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느헤미야 4 강 견고한 언약을 세워 기록하고 말씀/ 느헤미야 8-10장 요절/ 9:38 “우리가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이제 견고한 언약을 세워 기록하고 우리의 방백들과 레위 사람들과 제사장들이 다 인봉하나이다 하였느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성경이 무엇입니까? 구약과 신약, 곧 옛언약과 새언약으로 구성된 언약의 책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는 뭘까요? 언약 관계입니다. 남편과 아내, 목자와 양, 왕과 백성과의 관계입니다. 특히 언약관계를 말할 때는 하나님의 호칭중에 ‘여호와’란 호칭을 주로 씁니다. 그래서 다윗이 ‘하나님은 나의 목자시니’라고 하지 않고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달려 피흘려 죽게 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를 사랑하셔서~’ 네, 맞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언약을 맺었기 때문입니다. 그 언약을 이루심으로 그 분의 영광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이것을 알고서 신앙생활을 하면 하나님께 대한 바른 신앙생활 하는데 큰 유익이 됩니다. 본문으로 돌아와서, 느헤미야는 언약을 지키시는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을 붙들고 예루살렘에 왔습니다. 원수들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백성들과 합심하여 52일만에 기적적으로 성벽을 중건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성벽이 견고해도 그 안에 살고 있는 백성들의 마음이 믿음 위에 견고히 서 있지 않으면 또 다시 문제가 생기고 성벽도 다시 무너질 것입니다. 내면의 성벽을 견고하게 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그들이 어떻게 내면의 성벽을 쌓았는가? 하나님과의 언약을 어떻게 새롭게 갱신하여 견고히 했는가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Ⅰ. 율법 낭독과 초막절 준수 (8장) 2절을 보면, 때는 일곱째 달 초하루입니다. 오늘날 달력으로 하면 1월 1일이며 나팔절입니다. 새해가 되어서 이들은 무엇을 했습니까? 모든 백성이 일제히 수문 앞 광장에 모였습니다. 그리고 학사 에스라에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신 모세의 율법책을 가져오도록 요청합니다. 마치 작년에 우리 청년 리더들이 “우리를 교육시켜주시고 목자로 세워주세요” 이렇게 요청했던 것과 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에스라에게 말씀을 전해달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성벽 재건후 백성들의 마음이 지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갈급해 하고 있습니다. 성벽 재건이라는 믿음의 체험을 하고 나니 더욱 하나님에 대해 알고 싶어합니다. 거기에 참여한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남자와 여자와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이었습니다. 신명기에서 어린 아이들에게 율법을 외워들리라고 하였음으로 말 귀를 알아듣는 아이들도 참여했을 것입니다.(신6:2) 마침내 제사장 에스라가 율법책을 가지고 나무 강단에 서서 성경을 읽기 시작합니다. 새벽부터 정오까지 약 6시간 동안 말씀을 읽습니다. 요즘 이렇게 하면 다 도망갈 것입니다. 그런데 뭇 백성이 율법책에 귀를 기울였다 하였습니다. 한 사람도 자리를 뜨지 않고 모두 귀를 쫑긋 세우고 집중해서 말씀을 들었습니다. 에스라가 성경을 펼 때 백성들이 모두 다 일어났습니다. 말씀에 대한 경외심 때문에 편하게 앉아있을 수 없었습니다. 6절에 보면 에스라가 하나님을 송축합니다. 그러자 모든 백성들이 손을 들고 외칩니다. “아멘~ 아멘~” 어떤 사람들은 말씀에 깊이 감동을 받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하나님을 경배합니다. 말씀을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게 될 때 감히 고개를 들고 서 있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이 들었습니다. 이제 그들의 마음에 영적 질서가 세워지고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게 되었습니다. 지난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 전국 스텝 신년 수양회가 있었습니다. 신년 말씀으로 세 개의 강의를 공부했는데요. 그 중 신년 주제1강 말씀으로 시1편 ‘복 있는 자는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도다’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여 그 안에 거하며 묵상하며 실천하는 자가 복되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그 무엇보다도 말씀을 사랑하고 말씀을 가까이할 때 하나님과 교제의 즐거움을 누리며 복의 근원되신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누리며 형통한 삶을 살게 됩니다. 7절을 보면, 13명의 성경선생들과 레위인들이 백성들 사이에 있으면서 율법의 뜻을 해석해 줍니다. 