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사도행전 제 19 강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한 바울 말씀 / 사도행전 20:1-38 요절 / 사도행전 20:31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바울의 3차 전도여행은 사도행전18:23에서 시작했습니다. 19장, 20장을 거쳐 21:14절에서 마칩니다. 3차 전도여행 중에서 가장 큰 성령의 역사가 있었던 곳은 지난 주 배웠던 에베소였습니다. 바울은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또 다시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만납니다. 오늘 본문인 사도행전 20장은 절반 이상이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전한 말씀입니다. 바울이 어떻게 에베소 교회를 개척했고, 장로들이 어떻게 그 역사를 계승해야 하는지 당부하는 내용입니다. 우리가 이 시간 바울의 간증과 당부의 말씀을 통해 바울의 신앙과 목자 생활을 잘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겠습니다. “소요가 그치매 바울은 제자들을 불러 권한 후에 작별하고 떠나 마게도냐로 가니라” 소요가 그쳤습니다. 아데미 여신의 모형을 만들어 큰 돈을 벌었던 업자들이 바울의 복음 전파로 인해 매출이 급감하자 대규모 시위를 일으킨 것이었습니다. 다행히 서기장이 개입해서 그들을 모두 해산시켰습니다. 그러나 대규모 시위로 인해 제자들의 마음이 위축되어 있었습니다. 바울은 제자들을 불러 격려했습니다. 그리고 당초의 계획대로 에베소를 떠나 마게도냐로 갔습니다. 바울은 2차 전도여행 때 개척했던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 아덴, 고린도를 다니며 제자들을 여러 말로 격려했습니다. 특히 고린도에서 석 달 동안 머물렀습니다. 그 기간 바울은 로마서를 집필했습니다. 사도행전19:21절에서 바울은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로마 선교를 계획했습니다. 그는 계획만 세우지 않았습니다. 실제 로마와 가까운 고린도에 왔을 때 로마 성도들에게 편지를 써서 보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배를 타고 수리아로 곧 바로 가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바울을 해치려고 공모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바다 위 도망 갈 곳 없는 배 안에서 암살하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바울은 계획을 바꾸었습니다. 수리아로 직행하지 않고 다시 왔던 길을 따라 돌아갔습니다. 4절은 이 때 바울과 함께 한 형제들의 이름입니다. “아시아까지 함께 가는 자는 베뢰아 사람 부로의 아들 소바더와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와 세군도와 더베 사람 가이오와 및 디모데와 아시아 사람 두기고와 드로비모라” 총 7명입니다. 그들은 각 지역에서 모금한 구제헌금을 가지고 바울과 함께 예루살렘까지 가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고린도에서 배타고 드로아까지 먼저 가서 바울을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바울은 육로를 통해 빌립보까지 갔습니다. 무교절이 지난 후에 배를 탔습니다. 5일 만에 드로아에 도착했습니다. 먼저 도착한 형제들과 만났습니다. 거기서 7일 동안 함께 머물렀습니다. 그 주간의 첫날에 바울 일행은 떡을 떼기 위해 모였습니다. 안식일 다음 날 곧 주일에 모여서 예배드린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다음 날 곧 월요일에 드로아를 떠날 예정이었습니다. 바울은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르는 드로아 교회 성도들에게 가능한 많은 것을 전해주고자 했습니다. 바울의 설교는 좀처럼 끝나지 않았습니다. 해가 지고 어두워졌습니다. 등불을 많이 켜 두었습니다. 유두고라 하는 청년이 창에 걸터앉아 말씀을 듣다가 깊이 졸았습니다. 말씀이 더 길어지자 결국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3층에서 뚝 떨어졌습니다. 달려 내려가 보니 죽어 있었습니다. 바울도 황급히 따라 내려갔습니다. 그 위에 엎드려 몸을 안고 말했습니다. “떠들지 말라 생명이 그에게 있다” 유두고를 살린 것입니다. 살린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갑작스런 사고로 분위기가 어수선해졌습니다. 밤도 늦었기 때문에 그만 헤어질 만도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다시 3층으로 올라갔습니다. 떡을 떼어 먹으며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했습니다.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말씀의 은혜로 인해 잠을 잊었습니다. 바울은 밤새 한 숨도 자지 못했습니다. 월요일 아침 곧 바로 드로아를 떠났습니다. 바울은 동행하는 형제들에게 먼저 배 타고 앗소까지 가도록 하고, 자신은 걸어서 갔습니다. 앗소에서 형제들을 만났습니다. 함께 배 타고 미둘레네, 기오, 사모를 거쳐 밀레도에 도착했습니다. 밀레도는 에베소 남쪽 45Km 지점에 있습니다. 바울이 에베소를 들르지 않고 지나쳐 온 것입니다. 