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메세지

제목2017년 고린도후서 제 6 강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 (고린도후서 6:11-7:16)2017-12-03 22:27
작성자

2017년 고린도후서 제 6 강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


말씀 / 고린도후서 6:11-7:16

요절 / 고린도후서 7:10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오늘 말씀의 배경을 잠깐 살펴보고자 합니다. 지난번에 배웠듯이, 바울은 제 3차 전도여행 중 에베소에 머무르며 잠시 고린도교회를 방문하였고, 그 후 눈물의 편지를 써서 디도 편에 보냈습니다. 그 편지는 고린도 성도들의 죄를 책망하는 준엄한 내용이었기 때문에 바울은 그 편지에 대한 고린도 성도들의 반응을 초초하게 기다렸습니다. 


이런 가운데 그는 디도를 드로아에서 만나지 못하고 마게도냐까지 왔습니다. 거기서 드디어 디도를 만났는데, 그가 가져온 소식은 좋은 내용이었습니다.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고린도 성도들이 회개하고 바울을 다시 사모하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바울은 큰 위로를 받고 기쁨이 넘치게 되었습니다. 


그 후 아직 일부 대적자들이 남아있는 고린도교회에 보낸 서신이 바로 이 편지, 고린도후서이고, 오늘 본문은 그 편지의 중반부에 해당됩니다. 본문을 통해 우리가 다음의 두 가지 첫째, 양떼들에 대한 사도바울의 뜨거운 사랑, 둘째, 그들의 죄 문제를 돕는 바울의 영적인 자세를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1-13절을 보십시오. "고린도인들이여 너희를 향하여 우리의 입이 열리고 우리의 마음이 넓어졌으니 너희가 우리 안에서 좁아진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심정에서 좁아진 것이니라 내가 자녀에게 말하듯 하노니 보답하는 것으로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 


고린도 성도들은 교회 내에 침투한 거짓 교사들의 말을 듣고 바울에 대해 편견을 갖게 되었습니다. 오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바울에 대한 마음이 좁아졌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변함없이 그들을 영접하였고 마음에 있는 말을 숨김없이 다 말했습니다. 이제 그들도 오해를 풀고 자신을 영접해달라고 요청하는 것입니다. 


“Out of sight, out of mind" 라는 말이 있습니다. 오랫동안 교제가 없으면 서로 멀어진다는 것입니다. 이해를 못하고 오해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도 살펴보면, 스스로는 "아, 나는 이해심이 많은 사람이야”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우리도 다른 사람을 쉽게 오해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한 오해로 인해 불필요한 갈등이 일어날 때가 많습니다. 


오해란 3차원적인 정황을 2차원적으로 규정함으로 생기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무슨 말을 하거나 행동을 할 때는 거기에는 그렇게 말하고 행동하는 그 사람의 정황이 있습니다. 그런 정황에 대한 이해 없이 겉으로만 나타난 것을 갖고 볼 때 "저 사람은 역시 이기적이야“, ”저 사람은 게을러“, ”역시 그렇구먼.." 하는 마음이 듭니다. 2차원적으로 규정하는 것입니다. 


제가 예전에 어떤 미국 목자님을 새벽에 공항으로 픽업하기 위해 그의 숙소로 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 분이 시간이 되어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때 이 분에 대해 판단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그 분이 숙소에서 나오기 전에, 다른 목자님과 합심기도를 하였는데, 상대방이 기도를 길게 해서 좀 늦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선한 쪽으로 생각하지 못한 사랑이 없는 자임을 발견하고 회개하였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을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첫째, 겸손한 마음으로 추측은 하되, 판단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확실히 모르는 부분에 대해서는 좋은 쪽으로, 선한 측면으로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오해를 피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로부터 오해를 받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런 그들을 감당하며 고린도후서 편지를 통해 장문의 해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14a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여기서 '믿지 않는 자'는 NIV에 "unbelievers"로 되어 있는데,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불신자들을 말합니다. 당시 1세기 기독교는 박해를 받았고 가정교회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신자들은 모일 때마다 신앙고백과 애찬을 같이 하였기에, 오늘날과 같이 교회에는 나가지만 실제적으로는 믿음이 없는 명목상의 신자는 거의 없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믿지 않는 자들은 교회공동체 밖의 사람들을 말합니다. 