그러자 백성들이 말씀을 깨닫고 울기 시작했습니다. 9a절.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왜 울었을까요? 말씀이 심령을 터치했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이 들은 율법은 이전에 없었던 새로운 어떤 것이 아닙니다. 이미 모세 시대에 기록되었고, 성전과 회당과 가정에서 가르쳐졌고 외웠던 말씀입니다. 단지 그들에게 들을 귀가 없었던 것이 문제입니다. 이제 그 말씀이 들려집니다. 이해됩니다. 깨달아집니다. 율법을 깨닫고 보니 ‘그동안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지 않았구나’ 알게 되었습니다. 쓰라린 죄악의 삶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징계를 받았던 과거의 회한이 가슴에 와닿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비로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으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할 때 눈물이 터져 나왔습니다. 백성들이 모인 수문(water gate)가 말 그대로 눈물의 강이 되었습니다. 영적 각성운동이 어디에서부터 옵니까? 성경의 깨달음으로부터 옵니다. 성경의 깨달음은 성령께서 주십니다. 성경의 저자는 성령님이시니 가장 잘 아십니다. 또한 하늘의 비밀인 말씀을 깨닫도록 귀를 열어주시는 분도 성령님입니다. 사도바울은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설득력있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한다’고 고백하였습니다.(고전2:4) 우리 각 개인과 공동체에 말씀을 들을 귀와 깨닫는 마음 주시도록 항상 기도해야겠습니다. 또한 성경을 올바로 이해하고 가르치는 성경선생의 역활이 중요합니다. 에스라가 귀환한지는 어언 13년이 지났습니다. 그는 그동안 원수들의 방해로 성벽을 건축하지는 못했지만 좌절하지 않고 레위인들에게 부지런히 말씀을 가르치고 그들을 성경선생으로 키웠습니다. 제자양성을 한 것입니다. 때가 되자 쓰임 받게 되었고 결실을 맺게 되었습니다. 에스라와 그의 제자인 레위인들이 영적 부흥을 이끌고 있습니다. 이 시대의 요청이 무엇입니까? 말씀을 제대로 해석하여 가르쳐줄 성경선생을 주님은 찾고 계십니다.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그러므로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을 보내어주소서 하라” 우리가 먼저 탁월한 성경선생이 되어야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캠퍼스 영혼들에게 말씀을 먹일수 있는 성경 선생을 키워야합니다. 백성들이 말씀에 감격해서 울고 있을 때 느헤미야와 에스라는 무슨 말을 해 주었습니까? 9b,10절을 함께 읽어 봅시다. “오늘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일이니 슬퍼하지 말며 울지 말라 하고 느헤미야가 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가서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되 준비하지 못한 자에게는 나누어 주라.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하고” 이 날은 새해 첫날로서 나팔절이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기뻐하라 합니다(레23:23-25). 눈물로 회개하고 애통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거기에만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이제 하나님 앞에 적극적으로 나아가서 기뻐하고 힘차게 새 출발을 해야 합니다.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하나님을 기뻐할 때 힘을 덧입게 됩니다. 그들은 과거에 주변 강대국들처럼 부와 권세, 쾌락을 통해 기쁨을 얻고자 했습니다. 그때 그들은 타락했고, 힘을 잃고, 망하고 말았습니다. 이제는 회개하고 돌아왔으니 하나님을 기쁨의 대상으로 삼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기뻐할 때 하나님께서 새 힘을 주십니다. 세상이 주지 못하는 하늘의 신령한 힘을 주십니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는 나의 반석이시며 나의 요새시라. 나의 생명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님을 찬양합니다. 주는 나의 사랑이시며 나의 의지시라” 오늘날 세상에는 우리를 기쁘게 할 것처럼 우리를 유혹하는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우리에게 잠깐의 쾌락만 제공할 뿐 진정한 힘을 주지는 못합니다.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해서 힘을 빼놓습니다. 우리가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함으로 새 힘을 덧입고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은 힘있는 인생을 살 수 있길 기도합니다. 