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에스라 5강 울며 기도하여 자복할 때에 말씀/ 에스라 9장,10장 요절/ 에스라 10:1 “에스라가 하나님의 성전 앞에 엎드려 울며 기도하여 죄를 자복할 때에 많은 백성이 크게 통곡하매 이스라엘 중에서 백성의 남녀와 어린 아이의 큰 무리가 그 앞에 모인지라” 오늘 본문은 에스라서의 마지막 말씀입니다. 그간 길지는 않았지만 에스라서를 공부하며 많은 것을 배웠고 풍성한 은혜를 받았습니다. 오늘 말씀은 에스라의 영적 갱신에 대한 내용입니다. 우리는 영적 갱신하면 뭔가 큰일을 해야 되는 것처럼 생각이 듭니다. 제사장이나 레위인들을 전면적으로 바꾼다거나 온 백성들로 하여금 모세의 율법을 철저히 지키도록 한다든가 하는 것 말입니다. 그런데 그의 영적 갱신은 어찌 보면 개인들의 결정 사항이라고도 볼 수 있는 결혼 문제였습니다. 백성들이 주변의 이방 여인들과 결혼한 문제를 돌이키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깊이 생각해보면 이 문제는 민족의 존망이 달린 참으로 중대한 문제였습니다. 이 중대한 문제를 에스라는 어떤 자세로 섬길까요? 본문을 통해 에스라의 목자의 심정과 영적 리더십을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1. 기가 막혀 앉았더니 1,2절입니다. "이 일 후에 방백들이 내게 나아와 이르되 이스라엘 백성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이 땅 백성들에게서 떠나지 아니하고 가나안 사람들과 헷 사람들과 브리스 사람들과 여부스 사람들과 암몬 사람들과 모압 사람들과 애굽 사람들과 아모리 사람들의 가증한 일을 행하여 그들의 딸을 맞이하여 아내와 며느리로 삼아 거룩한 자손이 그 지방 사람들과 서로 섞이게 하는데 방백들과 고관들이 이 죄에 더욱 으뜸이 되었다 하는지라" 여기서 이 일 후에란 7,8장의 내용입니다. 즉, 에스라가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바벨론에서 가져온 예물들을 성전 제사장에게 인계하였습니다. 하나님께 감사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때가 아닥사스다 왕 제7년 5월1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거론되는 통혼 문제를 다루기 위해 백성을 소집한 때가 10장 9절을 보면 9월 20일입니다. 간단히 "이 일 후에"라고 하였지만 본문에 나타나는 이슈가 거론되기 까지는 4개월 반 정도의 시간이 지났습니다. 그 기간에 에스라는 무엇을 하였을까요? 그가 결심하고 예루살렘에 온 목적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준행하며 열심히 가르쳤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백성들의 마음에 심겨지자 그 동안 큰 문제의식 없이 지냈던 문제가 드러납니다. 곧 이스라엘 자손들이 주변의 이방 여인들과 결혼한 것이었습니다. (출34:16, 레18:24, 신7:1-4, 11:9, 23:4) 왜 그러셨을까요? 하나님이 이방인을 차별하시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께는 이스라엘 백성이나 이방인이나 동일하게 귀한 생명입니다. 하나님이 이방 여인과의 결혼을 금지하신 이유는 백성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을 잃어버릴 것을 우려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방 여인들은 그들 민족의 신을 섬겼습니다. 가나안 족속들은 바알과 아세라를 섬겼습니다. 암몬은 몰렉, 모압은 그모스, 애굽은 태양신 라 등을 섬겼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그러한 우상숭배는 가증한 것이었습니다. 만물의 창조주, 유일한 신 여호와를 섬기지 않고 손으로 만든 것들을 섬기는 우상 숭배는 참으로 가증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방 여인과 결혼하면 그들을 좇아 우상을 섬기게 되어 있습니다. 신명기 7:3,4 절도 말합니다. "또 그들과 혼인하지도 말지니 네 딸을 그들의 아들에게 주지 말 것이요 그들의 딸도 네 며느리로 삼지 말 것은 그가 네 아들을 유혹하여 그가 여호와를 떠나고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하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갑자기 너희를 멸하실 것임이니라" 어떤 분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믿지 않는 사람과 결혼해도 내가 그를 믿는 자가 되도록 만들겠다" 그러나 이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한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갖게 되는 것은 내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되기 때문입니다. 최근 우리는 잠언서 일용할양식을 먹고 있습니다. 잠언서의 저자는 솔로몬입니다. 그가 어떤 왕이었습니까? 그는 하나님을 잘 섬겼습니다. 겸손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를 기뻐하사 그에게 풍성한 지식과 지혜를 주셨습니다. 그는 지식과 지혜에 있어서는 전무후무한 왕이었습니다. (왕상3:12) 그런데 그는 많은 이방 여인을 아내로 삼았습니다. 그는 자신 만만했겠지만 이방 여인들의 말을 따라 결국 우상숭배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두 번이나 나타나 책망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마음을 돌려 여호와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왕상11:9) 솔로몬 이후 이스라엘은 두 쪽이 나고 결국 모두 멸망하게 됩니다. 