당시 고린도는 음란한 도시였습니다. 우상숭배와 쾌락, 물질주의의 도시였습니다. 바울은 그러한 문화 가운데 사는 불신자들과 함께 멍에를 메지 말라고 권합니다. 여기서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는 것은 일찍이 바울이 고전 5:9,10 에서 말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에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 하였거니와 이 말은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과 토색하는 자들이나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하려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 것과 같이, 불신자들과 일체 관계를 끊고 산 속으로 들어가 혼자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멍에는 말이나 소를 같이 움직이게 하기 위해 등에 얹는 구부러진 막대입니다. 무슨 일을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불신자와 멍에를 같이 메지 말라는 것은 사업을 같이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업을 같이 하게 되면 매일 만나서 머리를 맞대고 같이 고민하고 힘써야 합니다. 신자와 불신자는 인생 목적과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에 많은 갈등이 생기고 불신자의 세상적인 가치관이 들어옵니다. 아주 절대적인 믿음이 있는 사람이 아니면 영적으로 힘이 빠지게 되어 있습니다. 


14b~16절에서 바울은 신자와 불신자가 멍에를 매는 것이 다섯 가지, 곧 ‘의와 불법’, ‘빛과 어둠’, ‘그리스도와 벨리알’,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하며 불가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고린도 성도들에게 명합니다. 6:17-7:1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 


하나님은 신자들 곧 그의 백성들을 세상에서 불러내셨습니다. 교회(에클레시아)라는 말 자체가 '불러낸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세상에서 그들을 불러내셔서, 세상에서 살되 세상에 속하지 않는 구별된(거룩) 인생을 살게 하셨습니다. 발은 땅에 두되, 머리는 하늘에 두고 살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정체성을 가진 우리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고린도 성도들에게 마음을 열어 자신을 영접해 달라고 요청하면서 위와 같이 ‘믿지 않는 자들과 함께 멍에를 메지 말라’고 명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그들이 사도 바울과 그의 복음적인 가르침을 거부하는 것은, 단지 거짓 교사들의 선동에 의한 것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마음이 세속화되었기 때문이요, 여기에는 그들이 고린도 사람들과 같이 일을 하며 세상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마음에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 정욕과 쾌락, 세상의 인정과 명예를 사모하는 마음이 독버섯같이 자랄 때 그들은 거짓 교사들의 말을 쉽게 수용했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라가는 것이 부담스러워졌습니다. 바울은 그들의 마음 가운데 일어나고 있는 이러한 변절을 보았기 때문에 세상의 영향력을 경계하고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라고 명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생각은 마음에서 나옵니다. 마음이 세상을 사랑하게 되면 머리는 그것을 정당화하는 논리를 만들게 되어 있습니다. 모임 탓, 목자 탓, 사람 탓을 하지만 결국 자기의 마음의 욕심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2~4절을 보십시오. "마음으로 우리를 영접하라 우리가 아무에게도 불의를 행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해롭게 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속여 빼앗은 일이 없노라 내가 이 말을 하는 것은 너희를 정죄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전에 말하였거니와 너희가 우리 마음에 있어 함께 죽고 함께 살게 하고자 함이라 내가 너희를 향하여 담대한 것도 많고 너희를 위하여 자랑하는 것도 많으니 내가 우리의 모든 환난 가운데서도 위로가 가득하고 기쁨이 넘치는도다." 


사람이 겪는 마음의 아픔 중에 가장 큰 것은 배반당하는 아픔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자기가 키운 고린도 양들이 목자인 그를 배척할 때 큰 아픔을 겪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겸손과 인내로 그들에게 자세히 설명을 하며 오해를 풀고자 애를 쓰고 있습니다. 바울은 거짓 교사들이 비방하는 것처럼 고린도 성도들에게 불의를 행하거나 해롭게 하거나 속여 빼앗은 일이 없습니다. 도리어 그들을 아버지의 마음으로 사랑했습니다. 그들에게 허물이 많았지만, 그들을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바울의 사랑은 억지로나 겉으로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마음 중심으로부터 뜨겁게 흘러나왔습니다. 그들만 생각해도 마음에 위로와 기쁨이 넘쳤습니다. 



엄마의 눈에는 아기의 예쁜 것만 보인다고 합니다. 바울의 눈에도 그들의 좋은 점만 보였습니다. 짝사랑에 빠진 사람과 같았습니다. 이러한 눈이 바로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눈입니다. 하나님은 허물과 죄로 냄새나는 우리를 보시고도 좋은 점을 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해결해 주셔서 더 아름다운 모습으로 만들고자 애를 쓰십니다. 사랑은 그 사랑하는 대상의 허물을 그대로 두고 볼 수 없습니다. 그 허물을 제거하여 더욱 아름답게 만들고자 애를 쓰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러한 사랑의 절정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셔서 우리의 모든 허물과 죄를 해결해 주신 것입니다.


