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요한복음 4 강 인자도 들려야 하리라 말씀 / 요한복음 3:1-21 요절 / 요한복음 3:14,15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거듭남의 진리를 가르쳐 주시는 내용입니다. 거듭남은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진리중의 하나입니다. 거듭날 때 진정한 크리스천이 됩니다. 이 시간 예수님께서 들려주시는 거듭남의 비밀을 배우는 가운데, 이미 거듭나신 분은 감동의 시간이 되시고, 아직 거듭나지 않으신 분은 거듭남의 최고의 복을 누리는 시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그런데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라” 니고데모란 헬라어 니코(승리) + 데모(백성)로 백성의 승리자, 백성의 정복자란 뜻입니다. 그는 그의 이름대로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먼저 그는 바리새인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이라고 하면 그 유명한 바리새인 ‘사도바울’이 떠오릅니다. 바리새인은 ‘분리된 자’란 뜻으로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사람들, 선민의 순수성을 목숨처럼 지켜온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요즘의 미투에서도 자유로운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어릴 때부터 모세5경과 탈무드를 암송하고, 철저한 안식일 준수와 십일조 생활, 하루 3번 기도와 1주일에 2번 금식하는 사람들로서 존경받는 종교지도자들이었습니다. 둘째로 그는 유대인의 지도자였습니다. 이는 71명으로 구성된 이스라엘 최고기관인 산헤드린 공회의 멤버였다는 말입니다. 10절을 보면 그는 이스라엘의 선생이었습니다. 여기서 이스라엘의 선생이란 관악중이나 문영여고 선생님 같은 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의 정신적 지도자라는 뜻입니다. 니고데모의 트위터는 수십만 명의 팔로워를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또한 니고데모는 요한복음 19:39절을 볼 때 부자였습니다. 실로 니고데모는 그의 이름대로 종교, 정치, 사회, 경제적인 모든 면에서 최고로 성공한 진정한 백성의 정복자였습니다. 니고데모가 가는 곳마다 자매들은 ‘니고데모 오빠’라고 외쳤고, 부모들은 자식이 니고데모의 반에 반만이라도 되면 좋겠다고 부러워했습니다. 이스라엘 대학생들은 니고데모를 롤 모델로 삼고 니고데모처럼 되고자 불철주야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이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밤에 찾아 왔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아니, 최고로 성공한 ‘넘사벽’같은 니고데모가 무엇이 아쉬워서 예수님을 찾아 왔을까요?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하나님으로부터 온 선생인 줄 알고 찾아 왔다고 했습니다. 이를 보면 니고데모는 무엇인가 풀리지 않은 내면 문제를 예수님께 질문하고 ‘신의 한 수’를 얻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과연 니고데모의 고민이 무엇이었을까요? 예수님은 니고데모가 자신의 고민을 말하지 않았지만, 그의 내면을 훤히 꿰뚫어 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예수님은 니고데모가 최고로 성공한 사람이지만, 그 마음에 하나님 나라가 없음을 보셨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니고데모같은 유대인들에게는 쉬운 단어지만, 우리들에게는 생소한 단어입니다. 이 단어에 가장 가까운 말이 구원, 영생, 천국의 기쁨, 참된 행복 등입니다. 그럼 ‘하나님 나라’ 뜻이 정확히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 하나님의 통치를 말합니다. 로마서 14:17절은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했고, 누가복음 17:21절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곧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을 때, 우리 안에 이루어지지는 천국을 말합니다. 의와 평강과 희락이 넘치는 지극히 복된 상태를 말합니다. 이 하나님의 나라를 니고데모가 누리려면 어떻게 해야 된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까? 거듭나야 한다고 하십니다. 3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그럼 거듭난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선거철만 되면 정치인들이 자주 사용하는 말이 이 거듭난다는 말입니다. “저는 뽑아주신다면 제가 깨끗한 정치인으로 거듭나서 국민 여러분을 왕처럼 섬기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거듭남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거듭난다는 말은 위로부터 태어난다, 다시 태어난다, 영어로는 be born again이고 한자로는 거듭 중자를 사용하여 중생(重生)이라고 합니다. 거듭남은 기독교의 핵심진리로 한 존재가 근본적으로 변화하는 것입니다. 곧 성령의 역사로 죄인이 의인으로 변화되는 역사요, 사탄의 자식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역사입니다. 그래서 거듭날 때 진정한 크리스천, born again christian이 됩니다. ‘거듭나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에 니고데모는 고개를 꺄우뚱하며 물었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그는 대학자였지만 거듭남을 생물학적으로 이해했습니다. 생물학적으로 사람이 2번 태어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런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은 어떻게 거듭날 수 있는지를 2가지로 설명해 주십니다. 첫째는 물과 성령으로, 둘째는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영접함으로입니다. 먼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뜻을 보겠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거듭나는 것은 물과 성령으로 나는 것입니다. 