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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3년 느헤미야 3강 하나님께서 이루셨다 (느헤미야 6장,7장)2023-12-04 0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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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느헤미야 3강


하나님께서 이루셨다


말씀/ 느헤미야 6장,7장

요절/ 느헤미야 6:16

“우리의 모든 대적과 주위에 있는 이방 족속들이 이를 듣고 다 두려워하여 크게 낙담하였으니 그들이 우리 하나님께서 이 역사를 이루신 것을 앎이니라”


우리는 지난 강의에서 대적들이 성벽 건축을 끈질기게 방해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느헤미야와 백성들은 하나님을 믿고 열심히 일하였습니다. 특히 한 손에는 병기를 잡고 한 손으로 일을 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백성들은 드디어 성벽 공사를 완성합니다. 저자는 이것이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고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최선을 다 하는 자들을 통해 친히 일하시는 것을 배우길 기도합니다. 또한 느헤미야의 큰 믿음과 충성심을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1. 어찌하여 역사를 중지하겠느냐 

1절입니다. "산발랏과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 게셈과 그 나머지 우리의 원수들이 내가 성벽을 건축하여 허물어진 틈을 남기지 아니하였다 함을 들었는데 그 때는 내가 아직 성문에 문짝을 달지 못한 때였더라" 산발랏은 사마리아 총독입니다. 도비야는 산발랏의 부하이고 게셈은 유다 남쪽에 살던 아라비아 족속의 대표입니다. 그리고 "그 나머지 우리의 원수들"은 느헤미야 4:7을 보면 암몬 사람과 아스돗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느헤미야가 그 어려운 성벽 공사를 마쳐 허물어진 틈을 남기지 아니하였다 함을 들었습니다. BC 586년 유다 멸망 때 파괴된 후 이제 140여 년 만에 무너진 성벽이 중건되어 전체가 다 연결이 된 것입니다. 이제 10개의 성문들에 문짝을 달면 모든 공사가 끝납니다. 


그러자 대적들은 “이제 졌다!”하면서 두 손을 들어버렸나요? 아닙니다. 그들은 느헤미야에게 이렇게 제안합니다. 2절입니다. "산발랏과 게셈이 내게 사람을 보내어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오노 평지 한 촌에서 서로 만나자 하니 실상은 나를 해하고자 함이었더라" 대적들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유다 백성의 지도자 느헤미야를 제거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래서 오노 평지의 한 촌에서 만나자고 제안했습니다. 각 도의 수장들이 모여 정상회담을 하자는 것입니다. 오노 평지는 유다 서쪽 경계선에서도 한참 더 나가야 되는 지점입니다. 그곳에 가면 느헤미야가 안전보장이 전혀 안 됩니다. 그들은 느헤미야를 그곳으로 오게 하여 죽이고자 함이었습니다.


대적들의 제안에 대한 느헤미야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3절입니다. "내가 곧 그들에게 사자들을 보내어 이르기를 내가 이제 큰 역사를 하니 내려가지 못하겠노라 어찌하여 역사를 중지하게 하고 너희에게로 내려가겠느냐 하매" 성벽 건축이 거의 막바지입니다. 문짝만 달면 됩니다. 느헤미야는 이제 그 일은 동역자들에게 맡기고 외교적인 문제를 챙겨도 될 듯합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마지막 단계까지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내가 이제 큰 역사를 하니 내려가지 못하겠노라 어찌하여 역사를 중지하게 하고 너희에게로 내려가겠느냐" 느헤미야는 성문을 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쉬우니 작은 역사라고 여기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크던 작던 다 중요하고 큰 역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이 큰 역사를 내려놓고 그들에게 내려가지 못하겠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어찌 하나님의 역사를 중지하게 하고 너희에게로 내려가겠느냐”