유다에 여호사밧이라는 왕이 있었습니다. 그는 부친 아사왕의 행한 길을 따라 정치를 잘하였습니다. 그래서 유다는 부강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는 이에 자신감을 얻어 북이스라엘 아합왕과 결혼동맹을 맺었습니다. 자기 아들 여호람을 아합의 딸 아달랴와 결혼시켰습니다. 그는 북이스라엘이 여호와를 섬기는 나라가 되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말처럼 도리어 이세벨의 딸 아달랴가 여호사밧 가정에 들어와 그 집을 우상숭배 하는 가정이 되게 하였습니다. 결국 여호람도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죽고 아달랴는 그의 아들 아하시야의 죽음 이후 모든 왕자들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하여 유다를 다스립니다. 온 나라를 우상 숭배하는 나라로 만듭니다. 제가 이렇게 구약 시대에 있었던 예를 드는 것은 이방 여인과의 결혼이 그만큼 심각한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을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1절을 다시 보면 이스라엘 방백들이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즉 지도자들이나 평민들이나 모두 가증한 일을 행했다는 것입니다. 그 가증한 일은 백성들이 그 땅에 있는 여러 이방인들, 본문에는 8족속이 언급되고 있는데, 그들과 통혼하였다는 것입니다. 그 일에 방백들과 고관들이 앞장을 섰다고 하였습니다. 거의 같은 시대를 언급하는 느헤미야서 13:28절을 보면 대제사장 엘리아십의 손자가 호론 사람 산발랏의 사위가 되었습니다. 대제사장이면 이스라엘의 가장 높은 영적 지도자입니다. 그의 손자가 산발랏의 사위가 되었다는 것은 그 만큼 사회의 지도자층이 그 지역의 호족 세력과의 결혼에 앞장섰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 당시 이방 여인과 결혼한 사람들은 귀환 2세대, 3세대들이었습니다. 에스라가 2차 귀환자들을 이끌고 예루살렘에 온 때는 BC 458년으로, 제1차 귀환(BC 538)으로부터 80년 후입니다. 1세대들을 다 죽고 그들의 아들, 손자, 증손자들이 이방 여인과 결혼한 것입니다. 그들은 여러 가지 현실적인 이유를 들었을 것입니다. 험한 먼 거리를 여행하여 귀환한 사람들 대부분이 남자들인데 결혼 상대가 없지 않는가? 성전은 지었지만 성벽이 아직 없으니 이방인들의 출입이 자유로워 그들과 사귀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우리 같은 소수 민족이 살아남으려면 주변 민족들과 좋은 관계성을 맺어야 한다. 자식과 싸워 이기는 부모 없다는데 자식들이 결정하는 것을 어떻게 하겠는가? 이런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에스라가 저렇게 기가 막혀 않아 있는 것이 도리어 기가 막히지 않는가? 라고 하는 자도 있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에스라가 이 문제를 무엇이 더 유익한가 하는 실용적인 관점에서 바라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율법 편에서 이 문제를 보았습니다. 율법 편에서라고 하면 그저 법으로 옳고 그르고를 따진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 문제가 그 만큼 중요하기 때문에 법으로 정하셨다고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일찍이 온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그의 후손들을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며 그 신앙을 전파하여 만민을 구원하는 백성으로 택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이방 여인과 결혼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을 잃어버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에스라는 이스라엘 북쪽의 10지파가 그렇게 하여 이방화되어 버린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제 잘못하면 남은 유다와 베냐민 지파도 그렇게 될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이 지면에서 사라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인류 구원의 소망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이 문제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럴 때 이는 참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제 뚫린 작은 구멍을 메우지 않으면 큰 댐이 무너지는 것이 눈에 보이듯 훤했습니다. 그는 이 일을 듣고 속옷과 겉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으며 기가 막혀 앉았습니다. (3) 에스라가 이와 같이 슬퍼하고 분노하자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범죄한 것으로 말미암아 두려워 떠는 자들이 그에게 나오기 시작하였습니다. 2. 