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 4강
질그릇에 담긴 보배
말씀 고린도후서 4:7-5:10 요절 고린도후서 4: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오늘 말씀은 복음전파자의 연약함과 환난의 유익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연약함, 환난은 부정적으로 보기 쉬운 것들입니다. 그러나 이시간 우리가 연약함과 환난에 대해서 바울이 가졌던 시각을 소유하며 감사와 기쁨으로 연약함과 환난을 감당하기를 기도합니다.
7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바울사도는 보배를 질그릇에 담았다는 역설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여기서 ‘이 보배’는 무엇을 가리킬까요? 보배란 매우 가치가 있어서 애지중지 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최근 미국 뉴멕시코주 실버시티에서 골동품 가게를 운영하는 사람이 중고장터에 올라온 어떤 그림을 다른 골동품과 함께 총 200만 원 정도에 샀습니다. 그런데, 그 골동품 더미속에 추상표현주의 미술의 대표적인 화가인 윌렘 데 쿠닝(1904-1997)의 유화 ‘우먼 오커’(woman ochre)가 있었습니다. 이 그림은 싯가로 약 1,840억 원입니다. 그림 한 점에 2천억 원에 가깝다니, 참으로 엄청난 보배입니다. 보배 중 최고는 ‘아프리카의 별’이라고 하는 컬리넌1 다이아몬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1905년에 발견되어 영국왕실이 소유하고 있는 데 4500억원 정도입니다. 프로포즈때 다이아몬드를 사용하는 것은 당신은 내게 있어서 가장 귀한 존재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과연 우리 인생들에게 가장 귀한 보배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은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죄로 인해서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없었습니다. 이런 인간들은 하나님의 원수로 살다가 죽어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해서 보혈을 흘려주셨습니다. 그럼으로서 우리가 그 피를 의지할 때 하나님앞에 서게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3:14절을 보면 천국이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발견한 농부는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보화가 묻힌 밭을 삽니다. 골로새서 2:3절을 보면 예수님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최고의 보화이신 예수님에 비할 때 이 땅의 괜찮은 것들을 배설물수준으로 여겼습니다.(빌 3:8)
사람들은 복음이 보배인 줄 모르기 때문에 복음 전달하는 사람들을 시덥지 않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복음이 보배인 줄 확신하고 이 보배를 전달하는 복음전파자의 직분도 보배처럼 소중히 여겨야 하겠습니다.
보배는 질그릇에 담으면 안됩니다. 그에 걸맞는 금그릇같은 데 담아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보배를 질그릇에 담는 역설적 선택을 하셨습니다. 질그릇은 흙으로 만들어져 깨어지기 쉽고 모양이 세련되지 못합니다. 더구나 유약을 바르지 않아 광택도 나지 않습니다. 여기서 질그릇은 약하고 보잘것없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사람을 보면 철그릇, 금그릇처럼 보이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강합니다. 재능도 많습니다. 화려하고 스포트라이트를 받을만한 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이런 사람들에게 복음과 복음전파직분을 맡기지 않고 질그릇같은 사람들에게 맡기신 것입니까?
그것은 심히 큰 능력이 사람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음을 알게 하려 함입니다. 만약에 철그릇, 금그릇같은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예를 들면 아이언 맨처럼 강합니다. 황금의 입처럼 말도 잘합니다. 화려한 수사학과 언변을 사용하여 말씀을 전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람들이 복음보다 사람을 주목하게 됩니다. 하나님보다 사람이 더 드러나게 됩니다. 그래서 태양빛 같은 하나님의 영광보다 라이터 빛보다 적은 사람의 영광이 드러나게 됩니다.
복음을 보잘 것 없는 사람들에게 맡기셨다, 이것이 정말 사실입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이 갈릴리 무식한 어부 출신들이었습니다. 무식하고 언변도 부족했습니다. 수제자 베드로는 어떻습니까? 그는 좀 강해 보입니다. 충성심은 대단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죽을까 두려워 끝까지 자신을 결심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특별히 여자종들 앞에서 예수님을 부인하여 그가 얼마나 약하고 초라한 자인 가가 드러냈습니다. 그는 질그릇같은 자신으로 인해서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그 후 그는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줄 알고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만 간절히 의지했습니다. 기도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랬을 때 그는 예루살렘교회를 지키고 복음을 세계화하는 데 쓰임받았습니다.