어머니 모태에 들어갔다가 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물은 회개함으로써 더러운 죄를 씻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성령은 회개한 사람의 마음에 성령께서 역사하여 새 사람이 되게 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물과 성령으로 사람이 거듭나면 천국의 기쁨과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구원과 영생의 확신가운데 살게 됩니다. 거듭난 신자들은 이 땅에서 날마다 하나님 나라를 누리며 살다가 이 세상을 떠날 때에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이야말로 한 사람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하고, 최고로 큰 축복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거듭나는 것이 영혼이 거듭나는 것이라고 더 자세히 가르쳐 주십니다. 6절을 보십시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사람은 육과 영의 존재입니다. 그런데 육이 태어나는 것과 영이 태어나는 것은 전혀 차원이 다릅니다. 먼저 육이 태어나는 것을 생각해 봅시다. 이것은 우리가 모두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엄마의 태중에서 열 달 있다가 응애 응애 하면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라서 초, 중, 고, 대학을 다니고 나중에 결혼하고 자식을 낳고 손자까지 보다가 죽는 것, 이것이 육의 탄생의 일대기입니다. 그런데 이 육의 탄생과는 전혀 다른 영의 탄생이 있습니다. 육의 탄생이 어머니를 통해 나는 것이라면, 영의 탄생은 물과 성령에 의해 하나님으로부터 그의 영혼이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거듭나는 것은 영혼이 거듭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동물과 달리 영혼을 가진 존재로 창조 되었습니다. 그래서 육신은 부모님을 통해 태어나지만, 영혼은 하나님에 의해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동물은 영혼이 없기 때문에 다시 태어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강아지나 돼지에게 “강아지야, 너 거듭나야 하겠다. 돈아 너 거듭나야 하겠다”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오직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반드시 그 영이 거듭나야 합니다. 거듭나야 참 자유와 기쁨을 누리게 되고, 구원과 영생을 얻게 됩니다.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를 보고 누리며 또 장차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거듭남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모든 사람은 반드시 거듭나야 합니다. 이렇게 영이 거듭나는 것은 육신의 조건개선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육신의 조건개선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래서 니고데모처럼 부와 명예와 지위를 누리고 싶어 하고 외모를 멋있게 가꾸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돌을 아무리 갈아도 금이 될 수 없는 것처럼, 육신을 아무리 아름답게 가꾸어도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마치 치명적인 병으로 죽어가는 사람이 아무리 화려한 옷을 입고 진수성찬을 먹어도 다 소용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병이 낫는 것이듯이, 영혼이 거듭나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7,8절을 보십시오.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그러하니라” 니고데모는 사람의 영혼이 거듭난다는 것을 이상하게, 놀랍게 여긴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바람을 비유로 거듭남을 다시 설명하십니다. 바람은 임의로 붑니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다고 바람이 없다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불신 친구가 제게 “하나님이 있다면 보여 줘 봐 그러면 믿을께”라고 했습니다. 이때 저는 주일학교 선생님께 들은 말씀이 생각나서 그 친구에게 “너, 그럼 바람 보여 줄 수 있어? 바람이 안보이지만 있는 것처럼, 하나님도 마찬가지야”라고 했습니다. 바람이 안보이지만 있는 것처럼, 영혼이 거듭나는 것도 볼 수는 없지만, 반드시 있는 진리입니다. 결과가 이를 증명합니다. 사람이 거듭나게 되면, 그 말하는 것과 생각하는 것과 삶이 완전히 바뀝니다. 지옥같던 삶을 살던 사람이 천국같은 삶을 살게 됩니다. 진화론을 옹호하던 자가 창조론을 믿는 자가 되고, 전도하는 사람들을 피해 다니던 자가 이제 전도하러 쫓아다닙니다. 바울처럼 예수님을 박해하던 자가 예수님을 위해 순교하기까지 합니다. 거듭난 가장 확실한 증거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한다는 사실입니다. 고린도전서 12:3b절을 말합니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우리에게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는 거듭남의 축복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거듭남의 진리를 들은 니고데모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9절을 보십시오. “니고데모가 대답하여 이르되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예수님이 거듭남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해 주시는데 니고데모가 왜 반발했을까요? 아마도 예수님의 답변이 자기가 기대했던 답변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니고데모는 지금까지 자기가 쌓아왔던 것을 바탕으로 하여 여기에 무언가를 더 얹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 무언가가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고 해도 불굴의 의지와 성실로 감당할 용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새 출발을 말씀하셨습니다. 