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사도행전 제 24 강
로마의 셋집에서
말씀 / 사도행전 28:1-31 요절 / 사도행전 28:30,31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 사도행전은 하나님의 은혜가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들을 통해 전 세계로 흘러나가는 이야기입니다. 사도행전에서 복음이 확산하는 것보다 더 중요시되는 일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처음 시작부터 복음의 지리적 확장을 약속하였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이 약속대로 작은 제자 무리가 중심이 되어 전한 복음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저 멀리 로마 제국의 수도까지 퍼져 나갑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복된 구원의 소식이 온 세상 다양한 민족들에게 널리 전파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이 이방인들을 끌어모으고, 예수님의 은혜가 중심이 되는 교회들이 세워집니다. 그리고 구원받은 그들이 다시금 하나님의 선교적 사명을 받고서 세상으로 보내집니다. 이 복음 확장의 중심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성령을 통해서 복음이 놀랍게 성장하도록 이끄심으로 지역, 인종, 문화, 언어, 성별, 빈부, 핍박, 고난, 질병, 투옥과 같은 커다란 장벽을 뚫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십니다. 이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가 위로는 왕으로부터 아래로는 비천한 죄수, 원주민들에게까지 전해집니다. 복음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능력이 미치지 못할 사람도 없습니다.
오늘 말씀은 사도행전의 마지막 말씀입니다. 바울의 비전, 하나님의 약속대로 바울이 마침내 로마에 입성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셋집 감옥에 갇히는 상황입니다. 그의 거대한 꿈에 비하면 현실은 너무나도 열악합니다. 이 가운데 바울이 한 일은 오는 사람들을 영접하고 담대하게 말씀을 가르치는 것이었습니다. 이 셋집의 작은 역사가 마침내 로마 전체를 정복합니다. 성령의 역사는 우리의 생각과 다를 수 있습니다. 이 구원역사를 우리가 배우고 우리도 여기에 쓰임받기를 기도합니다.
1,2절입니다. 바울 일행이 하나님의 약속대로 모두 구조되었습니다. 그들이 상륙한 섬은 멜리데였습니다. 때마침 비가 오고 날이 추운데 원주민들이 바울 일행을 잘 영접해주었습니다. 불을 피워 추위에 지친 몸을 녹이도록 배려해 주었습니다. 바울이 나무 한 묶음을 거두어 불에 넣습니다. 연로한 바울이 헤엄을 쳐서 육지로 올라왔는데 얼마나 힘들고 지쳤겠습니까? 또 그가 배에 탄 276명을 구원하는데 지대한 역할을 했습니다. 이제 좀 대접받고 쉴 만도 한데 적극적으로 나서서 사람들을 섬기고 있습니다. 목자 바울에게서 우리 인생들을 열심히 섬기신 예수님의 닮은 모습을 봅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나뭇가지 사이에서 잠을 자던 독사가 뜨거운 불에 깜놀해서 바울의 손을 뭅니다. 대롱대롱 매달려 있습니다. 이를 본 원주민들이 말합니다. “이 사람은 살인한 자로다 바다에서는 구조를 받았으나 공의가 그를 살지 못하게 함이로다” “이 사람은 필시 숨은 죄가 있는 것 같애. 결국에는 독사에게 물려 죽네~” 그런데 바울은 아무렇지도 않는 듯 독사를 탈탈 떨어 버립니다. 그러자 독사는 불 위에 떨어져 즉시 뱀구이가 되고 맙니다. 원주민들은 조금 있다가 그가 붓든지 죽을 줄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시간이 지나도 멀쩡했습니다. 이번에는 원주민들이 깜놀합니다. “와, 이 사람은 신인가 봐. 독사에 물려도 안 죽네” 그 섬의 추장 보블리오가 자기 집으로 바울을 초대하여 융숭하게 대접합니다. 때마침 보블리오의 부친이 열병과 이질에 걸려 끙끙 앓아 누워 있었습니다. 이때 바울이 들어가서 안수하고 기도해주자 언제 그랬느냐는 듯 즉시 나아 일어났습니다. 이 소문을 들은 다른 병자들이 바울에게로 몰려왔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함으로 병을 치료해 주었습니다. 