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사도행전 22강 (메시지)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말씀/ 사도행전 25:1-26:32 요절/ 사도행전 26:18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오늘 말씀은 사도바울이 신임총독인 베스도와 아그립바 왕앞에서 심문을 받으면서 복음을 전하는 내용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바울의 믿음과 사명에 대한 확신을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1절부터 5절까지를 읽습니다. “베스도가 부임한 지 삼 일 후에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니 대제사장들과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이 바울을 고소할새 베스도의 호의로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옮기기를 청하니 이는 길에 매복하였다가 그를 죽이고자 함이더라 베스도가 대답하여 바울이 가이사랴에 구류된 것과 자기도 멀지 않아 떠나갈 것을 말하고 또 이르되 너희 중 유력한 자들은 나와 함께 내려가서 그 사람에게 만일 옳지 아니한 일이 있거든 고발하라 하니라” 베스도가 벨릭스 총독의 후임으로 왔습니다. 벨릭스는 파면되어 본국으로 소환되었다고 합니다. 총독관저가 있는 가이사랴는 항구 도시로 부요하고 상권이 잘 발달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유대인과 헬라인 사이에 서로 주도권을 잡으려는 분쟁이 있었죠. 그때 벨릭스가 개입하여 많은 유대인들을 죽이고 투옥하고 재산을 약탈했다고 합니다. 여기에 분노한 유대인들이 로마에 대표단을 파견하여 항의했는데 로마황제가 받아들인 것입니다. 이 시기는 유대지역에 소요가 빈번히 일어났기에 로마 입장에서는 골치 아프고 민감한 때였습니다. 신임 총독이 제일 먼저 무엇을 합니까? 수도인 예루살렘에 올라갑니다. 유대 상황이 어떤가 시찰하고 이스라엘 지도자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잘 맺으려고 합니다. 이때 대제사장들과 유대 높은 사람들이 바울을 고소합니다. 여기 보면 ‘대제사장들’이라고 복수로 나옵니다. 전에 바울을 심문했던 대제사장이 아나니아였는데, 이스마엘로 교체되었고 또 요셉으로 교체되었습니다. 그들은 베스도가 호의를 베푸니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호송하여 예루살렘에서 재판하기를 간절히 청합니다. 그 이유는 길에 매복하였다가 노중에서 바울을 죽이기 위해서입니다. 바울이 가이사랴 총독의 감옥에 투옥된지 어언 2년이 지났고 대제사장도 교체되었는데도 바울 죽이기를 포기치 않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무너뜨리려는 사탄의 집념이 얼마나 집요한가를 알 수 있습니다. 이때 베스도가 어떻게 합니까? 거절하죠. 바울이 현재 가이사랴에 구류되어 있고, 자기도 곧 예루살렘을 떠나 가이사랴로 가니 거기서 고발하라는 것입니다. 참 희한한 일입니다.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야 할 총독이 여기서는 공명정대하게 할려고 합니다. 잠언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음이 마치 봇물과 같아서 그가 임의로 인도하시느니라(잠21:1)” 6절부터 12절까지 읽습니다. “베스도가 그들 가운데서 팔 일 혹은 십 일을 지낸 후 가이사랴로 내려가서 이튿날 재판 자리에 앉고 바울을 데려오라 명하니 그가 나오매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유대인들이 둘러서서 여러 가지 중대한 사건으로 고발하되 능히 증거를 대지 못한지라 바울이 변명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율법이나 성전이나 가이사에게나 내가 도무지 죄를 범하지 아니하였노라 하니 베스도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더러 묻되 네가 네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 사건에 대하여 내 앞에서 심문을 받으려느냐 바울이 이르되 내가 가이사의 재판 자리 앞에 섰으니 마땅히 거기서 심문을 받을 것이라 당신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내가 유대인들에게 불의를 행한 일이 없나이다 만일 내가 불의를 행하여 무슨 죽을 죄를 지었으면 죽기를 사양하지 아니할 것이나 만일 이 사람들이 나를 고발하는 것이 다 사실이 아니면 아무도 나를 그들에게 내줄 수 없나이다 내가 가이사께 상소하노라 한 대 베스도가 배석자들과 상의하고 이르되 네가 가이사에게 상소하였으니 가이사에게 갈 것이라 하니라” 얼마 후 가이사랴에서 재판이 있게 됩니다.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인들이 바울을 둘러서서 여러 가지 중대한 사건으로 고발합니다. 그들은 무리지어 와서 바울을 빙 둘러섬으로 재판 자리에 위압감을 줍니다. 또 바울이 얼마나 끔직하고 중한 죄를 범했는가를 고발합니다. 그런데 증거는 대지 못합니다. 증거가 없으면? 무죄죠. 베스도도 알았을 것입니다. 