니고데모가 지금까지 이룬 모든 것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데 아무 쓸모가 없고, 다시 새 출발을 해야 한다니~! 이 얼마나 큰 충격이겠습니까~! 이처럼 세상에서 이룬 것이 많거나 자신이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거듭남을 받아들기기 힘듭니다. 특별한 은혜가 필요합니다. 삼성의 창설자 이병철씨는 죽기 전에 목사님을 초청하여 구원의 진리, 거듭남의 진리를 들었지만 영접하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이에 비해 살아계신 한국 최고의 석학 이어령 박사는 딸의 실명 위기 앞에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거듭나는 특별한 은혜를 입었습니다. 우리도 겸손한 마음으로 거듭남의 진리를 영접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강한 자기생각으로 거듭남의 진리에 반발하는 니고데모를 예수님은 책망하셨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 구약 성경에서도 물과 성령으로 새롭게 되는 원리가 나와 있습니다. 에스겔 36:25-27절을 보십시오. “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 숭배에서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게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런 성경 본문을 읽어 보았을 그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영적 무지요 또 교만이었습니다. 11,12절을 보십시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의 증언을 받아 들이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예수님은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하십니다.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거듭남에 대해서 말씀하시지만 니고데모는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모세 5경을 어릴 때부터 암송한 니고데모가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모세 5경의 4번째 책인 신명기를 인용하여 장차 예수님이 하실 십자가 사역을 가르쳐 주십니다. 14,15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듣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민수기 21장에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사건을 잘 아실 것입니다.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에돔 광야를 지날 때, 길이 험하자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하나님은 원망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크게 진노하사 불뱀을 보내 그들을 물게 하셨습니다. 그때서야 백성들은 모세에게 살려 달라고 애원했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모세에게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장대 위의 뱀을 쳐다보는 자는 살리라고 하셨습니다. 신명기 21:8,9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 그런데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구원의 방법은 이성적으로는 납득이 쉽게 되지 않습니다. 뱀에 물렸으면 뱀의 독이 몸속으로 퍼지지 않도록 물린 부분을 끈으로 동여매고, 입으로 독을 빨아내야 합니다. 그리고 더 이상 뱀에게 물리지 않도록 땅을 쳐다봐야 합니다. 그런데 장대위의 놋뱀을 쳐다보면 산다니.... 좀 넌센스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앞에 두 부류로 갈라졌습니다. 믿고 놋뱀을 쳐다 본 사람과 쳐다보지 않고 자리 나름대로 살아보고자 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결과는 믿고 쳐다 본 사람은 살았고, 쳐다보지 않고 자기 나름대로 살아보고자 한 사람들은 다 죽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믿고 바라보는 자는 영생을 얻습니다. 14,15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모세가 뱀을 든 것 같이 인자이신 예수님도 앞으로 들려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골고다 십자가 나무위에 높이 들리게 되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들리십니까?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입니다. 예수님은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의 죄 값을 담당하심으로 우리에게 영생을 주십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는다” 이것이 하나님이 제시하신 구원의 방법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말씀은 마치 ‘장대위의 놋뱀을 쳐다보면 살리라’라고 하신 말씀처럼, 이성적으로 잘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니고데모를 비롯하여 당시 유대인들은 세상의 구주는 영광의 주, 심판의 주로 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로마와 헤롯과 같은 악한 세상을 멸하고 메시아 왕국을 건설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아니, 놋뱀처럼 나무에 높이 달려 죽는다고....! 달려 죽는 사람을 믿으면 영생을 얻는다고...! 그들은 도저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더욱이 이스라엘 사람들은 신명기 21:23절 말씀처럼 ‘나무 위에 달린 자마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 나무에 달려서 죽은 예수를 믿고 바라보면 영생을 얻는다고...! 