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룻기 제 2 강
보아스를 만나게 된 룻
말씀 / 룻기 2:1-3:18
요절 / 룻기 2:20 “나오미가 자기 며느리에게 이르되 그가 여호와로부터 복 받기를 원하노라 그가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에게 은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도다 하고 나오미가 또 그에게 이르되 그 사람은 우리와 가까우니 우리 기업을 무를 자 중의 하나이니라 하니라”
사람의 인생은 한 치 앞을 알 수 없습니다. 어제까지 멀쩡하던 사람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기도 합니다. 정릉 바이블 하우스 화장실에 있는 수도관이 오래 전에 동파된 일이 있습니다. 그것을 수리하신 분이 다음날 돌아가셨습니다. 저는 그것을 볼 때마다 그 분이 수리하면서 과연 이것이 본인의 유작이 될 걸로 생각했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는 모두 내일 일을 모릅니다. 또한 무엇으로 이 세상에 마지막 공헌을 하고 갈지도 모릅니다. 잠언에 보면 “계획은 사람이 세우지만 결정은 여호와께서 하신다(16:1)”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16:9)”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내일 나의 인생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것은 나오미와 룻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본문에는 하나님의 말씀이나 명령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삶에 깊숙이 관여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인애의 손길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결론을 알고 본문을 읽기에 조마조마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결론을 알 수 없었던 그들은 믿음으로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갔을 것입니다. 그들이 믿음으로 체험한 하나님의 인애의 손길을 오늘날 우리도 동일하게 체험하길 기도합니다.
1.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한 룻(2:1-7)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의 친족으로 유력한 자가 있으니 그의 이름은 보아스라고 1절은 시작합니다. 저자는 나오미와 룻의 삶에 가장 중요한 전기를 마련해주는 보아스와의 만남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습니다.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에게 말합니다. “내가 밭으로 나가겠습니다. 누구에게 은혜를 입으면 그를 따라서 이삭을 줍겠어요!(2)” 룻은 고향을 떠나 새로운 땅으로 왔습니다. 시차 적응도 해야 하고 분위기 파악도 해야 합니다. 막상 어머니가 가는 곳에 나도 가겠다고 하고 이곳에 왔지만 아는 사람 한 명 없는 곳으로 홀로 나간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룻은 하늘만 보고 가만있지 않았습니다. 현재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자 했습니다. 이삭을 줍는 것은 가장 가난한 자들이 하던 일이었습니다. 과거의 풍족함만 그리워하지 않았습니다. 자존심만 내세우며 시어머니만 쳐다보지 않았습니다. 막연히 큰 꿈만 꾸면서 그 꿈만 먹고 살지 않았습니다. 현재 자신의 처지를 인정하고 할 수 있는 일을 했습니다. 지난 날 모압과 유대의 경계선에서 룻이 어머니를 따르겠다고 결단한 것도 훌륭했습니다. 그러나 결단대로 실천하는 지금은 더 훌륭합니다. 룻은 지금 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했습니다. 신약적으로 본다면 없는 것을 바라보지 않고 내게 있는 오병이어를 드린 것입니다.
룻은 밭을 고르지 않았습니다. 누구의 밭인지 아무 정보도 없었습니다. 그냥 단지 이삭을 베는 자가 보이면 그를 따라 밭에 들어갔고 이삭 줍는 것이 허용되면 이삭을 주울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3절을 보면 ‘우연히(공교롭게도)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이르렀더라’고 말합니다. 과연 이게 우연일까요? 1절은 보아스를 만나는 것이 우연이 아님을 이미 밝혔습니다. 인간 편에서는 우연이지만 이는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4절 도입부의 부사 ‘마침(때마침)’도 마찬가지입니다. 룻이 우연히 보아스의 밭에 들어간 그 날 그 시각에 때마침 보아스가 베들레헴으로부터 그 현장을 감독하고자 찾아왔습니다. 룻이 와도 그 시간에 보아스가 오지 않았다면, 보아스가 와도 룻이 다른 밭으로 갔다면, 아니 몇 분이라도 비껴갔다면 둘은 만나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두 출연자가 간발의 차이로 한 사람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고 한 사람은 엘리베이터를 탄다든지 해서 절묘하게 어긋나서 2,30년을 이별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수많은 ‘우연히’와 ‘마침’의 단어가 만들어내는 예상치 못한 상황을 경험하며 살아갑니다. 그것이 하나님 편에서는 절묘한 타이밍일 때가 많습니다.