4절을 보면 대적들은 오노 평지 정상회담을 네 번이나 요청해 왔습니다. 보통 세 번 요청하면 거절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네 번째도 거절하고 자기 일에 집중하였습니다. 자기가 맡은 사명을 마무리 하고자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보통 처음 시작할 때는 거창하게 합니다.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기도지원을 받으며 시작합니다. 그러나 끝부분에 가서는 일이 피곤하게 여겨지고 대충 끝내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 일을 온전히 완수하고자 하였습니다. 예수님도 지상 사역의 마지막인 십자가를 지고자 하실 때 참으로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감당하고자 결단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요17:4). 예수님은 아버지가 하라고 주신 일을 끝까지 이루십니다. 그리하여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십니다. 


우리에게도 하나님이 맡겨주신 사명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과 같이 죄인을 불러 회개하도록 돕는 일이요 잃어버린 자들을 찾아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는 일입니다. 이는 생명을 구하는 일입니다. 세상에서 육신의 생명을 구하는 앰뷸런스가 지나가면 사람이나 차들이 다 급히 양보해줍니다. 육신의 생명도 그와 같이 귀할진대 영혼의 생명은 얼마나 더 귀합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이미 영원한 생명을 얻었고 이 생명을 나눠주는 거룩한 사명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하라고 주신 일을 온전히 이루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를 기도합니다.


2. 나 같은 자가 어찌 도망하랴?

5절입니다. "산발랏이 다섯 번째는 그 종자의 손에 봉하지 않은 편지를 들려 내게 보냈는데" 산발랏이 이번에는 고도의 심리전을 씁니다. 한 종자의 손에 봉하지 않은 편지를 들려 느헤미야에게 보냅니다. 중요한 서류를 봉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 내용을 흘리기 위한 것입니다. 느헤미야에게 그 편지가 전달되는 과정에 누설되어 소문이 나도록 했습니다. 그 편지의 내용은 6,7절과 같이 두 가지입니다. 첫째, 사람들 간에 소문이 났는데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벽을 건축하는 이유는 아닥사스다 왕을 모반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둘째, 느헤미야가 이미 예루살렘에 선지자를 세워 유다에 왕이 있다는 예언을 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곧 느헤미야가 왕이 되려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고 이 말들이 바사 왕의 귀에도 곧 들어갈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에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모여서 의논하자는 것입니다.


이는 아무 근거가 없는 말입니다. 그러나 소문도 한두 번이지 반복하여 들으면 그런가 하는 마음이 듭니다. 한비자에는 '삼인성호(三人成虎)'라는 말이 나옵니다. 중국 전국시대 이야기로 '시장에 호랑이가 나타났다'는 터무니없는 말도 세 명이 하면 참인 것처럼 여겨진다는 것입니다. 산발랏이 말한 것이 근거가 없다고는 하지만 바사 왕이 여러 사람으로부터 자꾸 들으면 마음에 의심이 생길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아닥사스다 왕이 자기를 신임하고 있음을 믿지만 마음이 불편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산발랏의 비방에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백성들의 사기를 떨어뜨려 성벽 건축을 완성하지 못하게 하는 계략임을 알고 다만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합니다.  "이제 내 손을 힘있게 하옵소서" (9b)


느헤미야가 계략에 넘어가지 않자 대적들은 더 고도의 전술을 씁니다. 10절입니다. "이 후에 므헤다벨의 손자 들라야의 아들 스마야가 두문불출하기로 내가 그 집에 가니 그가 이르기를 그들이 너를 죽이러 올터이니 우리가 하나님의 전으로 가서 외소 안에 머물고 그 문을 닫자 저들이 반드시 밤에 와서 너를 죽이리라 하기로" 스마야가 성벽을 쌓는 작업장에도 나오지 않고 며칠 때 두문불출이었습니다. 혹시 몸이 아픈가 하여 느헤미야가 그의 집에 심방을 갔습니다. 느헤미야를 보고 스마야가 말합니다. "그들이 너를 죽이러 올터이니 우리가 하나님의 전으로 가서 외소 안에 머물고 그 문을 닫자 저들이 반드시 밤에 와서 너를 죽이리라" 제사장이요 예언자인 그가 분명하게 말합니다. “그들이 반드시 밤에 와서 너를 죽일 것이다!” 이 얼마나 두려운 말입니까? 그러면서 말하기를 “그러니 나와 함께 하나님의 전 안에 있는 거룩한 성소에 들어가서 안에서 물은 걸어 잠그자!” 성소는 제사장 외에는 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 곳입니다. 그러니 그 곳에 들어가 문을 닫으면 안전하다는 것입니다. 그럴듯한 제안입니다. 