14절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계속해서 말씀을 듣는 중에 “일곱째 달 절기에 초막에서 거할지니라” 라는 말씀이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초막절 준수에 관한 말씀을 알게 된 것입니다. 초막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원하시고 광야생활동안 그들을 인도하신 은혜를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그때는 일주일 동안 산에 가서 나뭇가지를 베어다가 초막을 짓고 거기 거하면서 말씀을 묵상해야 했습니다. 솔로몬 시대 잠깐 그리고 에스라 일행이 예루살렘에 처음 도착했을 때 잠깐 지킨 적은 있지만 여호수아 때로부터 지금까지 초막절을 제대로 지킨적이 없었습니다. 그들이 이것을 깨닫고 집 밖에 초막을 짓고 일주일 동안 초막에서 지내며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크게 기뻐하였습니다. 우리도 영적인 초막절을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가 얼마나 큰가 기억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과거를 기억하는 것은 미래를 준비하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과거를 잊어버리면 방자하게 됩니다. 그러나 겸허하게 과거를 기억하면 신중한 마음으로 미래를 대비할 수 있습니다. 지난 추수감사절 때 우리가 올 한해 하나님께서 베푸신 감사제목을 쓰며 주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기억했습니다. 그때 마음에 감사가 충만했고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 방향이 잡혔습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죄로 말미암아 불과 유황이 타는 못에 던져질 자들이었으나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로 구원받았음을 늘 기억하고 기려야 하겠습니다. Ⅱ. 언약을 세운 이스라엘 (9,10장) 9장과 10장을 보면 에스라를 통해서 율법을 듣고 나팔절과 초막절을 지킨 이스라엘 백성들이 본격적으로 말씀 앞에 회개하기에 힘을 썼습니다. 9:1~3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 달 스무 나흗 날에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여 금식하며 굵은 베 옷을 입고 티끌을 무릅쓰며 모든 이방 사람들과 절교하고 서서 자기의 죄와 조상들의 허물을 자복하고 이 날에 낮 사분의 일은 그 제자리에서 서서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낮 사분의 일은 죄를 자복하며 그들의 여호와께 경배하는데” 그들은 말씀 앞에 자신들을 비추어 보고 자신들의 죄를 발견했습니다. 특히 이방인들과 통혼하고 그들의 우상들을 받아들인 것이 큰 죄였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이방인들과 절교하기로 결단하였습니다. 또 자신들의 죄와 조상들의 허물을 자복하며 회개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을 믿음의 조상으로 택하시고 갈대아 우르에서 인도하여 내셨습니다. 그에게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을 주시고,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창12:2)” “너는 열국의 아비가 될지라(창17:5)” 그의 후손들이 애굽에서 종살이하고 있을 때 바로를 치시고 구원해 내셨습니다. 홍해를 마른 땅같이 건너게 하시고,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시내산에 강림하셔서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임명하시고,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광야 길을 지날 때 만나와 생수를 공급해 주셨습니다. 40년 동안 옷이 해어지지 않고 발이 부르트지 않게 하셨습니다. 대적들을 물리쳐 주시고 젖과 꿀이 흐르는 기름진 땅으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 땅에서 배불리 먹어 살찌며 주의 큰 복을 누렸습니다. 이렇게 엄청난 축복을 받았으면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겸손히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틈만 나면 하나님의 은혜를 까먹고 말씀에 불순종했습니다.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섬겨서 하나님을 모독했습니다. 조금만 힘들면 다른 지도자를 세워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말했습니다. 선지자들이 죄를 회개하라고 권면하면 그 선지자들을 죽여 버렸습니다. 이에 분노하신 하나님께서 그들을 대적의 손에 넘기셔서 환난을 당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면 그때서야 ‘잘못했습니다. 하나님! 도와주세요.’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긍휼히 여기셔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또 말씀에 불순종하고 죄에 빠졌습니다. 