그 이유가 16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이 아시아에서 지체하지 않기 위하여 에베소를 지나 배 타고 가기로 작정하였으니 이는 될 수 있는 대로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이르려고 급히 감이러라” 바울도 에베소를 방문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일정을 맞추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에베소를 지나쳐 왔습니다. 대신 사람을 보내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청했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떠난 후 에베소 교회를 섬기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부른다는 말을 듣고 그들은 만사를 뒤로 하고 밀레도로 달려 왔습니다. 오랜만에 사랑하는 목자 바울을 만나 감회가 남달랐을 것입니다. 18~21절을 보겠습니다. “오매 그들에게 말하되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여러분 가운데서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여러분도 아는 바니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 바울이 자신의 수고를 알아 달라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에베소 교회를 섬겨야 하는 장로들에게 실제적인 도움을 주기 위해서 자신의 목자생활을 진솔하게 간증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목자 생활의 롤 모델이 필요했습니다. 그들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바울의 섬김을 받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바울 없이 교회를 섬기는 위치에 있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보고 배운 것을 기초로 교회를 섬기고자 애썼을 것입니다. 바울의 겉모습을 흉내 내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내면적인 부분, 곧 영적 가치관과 목자 생활의 철학을 모르면 한계에 부딪칠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의 간증은 짧지만 목자생활의 중요한 네 가지 부분을 다루고 있습니다.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모든 겸손과 눈물로 주를 섬겼습니다. 19a절입니다.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모든 겸손이라고 말한 것은 겸손을 그만큼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여러모로 겸손하기 쉽지 않은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는 목자 생활의 열매가 많았습니다. 깊은 영적 비밀들을 깨달았습니다. 초대 교회에 그의 명성이 높았습니다. 그에 비해 에베소 성도들은 초보 수준의 신앙인들이었습니다. 영적 지식도 부족하고, 죄에 자주 넘어지고, 불순종하기를 잘했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감정적으로 대하기 쉬웠습니다. 권위적으로 아랫사람 부리듯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겸손으로 대했습니다. NIV 영어 성경에는 greate humility 곧 대단한 겸손으로 나옵니다. 바울이 왜 그토록 겸손하게 했을까요? 그들이 비록 바울의 전도로 구원을 받았지만 바울에게 속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피값을 지불하고 사셔서 하나님의 아들로 높이신 고귀한 존재들입니다. 바울이 그토록 겸손하게 한 또 하나의 이유는 양들이 순종해야 할 대상이 인간 목자 바울이 아니라,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양들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장하도록, 최대한 자신을 낮추고 겸손, 겸손, 또 겸손했습니다. 대신 그들의 죄 문제를 들고 하나님께 나아가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목자의 심정과 눈물의 사랑으로 양들의 죄 문제를 도왔습니다. 에베소 교회 장로들은 연장자로서의 권위를 내세우는 일이 없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떠난 후에도 양들이 계속해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장하도록 최대한 자신을 낮추고 대신 눈물의 기도와 사랑으로 섬겨야 합니다. 둘째, 시험을 참고 주를 섬겼습니다. 19b절입니다.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바울은 가는 곳마다 동족 유대인들의 방해와 공격을 받았습니다. 에베소에서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박수를 받으며 목자 생활하는 것은 할 만합니다. 그러나 끊임없는 비방과 모함과 훼방과 공격 속에서는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지속하기가 어렵습니다. 포기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모든 시험을 참았습니다. 변함없이 주를 섬겼습니다.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는 사도 바울이 경험한 것과는 다른 형태의 시험이 있을 것입니다. 물질 문제, 건강 문제, 자녀 문제, 인간 갈등, 때로는 자신의 연약함과 죄 문제가 있습니다. 이 때 그들은 목자 바울을 기억해야 합니다. 