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부활절 제 1 강 부활의 첫 열매 말씀 / 고린도전서 15:1-34 요절 / 고린도전서 15: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해피 이스터! 2018년도 부활절을 맞이하여 우리에게 부활의 생명을 주신 영광의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돌려드립니다! 사도행전 18장을 보면 바울은 제 2차 전도여행 중 고린도에 도착했습니다. 고린도는 로마제국의 주요 도시 중의 하나였습니다. 헬라 문화의 중심지로 그리스 로마의 신화에 나오는 수많은 신을 섬기고 있었는데 특히 열두 최고 신 중에 가장 핸섬하다는 음악과 예언의 신 아폴론을 숭배했습니다. 지금도 고린도 유적을 가보면 바울이 재판 받은 장소 바로 옆에 아폴론 신전 터가 있습니다. 고린도는 대표적 항구도시로 음란한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고린도인처럼 산다'는 것은 '음란한 삶을 산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작가들은 고린도를 ‘선원들의 낙원’, ‘주정뱅이의 천국’, ‘정숙한 여인의 지옥’ 또는 ‘허영의 시장’이라고 묘사했습니다. 그래서 바울도 고린도에 도착했을 때 심히 놀라고 두려워 떨었습니다(고전2:3).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담대히 전파하였을 때 하나님의 교회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떠나면서 고린도교회는 분쟁, 음행, 법정소송, 제사음식, 은사, 부활 논쟁 등 많은 문제가 일어났습니다. 바울은 이런 문제들을 돕기 위해 AD 55년경에 이 편지를 써서 보냅니다. 바울은 1장부터 그들의 문제를 하나씩 다루면서, 13장에서는 사랑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도록 권면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인 오늘 15장에서 근본적인 해결의 길을 제시합니다. 그것이 바로 부활신앙입니다. 우리도 세상을 살아가며 여러 가지 문제에 부딪칩니다. 음란과 쾌락, 물질주의, 인간 갈등 문제에 부딪칩니다.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며 승리하는 삶을 사는 길이 무엇일까요?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 부활의 믿음을 새롭게 하고 부활의 생명력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바울이 개척 초기에 고린도 성도들에게 전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복음이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이 헬라 지성인이라고 그들이 좋아하는 신화나 어떤 스토리를 전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감 없이 그대로 전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바울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때 불가능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전한 복음 앞에 자기들의 죄를 눈물로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였습니다. 날마다 바울 목자님께 말씀을 배우며 복음 위에 굳게 섰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떠난 후 그들 가운데 복음을 굳게 지키지 못하고 헛되이 믿는 자들이 생겨났습니다. 바울은 이런 그들에게 무슨 새로운 이론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과거에 전했던 복음을 다시 알게 합니다. 여기서 알게 하는 것은 그저 기억나게 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KJV 영어성경에는 ‘declare’로 되어 있는데 ‘선포’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강력하게 복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잘 안다고 생각합니다. 신앙생활의 초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베드로전서 1:12을 보면 ‘복음은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원한다는 것은 ’lust‘ 또는 ’desire‘로 아주 간절한 마음으로 계속 살펴본다는 것입니다. 천사는 영적인 일에 있어서는 우리 보다 얼마나 더 명석합니까? 그런 천사들도 복음을 계속하여 살펴보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복음은 그 깊이가 무한합니다. 우리도 늘 새로운 마음으로 복음을 듣고 그 이해의 깊이를 더해 가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면 바울이 다시 강력하게 선포하는 복음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3,4절을 보십시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이 말씀은 성경 전체에서 복음이 무엇인가를 가장 명확히 설명해주는 구절입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성경에 이미 예언된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사건입니다. 복음은 어떤 철학적인 개념이나 종교적 교리가 아니라 과거에 한 사건이 정말 일어났었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부활 사건입니다. 원래 복음(유-앙겔리온: eu‘기쁜’, aggelion‘소식’)이라는 말은 로마시대 때 주로 황제에게 사용되는 단어였습니다. 황제가 즉위했다든가, 전쟁에서의 승리했을 때 전령들이 말을 타고 제국 전체를 다니며 큰 소리로 선포한 소식입니다. 복음서 기자들과 사도 바울은 이 용어를 예수님의 생애에 적용하여 진정한 유앙겔리온을 선포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애 중에서도 특히 그의 죽으심과 부활 사건을 복음으로 선포했습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 진정한 유앙겔리온일까요? 2,000년 전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신 사건이 21세기 인공지능 시대를 살아가는 나에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그것에 대한 해답이 바로 오늘 메시지의 포인트입니다. 그 해답의 단초는 3b절에 있습니다. 3b절을 다시 한 번 보십시오.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그의 죽으심은 범상한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죽으심은 ‘우리 죄’를 위한 죽음이었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어떤 기독교 이단에서는 "누가 예수가 죽기 위해 세상에 왔다고 말하는가?"하며 예수님은 본래 이 세상에서 혁명을 통해 지상 메시아 왕국을 세우고자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가룟 유다의 밀고로 실패하여 십자가에서 비참하게 처형되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음을 여러 군데에서 분명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난 주 들은 요한복음 4강 메시지 제목이 무엇이었죠? "인자도 들려야 하리라."