5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마게도냐에 이르렀을 때에도 우리 육체가 편하지 못하였고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여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었노라." 바울이 드로아에서 디도를 만나지 못하고 마게도냐에 왔을 때, 외적 내적으로 많은 환난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하나님께서 디도를 만나게 해주셨습니다. 


6,7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낙심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디도가 옴으로 우리를 위로하셨으니 그가 온 것뿐 아니요 오직 그가 너희에게서 받은 그 위로로 위로하고 너희의 사모함과 애통함과 나를 위하여 열심 있는 것을 우리에게 보고함으로 나를 더욱 기쁘게 하였느니라." 바울이 큰 위로와 기쁨을 얻은 첫째 이유가 무엇입니까? 디도가 온 것입니다. 영어 성경에 보면 7절이 "not only by his coming but also by the comfort you had given him"으로 되어 있는데, 바울은 첫째, 디도가 온 것으로, 둘째는 그가 가져온 좋은 소식으로 위로를 받은 것입니다. 이는 바울이 얼마나 디도 자신의 안전에 관심을 갖고 있었는가를 보여줍니다. 


디도가 혹시 적대적인 고린도 사람들에게 해를 당하지는 않았을지? 오가는 먼 길에 강도를 만나지는 않았는지? 돈도 없었을 텐데 먹고 자는 것은 괜찮았는지? 그의 신변 안전에 극히 마음이 쓰였습니다. 바울은 동역자 디도 한 사람을 귀히 여겼습니다. 그가 어떤 소식을 갖고 왔는지 알기도 전에, 그가 안전하게 돌아왔다는 사실 그 자체를 가장 기뻐하였습니다. 


우리는 큰 역사를 이룬 바울을 보면 그가 매우 일 중심인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사람 중심의 사람이었습니다. 동역자 한 사람 한 사람을 뜨겁게 사랑하였습니다. 로마서 16장을 보면 그는 수많은 동역자들에게 일일이 안부를 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젊고 열정이 많기에 무슨 일을 크게 이루기 원합니다. 일 자체에 매력을 느끼고 성취감을 느끼고 싶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사도 바울과 같이 한 사람 한 사람을 귀히 여기고 사랑하는 목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디도가 가져온 소식은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고린도 성도들이 바울의 편지를 받고 애통히 회개하였다는 것이었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내가 편지로 너희를 근심하게 한 것을 후회하였으나 지금은 후회하지 아니함은 그 편지가 너희로 잠시만 근심하게 한 줄을 앎이라." 바울은 눈물의 편지를 보내고 나서 잠시 후회했습니다. 고린도 성도들이 그 준엄한 편지를 받고 근심할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습니다. “좀 더 인내하며 기다려야했는데.. 내가 너무 조급한 것은 아니었나” 후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디도가 가져온 소식을 듣고는 더 이상 후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도리어 기뻐하게 되었습니다. 


9절을 보십시오. "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서 아무 해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바울이 잠시 후회했지만 지금은 기뻐하는 이유는 고린도 성도들이 회개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바울의 편지를 받고 자신들의 죄 문제를 발견하고 인정했습니다. 그 편지가 바울의 개인적인 감정이나 바울의 유익을 위해 보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해 자기들의 죄를 책망하시는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알았고 죄를 뉘우치고 죄에서 돌이켰습니다.


11절을 보면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그 일에 대하여 일체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다시 간절하게, 변증하게, 자기들의 영적 무지에 분노하게 되었고, 사탄의 큰 시험에 들 뻔 하였던 것을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다시금 바울을 사모하며 복음에 대한 열심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대적자들을 처벌하여 회개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이와 같이 그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한 근심으로 말미암아 죄를 분명히 회개하고 그 열매를 맺었습니다. 이를 볼 때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 보게 됩니다. 