이런 일이 한 두 번이 아니라 계속하여 반복되었습니다. 벼룩도 낯짝이 있건만 이들은 목이 곧은 백성이었습니다. 그들은 이처럼 부끄러운 지난날의 죄를 고백하며 회개했습니다. 자신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자비를 베풀어 주시도록 기도했습니다. 그 회개와 결단의 표시로 하나님과 다시 언약을 맺고자 합니다. 38절을 다함께 읽겠습니다. “우리가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이제 견고한 언약을 세워 기록하고 우리의 방백들과 레위 사람들과 제사장들이 다 인봉하나이다 하였느니라” 회개와 결단의 표시로 견고한 언약을 세웠습니다. “견고한 언약”은 ‘꽉 묶어주는 약속’입니다. 사람 마음은 어딘가에 꽉 묶어두지 않으면 쉽게 흔들려서 죄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처음에 애굽에서 구원하신 후에 시내산 언약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너희는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이 될지라(출19:6)” 노예백성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정결한 신부로 맞아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언약을 배반하고 타락했습니다. 때문에 바벨론에 끌려가서 70년 동안 포로생활을 했습니다. 이제 다시 돌아와서 제 2의 언약을 맺고자 한 것입니다. 출애굽 언약이 제 1언약이라면, 출바벨론 언약은 제 2언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이 언약도 잘 지키지 못했습니다. 또 죄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셔서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게 하셨습니다. 그 십자가의 피로서 영원한 언약, 새 언약을 맺으신 것입니다. 누가복음 22:20절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예수님께서 보배로운 피를 흘려주심으로 우리 죄를 씻어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새 언약을 맺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피의 언약, 이 언약은 무엇으로도 깨뜨릴 수 없는 가장 견고한 언약입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언약은 은혜롭습니다.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지만, 하나님께서 자비하시기 때문에 주어진 것입니다. 처음부터 언약의 피는 하나님의 과분한 사랑의 증거입니다. 새 언약의 중보자로서의 예수님은 길 잃어 흩어져 유리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한데 모으십니다. 그분은 구약의 절기들을 성취하십니다. 이스라엘의 3대절기가 무엇입니까? 유월절, 오순절, 장막절(초막절)입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의 식탁으로 자기 백성들을 부르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3:20) 왜냐하면 그분은 참된 유월절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자신의 영인 성령을 보내시겠다 약속하셨습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요14:26) 그 약속대로 오순절에 그의 제자들에게 그의 영인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참된 유월절과 오순절을 예수께서 완성하셨습니다. 이제 장막절 절기만 남아 있습니다. 장막절은 모든 구속받은 자들을 위한 위대한 추수 감사제입니다. 지금 하늘의 예루살렘에서는 이미 그 절기를 위해서 모였다고 히브리서 기자는 말합니다. 예수님은 지금 땅의 모든 족속들을 이 하늘의 장막절 모임으로 초대하고 있고, 이를 위하여 우리를 세상 사람들에게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자기에게로 이끌기 위해 십자가에 들리셨고 하늘로 들려 승천하셨습니다. 이를 알기를 바랍니다. 모라비안 선교회의 창시자였던 진젠도르프는 다음과 같이 시를 썼습니다. “나의 영원한 기쁨과 위로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피. 나 이 증명서를 가지고 하나님 보좌 앞에 나아간다네. 나 기쁨의 나라에 들어가, 주님을 직접 뵈옵고, 수 많은 성도들과 함께 주님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하리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계명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 모든 말씀들은 하나님과 그 분의 백성간의 언약적 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을 창조할 때 결혼을 재정하시고, 그 속에 배타적 사랑의 신비를 계시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이십니다(출20:4-5). 그분은 여러 신들 중의 하나로서 예배 받기를 결코 허락지 않으십니다. 