그들은 감동을 받고 바울 일행이 떠날 때 필요한 것들을 많이 실어 주었습니다. 이 사건은 누가복음 4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치유사역과 너무나도 닮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집에 들어갔을 때 베드로의 장모가 중한 열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열병을 꾸짖자 병이 떠나갔고 여자가 수종들었습니다. 소문이 나서 온갖 병자들이 해 질 무렵에 예수님께 나아왔고, 예수님이 일일이 그 위에 손을 얹어 고쳐주셨습니다. 이러한 예수의 치유의 능력이 바울에게 그대로 나타난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도 이러한 치유역사가 일어나길 기도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로마로 가서 복음을 증언토록 하시겠다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울을 로마로 바로 직진케 하지 않으시고 폭풍을 만나 죽을 고비를 겨우 넘기고 배가 파선하여 생면부지의 멜리데 섬에 상륙하게 하시고 독사에 물리게 하십니다. 왜 이렇게 하셨을까? 그 의도가 궁금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구원계획에는 로마 사람뿐 아니라 거기로 가는 여정가운데 바울과 함께 했던 배 안의 275명 그리고 멜리데 원주민들까지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배에 탄 백부장과 선장, 선주, 선원, 그리고 로마에 가면 즉시 처형될 죄수들, 그리고 멜리데 원주민들을 생각하사 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흘러보내셨습니다. 바울이 고난 받지만 그 주위 사람들이 은혜를 받습니다. 이것이 바로 ‘목자의 삶’입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히 받았습니다. 이제는 목자된 우리가 십자가를 지고, 은혜는 내 주위 사람들이 받게 하여야겠습니다.
11절을 보면, 바울 일행은 석 달 동안 멜리데 섬에서 겨울을 지내고 알렉산드리아 배를 타고 떠납니다. 수라구사에서 사흘 있다가, 레기온에 이르러 하루를 지낸 후, 이튿날 보디올에 이릅니다. 거기서 형제들을 만나 그들의 초청을 받고 일주일을 머물렀습니다. 그리고 로마를 향합니다. 로마에 있는 형제들은 바울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압비오 광장과 트레이스 타베르네(세 여관)까지 마중을 나왔습니다. 압비오 광장은 로마에서 65km, 트레이스 타베르네는 50km 떨어진 곳입니다. 그들은 로마에서 바울을 밎이하기 위해서 먼 길을 달려왔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3차선교여행때 고린도에서 보내온 편지, 로마서를 읽어보았을 것입니다. 보디올의 형제들로부터 바울이 예루살렘에서부터 여기까지 어떻게 사선을 넘어 오게 되었는지 들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바울을 존경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한걸음에 달려왔습니다. 비록 바울이 쇠사슬을 찬 죄수의 모습으로 왔지만 마치 전쟁에서 승리하고 들어오는 개선장군을 맞이하듯이 바울을 열렬히 환영하였습니다. 이에 바울은 하나님께 감사했고 담대한 마음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손길을 느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는 우리 종로2부 목자님들과 청년들을 인하여 감사합니다. 특히 주일예배를 볼 때 큰 위로와 격려를 받습니다. 사회와 대표기도, 싱어롱, 찬양등 각자 주어진 일을 묵묵히 감당해주심으로 예배를 은혜 넘치게 합니다. 또 예배에 참석하신 분들의 밝은 얼굴을 보면서 제가 새 힘을 얻고 담대함을 갖게 됩니다. 오늘날 많은 젊은이들이 영적인 관심이 없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주님을 기쁘게 하고자 애쓰는 청년들을 볼 때 저에게 큰 격려가 됩니다. 미래에 대한 소망을 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며, 함께 말씀의 은혜를 나누며, 함께 기도할 때 그리스도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격려와 위로와 담대함을 얻습니다.