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에 들려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복음서에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십자가에 달리실 것을 여러 번 말씀하셨습니다(마17:22, 20:18, 26:2, 막8:31, 9:31, 10:33.... )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해 당시 가장 잔인한 처형 방법인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죄는 우리가 지었지만 죄 없으신 예수님이 대신 죽으심으로 우리의 죗값을 치르신 것입니다. 로마서 3:23a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다고 선언합니다. 'All have sinned.’ 여러분과 저를 포함한 모든 사람이 다 죄를 범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 결과 모두 다 사망에 이르게 되었습니다(롬 6:23a). 죽음은 모든 것을 앗아갑니다. 죽음 앞에서는 우리가 이루는 모든 것, 누리는 모든 것 다 무의미합니다. 어차피 죽으면 끝인데 하는 허무주의에 시달립니다. 저도 캠퍼스에 입학했을 때 화창한 봄날인데도 인생의 허무에 시달렸습니다. 늘 검정 우산을 받쳐 들고 다녔습니다. 우리나라는 먹고 마시고 정욕을 즐기는 향락문화가 도처에 퍼져있습니다. 그래서 음란공화국이라고 말하기까지 합니다 이런 향락주의의 뿌리에는 죽으면 다 끝이라는 허무주의가 있습니다. 부활의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나의 삶이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생각은 우리를 늘 불안하게 만듭니다. 실로 내일을 알지 못하는 인생은 눈을 가리고 낭떠러지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는 위태로운 삶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죽음에 필사적으로 저항하며 그 해결책을 찾고자 수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그러나 노예로 팔린 사람이 스스로를 자유롭게 할 수 없듯이 죄에 팔린 우리 인생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여기 기쁜 소식이 있습니다! 진정한 유앙겔리온이 있습니다! 이는 바로 하나님께서 인생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구원의 길을 여신 것입니다. 죄 없으신 그의 아들을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보내셔서 십자가에 달리게 하신 것입니다. 그를 믿는 자마다 죄 문제를 해결 받고 영생을 얻게 하신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실입니까!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대속의 죽음은 갑자가 어쩌다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성경대로, 곧 구약에 수없이 예언된 대로 일어난 사건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성경대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되셨나요? 4a절입니다.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장사 지냈다는 것이 무슨 말이죠? 정말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예수님이 가사(假死)상태에 있으셨던 것이 아니라 완전히 죽은 상태가 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되셨습니까? 4b절,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손과 발에 못 자국이 있는 그 몸이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완전히 죽었던 그 분이 완전히 살아 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야이로의 딸이나 나사로가 잠시 살아났다가 다시 죽은 그런 부활과는 다릅니다. 예수님은 다시는 죽음을 맛보지 않는 영원히 사는 몸으로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이는 인류 역사상 처음 일어나 사건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누구에게 자신을 보이셨습니까? 5-8절입니다.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부활하신 주님은 게바와 열두 제자에게 보이셨습니다. 또한 오백 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이 편지가 쓰여진 AD55 년경에 아직 살아있었습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의 부활은 몇몇 사람들에게만 알려진 것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목격한, 아무도 반박할 수 없는 공공연한 사실이었던 것입니다. 7절을 보면 예수님의 친동생 야고보에게도 보이셨습니다. 요한복음 7:5절을 보면 예수님의 친 형제들도 예수님을 믿지 않았었다고 말합니다. 그런 야고보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같이 자랐기 때문에 예수님의 인상착의에 정통하였을 것입니다. 아무리 비슷한 사람이 변장을 해도 그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확신한 야고보는 완전히 변화되어 에루살렘 교회의 최고 지도자인 총회장이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박해자 바울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가장 잔인한 박해자였던 바울이 가장 적극적인 복음 전파자가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가 예수님의 부활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증인들의 삶이 우리에게 말하는 바는 그리스도의 부활은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에는 어떤 사람들이 생겨났습니까? 12절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그런데 12절을 잘 보면,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무슨 주장을 하는 것이죠? ‘죽은 자 가운데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곧, 사람이 한번 죽으면 끝이지 어떻게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느냐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들에게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어떤 결과가 초래되는가를 말합니다. 13절을 보십시오.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 죽은 자의 부활의 없다면 그리스도의 부활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도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셨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부활이 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의 부활이 없다면 어떻게 됩니까? 