸준히 말씀역사를 섬기며 제자를 세워나갈 때 제자들이
또 다른 제자들을 세우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한 사람, 한
가정의 귀함을 알고 힘써 제자양성을 섬기기를 기도합니다.
4.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9절입니다.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고린도 역사는
왕성하게 일어났지만 한편 바울은 두려움에 사로잡힌 것 같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말하지 말고 조용히
지내고자 한 것 같습니다. 이는 고린도의 죄의 세력이 너무 강하고, 유대인의
박해가 극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천하의 바울도 두려워했다는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그도 사람입니다. 구약의 선지자 엘리야도 바알 선지자 450명을 죽이고서도 이세벨의
위협 앞에 두려워 도망을 갔습니다. 사람이 박해 앞에 두려움을 갖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바울을 우리와 전혀 다른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우리와 동일한 연약함을 갖고 있는 보통 사람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주님은 바울에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전도인에게 최대의 적은 두려움입니다. 사람이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무기력해집니다.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도
믿음으로 살다가도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놓치면 순식간에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매사에 두렵고 자신이 없어집니다. 두려움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마귀가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바울을 찾아오셔서 두려워하지 말고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또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주님께서 그와 함께 하시며 아무도 해치지 못할 것이라는 확신을 심어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다"고 하셨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면 그것을
환영할 자들, 감사하며 받을 자들, 믿고 구원받을 자들이
많다는 확신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고린도처럼 타락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회를 복음으로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붙들려 살며 전도해야 합니다. 침묵하지 않고 복음을 말해야
합니다. 말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은 말만 해서
되냐 좋은 영향력을 끼쳐야 한다고 합니다. 삶으로 복음은 전해야 한다고 합니다. 물론 그리스도인의 삶이 중요합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좋은 영향을
끼쳐도 복음을 말하지 않으면 그들이 예수님을 믿을 길이 없습니다. 말로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위로와 격려에 힘입어 두려움을 극복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전도했습니다. 침묵하지 않고 계속하여 복음을
말했습니다. 그러기를 일 년 반 동안 계속했습니다. 그랬을
때 고린도교회는 반석 위에 굳게 서게 되었습니다.
5. 갈리오를 통해 바울을 보호하신 하나님
12, 13절입니다. "갈리오가
아가야 총독 되었을 때에 유대인이 일제히 일어나 바울을 대적하여 법정으로 데리고 가서 말하되 이 사람이 율법을 어기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사람들을
권한다 하거늘" 갈리오가 아가야의 새로운 총독으로 부임했습니다. 갈리오는 스토아 철학자 세네카의 아들로서 청렴결백하고 덕망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총독이 새로 부임하면 그 지방 주민들로부터 환심을 얻어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이때를 이용하여 눈엣가시와 같은 바울을 쫓아내고자 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일제히 일어나 바울을 대적하여
법정으로 끌고 갔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율법을 어기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사람들을 가르친다고 고소했습니다. 바울이 로마에서 공인되지 않은 불법종교를 전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총독 갈리오는 어떤 판결을 내렸습니까? 14,15절입니다. "바울이 입을 열고자 할 때에 갈리오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너희 유대인들아, 만일 이것이 무슨 부정한 일이나 불량한 행동이었으면 내가 너희 말을 들어 주는 것이 옳거니와 만일 문제가 언어와
명칭과 너희 법에 관한 것이면 너희가 스스로 처리하라 나는 이러한 일에 재판장 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갈리오는 바울에게 로마법에 저촉되는 죄가 있으면 재판을 하여 벌을 내려야 합니다. 그러나
그는 유대인들의 고소가 그런 것이 아니라 그들의 종교에 관한 문제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갈리오는 이런
일에 재판장이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는 타 민족의 종교 문제에 관여하지 못하도록 한 로마법을
정확하게 적용하여 그들의 고소를 기각시켰습니다. '로마법상으로 징벌할만한 부정한 일이나 불량한 행동이
없다'라고 판결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고소한 자들을 법정에서
쫓아내었습니다.
그러자 법정 앞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17절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회당장 소스데네를 잡아 법정 앞에서 때렸습니다. 바울에
대한 유대인들의 고소가 기각되자 반유대적 감정을 품고 있던 헬라인들이 소송의 책임자인 회당장을 무고죄로 구타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갈리오가 이 일을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자기의 재임 중에
유대인들을 엄격하게 다루겠다는 표현으로 회당장이 폭행을 당하는 것을 방치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이런 총독 갈리오의 기각 결정은 선교적인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동안 바울이 선 법정의 판결은 그 도시에서만 효력을 갖는 판결이었습니다.
(읍장) 그러나 고린도는 달랐습니다. (총독) 갈리오의 판결은 아가야 주에 속한 모든 도시에 효력이 있었습니다. 또한
로마제국 내 다른 여러 주에도 선례가 되는 판결이 될 수 있었습니다. 총독이 주관하는 법정에서 기독교가
징벌할 대상이 아니라고 판결하는 바람에, 물론 유대인들의 불법적인 폭력적인 비방과 대적이 일어났기는
했지만, 법적으로는 향후 10 여 년간 바울은 합법적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방인을 통해서도 복음의 일꾼을 보호하신 것입니다.