이에 대해 느헤미야는 무엇이라 합니까? 11절입니다. "내가 이르기를 나 같은 자가 어찌 도망하며 나 같은 몸이면 누가 외소에 들어가서 생명을 보존하겠느냐 나는 들어가지 않겠노라 하고" 그는 일언지하에 거절합니다. "나 같은 자가 어찌 도망하랴?" 이는 하나님이 나를 성벽 건축의 책임자로 세우셨는데 내가 그 거룩한 직분을 버리고 어찌 도망을 가겠느냐 하는 말입니다. 더욱이 제사장들만 들어갈 수 있는 성소에 들어가는 죄를 어찌 지을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는 지도자로서의 책임 의식이 분명하였습니다. 자신이 목숨을 건지겠다고 도망가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는 자기 목숨을 잃을지라도 도망가지 않고자 하였습니다. 그런 후에 그가 깨달은 즉 스마야가 산발랏에게 뇌물을 받고 그런 예언을 한 것이었습니다. 느헤미야의 가장 가까운 동역자가 되어야 할 제사장이 이렇게 대적에게 뇌물을 받고 느헤미야를 덫에 걸리게 하려 했으니 이 얼마나 기가 막힌 일입니까?


그런데 이는 스마야뿐만이 아니었습니다. 14절을 보면 여선지자 노아댜와 그 외 여러 선지자들도 거짓 예언을 하여 느헤미야를 두렵게 하였습니다. 실로 대적들의 공격은 집요하였고 그들에게 매수된 제사장, 예언자들이 많았습니다. 백성의 지도자인 제사장, 예언자들이 이렇게 하였던 것입니다. 이런 자들을 위해 느헤미야가 녹을 받지도 않고 사재를 털어 섬겼으니 얼마나 마음이 힘들었겠습니까? 그가 의지하고 소망할 분은 하나님 한 분뿐이었습니다. 그는 이 모든 일을 하나님께 들고 나아가 기도합니다. "내 하나님이여 도비야와 산발랏과 여선지 노아댜와 그 남은 선지자들 곧 나를 두렵게 하고자 한 자들의 소행을 기억하옵소서 하였노라"(14)


느헤미야를 대적한 내부의 적은 제사장과 선지자들만이 아니었습니다. 17~19절입니다. "또한 그 때에 유다의 귀족들이 여러 번 도비야에게 편지하였고 도비야의 편지도 그들에게 이르렀으니 도비야는 아라의 아들 스가냐의 사위가 되었고 도비야의 아들 여호하난도 베레갸의 아들 므술람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으므로 유다에서 그와 동맹한 자가 많음이라 그들이 도비야의 선행을 내 앞에 말하고 또 내 말도 그에게 전하매 도비야가 내게 편지하여 나를 두렵게 하고자 하였느니라" 도비야는 암몬 사람입니다. 암몬 족속은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가고 있던 이스라엘을 저주하고 대적한 족속입니다. (신23:3-6) 이는 하나님을 대적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여호와의 총회'에 참여하는 것이 영원히 금지된 족속입니다. (신 23:3)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런 그가 유다 귀족들과 이중으로 인척 관계를 맺은 것을 보면 아주 수완이 좋은 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13장에 보면 그는 대제사장 엘리아십에게 로비를 하여 성전의 헌물 창고를 자기 개인의 방으로 사용합니다. 유다 귀족들과 인척 관계를 맺은 도비야에게는 그를 지지하는 유다 지도층 인사들이 많았습니다. 유대 귀족들은 느헤미야가 성벽을 건축하는 동안에도 여러 번 도비야에게 편지하여 성 안의 정보를 전해주었습니다. 도비야는 이를 기초로 느헤미야에게 편지를 보내 그를 두렵게 하였습니다. 귀족들은 도비야가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느헤미야 앞에서 칭찬하였습니다. 느헤미야 편에 선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만 붙들고 힘겨운 싸움을 싸웠습니다.