복음 전하는 자의 삶이 헛것이 됩니다. 우리가 전하는 것도 헛것이요, 믿음도 헛것입니다(14). 또 복음 전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거짓 증인이 됩니다(15).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살리셨다는 거짓말을 전파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복음을 영접한 신자들의 삶이 헛것이 됩니다. 17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한 가지 의문이 듭니다. 예수님의 죽으심, 그의 피 흘리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가 다 사해진 것이 아닌가요? 예, 맞습니다. 어린 양되신 예수님이 피 흘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해졌습니다. 그런데 왜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첫째, 그가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그가 과연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신 것인지 확인이 안 됩니다. 그가 그리스도이신 것이 증명이 안 되고 우리는 우리의 죄 사함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이 믿음이 없으면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부활시키신 것은 그가 무죄한 분이시요 그의 부활은 그가 바로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이 증명되는 것입니다. 둘째, 그의 부활은 사망을 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딤후1:10). 부활하사 사망의 세력을 없이 하심으로 우리는 이제 다시는 죄와 사망의 권세 아래서 범죄하지 않고 승리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18,19절을 보십시오.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부활이 없다면 내세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은 이 시대에 가장 불쌍한 자들입니다. 그러나 지난 2천년의 인류 역사를 보십시오. 예수님의 부활은 그를 버리고 도망갔던 12제자들을 변화시켰습니다. 그들은 모두 자기 목숨을 버리기까지 부활을 증거하였습니다. 역사상 바울을 비롯한 수많은 박해자들을 회심시켰습니다. 로마시대 잔인한 박해 가운데서도 신자들은 기쁨으로 원형 경기장에서 맹수들의 밥이 되었습니다. 기독교 역사는 서양의 역사요 세계의 주류 역사입니다. 오늘날에도 20억에 가까운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습니다. 거짓이 몇 년, 몇 십 년 동안 사람을 속일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2,000년간 세계를 변화시키는 그 막강한 힘은 거짓에서 결코 나올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진실입니다. 이루어지리라 예언된 진리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사는 여러분과 제가 불쌍한 사람이 아니라 가장 복된 사람들인 것을 믿습니다.
20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바울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잠자는 자들’이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을 의미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부활의 첫 열매이십니다. 저는 서울 사람이라 농사에 대해 잘 몰라서 농사를 아시는 분에게 첫 열매에 대해 여쭈어보니 이렇게 알려주시더군요. 대가 사과나 포도나 귤나무는 묘목을 심은 후 3,4년 후 첫 열매를 맺습니다. 3년 만에 첫 열매 맺는 나무를 3년생, 4년 만에 맺는 것은 4년생 나무라고 합니다. 배나 감, 대추는 대부분 4년생 나무입니다. 그런데 이런 나무들의 공통점은 첫 열매를 맺기 전까지는 꽃도 안 피고 아무런 반응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3,4년이 되면 첫 열매가 맺힙니다. 일단 첫 열매를 맺으면 그 다음 해 부터는 매해 빠짐없이 열매를 맺습니다. 그래서 농부들은 묘목을 심고 3,4년 동안 첫 열매가 나기를 간절히 기다립니다. 첫 열매가 열리면 “야, 이제 매년 열매를 맺게 되는구나!”하며 기뻐합니다. 첫 열매는 그 다음에 계속 열매가 나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민수기 18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곡식의 첫 소산을 하나님께 드리도록 하셨습니다. 첫 소산을 제사장에게 가져오면 제사장은 그것을 두 손으로 높이 들어 위 아래로(거제), 또 좌우로(요제)흔듭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첫 소산으로 주신 것인데, 이제 계속 수확이 이루어질 것이니 기뻐하라는 의미였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신자들의 부활의 첫 열매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부활의 보장이십니다. 은행에서 현금대신 자기앞수표를 주듯, 예수님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부활의 보증수표와 같습니다. 우리의 부활의 보증이 되시는 부활의 첫 열매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21절을 보십시오.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온 세상에 사망이 임했습니다. 이제 부활의 첫 열매되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 있는 모든 자들이 부활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22절은 위대한 해방선언입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저는 최근 두 번의 장례식에 참석하였습니다. 한 분은 86세의 여자 분이었고 다른 한 분은 61세의 남자 분이었습니다. 날 때는 순서가 있는데 갈 때는 순서가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옵니다. 아담의 후손인 우리에게 죽음이 임하게 될 것은 얼마나 확실합니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가 부활하게 된다는 것은 그 만큼 확실합니다! 우리는 과거에 아담 안에서 죽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부활하신 예수님 안에서 부활과 영생을 얻게 되었습니다! 장차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공중에서 큰 나팔 소리가 들릴 것입니다. "너희 죽은 자들아 무덤에서 나오라"는 호령이 날 것입니다. 그때는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 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 줍니다(계20:13). 그를 믿는 자들은 순식간에 영광스런 몸으로 변화합니다. 