16절을 보겠습니다. “우리가 로마에 들어가니 바울에게는 자기를 지키는 한 군인과 함께 따로 있게 허락하더라” 드디어 로마에 도착했습니다. 얼마나 감격스러웠을까요? 바울이 그토록 오고자 했던 로마는 어떤 곳인가? 세네카(Seneca, 고대 로마의 수사학자)는 로마를 ‘악의 소굴’로 불렀습니다. 유베날리스(Decimus Iunius Iuvenalis, Juvenal, 고대 로마의 시인)는 ‘더러운 하수구’라고 불렀습니다. 요한은 요한계시록에서 로마를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계17:5)로 묘사했습니다. 로마는 세계의 중심지였습니다. 로마의 광장에 있는 황금으로 된 이정표로부터 도로가 사방팔방으로 로마제국의 전 지역으로 뻗어나갔습니다. 그 로마를 네로(Nero)가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네로는 25세를 넘지 않았습니다. 이미 그의 손은 살인의 피로 물들어 있었습니다. 로마 인구가 2백만 명이었는데, 그 중 1백만 명이 노예였습니다. 또한 1백만 명의 시민 중 약 7백 명은 원로원 의원, 기사 계급에 속하였고, 이 소수의 사람이 로마의 모든 부를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로마를 여행하는 사람은 보통 두 가지를 기대했습니다. 하나는 빵이고, 하나는 원형 경기장에서 펼쳐지는 각종 경기를 관람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원형경기장은 귀족부터 노예에 이르기까지 어떤 신분의 사람도 다 관람할 수 있었고 관람객들에게 무료로 빵을 나누어주었습니다. 로마황제의 통치수단이었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빵을 구하여 굶주린 배를 채우고, 원형 극장으로 몰려가서 검투사의 싸움을 구경하기를 즐겼습니다. 그들은 빵과 흥분에 의지하여 살았습니다.
바울이 로마에 도착했을 때 그의 현실은 어떠했나요? 죄수인 바울 옆에 항상 그를 감시하는 군인이 배치되었습니다. 이런 환경에서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죄수로 갇힌 것을 슬퍼하거나 힘들어하지 않았습니다. 낙담하지 않았습니다. 어찌하든지 복음을 전하고자 힘썼습니다. 바울에게 로마 병사 한 명과 쇠사슬로 연결이 되었습니다. 보통은 두 사람이 지키는데 바울에게는 여유를 주었습니다. 시위대 소속의 군인들이 4시간 간격으로 교대 근무를 했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십분 활용하였습니다. 그들에게 일대일로 말씀을 전했습니다. 하루에 6교대 하니 6팀의 일대일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빌립보서를 보면 바울이 갇힌 것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를 이루었다고 합니다. 시위대 즉, 황제 친위대 군인중에서 믿는 사람이 생겼습니다.(빌1:12,13) 하나님의 역사는 참으로 신기하고 놀랍습니다.
17절을 보겠습니다. 사흘 후에 바울이 유대인들의 높은 사람들을 초청하였습니다. 그리고 로마에 오게 된 이유를 설명합니다. 20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이러므로 너희를 보고 함께 이야기 하려고 청하였으니 이스라엘의 소망으로 말미암아 내가 이 쇠사슬에 매인 바 되었노라” 바울은 자신의 인간적인 억울함을 풀고자 로마에 온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소망’ 때문에 로마에 왔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토록 간절히 소망하며 기다렸던 그리스도를 바울이 만났고, 바로 그분이 예수님임을 증거하고자 이곳 로마에 왔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말을 듣고 있던 유대인들은 바울이 주장하는 사상을 듣기 원했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주장하는 바가 어디에서나 반대를 받는 줄 알았습니다. 도대체 뭘 주장하는가 직접 듣고자 합니다. 그들은 날짜를 정해서 바울을 찾아왔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대상으로 아침부터 저녁까지 열심히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강론했습니다.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 즉 구약성경을 바탕으로 예수님의 구원의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들의 반응이 무엇입니까? 믿는 자도 있고 믿지 않는 자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안 믿는 자가 대세였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어떻게 해석합니까? 이사야 말씀을 인용하여 성령께서 그들의 마음을 닫히게 하셨다고 합니다. 성경의 성취로 보았습니다. 그는 이제 이방인들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겠다고 합니다. 바울은 참으로 이스라엘을 사랑했습니다. 지금까지 매번 이스라엘에게 배척받으면서도 줄기차게 그들에게 먼저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배척 받을때에라야 비로소 그는 이방인들에게로 갑니다. 이 점을 우리가 배워야겠습니다. 우리의 일가친족들, 그리고 국민대, 상명대생이 얼굴을 붉히고 배척하더라도 우리는 먼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의 일차적 소명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30,31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
바울이 2년동안 셋집에 머물렀습니다. 바울이 거하는 셋집은 로마 귀족들이 거하는 대 저택에 비하면 형편없이 초라했습니다. 말구유와 같은 곳이었습니다. 군인들의 감시를 받으며 셋집에 머무르는 것이 복음의 장애가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먼저 그 곳을 탈출할 궁리를 하기가 쉽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현재 있는 상황에서 어찌하든 복음을 전하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자기가 서 있는 그곳에서 흘러가길 원하였습니다.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였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쳤습니다.