우리는 사도바울은 금그릇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는 가말리엘 문하에서 배웠고 아버지가 외국인이라 헬라어도 유창하게 구사했습니다. 그러나 사도바울도 연약한 점들이 많았습니다. 육체의 가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고후 12:7) 그 육체의 가시가 무엇인가 대해서 안질이다, 간질이다는 견해들이 있습니다. 하여간 그것이 얼마나 그를 고통하게 했든 지 사탄의 사자라고 표현할 정도였습니다. 사탄은 하나님의 존재와 사랑을 의심케 합니다. 바울이 자신 안에 있는 육체적 연약함을 생각하면 하나님의 존재와 사랑이 의심될 정도였습니다. 바울은 너무나 괴로워 이 육체의 가시를 제하려 달라고 세 번이나 간구했습니다.(고후 12:8)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은혜가 그에게 족하다고 하시면서 거절하셨습니다. 일생 연약함을 안고 복음전파자의 삶을 살게 하셨습니다. 또한 12제자로 부르지 않고 13번째 사도로 부르셔서 일생 사도권시비를 안고 살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가 받은 은혜가 너무 많아서 자고하여지지 않도록 하시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연약함은 그가 자신을 낮추고 항상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하나님을 간절히 의지하게 했습니다. 그는 평생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크신 능력이 그를 통해서 나타났습니다.
20세기 최고의 복음전파자 중 한 사람은 디엘 무디입니다. 그는 초등학교밖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문법에 맞지 않는 영어를 구사했습니다. 그는 열심히 노력했지만 여전히 고쳐지지 않는 부분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그가 영국에 가서 옥스퍼드와 캠브리지 대학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는 영어의 본고장, 그리고 세계최고 수준의 지성인들앞에서 복음을 전할 때 자신의 부족함을 알기에 겸손하고 간절히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때 큰 성령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집회 후에 한 사람이 찾아와 무디 목사님이 전한 메시지에서 문법적으로 틀린 곳과 단어들을 적어다 주었습니다. 그랬을 때 무디는 그에게 말했습니다. “저는 부족한 영어로 수많은 사람들이 회심하고 주님께 돌아왔습니다. 당신은 그 완벽하고 정확한 영어로 몇 사람을 회심시켰습니까?” 그 다음날 캠브릿지의 학생회장이 무디를 찾아와 전날 있었던 일을 정중히 사과했고 무디 선생의 부흥집회로 캠브릿지 학생들 가운데 놀라운 부흥역사가 있었습니다. 무디선생의 영향력으로 윌리암 캐리를 비롯한 캠브릿지 세븐이 탄생되었고 근대 세계선교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은 부족하였기에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간절히 하나님만 의지했던 무디 선생에게 놀라운 성령의 큰 능력을 부어주시고 그를 귀하게 사용하셨습니다.
저의 일대일 목자님은 무디 목자님이십니다. 목자님은 센터운전수이셨고 초등학교밖에 나오지 않으셨습니다. 저는 이런 목자님 가정을 가장 자랑스러워합니다. 그 이유는 그분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능력이 어떤 분들보다 잘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사모님은 캠퍼스 복음역사를 영접하셨지만 캠퍼스에 가기가 너무나 두려우셨습니다. 그래서 여러 번 캠퍼스 앞까지 갔다가 돌아오셨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학벌이나 지성을 의지하지 않고 “두려워말고 믿기만 하라” 말씀을 붙들고 간절히 기도하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여 캠퍼스에 가셨습니다. 그랬을 때 하나님께서 많은 스탭목자들과 선교지부장과 목자, 선교사들을 세우게 하셨습니다. 이를 통해서 심히 크신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났습니다.
우리 중에 왜 하나님이 나같은 부족한 사람에게 캠퍼스 역사를 맡기셨는지 힘들어 하는 분들이 있습니까? 어떤 분은 자신은 학벌도 좋고 모든 게 좋은 데 외모가 딸린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캠퍼스에 가기 전에 거울 보다가 시간을 다 버리고 기도모임에 늦게 도착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키 작고 대머리에 안짱다리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은 말을 잘 못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바울도 편지는 잘 쓰지만 말은 시원치 않다는 평가를 받았고 말에는 졸하다고 자신도 시인한 바 있습니다. 외모나 말재주가 복음역사에 걸림이 되지 않습니다. 성격이 소심하고 자의식이 많은 것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자신의 친화력으로 목자생활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여 목자생활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더 드러낼 수 있습니다.