바울이 모든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처럼 그들도 상황에 요동하지 않고 신실하게 주를 섬기며 양 무리를 돕는 목자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셋째, 성도들의 유익을 위해 가르치기에 힘썼습니다. 20절을 보겠습니다.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유익한 것’은 영어로 ‘helpful'입니다.. 바울은 늘 교회와 형제들의 형편을 살폈습니다. 그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말씀을 주시도록 기도하고 연구했습니다.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면 그것이 무엇이든지 거리낌 없이 전하고 가르쳤습니다. 무엇이든지라는 말은 듣기 좋은 말과 그렇지 않은 말을 다 포함합니다. 어떤 것은 공중 집회에서 어떤 것은 각 가정을 심방해서 전하고 가르쳤습니다. 이렇게 한 목적은 한 가지입니다. 교회와 형제들의 유익입니다. 에베소 교회 장로들은 연륜이 되어 장로로 세움을 받았지만, 각자 자기 가정이 있고, 생업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 가정과 생업을 잘 감당할 뿐 아니라, 교회와 성도들의 형편도 살펴야 합니다. 교회와 성도들의 유익을 위해서 기도하고 말씀을 연구하고 가르쳐야 합니다. 공적 예배에서도 가르치고, 각 가정을 심방해서 전하고 가르치는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넷째, 회개와 믿음을 증언했습니다. 21절을 보겠습니다.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 증언했다는 것은 현재완료형으로 한두 차례 언급한 수준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증거하고 가르친 것을 의미입니다. 회개와 믿음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회개와 믿음은 거듭날 때 뿐 아니라, 거듭난 후에도 중요합니다. 신앙 성장의 필수 요소입니다. 회개란 죄를 대하는 마음의 자세입니다. 죄를 보고도 가볍게 여길 수 있습니다. 시대 분위기로 간주하고 타협할 수도 있습니다. 쉽게 극복되지 않는 죄 문제에 대해서는 포기하고 방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죄를 방치하면 영적으로 거듭났을지라도, 실제 삶은 죄의 지배를 받고, 죄의 열매를 맺습니다. 영적인 성장이 멈추고 오히려 퇴보합니다. 자칫 미혹되어 이단에 빠지거나, 건강하지 못한 왜곡된 신앙관이 형성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신 것은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입장은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의 입장도 변함이 없어야 합니다. 죄는 회개의 대상입니다. 회개는 한자어로 품을 悔, 고칠 改 입니다. 마음에서 뉘우치고, 행동을 고치는 것입니다. 후회하고 뉘우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행동과 삶을 고쳐야 합니다. 어떤 방향으로 고쳐야 합니까? 21절 앞 부분만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으로 고쳐야 합니다. 회개는 사람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대한 것입니다. 곧 회개는 하나님과 가까워지고 죄와 멀어지기 위한 신자의 내적인 몸부림입니다. 이것은 신자의 영적 성장, 곧 성화의 필수 과정입니다. 회개를 언제까지 몇 살까지 해야 합니까? 천성에 입성할 때까지 해야 합니다. 죄를 회개할 때 우리가 놓치기 쉬운 것이 있습니다. 회개해도 죄가 반복될 때 불의감에 사로잡혀 있기 쉽습니다. 율법적인 방법으로 죄를 극복하고자 노력하기 쉽습니다. 그런 방법으로는 결코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회개와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무엇을 믿어야 합니까? 우리의 죄 값을 다 지불하신 것을 믿어야 합니다. 더 나아가 우리의 죄악된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를 살리신 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 믿음이 우리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킵니다. 성령 안에 거하게 하고, 영적으로 성장하게 합니다. 우리는 죄를 회개할 뿐 아니라, 매순간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붙들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수양회 때 한두 번 은혜 받는 말씀 정도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날마다 붙들고 믿어야 할 신앙생활의 잇템(the must have item)입니다. 에베소 교회 장로들은 바울이 떠난 후에도 변함없이 회개와 믿음의 중요성을 증언할 수 있어야 합니다. 회개는 민감한 부분이기 때문에, 최대한 적게 말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먼저 회개와 믿음을 통한 영적인 성장을 이루고 성도들이 복음 위에 견고히 서도록 도와야 합니다. 22~24절은 복음을 맡은 바울의 사명인으로서의 자세입니다. 22,23절을 보십시오.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바울의 다음 목적지는 예루살렘입니다. 성령은 바울이 그곳에서 결박과 환난 당할 것을 증언했습니다. 