이러한 부활의 역사에는 순서가 있습니다. 23,24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 그 후에는 마지막이니 그가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첫 열매인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부활하셨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그가 재림하실 때 그에게 붙은 우리 신자들의 부활입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그날에 그를 믿는 모든 자들은 부활하여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고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참예하게 될 것입니다. 그 후에는 세상의 종말이 옵니다. 25,26절을 보십시오. “그가 모든 원수를 그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반드시 왕 노릇 하시리니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주님께서 재림하신 후 모든 원수를 그 발아래 둘 때까지 왕 노릇하십니다. 우리 신자들도 주와 함께 왕 노릇합니다. 맨 나중에 멸망받을 인류의 원수가 무엇입니까? 사망입니다. 세상에 원수들이 많지만 사망만큼 인간을 처참하게 하는 원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기 전까지 죽음은 모든 인생들에게 왕 노릇했습니다. 죽음이 문을 두드릴 때 아무도 대항할 수 없었습니다. 천하를 호령하던 영웅호걸이나 황제나 왕이나 모두 죽음 권세 앞에는 무릎을 꿇었습니다. 또 죽음의 권세는 잔인합니다. 젖먹이 자식을 어머니의 품에서 빼앗아 가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남편이나 아내를 졸지에 데려가기도 합니다. 사망권세는 인간을 허무하게 만들고 운명주의자가 되게 합니다. 두렵게 하고 마귀의 종이 되게 합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그 날에 인류의 철천지 원수인 사망을 멸하십니다. 사망을 불과 유황으로 타는 영원한 못에 던지십니다(계 20:10,14). 예수님께서는 사망 권세를 파하신 후에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치십니다. 그날에는 창조의 질서가 완전히 회복됩니다.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께 복종하며, 하나님의 완전한 통치가 이루어집니다. 그 날에 우리는 죽음의 권세에서 완전히 해방을 받게 되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러한 완전한 소망, 완전한 승리를 주시는 부활의 주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그러면 이러한 분명한 부활신앙과 역사의식을 가진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31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사도 바울은 주와 복음을 위해 날마다 죽는 삶을 살았습니다. 부활신앙이 있는 그에게는 이 땅에서 잘 살거나 오래 사는 것이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맡겨주신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완수하는 것만이 중요했습니다(행20:24).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는 것이 가장 고귀한 일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32절을 보십시오. "내가 사람의 방법으로 에베소에서 맹수로 더불어 싸웠다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바울은 당대의 지성인이었습니다.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이 땅의 즐거움을 기꺼이 포기할 뿐 아니라 모든 고난을 마다하지 않고 주님의 일에 온전히 자신을 드린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단 가지입니다. 자신의 부활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33,34절을 보십시오.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속지 말라"(KJV: 'Be not deceived', NIV : 'Do not be misled')고 합니다. 세상은 우리를 속입니다. 산들 산들 봄바람을 타고 우리의 마음을 파고듭니다. 멋지게 포장된 책을 통해, 유명한 선생의 강의를 통해, 친구들의 애틋한 말을 통해 우리를 속입니다. 그 속이는 말은 "죽으면 다 끝이야, 여기 사는 동안 먹고 마시고 즐겨. 머니 머니해도 머니가 최고야. 열심히 돈을 벌어. 남자는 이러 이러한 남자가 최고고 여자는 이러 이러한 여자가 최고야. 인생 뭐 있어.." 이런 사상을 아주 조용하게 은밀하게 깊이 심습니다. 그러면 우리 눈이 풀리고 갑자기 세상의 것들이 멋지게 보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의 말에 넘어가지 말라고 합니다. 악한 동무들은 이마에 "나는 악한 동무"라고 써 붙이고 다니지 않습니다. 아주 친근하게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그래서 깨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깨어 있을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고 하신 적이 있습니다(마26:41). 또한 하나님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시119:105)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주의 깊게 배우며 기도할 때 우리는 속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부활의 생명을 가진 것을 알게 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은 우리가 하늘나라에 가면 할 수 없고 이 땅에서만 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유혹과 시험에도 불구하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함으로 하나님께 대한 진정한 사랑을 나타내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죽어가는 생명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유혹이 많은 봄 학기 캠퍼스를 누비며 복음을 전하고 학생들을 Bible Cafe에 초청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부활의 생명을 얻어 영원에 잇댄 우리가 짧은 인생을 살아가며 이 땅에서 할 수 있는 정말로 가치 있는 일입니다. 악한 동무들은 우리로 죄를 짓게 하지만 우리는 속지 말고 깨어 의를 행하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우리를 위한 부활의 길을 활짝 여셨습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습니다. 우리는 악한 동무들에게 속지 말아야겠습니다. 부활생명의 확신 가운데 더욱 기쁨으로 주의 일에 힘쓰는 자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부활의 첫 열매 예수님께 감사와 찬양을 돌려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