3. 하나님께서 이루셨다

이러한 상황에서 성벽 건축 역사가 드디어 완성됩니다. 15절입니다. "성벽 역사가 오십이 일 만인 엘룰월 이십오일에 끝나매" 대적자들이 그 동안 얼마나 줄기차고 집요하게 방해를 하였습니까? 처음에는 조롱하였습니다. "저들이 성벽을 짓는다고 여우가 올라가도 무너질 걸!" 그럼에도 건축을 진행하자 그들은 다 함께 꾀하여 예루살렘으로 가서 유대인들을 쳐서 죽이자고 하였습니다. 오노 평지에서 만나 회담을 하자고 하였습니다. 느헤미야가 바사 왕을 반역하려고 성벽을 쌓는다고 유언비어를 퍼뜨렸습니다. 스마야를 비롯한 제사장과 선지자들을 매수하여 느헤미야를 실족하게 하려했습니다. 유대 귀족들을 등에 업고 압박을 가해왔습니다. 이 모든 일에 대해 느헤미야는 혈혈단신이었습니다. 그는 외적 내적으로 엄청난 도전에 직면하였지만 오직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였습니다. 두려움이 몰려왔지만 오직 하나님만을 붙들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습니다. 마침내 오십이 일 만인 엘룰월 이십오일에 성벽 공사가 끝난 것입니다. 성벽의 높이는 약 10미터, 길이는 약 2~3Km 정도 됩니다. 낙산에 가보면 한양 성곽이 있는데 높이가 한 7-8 미터 됩니다. 돌 하나하나를 보면 쉽게 쌓을 수 있는 돌들이 아닙니다. 여러 사람이 하나를 들어 겨우 다른 돌과의 간격을 맞추어야 하나씩 올라갑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스룹바벨 성전을 짓는데 약 4년이 걸렸습니다. 그런데 이 큰 예루살렘 성벽을 불과 52일 만에 완성한 것은 실로 기적이었습니다.  


여기에는 몇 가지 현실적인 이유가 있었습니다. 첫째, 비가 오지 않는 건기에 지어서 중단 없이 건축할 수 있었습니다. 유대 종교력 엘룰월이면 태양력으로 8월말정도 입니다. 7,8월에 건축이 이루어졌는데 그 때가 건기라 중단 없이 일할 수 있었습니다. 둘째, 멀리 있는 채석장에서 돌을 다듬어서 가져 온 것이 아니라 흙무더기에 돌을 꺼내 올려 쌓은 것이기에 상대적으로 쉬웠습니다. 셋째, 대적들의 방해 공작 때문이었습니다. 대적들은 심지어 공사하는 백성들을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그런 위협이 도리어 백성들로 하여금 깨어있게 하였고 죽기 살기로 일을 하게 만든 것입니다. 이를 볼 때 대적들의 방해가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닌 것임을 보게 됩니다. 사탄 마귀의 공격이 도리어 우리도 하여금 정신을 차리게 합니다. 긴장하고 깨어 있게 합니다. 열심히 집중하여 일하게 합니다.