다같이 7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그렇습니다. 내가 부족하기에 하나님이 드러납니다. 내가 능력이 모자라기에 하나님의 크신 능력이 드러납니다. 그러니 나의 부족함은 부르심을 감당하기에 결격사유가 아니라 부르심의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금그릇, 철그릇 아닌 것에 대한 안타까움과 쏘리한 마음을 가진 것을 이제 바꾸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금그릇, 철그릇, 질그릇, 일부 금그릇 일부 질그릇 섞여 있는 혼합형, 어디에 속합니까? 내가 참 이런 점만 없다면 완벽한 사람일터인데 이렇게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질그릇 같은 면이 있는 것이 오히려 주의 종의 완전한 조건을 갖춘 것입니다. 부족함이 있는 것이 완전합니다. 부족함이 있는 것이 안전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복음전파자로 잘 부르심 받았습니다. 우리가 부족함에 대해서 탄식하거나 안타까워하지 않고 이제 감사함으로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한 가지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질그릇같이 연약한 점이 있다고 해서 복음전파자로서 귀하게 쓰임 받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약점을 통해서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철저히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매사에 간절히 기도하고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그때 우리가 하나님의 복음역사에 보배롭게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연약한 점을 그대로 두면 그냥 연약함 이외에 의미는 없습니다.
저의 약점은 무엇입니까? 메신저로서 약점을 말씀드리면 무대체질이 아니고 말도 잘 못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담대하고 싶었고 말도 잘하고 싶었고 잘한다고 착각한 적도 있었으나 사실을 말에 졸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졸업예배 후 한 선배는 말 좀 잘하라 고 조언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말씀의 종으로 쓰임 받았으나 메시지를 전하기가 너무 힘들었습니다. 25-30분을 버티기가 힘들었습니다. 25-30분간 버티기 위해서 수영훈련을 하기도 했습니다. 컨텐츠가 없는 것이 문제임을 깨닫고 열심히 책을 읽고 많은 신앙체험을 하고자 했습니다. 무엇보다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3년간 결단하고 기도했고 그 후에는 지금까지 매일 스피릿을 덧입기 위해서 새벽기도를 합니다. 하나님을 간절히 의지할 때 제가 저의 한계를 극복하도록 하나님이 은혜를 주셨습니다. 이번에는 방송국에서 인터뷰를 했는데 괜찮게 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특히 제가 인터뷰시간을 잘못 알아서 녹음 5분전에 호출을 받아 오직 성령만 간절히 의지하였습니다. 이 때 저의 말이 아니라 성령이 주시는 말씀을 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두려움이 많기 때문에 모든 모임에 들어가기 전에 항상 모임참석자들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제게 평안을 주시고 할 말을 주십니다. 저는 요새 자녀문제로 항상 마음이 낮아집니다. 자녀문제는 제게 사탄의 가시입니다. 저는 이 문제로 항상 바닥에 나뒹굴며 간절히 기도합니다. 저는 사면초가, 홍해 앞에 서 있음을 느낍니다. 자주 아무런 판단력도 들지 않고 가장으로서 무력함을 느낍니다. 질그릇이 박살나는 것을 많이 체험했습니다. 하지만 이를 통해 제가 정말 자신을 조금도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천부여 의지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주 나를 박대하시면 나 어디가리이까” 제가 저의 콩알 같은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히 크신 능력을 나타내기 위해서 저를 궁지로 몰아넣으신 것으로 알고 감사합니다. 제가 오직 심히 큰 능력을 지니신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자녀문제를 극복하고 더 나아가 캠퍼스 제자양성의 큰일을 섬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지금까지는 바울은 복음전파자의 연약함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이제 그 연약함에 더해서 복음전파자를 억누르는 환난문제를 추가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바울이 어떤 환난을 당했습니까? 8,9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바울은 여러 가지 환난을 겪었습니다. 욱여쌈을 당하는 것은 전쟁으로 하면 포위를 당한 것입니다. 사방에 적들입니다. 사방에 문제요 고난입니다. 그 외에도 답답한 일들을 많이 겪었습니다. 엘리베이터 안에 갇혀있는 것 같은 답답함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런 환난을 겪어도 좌절하지 않습니다. 낙심하지 않습니다. 주저앉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앞 절 말씀과 연관하여 생각해보면 이런 환난을 통해서 우리는 부서지고 깨어집니다. 한계에 처합니다. 그러나 이 가운데 우리는 기대할 것없는 자신에게 절망하고 하나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래서 마치 홍해 앞에서 길을 내시는 것처럼 길을 내시는 하나님을 체험합니다. 그러므로 사면초가의 상황은 막다른 절망의 때가 아니라 심히 크신 하나님을 체험할 때입니다.