베스도가 바울에게 묻습니다. “네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 사건에 대하여 내 앞에서 심문을 받으려느냐” 이제는 베스도가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고자 합니다. 이때 바울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내가 가이사의 재판 자리 앞에 섰으니 마땅히 거기서 심문을 받을 것이라 당신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내가 유대인들에게 불의를 행한 일이 없나이다. 내가 가이사에게 상소합니다” 바울이 적극적으로 로마 시민권을 사용합니다. 그러면 왜 바울이 가이사에게 상소하는 것입니까? 첫째는 공정한 재판을 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죽을 수도 있기에 회피하는 것이죠. 사명자는 사명을 다하기까지 함부로 목숨을 버리면 안됩니다. 둘째는 로마에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의 성공적 사역 후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는 꿈을 갖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을 방문한 후 로마에 가고자 계획을 세웠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에게 붙들려 감옥에 갇힘으로 그 계획이 틀어졌습니다. 그때 주님으로부터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행23:11)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2년동안 구류되어 옴짝달싹 할수 없었습니다. 선교는커녕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요. 그는 주님과 깊은 교제의 시간을 가졌을 것이고, 로마선교의 약속이 어떻게 이루실 것인가 궁금했을 것입니다. 또 한편으론 죄수의 몸인 이 상태로 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베스도총독이 ‘예루살렘에 가서 재판을 받으려느냐’ 하는 말에 바울이 더 이상 미루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을 한 것 같습니다. 죄수의 몸으로 로마에 갈 것을 결단합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영접합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방법은 참으로 기이합니다.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보다 높고 하나님의 길은 우리의 길보다 높습니다. 내가 죽는 길로 가는 것 같은데 하나님은 사는 길이라고 합니다. 인생 망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축복의 길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 쓰임받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도리어 하나님께 귀히 쓰임받고 있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창세기의 요셉이 그렇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주신 꿈 때문에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 애굽의 노예로 팔려갑니다. 형들에게 ‘제발 저 좀 살려주세요’ 애원했지만 소용이 없었죠. 그런데 애굽의 노예로 팔려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요셉의 꿈을 이루는 출발점이었습니다. 끌려간 애굽이 요셉의 사역지가 되었고, 노예의 삶이 그를 총리가 되게 하는 연단의 과정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빚으사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는데 사용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열두지파를 애굽으로 이주시켜 번성케 하셨고, 기근으로 고통하는 인류를 구원하여 생명을 보존시키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심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인생 망했다”, “왜 이리 꼬이지”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 같고,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 같은 때가 있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께서 나를 망하게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나를 연단하고 그것이 하나님께 쓰임받게 하는 통로가 되게 하십니다. 이것을 ‘십자가의 길’이라고 합니다. 예수님도 아무 죄도 없으시지만 유대인들의 고소로, 빌라도 총독의 사형판결을 받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를 따라오는 여자들은 억울하고 슬퍼서 울었죠. 그런데 그것이 승리의 길이었습니다. 온 인류를 구원하는 길이었습니다. 지금 바울이 죄수의 몸으로 로마로 가는 이 길도 죽음의 길이 아니라 사명인의 길입니다.