무엇보다 성벽 공사가 이렇게 빠르게 완성이 된 것은 하나님이 하셨기 때문입니다. 16절입니다. "우리의 모든 대적과 주위에 있는 이방 족속들이 이를 듣고 다 두려워하여 크게 낙담하였으니 그들이 우리 하나님께서 이 역사를 이루신 것을 앎이니라" 사람들이 일을 열심히 했지만 그 일이 원활하게 진행이 되고 완수될 수 있었던 데에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백성들에게 힘을 주시고 열정을 주시고, 대적들을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함을 주셨습니다. 돌이 흙더미 속에서 잘 꺼내지게 하시고 다른 돌 위에 착착 잘 맞아 들어가도록 하셨습니다. 일꾼들의 호흡이 서로 잘 맞게 하셨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손이 그들을 거들어주셨습니다. 요즘에 웨어러블 로봇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사람이 몸에 착용하여 부족한 근력을 보완하거나, 장애를 극복하거나, 나아가 물리적 한계를 뛰어넘게 하는 장치를 말합니다. 이런 것을 입으면 포크레인이 들어 올리는 무거운 것을 사람이 들어 올립니다. 점프력이 놀랍게 향상됩니다. 지치지 않고 높은 곳을 달려 올라갑니다. 하나님은 마치 각 사람에게 입혀진 웨어러블 로봇 같이 일하는 자들을 도와주셨습니다.


예루살렘 성벽 공사가 52일 만에 끝나자 대적들도 인정합니다. "그들이 우리 하나님께서 이 역사를 이루신 것을 앎이니라" 사람이 아무리 열심히 해도 하나님이 도우시지 않으면 되는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부족해도 하나님이 도우시면 어떤 불가능하게 보이는 일도 가능하게 됩니다. 예전에 우리 모임의 설립자 고 이사무엘 선교사님은 여러 한계적인 상황 가운데도 믿음의 도전을 많이 하셨습니다. 60,70년대 가난한 한국 대학생들이 어떻게 선진국 유럽이나 미국 사람들을 선교할 수 있단 말입니까? 90년대 초에 들어서도 제가 영국에 선교사로 간다고 하니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사무엘 선교사님은 많은 불가능한 일에 도전하셨습니다. 그때 그는 믿는 바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도우신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도우신다! 이것을 우리는 계산에 넣어야합니다. 우리 자신과 상황만 갖고 계산하면 답은 항상 불가능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도우신다“를 넣어 계산하면 항상 가능합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을 굳게 의지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도우신다는 믿음으로 일을 추진하여 마침내 완성하였습니다. 우리에게는 어떤 불가능하게 보이는 문제가 있습니까? 코로나 시대를 거치면서 이 시대 캠퍼스 청년들은 기독교에 대해 더욱 냉소적이고 무관심해졌습니다. 이런 문제 앞에 우리는 전의를 상실하고 현실에 밀려 살아가기 쉽습니다. 마음에 낙심이 들고 해도 안 된다는 부정적인 마음이 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면 됩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을 믿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도전할 때 반드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캠퍼스 역사를 이루실 것을 믿습니다.


4. 우리의 성벽 공사

느헤미야와 백성들이 예루살렘 성벽 중수를 완성하였습니다. 이 성벽 공사를 하는 것이 우리에게 적용해보면 무엇을 의미할까요? 예루살렘 성벽은 무엇을 위해 있는 것일까요? 예, 성벽 안에 있는 성전과 성읍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입니다. 성벽 자체가 목적은 아닙니다. 성벽은 수단입니다. 성벽을 튼튼히 지음으로 그 안의 것들을 안전하게 보존합니다. 요즘에 우리는 주로 아파트나 빌라에 살기에 자기 집에 담을 두르는 일은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예전 집을 보면 담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가 가난하여 도둑이 많았을 때는 담을 높게 올리고 그 위에 쇠꼬챙이나 유리병 깨진 것들을 박아 놓았습니다. 제가 아프리카에 가보니 담 위에 철조망을 쳐 두고 밤에는 전기가 흐르게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담을 튼튼히 쌓아 외부인이 집에 들어오지 못하게 함입니다. 담이 뚫렸다고 생각해 봅니다. 지나가는 사람들도 창문에 다가와 안을 들여다 볼 것입니다. 혹시 문이 열려있으면 안으로 들어올 수도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담은 그 안에 있는 것들을 보호하는 데 필수적입니다.