울며 기도하며 죄를 자복한 에스라 5절입니다. "저녁 제사를 드릴 때에 내가 근심 중에 일어나서 속옷과 겉옷을 찢은 채 무릎을 꿇고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향하여 손을 들고" 에스라는 상번제중 저녁 제사를 드릴 때에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극도의 슬픔과 애통 가운데, 무릎을 꿇고 하나님을 향하여 손을 들고 기도합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겸손했습니다. 죄를 가볍게 여기기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였습니다. 회개하며 긍휼만을 구합니다. 6절에 보면 에스라가 "나의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하지만, 7절부터 15절까지 보면 '우리'라는 단어가 거의 매 절마다 나옵니다. 사실 에스라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통혼 문제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바벨론에서 태어나 자랐습니다. 2차 귀환자들을 이끌고 몇 달 전에 예루살렘에 귀환했습니다. 이스라엘 남자들이 이방 여인과 결혼했다는 것은 상상하지도 못한 그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백성들의 죄 문제를 ‘우리 죄’라고 표현함으로 자기 책임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과거에 이스라엘 백성은 우상숭배를 하며 범죄하였습니다. 그 죄악이 많아 정수리에 넘치고 그 허물이 커서 하늘에 미쳤습니다. 하나님이 이런 그들을 징계하셨습니다. 칼에 죽으며 사로잡히며 노략을 당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바사의 포로 백성 상태로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비로우신 하나님은 이런 가운데서도 조금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하나님이 이방 왕들의 마음을 감동시키사 백성들이 바벨론에서 돌아오게 하시고 성전을 짓게 하셨습니다. 정착할 땅도 주셨습니다. 이는 범죄한 백성들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크신 은혜입니다. 그런데 이런 은혜를 받는 와중에도 주님의 계명을 버리고 이방 여인들과 결혼을 하였으니 에스라는 이게 도대체 말이나 되는 것이냐고 합니다. 우리가 무슨 할 말이 있겠느냐, 입이 열개라고 할 말이 없다고 합니다. 에스라는 백성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말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정말 자기 죄를 하나님 앞에서 깊이 깨달으면 용서를 구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하'자도 입에 올릴 자격이 없음을 알고 그저 그 앞에서 울기만 합니다. "다만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할 뿐입니다. 에스라의 기도가 그런 기도였습니다. 에스라는 백성들의 죄를 대신하여 어떤 형벌이라도 받고자 하는 심정이었습니다. 그의 기도는 모세의 기도를 생각나게 합니다. 이스라엘 조상들은 애굽에서 나온 후 광야에서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그 앞에 절하며, "이것이 우리를 애굽에서 구원해낸 신이라" 하며, 먹고 마시고 뛰놀았습니다. 하나님은 진노하사 그들을 다 쓸어버리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자기의 생명을 담보로 하여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했습니다.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주옵소서!" (출32:32) 하나님은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 백성에 대한 진노를 멈추셨습니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도 임박한 하나님의 심판을 알지 못하는 예루살렘 백성들을 보고 탄식하며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그들의 구원을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눅23:34) 우리 민족은 수천 년 동안 온갖 우상들을 섬겨왔습니다. 산에 가면 산신이 있고, 물에 가면 물신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큰 나무나 큰 바위를 보면 그 앞에서 절을 했습니다. 제주도에서는 뱀을 신성시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백성들에게 선교사들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들이 복음을 전할 때 파란 눈을 가진 요상한 짐승들이 나타났다고 죽이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은 36년 일제 강점기 수난을 통해서 우리 백성을 훈련하셨습니다. 한국전쟁과 민족의 분단이라는 고통을 허락하셨습니다. 지금도 지구상에서 유일한 분단국가로 남아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그간의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배반하며 물질과 쾌락을 우상으로 섬기고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을 정도로 급속히 기독교 강국이 되었던 우리나라가 유례가 없을 정도로 급속히 탈기독교 국가가 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문제가 나와 별로 상관이 없는 것으로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에스라를 보십시오. 