상황을 뒷 말씀과 연결시켜보면 우리가 극한의 환난 중에도 낙심하거나 주저앉지 않을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10,11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환난의 정점은 죽음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날마다 죽는다고 했습니다. (고전 15:31) 또한 빌립보서 3:10 절에서는 그의 죽으심을 본받고자 한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복음전파자들이 복음을 전하면서 고난에 처해지고 더 나아가 죽음과 대면하는 삶을 살면서 예수님의 부활생명이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을 체험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복음전파자들을 죽음과 같은 고난에 넘기시는 이유입니다. 그렇습니다. 죽음과 같은 상황을 경험하지 않고는 참된 의미에서 부활신앙을 배울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죽음과 같은 환난을 겪는 것을 부활신앙을 덧입는 좋은 기회로 알아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죽음이 가져오는 또 다른 선한 결과는 무엇입니까? 12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 우리가 죽음에 직면하고 죽음과 같은 상황을 경험할 때 그 결과로 양들이 살아납니다. 엄마들이 죽음 같은 출산의 고통을 경험할 때 생명이 태어나는 것과 같습니다. 한 알의 밀이 죽을 때 많은 생명의 열매를 맺습니다. 이처럼 목자가 죽을 때 양들이 살아납니다. 반대로 양들이 살아나지 않는 이유는 목자가 죽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에서 죽음의 위협가운데도 목자생활할 때 많은 고린도의 영혼들이 살아났습니다. 양들은 목자의 죽음같은 헌신으로 생명을 얻고 은혜가 넘치게 되어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돌립니다.(15)
4:13-5:10 말씀은 우리가 겪는 환난이 장차 하늘로부터 오는 부활의 몸을 덧입고자 하는 소원을 줌을 가르칩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서 서게 하실 줄을 아노라” 예수님을 다시 살리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을 다시 살리사 하나님앞에 세우십니다. 16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 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환난을 겪으면서 우리의 겉사람이 낡아집니다. 스트레스를 받고 고생을 하며 목자의 주름살과 흰머리가 늘어납니다. 그러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집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17,18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우리는 환난을 통해 이 세상에 붙은 소망들을 버립니다. 그리고 영원한 영광을 바라봅니다. 그럴 때 우리 심령은 참된 소망으로 빛나고 새로워집니다. 장차 나타날 영광에 비하면 이 땅에서 환난은 잠시잠깐입니다. 이 땅에서의 환난이 바늘처럼 작고 가볍다면 장차 나타날 영광은 거대한 항공모함처럼 크고 무겁습니다. 5:1절을 보십시오. 땅에 있는 장막 집은 무너집니다. 장막 집은 임시거처로 우리의 육체를 말합니다. 텐트는 폭우가 내리고 홍수가 나면 무너집니다. 우리의 영원한 집은 하늘에 준비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임시거처인 현재의 육체를 벗고 영원한 몸을 입게 됩니다. 우리는 그 몸 덧입기를 탄식하며 사모합니다. 특히 지금 입고 있는 몸의 한계를 느낄 때마다 그러합니다. 우리의 죽을 몸은 생명에게 삼킨 바되어 다시는 죽음이 없는 몸을 덧입게 될 것입니다.
이상의 이야기는 단지 우리의 바램에 불과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이를 보증하는 것이 성령입니다. 통장이 예금을 보증하는 것과 같습니다. 성령은 반드시 이 일이 이루어질 것을 우리 안에서 가르치고 확신을 줍니다.(요 14:17,26 ; 16:13)
이처럼 우리는 우리의 몸의 부활을 간절히 사모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빨리 우리의 한계적인 몸을 벗고 주님과 함께 있기를 사모합니다. 그러나 빨리 이 몸을 벗는 것이 능사는 아닙니다. 왜 그렇습니까? 10절을 보십시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우리의 모든 행위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물론 죄사함을 받은 사람은 죄가 드러나지 않을 것입니다. 선악간에 드러난다고 했는데 선이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행위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냥 하나님나라에 빨리 가면 안됩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많이 하고 가야 합니다. 요새 사람들은 자기를 기쁘게 하는 것을 인생목적으로 삽니다. 혹은 별다른 삶의 목적없이 오래 안정되게 살다가 죽고자 합니다. 우리가 남은 생애 동안에 주님을 많이 기쁘시게 하는 일을 많이 하고 주님께 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입니다. 우리는 절망스러울 정도로 연약합니다. 우리에게 살 소망이 끊어질 정도의 고난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체험하고 부활신앙을 덧입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자신의 연약함과 죽음같은 상황을 감사와 기쁨으로 잘 감당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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