10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바울은 여기서 두 종류의 근심에 대해 말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Godly sorrow), 다른 하나는 세상근심(Worldy sorrow)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 무엇일까요? 거룩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살전 4:3은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하나님은 우리가 거룩한 사람들이 되기 원하십니다. 우리가 어떻게 거룩하게 될 수 있을까요? 죄를 회개함으로 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를 발견하고 그 죄를 회개함으로 죄사함을 받을 때 거룩성을 회복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는 ‘Godly sorrow’(경건한 슬픔)를 가진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죄를 발견합니다. 그 죄가 얼마나 하나님을 슬프시게 한 것인가를 애통히 여깁니다.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를 멸시하고 자행자지 행하였던 것, 가랑비에 옷 젖는다고 어느새 마음이 교만하여 진 것, 섬기기보다 인정과 존경만을 받기 원하는 마음이 된 것, 정욕과 세상욕심의 종이 된 것 등을 발견하고 뉘우칩니다. 그 죄를 미워하고 죄에서 돌이킵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를 우리가 잘 압니다. 둘째 아들은 허랑방탕하게 돈을 다 탕진하고 돼지우리에서 쥐엄 열매도 먹지 못하는 근심과 슬픔에 빠졌을 때,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고 회개합니다.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범하였다고"(눅15:18) 고백하며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는 경건한 슬픔 가운데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그 죄에서 뉘우치는 회개를 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였습니다. 새벽닭이 울자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밖에 나가 통곡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부인했다는 사실이 도저히 믿겨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를 통해 예수님의 사랑과 자신의 죄를 깊이 깨달았습니다. 죄를 깨닫고 회개하고 다른 제자들을 굳게 하는 기도의 종으로 성장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 앞에서 자기 죄를 깊이 발견하고 뉘우치는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근심이 구원에 이르는 회개를 하게 합니다. 


반면에 세상 근심(worldy sorrow)은 무엇일까요? 넓게 보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우리의 영혼을 갉아먹는 쓸데없는 염려, 걱정을 말하기도 하지만, 본문의 맥락에서는 죄로 인한 근심이 아니라, 죄의 결과로 인한 근심을 말합니다. 죄를 지은 결과 고통과 슬픔이 생깁니다. 그 고통 자체만을 해결해보고자 하는 근심이 세상 근심입니다. 


창세기 4장에 나오는 가인은 시기심으로 인해 동생 아벨을 돌로 쳐 죽였습니다. 인류 최초의 끔찍한 살인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인을 징계하시자 그는 말합니다.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짐을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4:13,14) 그는 피 흘리며 죽어간 아벨의 고통에는 무관심했습니다. 그 부모인 아담과 하와의 슬픔에도 무심했습니다. 단지 자기 고통만을 괴로워했습니다. 자기 고통의 문제만을 해결해 주시길 하나님께 구했습니다. 이런 자세는 결국 그로 하여금 사망에 이르게 합니다. 


예수님을 배반한 가룟 유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자기의 죄를 깨달았을 때, 그 죄가 얼마나 하나님을 슬프시게 했는가 깨닫고 회개해야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받은 양심의 타격, 정죄의식 그것이 슬프고 괴로웠습니다. 그 문제만을 해결하기 원했습니다.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배울 점이 무엇입니까?  사람들은 보통 자기의 죄가 드러나면 자존심 상해합니다. 남들은 안 그러냐고 자기 방어를 합니다. 이런 저런 이유를 대어 필사적으로 정당화하고자합니다. 그런 것이 세상 근심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는 자는 자기의 죄를 인정합니다. 다른 사람을 비교하거나 핑계하지 않고, 자기가 하나님을 슬프시게 한 것을 알고 뉘우칩니다. 진실되게 회개합니다. 그럼으로써 거룩함을 회복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기만 하면 둘째 아들을 달려와 영접하시는 것처럼 우리를 영접해주십니다. 모든 죄를 사하시고 사랑의 관계성을 맺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가운데 세상 근심을 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는 은혜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경건한 슬픔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 회개함으로 생명의 은혜를 얻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여 회개하도록 돕는 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다른 사람이 죄를 회개하도록 돕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를 데려다가 죄를 지적하고 회개하라고 할 때 자기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우리가 죄를 회개하도록 돕기 위해 정말 기도를 많이 하고 회개하지 않는 그 사람에 대한 진정한 사랑과 안타까운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겸손과 지혜로 도와야 합니다. 


삼하 12장을 보면 선지자 나단이 다윗이 회개하도록 돕는 내용이 나옵니다. 다윗은 왕이 되어 헷사람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데려다가 동침하는 죄를 범합니다. 그녀가 임신한 것을 숨기기 위한 다윗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자 그는 우리야를 전장의 최일선에 내몰아 죽이라고 지령을 내립니다. 우리야가 누구입니까? 사울이 다윗을 죽이고자 그를 좇을 때 생명을 다하여 다윗을 보호한 용사들 중에 하나입니다. 생명의 은인입니다. 이런 우리야를 죽이고 그의 아내를 취하였습니다. 모든 것을 거짓으로 은폐했습니다. 참으로 끔찍한 죄를 범한 것입니다. 