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받는 길입니다. 어느 누가 전 세계의 통치자 로마황제 가이사에게 나아가 복음 전할 기회를 얻겠습니까? 이것이 꼬투리가 되어 로마가 복음화되었고, 4세기에는 로마황제도 믿게 되고 기독교가 로마국교가 되지 않았습니까? 13절부터 27절까지는 아그립바 왕이 바울을 심문하게 된 배경과 그 과정을 다룬 내용입니다. 23절을 다함께 읽습니다. “이튿날 아그립바와 버니게가 크게 위엄을 갖추고 와서 천부장들과 시중의 높은 사람들과 함께 접견 장소에 들어오고 베스도의 명으로 바울을 데려오고” 아그립바와 버니게가 크게 위엄을 갖추었다는 말은 자주색 왕복을 입고, 머리에는 왕관을 쓰고 왕으로써 화려한 예복을 입고 들어왔다는거죠. 그리고 천부장들과 고위관료들과 함께 접견장소로 들어왔습니다. 바울을 심문하는 자리에 아그립바왕이 왜 이렇게 잘 차려입고 많은 고위관료들을 대동하고 온 걸까요? 바울을 이용하여 사람들 앞에서 자기가 어떤 사람인가를 과시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습니다. 특히 신임 총독에게 ‘나, 이런 사람이야~’ 보여주고 싶었겠죠. 베스도 총독은 이 재판 자리가 로마황제에게 바울을 상소할 자료를 찾기 위해 아그립바 왕을 초청한 자리임을 알립니다. 26장입니다. 드디어 바울 청문회가 열렸습니다. 이 청문회의 주인공이 누구입니까? 아그립바왕입니다. 그가 바울을 심문하여 죄목을 찾기 위해 열린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심문하다보니 주인공이 바뀝니다. 누구로? 바울로. 그리고 바울의 증언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주인공이 됩니다. 이번 재판 자리는 재판이라기보다 청문회 형식이었기에 바울이 자유롭게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로마총독과 유대왕, 그리고 로마와 유대의 고위 관료들이 대거 참석한 자리입니다. 고위층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최고의 환경입니다. 돈 주고도 마련할 수 없는 그런 자리죠. 바울이 증언하면서 얼마나 가슴이 벅차 벅차올랐을까요? 바울은 전혀 주눅들지 않고 담대함과 주도권을 가지고서 부활하신 예수님과 자신이 받은 소명에 대해 분명하게 증거하였습니다. 바울은 먼저 자신에 대해 소개하고, 심문받는 이유를 말합니다. 6,7절을 읽습니다. “이제도 여기 서서 심문 받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 것을 바라는 까닭이니 이 약속은 우리 열두 지파가 밤낮으로 간절히 하나님을 받들어 섬김으로 얻기를 바라는 바인데 아그립바 왕이여 이 소망으로 말미암아 내가 유대인들에게 고소를 당하는 것이니이다” 바울이 심문받는 이유를 이스라엘의 소망 때문이라고 합니다. 8절입니다. “당신들은 하나님이 죽은 사람을 살리심을 어찌하여 못 믿을 것으로 여기나이까” 하나님은 죽은 사람을 살릴수 있습니다. 그 증거가 무엇인가?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엘로우힘’입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전능자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에녹이 죽음을 보지 않게 하여 하늘로 올리셨습니다. 여러 구약 선지자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죽은 자를 살리는 표적을 나타냈습니다. 바울 자신도 죽은 자를 살렸습니다.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된 것인데, 예수님의 부활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분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고 영원히 살아계십니다. ‘부활하신 예수가 바로 그리스도다’ 이것이 조상들의 소망이요, 바울이 전하고자 하는 핵심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정통적인 부활신앙은 마지막 날에 의인과 악인이 부활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나사로가 죽었을 때 그의 여동생 마르다도 ‘마지막 날에 살아날 줄을 믿는다’고 하였습니다. 바울도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해 왔습니다. 그런데 죽은 자 가운데 부활하신 예수님을 마지막 날이 아닌 지금 자신에게 나타나셔서 만났다는 것입니다. 현재 죽은 자가 살아 영원히 산다는 것입니다. 그 분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그 뒤에 둘째, 셋째, 계속하여 부활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영적 비밀이 있습니다. 이것이 단지 육체의 부활만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에베소서 2장 1절에서 ‘그가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다’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창세기에 있었던 창조의 역사가 지금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고후5:17은 말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새 것이 되었도다” 현재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부활의 역사, 새 창조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예수님을 만나 죽었던 자기가 어떻게 새 창조의 역사로 살게 되었는가를 9절부터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바울 자신도 예전에는 예수의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였습니다.