질투는 ‘열심’으로도 번역할 수 있는데, 하나님의 질투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향하여 가지고 있는 강렬하고 배타적을 사랑을 의미합니다. 십계명중 7계명 ‘간음하지 말지니라’ 이 말씀은 이스라엘과 맺으신 하나님의 언약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결혼 관계 안에서 남편과 아내의 상호 헌신과 사랑은 배타성을 띠고 있습니다. 우리는 결혼 전에는 누구나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혼하면 ‘기쁠 때나 슬픈 때나, 건강할 때나 아플 때나, 좋을 때나 시련의 때나, 젊을 때나 백발이 되어서나 당신 한 사람만을 사랑하겠다’고 서약하고 결혼합니다. 이처럼 부부사이의 사랑은 배타성을 띱니다. 만약 아내나 남편이 다른 남자, 다른 여자에게 마음을 두면 질투를 하는 그런 사랑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을 나타내는 모형입니다. 그것을 우리에게 알도록 하기 위해 ‘결혼’이란 제도를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입니다. 이것을 깨달은 사도바울은 사도바울은 에베소서 5장에서 부부 관계를 설명하다가 갑자기 ‘크도다 이 비밀이여’ 감탄을 합니다. 그리고 그는 남편인 그리스도와 신부인 교회와의 관계를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부연 설명합니다. ‘간음하지 말라’ 이 계명에 부부가 서로에게 성실할 때 하나님의 백성들의 가정생활이 더욱 견고해질 것입니다. 그러나 이 계명은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넘어서서 그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또한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헌신하되 질투(열심)하는 배타적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헌신하라는 하나님의 요구인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을 향하여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고후11:2)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신랑되신 예수님과 언약을 맺고 결혼한 신부입니다. 이제 예수님을 배타적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보다 다른 것을 사랑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것들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하셨습니다. 심지어 자기 목숨보다 예수님릉 더 사랑하길 요구하십니다. 이것이 가능할까요? 우리 안에 있는 예수의 영이 가능케 합니다. 우리를 새롭게 하고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하게 합니다. 성령은 율법이 요구하는 계명들을 행할 힘을 주십니다. 10장을 보겠습니다. 1~27절은 하나님과 견고한 언약을 맺고 거기에 서명한 사람들의 명단이 쭉 기록되고 있습니다. 자신의 이름을 걸고 언약을 지키겠다는 것입니다. 자~ 여기 서명한 이름들을 보십시오. 앞에 나온 다섯명의 이름을 보겠습니다. 느헤미야(여호와의 위로), 시드기야(여호와는 의로우시다), 스라야(여호와께서 주가 되신다), 아사랴(여호와께서 도우셨다), 예레미야(여호와께서 세우신다). 이들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그 이름에 모두 ‘여호와’와 관련된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뒤에 나오는 명단에도 ‘여호와’와 관련된 이름들이 많습니다. ‘여호와~’ 이 하나님의 호칭은 언약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이제 이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 이름에 걸맞게 살겠다고 결단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너무 감사하여 기꺼이 헌신합니다. 28-39절은 그들이 구체적으로 결단한 언약 조항들입니다. 첫째,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의 말씀을 좇아 이방인들과 결혼하지 않을 것을 결단합니다. 둘째, 안식일을 철저히 지키겠다고 합니다. 셋째, 하나님의 성전을 버리지 않겠다고 합니다. 구체적으로 매년 삼분의 일 세겔을 성전세로 내고, 첫 열매를 주님께 드리고, 십일조를 반드시 드리겠다고 합니다. 결론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으로 이스라엘이 외적 성벽을 쌓는데 성공하였습니다. 그들은 믿음의 체험을 기초로 하나님과 관계성을 회복하는 내적 성벽을 쌓기 위해 말씀을 듣고자 모였습니다. 말씀을 들을 때 지난 날의 죄를 회개하였습니다. 이제는 은혜를 배반하지 않고 말씀대로 살겠다고 견고한 언약을 맺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의 언약입니다. 그의 십자가는 우리를 영생으로 들어가게 하는 문입니다. 그 안으로 들어가는 자는 모두 하나님의 사랑의 집에서 안전하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주님의 보혈의 은혜를 기억하길 바랍니다. 그 은혜안에서 기뻐하길 바랍니다. 그 은혜를 증거하길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