뭔가 이뤄지려면 타이밍이 맞아야 합니다. 취업이나 양을 얻는 것이나 결혼이나 뭔가 되는 사람은 타이밍이 맞고 뭔가 안 되는 사람은 타이밍이 안 맞습니다. 그 타이밍을 사람이 조절하지 못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에게 속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룻처럼 믿음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최선을 다해 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기막힌 타이밍을 허락하십니다. 결과론적인 얘기이긴 하지만 보아스를 만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룻에게 어디 있겠습니까? ‘우연히’와 ‘마침’이 만들어내는 타이밍은 하나님의 놀라운 손길이 되어 모든 영광을 하나님에게 돌리도록 하고 있습니다.
저는 본문의 내용을 읽을 때마다 생각나는 한 사건이 있습니다. 18년 전 전요셉 선교사가 고시원 생활을 하다가 새벽에 고향으로 몰래 내려간 일이 있습니다. 고향이 영암인 것 말고 아는 것이 전혀 없었습니다. 저는 무작정 영암으로 내려갔습니다. 시내버스 터미널에 도착하니 여러 마을로 들어가는 버스들이 늘어서 있었습니다. 어느 버스를 타야할지 몰랐습니다. 그냥 아무 버스나 올라탔고 맨 뒷자리에 앉아 괴로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버스가 출발하기 직전에 한 사람이 버스에 올라왔는데 전요셉 선교사였습니다. 그때의 심쿵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는 제가 있는 줄을 모르고 맨 뒷자리로 오는 것이었습니다. 제 앞까지 왔을 때 저는 어서 와 여기 앉으라고 했습니다. 그는 뒤로 나자빠질 뻔 했습니다. 그 ‘우연히’와 ‘마침’으로 모든 게임은 끝났습니다. 하룻밤을 같이 자며 부르심에 대해서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했습니다. 그는 다음날 짐을 싸서 다시 서울로 올라왔고 곧 취업을 했고 결혼을 했고 선교사로 나아갔습니다. 우리는 ‘우연’과 ‘마침’을 의도적으로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고 지금 여기서 최선을 다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우연’과 ‘마침’의 모습으로 ‘섭리’를 선물하십니다. ‘우연’과 ‘마침’의 모습으로 다가오는 하나님의 ‘섭리’를 수시로 체험하길 기도합니다.
보아스는 일하는 자들에게 친절하게 인사를 합니다(4).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일꾼들도 화답합니다.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나이다” 노사관계가 이렇게 아름다우면 얼마나 좋을까요? 회사라는 밭을 경영하는 목자님들도 계시고 남의 밭에서 일하는 목자님들도 계십니다. 그 관계가 갑과 을이 아니라 이런 사랑과 신뢰의 관계가 되길 바랍니다.
보아스의 눈에 룻이 띄었습니다. 사환에게 이는 누구의 소녀냐고 묻습니다(5). 못 보던 사람이라서 눈에 띄었을까요? 아니면 외모가 예뻐서 시선을 끌었을까요? 7절 사환의 말은 룻의 어떤 점이 눈에 띄게 했는지를 알려줍니다. “아침부터 와서는 잠시 집에서 쉰 외에 지금까지 계속하는 중입니다” 건성으로, 마지못해서, 화를 내면서 이삭을 줍지 않고 마음을 집중하여 열심히 이삭을 주웠습니다. 이것이 시어머니를 위한 길이요 이 땅에서 어머니의 백성으로 머물 수 있는 길이었습니다. 자신의 인생을 한탄하지 않고, 이까지 것 주워서 뭣하나 하는 마음을 버리고 이삭줍기에 몰두했습니다. 이런 그의 모습이 사환에게도 인상적으로 다가왔고 보아스에게도 아름답게 보였습니다.
2. 룻을 귀하게 여기고 위로한 보아스(8-16)
보아스는 룻에게 호의를 베풉니다(8,9). ‘내 딸’이라고 부르면서 여기 머물며 이삭을 주을 것이고, 너를 건드리지 말도록 조치도 취했으니 목이 마르거든 소년들이 길어 온 것을 마시라고 했습니다. 또한 식사 시에는 한 상에서 떡을 먹고 볶은 곡식을 주었습니다(14). 이삭을 베는 소년들에게는 특별히 룻이 곡식 단 사이에서 이삭을 줍게 하고 그를 위하여 곡식 다발에서 이삭을 조금씩 뽑아버려 줍게 하라고 특혜를 베풀었습니다(15,16). 룻은 보아스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10절을 보면 룻은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며 말했습니다. “나는 이방 여인이거늘 어찌하여 내게 이런 은혜를 베푸시나이까?” 당시 여인은 사람대접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다가 과부면 더 했고 이방인 과부이면 말할 것도 없었습니다. 모든 것을 가진 보아스와 아무 것도 없는 룻의 차이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커보였습니다.