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나열하고 있습니다. 그중에서 몇 가지만 살펴보겠습니다. 14절을 보면 예수께서 바울에게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하십니다. 가시채를 뒷발질한다 것은 황소가 주인이 원하는 방향으로 가지 않을 때 가시채가 황소를 찌릅니다. 그럼에도 황소가 자기 고집을 부리면서 뒷발질을 하는 걸 말합니다. 그러면 계속 찔리고 아프고 상처가 나겠죠. 이처럼 바울이 열심은 있는데 하나님께서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계속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네가 하는 행동은 주를 박해하는 행위야’, ‘네가 가야 할 길이 이 길이 아니야’ 알려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고생하는 것이 아니라 네가 고생하고 있다는 거에요. 이런 그에게 주님이 해보다 더 밝은 부활의 광채로 임하셔서 그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사명을 주십니다. 그 사명이 무엇인가? 16-18절을 읽습니다. “일어나 너의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종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그들에게 보내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주님께서 바울은 종과 증인으로 삼으셨다고 합니다. 17절에서 나오는 ‘내가 너로 구원하여 그들에게 보내어’란 말은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사명인으로 부르셨을 때 하신 말씀과 같습니다(렘1:8). 주님께서 바울을 구원하셨다고 합니다. 그를 불가항력적인 은혜로 택하시고 구원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보내십니다. 그가 할 일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눈이 어떻게 뜨게 됩니까? 요한복음 3장에서 예수께서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하셨고,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눈을 뜨게 됩니다. 그러면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 일을 바울 네가 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교회 공동체를 이루시고 기업을 얻게 하시겠다 약속하십니다. 사도행전에는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 거듭난 동일한 사건이 세 번 반복하여 나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자신이 어떻게 예수님을 믿게 되었는가보다 자신이 어떻게 사명을 받았는가에 초점을 맞추어 증언하고 있습니다. “아그립바 왕이여 그러므로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스리지 아니하고” 불가항력적인 은혜로 사명을 받았기에 자신은 거스릴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실제로 할 일이 무엇인가? 다메섹과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과 유대 온 땅과 이방인에게까지 가서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하라고 전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나를 잡아 죽이고자 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도와 주셔서 오늘까지 이렇게 서서 높고 낮은 사람들 앞에서 복음을 증언하고 있고 여러분들 앞에서도 지금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복음의 핵심은 무엇인가? 성경에 기록된대로 그리스도가 고난 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나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즉 온 세상에 빛되신 예수를 전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빛을 만나면 누구나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의 증언을 통해 주의 부르심을 따라 사명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세계적인 전도자 빌리그래함목사는 7세에 예수님을 믿고 거듭났습니다. 