결박과 환난을 당한다면 가지 말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피하지 않았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24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세상에서 내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바울은 더 귀한 것이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는 달려갈 길을 마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주 예수께 받은 사명을 완수하는 것입니다. 달려갈 길은 영어로 the race 입니다. 레이스에는 출발점과 종착점이 있습니다. 종착점에 도착해야 경주를 마친 것입니다. 신앙의 출발점은 거듭난 시점입니다. 사람들은 신앙의 레이스를 달리면서 가능하면 종착점에는 성공과 안정, 덤으로 넉넉한 물질이 있기를 원합니다. 성령이 그런 길로 인도하시면 순종하지만, 고난의 길로 인도하시면 불순종합니다. 바울의 신앙 레이스의 종착점에는 성공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령이 인도하시는 곳은 어디든 순종해서 갔습니다. 바울은 또 복음을 증언하는 사명을 자신의 생명보다 더 귀하게 여겼습니다. 이는 복음 전파야 말로 죄로 죽어가는 영혼들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들고 가서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할 수 있다면 그는 자기 생명을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개척할 때도 그와 같은 자세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25~27절을 보십시오. “보라 내가 여러 분 중에 왕래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였으나 이제는 여러분이 다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 줄 아노라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에게 증언하거니와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여러분에게 전하였음이라” 바울은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깨끗하다고 증언할 정도로 하나님의 뜻을 에베소 성도들에게 다 전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떠난 후 교회를 분열시키고 양 떼를 어지럽게 하는 두 부류의 사람들인 나타날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이 바울의 빈자리를 대신해 주기를 당부했습니다. 28~30절을 보십시오.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 교회 내 사나운 이리가 들어올 것입니다. 영지주의 같은 이단의 세력이 침투할 것을 염두에 두고 한 말입니다. 외부에만 위협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내에서도 제자들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장로들은 그런 일이 발생할 때 신속하게 대처해야 하겠지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늘 삼가하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온 양 떼에게 관심을 갖고 두루 살펴야 합니다. 성령께서 온 양 떼들 가운데 그들을 감독자로 세우셨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피로 사신 하나님의 몸입니다. 장로들은 자기 몸의 건강 상태를 민감하게 살피듯 교회 지체들의 영적 상태를 세심하게 살펴야 합니다. 영적으로 아픈 지체가 없는지 살펴야 하고, 죄로 고통하는 지체가 있을 때 함께 아파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지난 삼 년간 이와 같은 자세로 교회를 섬겼습니다. 31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훈계는 영어로 warning입니다. warning 은 위험 상황을 사전에 경고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 죄는 위험한 것입니다. 방치하면 자신도 위험하고 교회 전체에도 악영향을 끼칩니다. 바울은 죄에 대해서 민감하게 깨어 있었습니다. 각 사람의 죄 문제와 씨름해 주었습니다. 죄를 죄로 깨닫도록 훈계하고, 회개에 이르기까지 돕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일을 삼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감당했습니다. 쉬지 않고 라는 말이 영어로는 never stopped warning 입니다. 결코 멈추지 않았고, 또 멈출 수 없었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강압적으로, 권위적으로 훈계하지 않았습니다. 눈물로 훈계했습니다. 양들은 바울의 눈물의 훈계를 받아들였습니다. 죄를 회개하고 믿음의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소수 제자들의 회개와 변화는 에베소 복음 역사의 견고한 기초가 되었습니다. 그들로부터 시작해서 말씀 역사가 흥왕하게 일어났고 에베소와 아시아 전역에까지 복음이 널리 전파되었습니다. 이제는 장로들이 그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고 믿음의 사람으로 서기까지 영적인 씨름을 해 주어야 합니다. 장로들이 바울의 빈자리를 잘 채워 줄 수 있을까요? 