6.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깍은 바울
18절입니다. 바울은 더
여러 날 머물렀습니다. 자기가 떠나도 고린도 교회가 설 수 있도록 리더들을 굳게 하였습니다. 그 후 형제들과 작별하고 수리아로 떠났습니다. 이때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도 함께 떠났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일찍이 서원이 있었으므로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습니다. 겐그레아는 고린도의 외항이었으며, 여집사 뵈뵈가 섬기는 가정교회가
있는 곳이었습니다. (롬16:1,2) 바울은 그곳에서 머리를
깎았습니다. 머리를 깎았다는 것은 그가 나실인 서원을 했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민6:2-21) 누구든지 나실인이 되기를 원하면 일정 기간 자기
몸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릴 수 있었습니다. 서원 기간 동안 포도주와 독주를 멀리 하고 머리를 깎지
않았습니다. 이는 육체의 소욕을 멀리하고 자신을 하나님께 전폭적으로 복종시키는 표현이었습니다. 그 기간 동안 율법 연구와 예배와 경건에 힘쓰는 생활을 하였습니다. 서원한
날이 차면 희생 제사를 드린 후에 머리를 깎고 제단에 불태우며 하나님께 감사하였습니다.
성경에는 바울이 일찍이 무엇을 서원했는지 기록하지는 않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서원이 다 이루어졌기 때문에 머리를 깎고 하나님 앞에 감사의 단을 쌓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마
바울은 고린도 개척을 시작하면서 복음화하기 어려운 그 도시를 위해 자신의 온 몸을 드리고자 결단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였을 것입니다. 돌아보니 하나님의 은혜가 컸습니다. 고린도에 오자마자 브리스길라
아굴라 부부를 만나 천막을 만드는 일을 같이 할 수 있게 하시어 물질 자립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들을
충성스런 동역자들로 세워주셨습니다. 디모데와 실라를 마게도냐로부터 보내주셔서 바울로 하여금 큰 힘과
위로를 얻게 하셨습니다. 빌립보 교회의 헌금으로 전적으로 말씀역사에 자신을 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럴 때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에 잡히게 하셨습니다. 두려움에 빠져있을
때 주님이 친히 환상 가운데 나타나셔서 믿음을 심어주셨습니다. 침묵하지 마고 말하라는 분명한 방향을
주셨습니다. 유대인들에게 고소를 당했을 때 로마총독 갈리오의 무죄 판정을 받게 하셨습니다. 유대인이 그의 복음 역사를 방해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이런 가운데
하나님은 고린도에 헌신된 많은 제자들을 세워주셨습니다. 곧 디도 유스도, 회당장 그리스보와 그의 가족들, 에배네도와 스데바나 (롬16:5; 고전16:15), 브드나도와
아가이고(고전 16:17) 등이었습니다. 생각해보니 자기는 말씀에 잡혀 복음을 전한 것 밖에 없었는데 하나님이 많은 일을 하신 것이었습니다. 바울의 서원 기도를 받으시고, 하나님이 인도하셨고, 하나님이 역사하셨고, 하나님이 보호하셨고, 하나님이 사람들을 변화시켰습니다. 바울은 이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할
때 뜨거운 눈물로 감사의 예물을
드렸을 것입니다.
19절입니다. "에베소에
와서 그들을 거기 머물게 하고 자기는 회당에 들어가서 유대인들과 변론하니" 바울은 아굴라 부부와
함께 에베소에 도착했습니다. 에베소는 로마의 아시아 지역의 수도이며 상업 중심지였습니다. 바울은 이곳에 도착한 후에 아굴라 부부를 그곳에 머물게 했습니다. 자기는
회당에 들어가서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들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20절입니다. "여러 사람이 더 오래 있기를 청하되 허락하지
아니하고" 여러 사람들이 더 오래 있으며 말씀을 전하기를 청했습니다. 그들의 반응이 매우 호의적이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 선교의 가능성을
보았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바울이 오래 체류하기를 간청했으나 허락하지 않고 자신의 여행길을 재촉했습니다.
바울은 그들과 작별하면서 어떤 약속을 남겼습니까? 21절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뜻이면 너희에게 돌아오리라" 바울은
하나님의 뜻이면 다시 에베소로 돌아오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배를 타고 에베소를 떠나 가이사랴에 상륙하여
올라가 교회의 안부를 물었습니다. 여기서 교회의 안부를 물은 것은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사도들을 만난
것을 의미합니다. 그는 예루살렘에 가서 사도들과 교제하며 간단하게나마 제2차 전도여행 보고를 하였을 것입니다. 그 후 수리아 안디옥교회로 내려갔습니다. 그는 모교회인 안디옥 교회에서 유럽 선교보고회를 가졌습니다. 왜
아시아 선교를 포기하고 유럽으로 건너갔는지와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 아덴, 고린도 개척 역사를 보고했습니다. 바울은 안디옥에서 AD 52년 여름부터 53년 봄까지 머물렀습니다. 이 기간 동안 영육간에 쉼을 얻고, 3차 전도여행을 계획하며 준비하였습니다.
결론적으로, 바울은 고린도를 개척할 때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한 가정을
잘 섬겼습니다. 그 한 가정이 변화되어 평생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또한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밝히 증언했습니다. 많은 영혼들이 주님께 돌아왔습니다. 바울은 약하고 두려워 떨었지만 주님께서 찾아오셔서 위로하시고 격려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느니라. 이 성에는 내 백성이 많으니라" 이는 바울에게 큰 위로와
격려가 되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주신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선교 역사의 주인이십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을 믿고 온 마음으로 말씀을 사랑함으로 말씀에 붙잡혀 복음을 말하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