그는 복음전파자의 소명을 받고 28세에 첫 대중 전도집회를 미국 미시간에서 열었는데 6천명의 청중이 모였습니다. 그후 일평생 400번이 넘는 전도집회를 전세계 6개 대륙을 다니며 185개국이 넘는 나라에서 개최하였습니다. 그의 설교를 들은 사람만 22억명에 달하며, 수많은 사람이 회심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 돌아왔습니다. 그중에 한 사람이 미국의 43대 대통령 ‘조지 W. 부시’입니다. 6남매중 장남인 그는 늘 집안의 명성에 먹칠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공부도 못했고, 술과 파티, 그리고 연애로 젊은 날을 보냈습니다. 예일대를 나왔으나 아버지 빽으로 들어가 간신히 졸업했습니다. 20세에 약혼했으나 행실에 문제가 있다는 이유로 파혼을 당했습니다. 베트남 전쟁에 참여했다가 훈련 성적이 좋지 않아서 전쟁은 구경도 못하고, 주 방위군에서만 근무를 했습니다. 하원 선거 실패, 석유사업 실패와 알코올 중독자가 되었습니다. 40세에 그가 빌리그래함 집회에 참석하여 회심하였습니다. 그의 인생이 변했습니다. 먼저 술을 끊었습니다. 매일 아침 성경을 읽고 기도하면서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14년이 지난 뒤 미국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누가 이 사람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는가? 빌리그래함목사님을 통해 전해진 복음입니다. 빛되신 예수님이 그와 함께 하심으로 그 자신 스스로 할 수 없는 것을 불가항력적인 은혜로, 능력으로 그를 변화시킨 것입니다. 바울의 증언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베스도가 그의 학문이 그를 미치게 했다고 오해했습니다. 아직 ‘길가 밭’과 같은 마음입니다. 바울은 조금 더 나은 마음 밭을 갖고 있는 아그립바 왕에게 도전합니다. “아그립바 왕이여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믿으시는 줄 아나이다” 그러자 아그립바가 눈치채고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당황하며 바울에게 면박을 줍니다. 이에 바울이 뭐라고 합니까? 29절을 다 함께 읽습니다. “바울이 이르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하니라” 쇠사슬에 묶인 자기 팔을 흔들면서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이 얼마나 멋있는 말입니까? 촌철살인의 한마디입니다. 지금 누가 왕이고, 누가 주인공입니까? 참으로 기이합니다. 아그립바왕의 위엄있는 행색과 권력에 비교한다면 바울의 모습이 어떠합니까? 바울은 키가 작고, 다리는 휘었고, 대머리였다고 합니다. 거기에다 남루한 죄수복을 입었고 쇠사슬에 묶여있습니다. 초라한 죄수의 모습입니다. 그런데도 기개가 넘칩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생각해보겠습니다. 아그립바가 어떻게 왕이 되었죠? 로마 황제인 가이사가 임명해서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사명인이 된 것은 누구에 의한 것입니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부활하신 예수님이 임명한 것입니다. 누가 더 높은 권세입니까? 살아계시고 권능으로 역사하시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가 아닙니까? 그 분이 바울을 왕같은 제사장 삼으셨기에 그는 담대하였고 패기가 있고 위축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어떤 신분인가? 고급주택에 살지 않아도, 외제 승용차를 타지 않아도, 명품 옷을 입지 않아도, 부자가 아니어도, 좋은 직장에 다니지 않아도 우리는 위축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고, 영생을 얻었고, 왕같은 제사장의 직분을 위임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교회에게 약속하셨습니다. 너희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 풀릴 것이요 너희가 땅에서 묶으면 하늘에서도 묶이리라고 했습니다. 천국 열쇠를 누구에게 주셨습니까?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베스도나 아그립바왕은 바울의 생사여탈권이 자기들에게 있다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바울은 베스도총독과 아그립바왕, 천부장들과 거기 참석한 모든 고위관료들의 생사여탈권을 자기가 가지고 있음을 인식하였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멸망으로 가는 그들에게 담대히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어찌하든 그들을 살리고자 애쓰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이 어두움의 시대에 그리고 사탄의 통치 아래 있는 세상에서 주님은 우리를 먼저 찾아오시고 영적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이 은혜에 기초하여 우리에게 주신 소명에 관한 약속을 굳게 붙들기를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