부족한 점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믿음으로 그들을 은혜의 말씀에 맡겼습니다. 32절을 보십시오.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장로들은 먼저 말씀을 가까이 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씨름을 감당해야 합니다. 말씀은 그들을 능히 든든히 세우실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 모든 성도들 가운데 목자로 세우시고 영적인 기업이 있게 하실 것입니다. 누구보다 훌륭하게 목자의 사명을 감당한 바울도 항상 깨어서 말씀에 순종함으로 성도들의 본이 되는 생활을 했습니다. 33~35절을 보십시오.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이 쓰는 것을 충당하여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바울은 복음 역사에 헌신했기 때문에 물질적으로 풍족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개척한 교회에게 물질 지원을 요청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직접 물질을 벌어서 동행하는 형제들의 쓸 것을 충당해 주었습니다. 그가 이렇게 한 이유는 주 예수께서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신 말씀에 순종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바울은 철저하게 말씀에 순종함으로 매사에 양 무리의 본이 되었습니다. 36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여기까지 말한 후 모든 사람들과 함께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기도할 때 다 크게 울었습니다. 지난 날 바울의 섬김과 사랑을 생각할 때 감동이 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들은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장로들은 다시 그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한 바울의 말로 인해 더욱 근심하고 배에까지 바울을 전송했습니다. 본문 말씀을 묵상하면서 에베소 가운데 일어난 폭발적인 성령의 역사의 비결이 무엇이었는가 좀 더 깊이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결국 소수 제자들의 변화가 그 중심에 있었습니다. 지난 주 사도행전 19장에서도 그 부분은 언급되어 있지만, 20장을 통해 바울이 삼년 내내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한 결과 소수 제자들이 변화된 것임을 발견합니다. 바울이 에베소 사역을 하기 전에는 주로 대중 전도를 했습니다. 에베소에서처럼 오랫동안 한 곳에 머무른 적도 없었습니다. 분명하게 변화된 바울 한 사람이 초대 교회 전체에 큰 영향을 미친 것처럼, 분명하게 변화된 소수의 제자들이 에베소와 아시아 전체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우리 사역의 특징 중 하나가 일대일 제자양성입니다. 과거에는 한 사람의 내면 문제를 돕기 위해서 밤새워 대화하며 씨름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 결과 변화된 한 사람이 한 나라를 감당했고, 전 세계 지성인 복음 역사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일용할 양식 책자가 처음 나온 곳도 UBF 였습니다. 그 후로 많은 교회와 단체들이 양식을 편찬하고 일용할 양식 생활을 했습니다. 우리모임의 제자양성 방식과 소감쓰기를 배워서 제자양성 역사의 전성기를 이루고 있는 교회들도 여럿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현재 우리의 모습은 과거와 비교할 때 많이 약해져 있습니다. 일대일 성경공부를 하지 않는 분들도 여럿 있습니다. 마치 대중 전도를 하듯 복음 역사를 섬기고 있는 것은 아닌가 스스로를 돌아보게 됩니다. 일대일을 하지 않는 것은 사실 양의 문제가 아닙니다. 목자의 문제입니다. 스피릿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죄와 치열하게 싸우지 않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위해 헌신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를 복음으로 구원해 주시고, 자격 없는 자에게 복음을 맡겨주신 은혜를 감사합니다. 그러나 제가 복음을 위해 헌신하지 않았습니다. 중국에서 한 리더에게 상처를 받고 돌아온 후 또 상처 받을 것이 두려워 적극적으로 복음 역사에 헌신하지 않았습니다. 죄와 치열하게 싸우고 말씀에 순종하는 투쟁을 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시대의 분위기에 동화되어 타협하는 생활을 회개하고 성령을 의지해서 목자의 사명을 감당하기를 기도합니다. 각 사람을 눈물로 훈계할 수 있을 정도의 심정과 스피릿을 회복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입니다. 에베소 큰 성령의 역사의 중심에는 결국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한 사도 바울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제자 양성의 원리, 성령의 역사 방법은 오늘날도 동일합니다. 과거 우리가 그것을 경험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께 쓰임 받는 그 한 사람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