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고린도후서 제 3 강 새 언약의 일꾼 말씀 / 고린도후서 3:1-4:6 요절 / 고린도후서 3:6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
오늘 말씀은 새 언약의 일꾼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새 언약의 일꾼이 어떤 직분인지 깨닫고 그 직분을 잘 감당할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다시 자천하기를 시작하겠느냐 우리가 어찌 어떤 사람처럼 추천서를 너희에게 부치거나 혹은 너희에게 받거나 할 필요가 있느냐” 사도 바울이 이 편지를 쓰던 시대에는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인터넷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을 처음 만났을 때, 특히 그에게 뭔가 중요한 직분을 맡겨야 할 때 그 사람이 유명인사인지 아닌지, 공부를 했으면 어디에서 어떤 학위를 받았는지, 논문이나 저서는 무엇이 있는지, 그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는 어떠한지, 또 SNS 계정을 통해 어떤 취미와 인간관계가 있는지 등을 알아낼 길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다 아는 유명인이 써준 추천서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바울이 이 편지를 쓰던 무렵 고린도 교회에는 바울과 그의 가르침을 비판하던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어디에서 온 무리들이고 바울의 가르침을 어떻게 비판했는지 정확하게 알 길은 없습니다. 그러나 본 바울의 편지를 통해 어느정도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먼저 1절을 통해 그들은 유명인으로부터 추천서를 받았다는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내세웠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유명인이 누구인지 알 수는 없습니다. 어떤 이는 당시 예루살렘 교회 총회장이었던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가 아닌가 추측합니다. 그러나 야고보가 비복음적인 그들을 추천했을 리가 없고 또 바울이 모세의 직분과 새 언약의 직분을 비교하여 설명한 것을 볼 때 아마도 그들은 유대교의 틀 안에서 복음을 재해석한 예루살렘의 유명한 한 랍비의 추천을 받은 것이 아닌가 추정이 됩니다.
아무튼 그들은 유명인의 추천을 받은 것을 자랑했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유명한 대학이나 저명한 교수 밑에서 공부한 것을 자신에 대한 추천으로 삼는 것과 같습니다. 이에 비해 바울은 예수님의 직접적인 제자가 아니었습니다. 또 유명한 사도로부터 무슨 추천장을 받은 것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무슨 권위를 가지고 그렇게 마치 자신이 사도이거나 목회자인 것처럼 고린도 교회 내부 문제에 대해 이래라 저래라 간섭하느냐고 그들은 묻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바울의 답변이 무엇입니까? 2-3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우리의 편지라 우리 마음에 썼고 뭇 사람이 알고 읽는 바라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바울의 추천서라고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6:9-11절을 보면 과거 그들은 여러 우상을 숭배하며 간음과 음란을 일삼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복음이 전해졌을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우상숭배와 음란한 삶이 죄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러한 죄에 대한 형벌로 예수께서 대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들의 마음에 큰 참회와 회개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눈물로 죄를 고백하며 이제는 주 안에서 순결하고 거룩한 삶을 살겠다고 결단하였습니다. 바울은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았습니다. 바울은 이것이 그가 메시지를 잘 전했거나 그가 똑똑해서 일어난 일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습니다. 바울은 이 모든 과정이 눈에 보이지 않지만 예수께서 성령으로 그들의 마음에 영적인 깨달음을 주시고 죄에 대한 자각과 회개의 마음을 주셨기 때문이라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성령의 일하심으로 이런 기적같은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변화된 그들이 바울의 추천서라고 말합니다. 그 추천서는 세상에서 유명한 사람이나 저명한 대학에서 발급해 준 것이 아닌 그리스도께서 친필로 바울의 마음과 그들의 마음에 써 주신 추천서라고 말합니다.