그런데 보아스는 말합니다. “네 남편이 죽은 후로 네가 시어머니에게 행한 모든 것과 네 부모와 고국을 떠나 전에 알지 못하던 백성에게로 온 일이 내게 분명히 알려졌느니라. 여호와께서 네 행한 일에 보답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11,12)” 룻의 한 일은 이미 베들레헴 전역에 퍼졌고 보아스에게도 들렸다고 말합니다. 원어로 보면 ‘알려졌다’는 말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사람의 착한 행실은 누가 말하지 않아도 알려지고 영향을 발휘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룻이 행한 착한 행실은 무엇입니까? 첫째, ‘네 남편이 죽은 후로 네가 시어머니에게 행한 모든 것’입니다. 며느리가 남편이 죽으면 시어머니와의 관계가 어떻게 됩니까? 남편이 있어도 고부간의 갈등이 심한데 없으면 관계는 끝난 것입니다. 그런데도 룻은 남편이 죽은 후에도 시어머니를 봉양하고자 따라왔습니다. 그 점이 알려졌고 보아스를 감동시켰습니다. 둘째, ‘네 부모와 고국을 떠나 전에 알지 못하던 백성에게로 온 일’입니다. 잘 알던 사람들 속에서 살다가 알지 못하던 사람들에게 온 이유가 무엇입니까? 고생을 자처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호와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기 위해서였습니다. 당시는 지금처럼 종교를 바꾼다는 게 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내 생각과 가치관만 아니라 삶의 터전과 존립기반마저 바꾸는 일이었고 미지의 세계로 자신을 던지는 일과 같았습니다. 앞길이 창창한 젊은 여자가 하나님에게 자신의 인생을 걸었습니다. 어떻게 감동을 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보아스는 룻을 축복합니다. “여호와께서 네가 행한 일에 보답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보아스에겐 영적인 눈이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귀한 사람인 줄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인애의 마음으로 아무 것도 없는 시어머니를 섬기는 그가 진정 귀한 사람임을 알았습니다. 무엇보다 얼마든지 자신의 계획과 유익을 앞세울 수 있는 나이에 하나님에게 자신을 던졌으니 이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존귀한 사람임을 알았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털어서라도 룻을 도와주고픈 마음이 일었습니다.
룻은 보아스의 말에 위로를 받습니다. 13절을 보면 자신은 그의 하녀 중의 하나와도 같지 못한데 자신을 위로하고 마음을 기쁘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룻은 겸손합니다. 어둠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지만 그에게도 위로가 필요했습니다. 부지런한 사람일수록 위로가 필요합니다. 룻은 아직 시어머니로부터 받지 못한 위로를 보아스로부터 받습니다.
3. 보아스의 호의를 입은 것이 우연이 아님을 안 나오미(2:17-23)
룻이 하루 종일 줍고 주은 것을 떠니 보리가 한 에바쯤 되었습니다. 약 22리터라고 하는데 한 사람이 하루 이삭을 주어서, 특히 여인이 그것도 이삭을 한 번도 주워본 일이 없는 이방인이 그렇게 했다는 것은 생각하기 힘든 일입니다. 룻은 나오미에게 보여주고 먹고 남은 볶은 곡식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혜택을 준 사람이 보아스임을 말했습니다. 나오미는 말합니다. “그가 여호와로부터 복 받기를 원하노라 그가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에게 은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도다 ~ 그 사람은 우리와 가까우니 우리 기업을 무를 자 중의 하나이니라(20)” 룻으로부터 자초지종을 들으며 나오미는 어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느낀 것 같습니다. 첫날부터의 이런 만남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보아스는 남편 엘리멜렉과 아들들이 살아있을 때도 은혜를 베푼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인격이 그대로였습니다. 그는 우리와 가까우니 우리 기업을 무를 자 중의 하나라고 했습니다. ‘무르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고엘’로서 ‘되찾다, 회복하다, 갚다’는 말입니다. ‘기업을 무를 자’란 의미는 친족을 여러 어려운 상황으로부터 구해내 처지를 원래대로 회복시켜줄 의무와 능력이 있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다른 말로 ‘속전을 치르는 사람, 대속자, 구속자’ 등으로 해석합니다. 이것을 하려면 친족이어야 했고 자원하는 마음이 있어야 했고 물질적 능력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룻이 여기에 합당한 보아스를 만난 것입니다. 이 우연 속에 나오미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느꼈습니다. 그 가문과 인생이 회복되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나오미는 여자의 촉으로 보아스가 룻을 특별하게 생각하고 있음도 감지했습니다.