저번에 L.A. 김페트라선교사님이 선교보고를 하셨습니다. 이 분이 몸이 아프고 허리가 아파서 병원에 하루 종일 누워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일주일에 15팀 일대일을 하였습니다. 그녀는 병문안 온 부모와 형제 자매, 친척들, 그리고 찾아온 사람들에게 누워서 일대일 성경공부를 하였습니다. 아픈 사람이 말하는데 싫다고 나가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건강할 때는 이만큼의 일대일을 하지 못했는데, 병원에 입원하고서 꼼짝도 못할 때 오히려 복음의 진보를 이루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꼼짝 못하게 하는 것이 결코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고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학업에 매이고, 취업에 매이고, 직장에 매이고, 장래에 매이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역사를 섬기는데 장애가 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시간 많고, 돈 많고, 여유가 있으면 하나님을 잘 섬길 수 있으리라 생각하기 쉬운데~. 아닙니다. 오히려 죄지을 기회가 많아집니다. 어떻게 입을 즐겁게 할까? 어떻게 눈을 즐겁게 할까?를 생각하게 됩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 내가 있는 이곳에 하나님의 은혜를 흘러가게 할까? 이런 생각을 안합니다. 저부터 그렇습니다. 어떤 목자님은 현재의 직장이 너무나 안정적이고, 익숙하고, 편하고, 주말에는 골프치러가고 맛집을 찾아다니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서 영적인 위기 의식을 느꼈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직을 결심하고 이직하였습니다. 현재 이직한 직장에서 여러 어려움이 있고 독사같은 사람을 만나 육체적으로 힘들기는 하지만, 깨어있게 되고 생명구원에 관심을 갖고서 캠퍼스에 오르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12장 9,10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바울이 약한 것들, 능욕, 궁핍, 박해, 곤고를 기뻐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통해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무언가에 매이고 어려움을 겪을 때 오히려 깨어있게 하며,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좋은 사인으로 알기를 바랍니다.
바울이 이년동안 로마 셋집에서 구류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의 유익을 저는 ‘셋집의 영성’이라고 불러봅니다. 사람이 갇혀 있으면 깊이가 깊어지고 집중도가 높아집니다. 나치 치하에서 감옥에 갇혀 순교했던 본회퍼목사님이 쓴 <옥중묵상집>이 유명합니다. 그중에 “나는 누구인가” 내용은 그 깊이가 얼마나 깊은지 카톡릭 신부들도 연구를 합니다. 그 중 한 부분을 읽어드립니다. “나는 누구인가? 고독하게 던지는 물음이 나를 조롱합니다. 내가 누구인지, 당신은 아시오니, 나는 당신의 것입니다. 오 하나님!” 마찬가지로 바울이 셋집에 머물 때 영적으로 깊이 있는 서신서들을 썼습니다. 옥중 서신이라 불리우는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가 이때에 쓰여졌습니다. 이 서신서들을 읽어보면 하나님의 경륜과 그리스도가 누구신가에 대한 그 이해와 그 깊이가 얼마나 깊은지 참으로 놀랍습니다.