오늘날은 성령의 역사가 활발했던 80년대, 또 90년대와 비교하여 다소 잠잠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대한민국은 국민소득 2만 8천 달러의 선진국이 되었습니다. 국민소득이 1만달러면 마이카 시대가 오고, 2만달러가 되면 골프가 일상적인 스포츠가 되고, 3만달러가 되면 마이보트 시대가 온다고 합니다. 이에 비례하여 서구식 개인주의, 물질주의, 쾌락주의의 물결이 홍수처럼 밀려들고 있습니다. 많은 청년들은 젊었을 때 최대한 여러 이성과 즐길만큼 즐긴다음 결혼하자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누군가가 자신의 삶을 터치하는 것, 그렇게 사는 것은 죄라고 말하는 것을 극도로 혐오(극혐)합니다. 이런 시대 가운데 80년대에 비해 많은 수는 아니지만 몇몇 청년들이 믿음의 순결을 지키며 돈이 아닌 하나님을 의지하며 믿음으로 살고 있습니다. 세상 향락과 쾌락으로 스트레스를 푸는대신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와의 교제 안에서 세상을 이기고 승리할 힘과 위로를 얻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드넓은 붉은 사막 한 가운데에 푸르고 푸른 나무 한 그루가 자라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기적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 기적이겠습니까? 이 좋은 가을날 여친 남친과 놀러가는 대신 말씀을 들으러 와서 이 자리에 앉아있는 우리 청년들이 바로 그리스도의 편지입니다. 그 마음 가운데 성령의 손가락으로 너는 하나님의 사람,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써 놓으셨습니다.
4-5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하여 이같은 확신이 있으니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 본문에서 만족은 satisfaction이 아닌 competence(어떤 직분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곧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사도요 목자의 직분을 행할 수 있었던 비결은 그가 무슨 재능이나 뛰어난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에게 직분을 주시고 여러 필요한 것들을 성령으로 공급하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멀리 갈 것도 없이 제가 목자 생활의 현장에서 늘 체험하는 바입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목자로 세우시고 필요한 모든 것들을 공급해 주십니다. 수양관을 구해야 할 때가 되면 적합한 수양관을 얻게 도와주시고, 수양회에 강사가 필요하면 마음이 준비된 강사를 세워주십니다. 이번 가을 수양회에 삼손 말씀을 전할 메신저가 필요했는데 하나님께서 삼손 메시지를 전하기에 가장 적합한 이어거스틴 목자님을 세워주셨습니다. 캠퍼스 바이블 아카데미 때에도 말씀을 전할 메신저를 위해 기도하면 가장 적합한 메신저를 때마다 세워주셨습니다. 이번 주 메시지에 도대체 무슨 말을 써야 할지 몰라 방황하고 있으면 메시지에 쓸 내용을 생각나게 하시고 체력이 고갈되어 힘을 좀 주시라고 기도하면 정말 새 힘이 생겼습니다.
만약 우리가 내 능력으로 목자 생활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너무 부담이 되고 도저히 할 수 없다고 생각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직분을 주시고 그 직분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하나도 부족함이 없이 다 공급하여 주십니다. 오늘 선교보고를 할 예정인 케냐의 김폴린 선교사님에게도, 캐나다 알공퀸의 정이삭 레베카 선교사님께도 하나님은 지금 이날까지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셨습니다. 자비량과 체류에 필수적인 직장이 필요하면 직장을, 성경을 가르칠 양이 필요하면 양을 보내주셨습니다. 이 하나님은 앞으로도 모든 필요한 것들을 하나도 부족함없이 다 공급하여 주실 것입니다. 우리에게 바로 이와같은 담대한 확신이 있습니다.
6-8절을 보십시오.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율법 조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 때문에도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영의 직분은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서두에서도 말씀드렸던 것처럼 당시 바울을 비난하던 이들은 복음 사역을 구약의 틀 안에서 본 것으로 추정됩니다. 만약 이 추정이 맞다면 그들은 옛 언약의 일꾼이었던 모세를 가장 위대한 하나님의 종으로 보았습니다. 또 모세를 통해 하나님과 맺은 옛 언약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사역을 이러한 옛 언약의 연장선상에서 해석하였습니다. 구약의 대부분의 율법은 여전히 예전처럼 지켜져야 하며 유대인들의 전통을 존중하고 계승하는 토대 위에 신약의 교회가 세워져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들은 얼핏 보기에 구약의 옛 언약을 무시하고 모세의 가르침과 전통을 무시하는 것처럼 보이는 바울의 가르침이 매우 잘못되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는 유명 인사의 추천장도 없는 엉터리이며 사도도 아니라고, 심지어 사기꾼이라고 매도하였습니다.