그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왜 저주의 상징인, 십자가 나무위에 달려 죽으십니까? 그것은 우리가 죄 값으로 받을 저주를 대신 받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해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3:13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니라” 예수님은 죄 없으신 분이심에도 불구하고 우리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저주를 대신 받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저주를 받으심으로, 우리가 죄의 저주에서 자유를 얻고 영생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만 믿고 바라보면 됩니다. 믿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차라리 율법을 지키는 길이 더 그럴듯해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 값을 다 치루셨고, 율법의 의를 다 이루셨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만 예수님을 믿고 십자가만 바라보면 됩니다. 그러면 거듭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16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은 하나님이 왜 예수님을 십자가에 들리게 하셨는가를 잘 말해 줍니다. 곧 세상을 너무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에서 ‘이처럼 사랑하사’는 ‘너무도 사랑하사’라는 뜻입니다(For God so loved the world). 그런데 하나님이 너무도 사랑한 이 세상은 어떤 세상입니까? 사랑의 하나님을 반역한 세상입니다. 죄악이 넘쳐나는 세상입니다. 미투운동을 통해 드러나는 죄악은 빙산의 일각입니다. 세상은 죄로 넘쳐납니다. 이 세상은 심판받아 마땅한 세상입니다. 멸망 받아 마땅한 세상입니다. 사랑받은 만한 가치가 없는 세상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세상을 멸망에서 건져내어 영생을 주기 위해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하나 뿐인 외아들을 주셨습니다. 하나 뿐인 외동아들은 얼마나 귀합니까! 그런데 그런 외동아들을 죄악된 인간들을 위해 내어 줄 부모가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오래된 일화입니다. 많은 아들을 둔 한 인디언이 생활이 어려워서 한 아들을 훌륭한 백인선교사에게 양자로 보냈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새벽부터 그 아버지가 백인의 집 앞에 와서 계속 우는 것입니다. 그 인디언은 결국 백인에게 주었던 아들을 도로 찾아 갔습니다. 이처럼 많는 아들 중에 한 아들도 주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유일한 독생자를 죄악된 인간들을 위해 주셨습니다. 죄악된 인간들을 너무도 사랑하셔서 주셨습니다. 주시되 저주 받은 형틀인 십자가에 내어 주셨습니다.
도대체 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이 세상에서 찾아볼 수 없는 사랑입니다. 비합리적이고, 무모한 사랑입니다. 우리의 이성을 뛰어 넘는 사랑입니다. 세상은 사랑할 만한 사람을 사랑합니다. 의인을 사랑하고, 선인을 사랑합니다. 아내를 사랑하고, 자녀를 사랑하고, 친구를 사랑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죄인을, 그것도 하나님을 반역한 악독한 죄인을 사랑하셨습니다. 로마서 5:8절은 이 하나님의 사랑을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사도요한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니라(요한1서 4:9,10)” 독생자를 제물로 내어 주시기까지 세상을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찬양합니다. 17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라,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요, 십자가는 사랑의 극치입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을 영접하는 것이 구원이요, 영생이요, 바로 거듭남입니다. 영원한 생명이냐 영원한 멸망이냐는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영접하느냐 영접하지 않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을 거절하는 것은 스스로 영생을 거절하는 것이요 심판을 자초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어리석게도 하나님이 보이신 사랑의 증거를 믿지 않고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는 것일까요? 왜냐하면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빛으로 나오면 자기 죄가 드러날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빛으로 나오면 더 이상 죄를 즐길 수 없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장차 그리스도의 심판에 앞에 서게 되면 어차피 모든 것이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때 가서 죄 문제를 해결 받으려 하면 너무 늦습니다. 바로 지금 빛 가운데로 나와야 합니다. 그러면 놀라운 죄사함의 은혜와 거듭남의 축복과 하나님 나라의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세상을 너무도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 주셨습니다. 십자가에 들리신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자는 누구나 죄사함을 받고 영생을 얻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믿는 것이 거듭남의 길이요 영생의 길입니다.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찬양합니다. 이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는 캠퍼스 후배들에게 이 사랑을 감동적으로 전하는 봄학기를 되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