그는 자기 민족의 죄를 자기 죄로 영접하고 울며 죄를 자복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민족의 죄를 회개하며 긍휼을 구하는 한 사람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그 백성들 가운데 회개의 역사를 일으키십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은혜 가운데 산 것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는 예수님 덕분입니다. 목자님들과 동역자님들의 중보기도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민족의 죄, 이 사회의 죄를 나의 죄로 알고 애통하게 회개의 기도를 해야겠습니다. 이 시대 캠퍼스 양들의 죄악을 가슴에 품고 이들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해야겠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긍휼을 베풀어 주실 것을 믿습니다. 3. 이방 여인을 끊어 버리라 10:2-4절입니다. "엘람 자손 중 여히엘의 아들 스가냐가 에스라에게 이르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께 범죄하여 이방 여자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았으나 이스라엘에게 아직도 소망이 있나니 곧 내 주의 교훈을 따르며 우리 하나님의 명령을 떨며 준행하는 자의 가르침을 따라 이 모든 아내와 그들의 소생을 다 내보내기로 우리 하나님과 언약을 세우고 율법대로 행할 것이라 이는 당신이 주장할 일이니 일어나소서 우리가 도우리니 힘써 행하소서 하니라" 에스라가 엎드려 울며 기도하여 자복할 때에, 많은 백성이 심히 통곡하였습니다. 백성들 가운데 회개의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이때 스가냐가 에스라에게 말합니다. 우리가 비록 이방 여자를 아내로 삼았지만 지금이라도 그들을 다 내보내기로 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다시 용서하시지 않겠습니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에스라도 이 점을 생각했었을 것입니다. 회개하고 열매를 맺으면 하나님이 다시 받아주시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에스라가 먼저 말을 꺼낼 경우 반대하는 사람이 생길 수 있습니다. 이 경우 전체 공동체를 섬겨야 하는 그의 리더십에 치명적인 상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동역자 중의 한 명인 스가냐가 이러한 어려운 일을 제안했습니다. 에스라에게 당신이 이 문제에 대한 이니셔티브를 갖고 추진하라, 그러면 우리가 돕겠다고 합니다. 이미 결혼을 하여 자식까지 낳았는데, 이들을 내어보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특히 지도자들이 이 일에 앞장을 섰으니 그들의 강력한 반발이 예상됩니다. 여러 가지 타협안이 나올 수도 있었습니다. "기왕 엎질러진 물이니, 이미 결혼한 사람들은 봐주고 다음부터나 잘 하자"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스가냐는 단호한 방향을 제안했습니다. 그는 이러한 방향을 제시하며 지도자 에스라를 신앙적으로 동역했습니다. 이러한 스가냐의 제안은 에스라에게 큰 용기를 주었을 것입니다. 이에 에스라는 일어나 온 백성들로 하여금 그 말대로 행하도록 맹세하게 합니다. 그리고 모든 백성들이 3일 내에 예루살렘에 모이도록 합니다. 백성들이 모였을 그 때는 유대력 9월 20일이었습니다. 태양력으로 11월말, 12월 초순으로 겨울이었습니다. 우기였습니다. 백성들이 모인 그 당시 마침 큰비가 쏟아졌습니다. 백성들은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로 인해 흠뻑 젖었고, 이것을 하나님의 진노의 표현으로 여겼을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범죄와 큰 비로 인해 떨었습니다. 이때 에스라가 이들에게 무엇을 촉구합니까? 10,11입니다. "제사장 에스라가 일어나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범죄하여 이방 여자를 아내로 삼아 이스라엘의 죄를 더하게 하였으니 이제 너희 조상들의 하나님 앞에서 죄를 자복하고 그의 뜻대로 행하여 그 지방 사람들과 이방 여인을 끊어 버리라 하니" 에스라는 그들의 죄를 지적하고, 단호하게 끊도록 도전했습니다. 이방 여인들과 그 소생들을 출교시키도록 명하였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에스라는 죄의 뿌리를 확실하게 뽑고자 했습니다. 이런 에스라의 조치가 너무 심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런데 만일 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당시 예루살렘에 귀환한 백성들은 이스라엘의 신앙적 주류입니다. 이미 북쪽의 열 지파는 더 이상 여호와를 섬기는 백성들이 아니었습니다. 바벨론에 남아 있는 대다수의 유대인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결국 이방화됩니다. 예루살렘과 유다에 돌아온 유대인들! 그들이 하나님의 남은 백성들입니다. 그들이 아브라함의 언약을 이어가야 되는 사람들입니다.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만민 구원 역사를 섬겨야 하는 공동체입니다. 그런데 그 공동체가 타락하기 시작했습니다. 큰 댐에 작은 구멍이 나서 물이 새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을 막지 않으면 이 땅에서 여호와를 섬기는 백성은 사라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에 있어서 절체절명의 순간인 것입니다. 