이런 그들의 주장에 대해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를 새 언약의 일꾼되기에 만족하게 하셨다고 답변합니다. 곧 하나님께서 그를 새 언약의 일꾼으로 인정하시고 보증하시고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옛 언약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400년간 이집트의 노예된 삶에서 구원하시고 난 후 시내산에서 그들과 맺은 언약입니다. 그 언약의 내용은 출애굽기 19:4-6절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현재 바울을 비난하는 이들은 이 언약은 절대적인 것이고 지금도 유효하며 앞으로도 영원히 유효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그들이 그토록 절대시하는 구약성경을 한 번도 제대로 읽어보지 못한 것 같은 무지와 아집의 소산일 뿐입니다. 예레미야 31:31-32절을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러면 새 언약의 내용은 무엇이며 새 언약은 어떠한 방식으로 맺어지게 됩니까? 누가복음 22:19-20절 말씀을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떡을 가져 감사 기도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새 언약의 내용은 예수께서 우리가 각자의 죄로 인해 받아야 할 형벌을 십자가에서 대신 받으심으로 그 몸이 찢기시고 피를 흘리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로 인해 우리는 율법의 모든 정죄와 죄책으로부터 해방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에게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참된 생명, 영원한 생명 곧 영생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이 곧 새 언약입니다.
다음으로 이 언약은 하나님께서 각 사람의 마음에 기록하여 주십니다. 다시 예레미야 31:33-34절을 보면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하셨습니다.
이상에서 바울은 그가 새 언약의 일꾼이 되었고 이 언약은 돌판이 아닌 각 사람의 마음판에 새겨졌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이 바울의 답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이는 우리의 신앙이 율법을 지키는 신앙이 아니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 주 안에서 자라가는 신앙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옛 언약은 기본적으로 행위 언약입니다. 그 언약을 지킬 때 효력이 계속 유지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담의 범죄 이후 모든 인간은 그 안에 죄를 사모하고 죄를 짓고 싶은 죄성을 가지고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행복이란 자기가 정말 하고 싶은 일과 실제 하는 일이 일치할 때 느껴지는 마음의 상태입니다. 반면 하고 싶은 일과 실제 하는 일의 간극이 클수록 불행감이 커집니다. 공부하기 싫은 마음, 놀고 싶은 마음을 가득 안고 억지로 공부할 때의 고통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와같이 인간의 마음에는 죄를 짓고 싶은 마음이 가득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상에게 절하지 말고 하나님 한 분을 섬기라고 말씀하지만 내 안에는 음란 우상, 쾌락 우상, 자기 명예와 성공 우상에게 절하고 싶은 충동이 너무 강력합니다. 이러한 충동을 극복하고 순종할 수 있는 유일한 동력은 그러한 죄에 대한 무서운 심판의 경고입니다. 공부하기 싫은 아이를 책상에 앉혀놓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무서운 선생님이 옆에 있는 것, 또 그렇게 공부하지 않을 때 장차 얼마나 비참한 삶을 살게 되는가 경고하여 주는 것뿐인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경고해도 아이는 놀고 싶은 욕구, 게임하고 싶은 욕구를 참지 못하고 잠시만 빈틈이 생기면 곧바로 PC 방으로 도주합니다. 이 아이처럼 우리는 심판에 대한 경고와 그로 인한 두려움이 조금만 느슨해져도 죄와 우상의 세계로 달아납니다.
이와같이 심판에 대한 경고와 그로인한 두려움에 기초한 신앙생활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새 언약은 성령께서 그 사람을 근본적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십니다. 이번 종로7부 가을 수양회에서 최윤혁 목자님은 삼손의 마지막 헌신 말씀을 전하신 이어거스틴 목자님의 간증을 통해 죄로 인해 정죄감을 느끼고 고통당하는 것과 자기가 죄인인 것을 깨달은 것이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죄로 인해 정죄감을 느끼고 고통당하는 사람은 그 순간만 괴로워할뿐 나중에 좀 살만하면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갑니다. 반면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근본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은 사람은 언제나 겸손히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사람이 됩니다. 사람 자체가 근본적으로 달라집니다. 정죄감에 고통하는 사람은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다니지만 죄인된 자아 발견을 한 사람은 얼굴에 하나님이 주시는 죄사함의 은혜가 있고 겸손이 있고 하나님의 복음의 광채가 납니다. 이와같이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신 사람의 마음 안에는 죄를 미워하고 대신 주님을 사랑하고 거룩을 사모하는 새 마음이 있습니다. 이 시간 우리 각자 마음의 깊은 곳을 살펴보겠습니다. 우리 마음 깊은 곳 안에 주님을 사랑하고 거룩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지 않습니까? 특히 우리 청년들 어떠합니까? 그런 마음이 전혀 없습니까? 그런 마음이 있긴 하지만 죄를 사랑하는 마음에 비해 너무 미약하다고요? 네 그것은 여러분이 아직 몸의 구속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고, 또 여러분 안에 있는 새 피조물이 아직은 막 태어난 어린아이, 혹은 태어난지 얼마 되지 않은 아이와 같이 어리고 연약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새 피조물이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말씀과 단비와 같은 성령의 은혜를 받을 때 쑥쑥 자라나게 됩니다.