‘기업을 무르는 자’ 곧 ‘대속자’를 만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사람에게는 그 인생에 영향을 준 만남들이 있습니다. 강영우 박사는 세 가지의 만남이 자기 인생을 변화시켰다고 말했습니다. 첫째는 믿음 있는 아내와의 만남이고 둘째는 좋은 친구들과의 만남이고 셋째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이라고 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세 번째의 만남이 가장 위대한 만남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노력한다고 되는 것이 아닌데 하나님이 그런 만남을 이루어주셔서 맹인으로 인생을 한탄하다 죽을 자를 모든 장애우들의 대변자로서 살게 하셨다고 하였습니다. 룻이 모압에서 말론이란 남자를 만난 것은 어찌 보면 불행의 씨앗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오미라는 시어머니의 만남은 그를 영적인 세계에 발을 들여놓도록 한 소중한 만남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보아스와의 만남은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을 위대한 만남이 됩니다. 하나님은 이방여인인 룻을 불쌍히 여기시고 기업을 무르는 대속자를 만나게 하신 인애의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은 우리도 생각하지 못한 때에 주님을 만나게 하셨습니다. 인생이 아무 것도 없고 가장 힘들 때 나를 눈여겨보시고 다가오시는 대속자 예수님을 만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나라 영생이라는 기업을 회복하였고 사명이라는 기업도 회복하였습니다. 우리의 인생을 회복시키신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4. 보아스에게 청혼을 하는 룻(3:1-18)
나오미가 룻에게 말합니다. “내 딸아, 내가 너를 위하여 안식할 곳을 구하여 너로 복되게 하여야 하지 않겠느냐(1)?” 그를 재가시키고 싶다는 말입니다. 룻만큼은 자기처럼 언제까지나 과부로 사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런데 보아스가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타이밍인 것 같았습니다. 나오미는 룻에게 지시했습니다. “너는 목욕하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입고 타작마당에 내려가서 그 사람이 먹고 마시기를 다 하기까지는 그에게 보이지 말고 그가 누울 때에 너는 그 눕는 곳을 알았다가 들어가서 그의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 누우라. 그가 네 할 일을 네게 알게 하리라(3,4)” 이는 룻으로서는 순종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자칫 보아스에게 품행이 단정하지 못한 여자, 결혼하려고 별 짓을 다하는 여자로 보일 수 있습니다. 아무리 자기가 찬 밥 더운 밥 가릴 처지가 아닌 과부라지만 남의 남자 발치에 누워서 처분만 바란다는 것이 자존심 상하는 일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룻은 시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합니다. 유대의 전통을 따릅니다. 룻은 모압을 떠날 때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는 유대인을 자기 백성으로 여겼고, 자기 자신을 유대인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유대의 전통을 그대로 따랐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유대인을 선택하고서는 실제 생활도 선택한 그대로 했습니다. 선택은 하고서 실제 행동은 모압 식으로 하는 이중의 삶을 살지 않았습니다. 내가 어머니와 함께 하나님을 섬기는 유대인으로 살고자 했기에 자기 생각과 자존심을 다 버리고 순종했습니다. 5,6절을 보면 ‘다 행하리이다, 다 하니라’하는 말이 창6,7장에서 ‘다 준행하였더라’고 한 노아의 순종을 연상시킵니다. 믿음으로 첫 결단을 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런데 그 결단을 실제 삶 속에서 실천하기는 더 어렵습니다. 그러나 룻은 결단한 대로 초지일관 자신의 삶을 끌고 가고 있습니다.