에스라의 방향이 떨어지자 백성들이 어떻게 합니까? 12절입니다. "모든 회중이 큰 소리로 대답하여 이르되 당신의 말씀대로 우리가 마땅히 행할 것이니이다" 그런데 사람은 너무 많고 폭우가 쏟아지고 있으며 이 문제 조사에 시간이 걸리니 백성들을 일단 집으로 돌려보내자고 합니다. 시간을 두고 조사하여 해당자들을 찾아내고 나중에 장로들과 함께 다시 예루살렘에 모이도록 하자고 합니다. 시일을 두고 신중하게 처리하자고 한 것입니다. 15절을 보면 아사헬의 아들 요나단과 디과의 아들 야스야가 일어나 반대하였습니다. 시간을 길게 주지 말고 여기 모인 김에 마무리를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무리들의 제안대로 시행됩니다. 16절을 보면 사람들을 돌려보내고 10월 1일 부터 각 고을마다 조사를 시작합니다. 그 조사가 다음 해 1월 1일에 끝납니다. 18절 부터 44절까지는 이방 여인과 결혼한 사람들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사장 5명, 레위인 6명, 평민들 103명하여 총 114명입니다. 이 숫자는 전체 이스라엘 자손이 5만 명 이상인 것을 볼 때 그다지 많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죄는 작게 보여도 적은 양의 누룩이 전체를 부풀게 하듯 공동체를 타락하게 합니다. 에스라는 이 문제를 분명하고 단호하게 해결하였습니다. 에스라의 영적 갱신에 대한 내용이 통혼한 명단만 밝히고 끝납니다. 다소 미완성의 느낌이 듭니다. 이들이 모두 아내와 자식들을 내 보냈을까? 이방 여인들이 유대인으로 개종하는 절차를 밟도록 하는 구제책은 없었을까? 아내와 자식을 따라간 남자들은 없었을까? 하는 점에 대해서는 성경은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 통혼 문제가 쉽지 않은 문제라는 것은 위에서 언급한 느헤미야 13:28 의 경우에도 볼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에스라의 귀환 14년 후 제3차 귀환자들을 이끌고 옵니다. 그 때에도 대제사장 엘리아십의 손자가 호론 사람 산발랏의 딸과 결혼한 것을 볼 때 이방인 통혼 문제는 쉽지 않은 문제요 시대를 거쳐 싸워야 할 문제임을 보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오늘 본문을 우리 시대에 그대로 적용하기는 어렵습니다. 우리 자녀가 이방 여인 곧 비신자와 결혼했다고 그 여인과 이혼하라고 말 할 수는 없습니다. 그 자식들을 쫓아내라고 했다가는 큰 문제가 될 것입니다. 이방 여인을 쫓아내라는 것은 그 당시 신정일치 시대 곧 그 당시의 종교법이 바로 실정법이었던 시대의 특수성에 비추어 생각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전서 7:13,14a에서 말합니다. "어떤 여자에게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있어 아내와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그 남편을 버리지 말라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나니" 비신자와 결혼했다 하더라도 그 가정을 지켜 비신자 배우자가 믿는 자가 되도록 선한 영향을 끼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본문의 이방 여인을 끊어버리라는 것을 영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영적으로 볼 때 우리가 끊어낼 이방 여인이 무엇일까요? 이방 여인은 나와 하나님 사이를 멀어지게 만드는 존재입니다. 이 시대의 물질적이고 정욕적인 풍조가 이방 여인입니다. 돈을 가장 귀하게 보고 좇는 삶의 자세, 진리의 말씀보다 이 시대의 인간중심주의, 상대주의가 이방 여인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과 헌신을 거부하게 하는 비성경적인 가치관들이 이방 여인입니다. 우리는 이런 이방 여인들을 좇아내고 여호와 하나님을 마음 첫 자리에 모셔 들여야 합니다. 그것이 이방 여인을 쫓아내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사명 중심의 가정을 이루는 것입니다. 비신자와 결혼은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를 금하고 있습니다. 결혼은 가장 비밀한 것도 같이 나누는 관계인데 우리의 가장 근본된 신앙적인 것을 나누지 못하면서 결혼 생활을 유지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은 우리를 캠퍼스 제자양성과 세계선교를 섬기는 모임으로 부르셨습니다. 이 부르심에 순종한 우리 모임을 지난 세월 동안 크게 축복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부르심을 지키기 위해서는 인생의 방향, 곧 사명이 같은 사람끼리 가정을 이루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영육간의 자녀들이 믿음과 사명에 기초한 가정을 이룰 수 있도록 계속 기도를 해야겠습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백성들의 죄 문제를 자기 문제로 알고 통회하는 에스라를 쓰셔서 이스라엘 가운데 영적 갱신을 이루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일시적인 고통을 감내하며 순종하였습니다. 우리도 이 나라와 이 사회의 죄악을 들고 하나님께 나아가 회개 기도해야겠습니다. 이방 여인들을 단호하게 끊고 이 시대 캠퍼스 청년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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