바울이 고린도에 와서 전한 복음을 듣고 그들은 주 안에서 새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과거 방탕한 삶을 떠나 거룩하고 순결한 삶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물론 그들이 완벽하지 않았습니다. 때론 과거의 죄에 다시 넘어지고 때론 거짓 교사들의 말을 듣고 혼돈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또 목자님에게 반항심을 표출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 목자님이 인내와 사랑으로 권면하고 말씀을 주면 언제 그랬냐는듯 금새 회개하고, 회개의 소감을 써서 발표하고 다시 원래 사랑스러웠던 순한 양으로 돌아갔습니다. 바울은 이처럼 사랑스러운 양들을 보면서 이 직분이 얼마나 영광스러운가 생각했습니다. 그가 복음을 전하면서 때로는 비난도 많이 받고 오해도 많이 받았습니다. 때로는 피곤과 배고픔과 추위, 또 무서운 박해의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죄 가운데 있던 한 영혼이 복음 안에서 새 피조물이 되어 주 안에서 무럭무럭 성장해 가는 모습을 볼 때 새 언약의 일꾼으로서 이 직분이 너무나 영광스럽게 느껴졌습니다. 그는 구약에서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고 난 후 그 얼굴에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가 났다는 사실을 기억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이 그 거룩한 광채를 직접 보지 못하도록 수건으로 얼굴을 가렸습니다. 여기에는 그 광채가 잠시 후 사라지기 때문에 사라지는 모습을 보지 못하도록 가렸다는 해석이 있습니다. 혹은 죄악된 이스라엘이 직접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를 보면 죽을 수도 있으므로 가렸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아무튼 모세는 그 광채가 너무 아름답고 거룩하고 영광스러우므로 이스라엘 백성이 직접 보지 못하도록 가렸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새 언약의 일꾼으로서의 영광이 모세의 얼굴에 빛나는 광채와 비교할 수 없이 큰 것을 깨달았습니다. 옛 언약의 일꾼인 모세가 받는 영광이 달의 영광과 같다면 새 언약의 일꾼인 그가 받는 영광은 해의 영광과 같았습니다. 달의 영광은 밤하늘을 잠시 비출 뿐이지만 해의 영광은 온 천하를 밝히 비추는 것처럼 새 언약의 영광은 참된 영광이요 영원한 것입니다. 이 깨달음은 바울로 하여금 그가 받는 모든 오해와 비방과 수치와 능욕과 고난을 끝까지 견디고 이겨낼 수 있는 승리의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세상에도 영광스러운 직분들이 있습니다. 대기업에서 그 능력을 인정받아 임원이 되면 가문의 영광이 됩니다. 임원 전용 운전사가 배당됩니다. 넓고 아름다운 사무실이 주어집니다. 그 사무실에는 임원을 섬기는 여비사가 있습니다. 연봉도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이 높이 뛰게 됩니다. 임원이 지나가는 길에는 마치 바다를 지나가는 배 주위로 파도가 치며 길이 열리듯 모든 사람들이 90도 각도로 깍듯하게 인사하며 경의를 표합니다. 또한 그에게 회사의 중요한 일을 일정부분 결정할 수 있는 결정권이 주어집니다. 이 얼마나 영광스럽습니까! 그러나 죄로 병든 한 영혼을 거듭나 새 피조물이 되며 그가 주 안에서 무럭무럭 성장하도록 돕는 이 새언약의 직분은 그것과 비교할 수 없이 영광스러운 직분입니다.