예루살렘 성벽은 성전을 보호하고 주민들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필수적이었습니다. 초대교회에 지도자들은 신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보호벽이 필요하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사도신경을 만들어 고백하도록 하였습니다. 신자들을 이단 사상에서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성벽인 셈입니다. 우리 모임에도 성벽이 있습니다. 보이는 성벽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성벽입니다. 저는 가장 중요한 성벽이 말씀을 열심히 공부하고 소감을 쓰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말씀 공부에 대한 열심이 우리의 생명을 지키는 성벽입니다. 소감을 쓰며 말씀을 머리로만 아니라 마음으로 받는 것이 우리의 성벽입니다. 물론 소감 쓰는 것 자체가 목적은 아닙니다. 그것은 말씀을 잘 받는 수단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손을 사용할 수 없는 형편이라면 소리 내어 배운 바를 고백하는 것도 소감쓰기에 해당될 것입니다.


또 우리의 성벽은 캠퍼스 역사를 위해 계속하여 기도하고 도전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임의 정체성은 우리 모임의 이름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대학생, 성경, 공동체입니다. 대학생을 중심으로 돕는 것입니다. 매년마다 수많은 지성인들이 오가는 캠퍼스는 여전히 복음의 황금어장입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모임입니다. 가족과 같이 서로 사랑하며 섬기는 공동체입니다. 고 이사무엘 선교사님의 유훈이 센터에 걸려있습니다. 우리의 정체성과 신앙을 지키기 위한 좋은 성벽들입니다. 물론 벽이 너무 높으면 양들이 들어오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벽은 우리를 지키기도 하지만 세상과 단절시켜 선교를 어렵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벽을 쌓되 적절한 균형도 필요합니다.


5. 충성스럽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

백성들은 단 기간에 성벽 중건을 완성하였기 때문에 몹시 지쳤을 것입니다. 느헤미야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이제 낙성식 파티를 열어 백성들을 위로하고 휴가를 주어야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무엇을 합니까? 7:1절입니다. "성벽이 건축되매 문짝을 달고 문지기와 노래하는 자들과 레위 사람들을 세운 후에" 그는 축제를 벌이는 대신에 후속조치에 들어갔습니다. 그 첫 번째 일은 문지기와 노래하는 자들과 레위 사람들을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에 거하는 사람들의 대다수가 제사장과 레위인들이었습니다. 노래하는 레위인들까지 파수를 돕도록 한 것입니다.


2절입니다. "내 아우 하나니와 영문의 관원 하나냐가 함께 예루살렘을 다스리게 하였는데 하나냐는 충성스러운 사람이요 하나님을 경외함이 무리 중에서 뛰어난 자라“ 느헤미야는 충성된 사람,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함이 무리에서 뛰어난 자를 세웠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뛰어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무엇으로 뛰어나는가가 문제입니다. 어떤 사람은 지식으로 뛰어나기를 원합니다. 어떤 사람은 특별한 재능으로, 어떤 사람은 외모로 뛰어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은 "충성스럽고 하나님을 경외함이 뛰어난 사람"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그런 사람과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섬김에 있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충성스럽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으로 뛰어난 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느헤미야와 백성들은 하나님의 뜻을 섬기는 것을 큰 역사로 여겼습니다. 맡겨진 사명에 충성하였습니다. 어려울 때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그들을 통하여 예루살렘 성벽 중건을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그를 믿고 도전하는 자들을 통해 일하십니다. 우리에게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고 도전하는 은혜주시길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사탄의 어떤 대적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승리를 체험하기를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