이런 그에게 선지자 나단이 들어가 한 스토리를 말합니다. 양과 소가 심히 많은 한 부자가 있었는데, 그가 가난한 자의 유일한 암양 새끼를 취하여 손님을 대접했다는 스토리입니다. 이를 들은 다윗은 심히 노하여 그 부자는 네 배나 값을 뿐 아니라, 죽여 마땅하다고 대노합니다. 나단은 그때 "당신이 그 사람이라" 합니다. 이 말이 시작이 아니라 끝입니다. 다윗이 스스로 자기를 발견하고 회개하도록 도운 것입니다. 


나단은 왕이 두려워서 그의 죄를 처음부터 담대히 지적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그는 죄인의 심리를 잘 알았습니다. 사람이 죄를 범하면 즉시자기 머리에서 그 죄를 합리화하는 모든 프로그램이 가동됩니다. 스스로를 속입니다. 자기 죄를 죄로 의식하지 못하도록 만듭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보면 많은 죄가 보이는데도 당사자는 전혀 그것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나단은 죄인의 심리와 행동 특성을 잘 이해했습니다. 그가 왕 앞에 가서 “당신은 살인자, 간음한 자, 거짓말 한 자요!”라고 죄를 담대히 책망했다면 다윗은 뭐라고 했겠습니까? "아니, 도대체 무슨 소리하는 거야! 왕이 후궁 하나 취한다고 뭐가 문제가 되는가? 왕이 후궁을 취하여 기쁨을 누리고 나라를 더 잘 다스리면 그것이 백성들에게 얼마나 유익한데 어차피 싸우다가 죽을 한 장수의 죽음이 뭐 그리 대단한가? 무엄하도다!" 등 각종 말로 자기를 방어했을 것입니다. 나단은 아주 부드러운 이야기로 왕을 무장해제 시키고, "You are the man"으로 그의 마음의 회개의 빗장을 푼 것입니다. 

회개하는 것이 큰 축복이지만 죄의 간교한 특성으로 인해 회개하도록 돕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네 죄를 알렸다’는 식으로 돕다가 떠나는 자들에 대해 나는 분명하고 담대하게 진실을 말했다라고 하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조금도 정죄하는 마음이 없는 진실된 사랑과, 진정으로 그를 위하는 마음, 하늘의 지혜와 은혜가 있어야 사람이 진정으로 회개하도록 도울 수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양떼들을 진정으로 사랑했습니다. 뜨겁게 사랑했습니다. 그의 이러한 사랑은 고린도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도록 도왔고 구원을 얻는 회개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우리 가운데도 이러한 아름다운 일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참 사랑에서 나오는 죄에 대한 책망과 하나님의 사랑의 지적임을 알고 회개하여 구원에 이르는 생명의 역사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서로 서로 죄를 고하는 가운데 우리 공동체가 날로 거룩해 지기를 기도합니다.


13~16절을 보십시오. "이로 인하여 우리가 위로를 받았고 우리의 받은 위로 위에 디도의 기쁨으로 우리가 더욱 많이 기뻐함은 그의 마음이 너희 무리로 말미암아 안심함을 얻었음이라 내가 그에게 너희를 위하여 자랑한 것이 있더라도 부끄럽지 아니하니 우리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다 참된 것 같이 디도 앞에서 우리가 자랑한 것도 참되게 되었도다 그가 너희 모든 사람들이 두려움과 떪으로 자기를 영접하여 순종한 것을 생각하고 너희를 향하여 그의 심정이 더욱 깊었으니 내가 범사에 너희를 신뢰하게 된 것을 기뻐하노라."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의 진실된 회개를 통해 큰 위로와 기쁨을 얻었습니다. 디도에게 그들에 대한 자랑을 많이 했었는데 그 자랑이 헛되지 않았음을 기뻐하였습니다. 이제 고린도 성도들을 더욱 신뢰하게 되었습니다. 참된 사랑과 진실된 회개에 기초한 든든한 관계성이 형성되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사도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을 뜨겁게 사랑했습니다. 그들의 오해를 풀기 위해 겸손과 인내로 최선을 다해 설명했습니다. 무엇보다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함으로 회개에 이르게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죄를 지적받을 때 세상 근심이 아니라 죄 자체를 회개하는 경건한 근심을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서로 죄를 책망하는 더욱 성숙한 공동체가 되도록 해 주시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