관악 5부의 정아브라함 목자님은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시고 부장판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목자님은 부장판사의 직분보다 목자의 직분을 훨씬 더 영광스러운 직분으로 생각하셨습니다. 이번에 캐나다 정레베카 선교사님을 통해 정아브라함 목자님에 대한 간증을 듣게 되었는데 캠퍼스 영혼들을 얼마나 아버지처럼 따스한 사랑으로 섬겼는지 참으로 감동이 되었습니다. 현재도 대형 로펌의 변호사로 일하시지만 그것을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고 목자의 직분을 훨씬 더 소중하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생각하시는 것을 그 분의 얼굴만 보아도 느낄 수 있습니다. 또 전요한 박사님은 한국 대표로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내과 전문의로서의 모든 영광을 초개처럼 버리고 가난한 목자의 삶을 지난 40년간 사셨습니다. 내과 전문의로 사셨다면 지금쯤 대궐같은 넓은 집에서 편하게 남은 여생을 지내실 터인데 센터 6층 선교사 숙소의 비좁은 방에서 여러 선교사님들과 함께 지내시는 것을 볼 때 안스러운 마음도 듭니다. 그러나 박사님이 이러한 삶을 사시는 것은 새 언약의 직분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것인가를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올해 종로7부에서 김소연, 최윤혁 두 분이 목자로 정식 임명을 받았습니다. 세상에서는 이것이 별 것 아닌 것으로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목자요 새 언약의 일꾼으로 세움받은 이것은 사도 바울이 받았던 그 영광에 동참하는 것임을 믿습니다. 그 앞길에 고난이 있을 수 있습니다. 아니 반드시 고난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영광이 고난과 비교할 수 없이 큽니다. 고난은 잠시지만 영광은 영원합니다. 이 두 분이 끝까지 목자의 길을 걸어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종로1부, 2부 가운데에도 여러 청년들이 올 한 해 목자로 임명받았습니다. 얼마나 귀한 일인지 알 수 없습니다. 이 분들이 이 직분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직분인지 잘 알고 직분에 따르는 크고 작은 고난들을 다 이겨내고 승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3-18절에서 바울은 모세의 얼굴에 있던 수건을 비유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모세의 얼굴에 있던 수건으로 인해 사람들은 모세의 얼굴의 광채를 볼 수 없었습니다. 이와같이 바울을 비난하고 있는 거짓 교사들과 유대인들은 구약을 읽을 때 수건이 그 얼굴을 가리고 있습니다. 그 수건은 구체적으로 편견입니다. 그들은 시골 동네 갈릴리에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난 예수님을 메시야라고 믿을 수 없었습니다. 또 설령 믿는다고 해도 모세보다 더 위대한 분이라고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편견을 버리고 예수님이 하신 말씀과 행적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때 그 분이 메시야요 새 언약의 일꾼들을 부르시고 세우시는 분임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또 그것을 깨달을 때 진정 죄로부터 자유함을 얻게 되고 주님과 참된 교제 안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으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4:1-6절에서 바울은 이 직분을 받아 낙심하지 않을 수 있었던 비결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먼저 1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낙심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에게도 때로 낙심하는 마음이 들어왔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사랑으로 섬겼던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거짓 교사들이 말에 넘어가 흔들릴 때 ‘내가 전했던 복음이 정말 그들의 마음에 역사했던 것일까? 어떻게 이렇게 쉽게 거짓 교사의 말에 넘어가 목자였던 나를 대적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이 들고 낙심하는 마음이 파고 들어왔을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낙심하는 마음을 어떻게 극복했습니까?
3-4절을 보십시오.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바울은 복음을 들었던 자들 중 만약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자들이 있다면 그가 복음을 잘못 전했거나 혹은 복음의 능력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신, 곧 사탄이 그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였기 때문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우리가 목자로 살면서 복음을 전하는 모든 이들이 다 회개하여 거듭나면 정말 행복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복음을 듣는 자들 중 상당 수는 끝까지 회개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소망이 있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우주를 창조하실 때 어두운 데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비추어주신 영혼들이 있습니다. 먼저는 바울 자신이 그것을 체험했고 고린도에 있는 사랑하는 성도들이 그것을 체험했습니다. 지금 그들 중 일부가 잠시 거짓교사의 혼미하게 하는 말에 넘어가 눈이 가리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을 비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바울의 이 편지를 통해 다시 눈이 열리고 바울이 참으로 하나님이 세우신 영광스러운 새 언약의 일꾼인 것을 깨닫고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결론입니다. 이 좋은 가을날 말씀을 사모하여 이 자리에 앉아계신 우리 청년들이 성령께서 써 주신 편지입니다. 하나님은 보배같은 청년들을 부르시고 거듭나게 하시는 일에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으로 부르고 계십니다. 이 직분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것인가 알 때 이 직분에 따르는 모든 어려움과 고난을 이기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알고 모든 어려움을 이기고 승리하는 가을학기 되기를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