드디어 그 날 밤이 되었습니다. 보아스는 먹고 마시고 마음이 즐거운 상태에서 곡식 단 더미 끝에 누웠습니다. 아마 밤공기가 차서 이리저리 뒤척이며 이불을 잡아당기고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발끝에 따뜻하면서도 이상한 것이 걸려서 놀라 깼을 것입니다. 소스라치게 놀란 보아스는 ‘네가 누구냐’ 하였습니다. 룻은 대답합니다. “나는 당신의 여종 룻이오니 당신의 옷자락을 펴 당신의 여종을 덮으소서(9)” 룻은 사실 그의 종이 아닙니다. 그러나 종이 되고자 하는 지극한 겸손으로 청혼을 합니다. “당신의 옷자락을 펴 덮어주세요” 2:12에서 보아스는 룻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날개 아래 보호받으러 온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이를 인용해서 룻은 당신의 옷자락으로 나를 덮어달라고 함으로서 하나님은 보아스를 통해 그 날개 아래에서 보호하시는 일을 하고 계시다는 것을 연상시키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지혜로운 대답입니까?
룻이 너무나 결혼하고 싶어서 이렇게 대시한 것입니까? “이는 당신이 기업을 무를 자가 됨이니이다” 나오미는 그의 재가를 위해 보아스에게 접근을 시켰습니다. 그러나 룻은 결혼이 아니라 기업을 무르는 일을 위해 그에게 온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인생 문제 해결보다도 시어머니의 인생문제, 더 나아가 엘리멜렉 집안의 문제 해결에 주안점을 둔 것입니다. 그 점이 보아스를 더욱 감동시켰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내 딸아 여호와께서 네게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 네가 가난하건 부하건 젊은 자를 따르지 아니하였으니 네가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지 않으면 누가 받겠는가 하는 심정으로 축복을 합니다. 자신의 장래를 생각한다면 젊은 자를 따라가야 합니다. 그래야 자식도 낳고 오랫동안 해로할 수 있습니다. 보아스는 아버지뻘입니다. 얼마나 같이 살 수 있을지, 과연 자식을 가질 수 있는지, 장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결혼하기를 원합니다. 나오미의 소원이기도 하며 하나님이 세우신 고엘 제도에 순종하기 위해서입니다. 그가 처음 베푼 인애는 과부의 몸으로 과부인 시어머니를 좇아 이곳에 온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나중 인애는 젊은 과부로서 정욕을 좇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자신의 결혼의 권리를 하나님께 드린 것입니다.
보아스는 룻의 믿음을 인정하고 적극적으로 돕습니다. “내 딸아 두려워 말라 내가 네 말대로 네게 다 행하리라 네가 현숙한 여인인 줄 나의 성읍 백성이 다 아느니라(11)” 그리고 기업 무를 자로서의 자기 책임을 다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자기보다 우선 순위인 친족이 있으니 그에게 먼저 물어 보고 결정하겠다고 했습니다. 룻도 정욕에 기초하지 않고 하나님이 정하신 고엘 제도를 위해 자신을 순종시켰고, 보아스도 고엘 제도에서 정한 원칙에 먼저 충실했습니다. 그들의 만남이 더욱 아름다운 것은 둘 사이의 끌림이 단순히 감정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에 충실하고자 했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 법을 세우고자 하는 마음이 먼저요 결혼은 나중이었습니다. 21세기의 눈으로 보면 이해하기 힘든 그들의 만남,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 중심적인 만남이요 결혼입니다. 우리 가운데도 하나님의 법을 세우고 인애를 실천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아름다운 결혼이 풍성히 이뤄지기를 기도합니다.
보아스는 룻을 돌려보내면서 보리 여섯 되를 지워주었습니다. 이는 나오미에게 보내는 증표였습니다. 이 보리를 받아든 나오미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풀려 감을 보았고 말을 합니다. “내 딸아 이 사건이 어떻게 되는 것을 알기까지 앉아 있으라 그 사람이 오늘 이 일을 성취하기 전에는 쉬지 아니하리라(18)” 진인사대천명이라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으니 이젠 오직 하나님의 처분에 맡기고 그가 하시는 일을 보자는 것입니다.
결론입니다. 사람의 인생은 알 수 없습니다. 룻은 결단한 대로 시어머니를 섬기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고자 한 것뿐입니다. 나오미는 며느리가 잘 되는 것을 바란 것뿐입니다. 보아스는 하나님의 눈으로 룻을 보고 하나님이 복 주시기를 바란 것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세 사람의 인애의 마음을 받으시고 아름다운 섭리의 역사, 회복의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자기 소견에 옳을 데로 살아가던 당시 사사기 시대에 그들은 하나님의 인애의 마음으로 살고자 한 사람들이었고 하나님은 그들에게 은총을 베푸셨습니다. 하나님의 인애의 마음을 가지고 우리도 캠퍼스와 삶의 현장에서 아름다운 섭리와 회복의 스토리를 이어가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