이번 미국 국제 수양회에서 특강 강사로 Dr. Tennent 에즈베리 대학 총장님이 초대되었습니다. 에즈베리 대학의 부흥운동으로 전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았던 유명한 분입니다. 그런데 이 총장님이 우리 수양회에 참석해서 너무나 큰 감동과 은혜를 받고 “이번 국제수양회는 너무나 환상적인 세계선교 대회입니다.” 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딸이 아프리카 탄자니아 선교사로 헌신하고 있는데 36살이라고 합니다. 결혼을 해야 하는데 UBF에서 신랑감을 보내주면 좋겠다고 부탁하였습니다. 사실 에즈베리 부흥운동도 대단한 것은 아닙니다. 한적한 대학 캠퍼스에서 몇 사람이 모여 합심기도하던데에서 출발하였습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무명의 대학 담임 목회자가 말씀을 전하고 있을 때 성령께서 강력하게 역사하여 부흥운동이 시작이 되었습니다. 우리 UBF모임도 처음에는 말구유 같은 광주 대인동 셋집에서 기도와 일대일 공부로부터 시작하여 지금은 많은 나라에 선교사를 파송하는 단체로까지 성장했습니다. 지금도 우리 UBF선교사님들은 작은 house church (셋집)에서 일대일로 열심히 양들을 섬기고 있습니다. 죄로 병들어서 스스로도 어떻게 할 수 없고, 부모나 교수님들도 어떻게 하지 못하는 젊은이들을 우리 선교사님들이 영접하고 인내하며 복음으로 돕고 있습니다. 그 결과로 이번 국제수양회에서 이방 현지 목자들이 말씀강사, 소감강사로 세워져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증거하였습니다.
여러분은 현재 살아가는 삶에 대해 만족하십니까? 다람쥐 쳇바퀴 도는 것 같은 삶이 나를 지루하게 만든다고 느끼지는 않나요? 무언가 익사이팅한 일을 갈망하지는 않습니까? 우리 인생은 90퍼센트가 평범한 일상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일상에 지루함을 느끼는 이유가 뭘까요? 놀라운 것들이 없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놀라운 일들을 알아보는 눈이 없기 때문입니다. 정신이 멍하기 때문입니다. 체스터틴(영국의 시인이자 문예비평가)은 “경이로운 것들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경이로움이 부족해서 우리는 죽어간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평범한 것들 속에 평범하지 않는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이 숨겨져 있습니다. 우리의 주일예배 속에, 금요 기도모임속에, 매일 먹는 일용할 양식 말씀에, 우리가 하는 성경공부에, 그리고 가족을 위한 요리와 설거지, 청소, 빨래속에, 학업과 직장 일 가운데 하나님의 경이로운 것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평범한 것들 한 가운데에 평범하지 않은 것들이 있음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볼 수 있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믿음의 눈입니다. 기도할 때, 약속의 말씀을 붙들 때 그것이 보입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영역에서, 그것이 하찮은 것이라 할지라도 거기에 하나님의 손길이 있습니다. 특히 우리가 감당하는 일대일 한 팀, 한 말씀을 나누는 것, 한 영혼을 위한 기도, 몸으로 다른 사람을 섬기는 일, 여기에 하나님이 계시고, 이것들을 통해 하나님이 역사하십니다. 우리가 이것을 알고서 내가 서있는 그곳에서 하나님의 경이로운 것들을 먼저 발견하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흘러보내고자 힘써야겠습니다.
사도행전의 마지막 구절은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거침없이 가르쳤다’라는 미완료 형태로 끝납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의 역사는 우리를 통해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가을학기가 시작되었습니다. 바울의 셋집 복음역사를 배워서 한 영혼을 마음으로 영접하고 섬겨야 하겠습니다. 내가 하는 한 명과의 일대일 역사를 통해 열방이 주께로 돌아오게 하실 하나님의 비전을 보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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