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부활절 특강 제 2 강 부활의 영광과 승리 말씀 고린도전서 15:35-58 요절 고린도전서 15:57,58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뭐든지 맹신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맹신할 때 오래가지 못하고 날카로운 지적을 받으면 무너집니다. 부활신앙은 콘크리이트처럼 단단하고 견고해야 합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부활이 없다하는 이들을 어리석다고 하며 부활의 필연성을 가르치고 더 나아가 부활의 영광과 승리를 노래합니다. 본문을 통해서 부활신앙위에 굳게 서서 흔들림없이 그 영광과 승리를 향해 나아가기를 기도합니다.
35절을 보십시오.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이 질문은 부활에 대한 궁금증에서 나온 진지한 질문이 아닙니다. 부활이 불가능하며 불합리하다는 의미로 비아냥대는 말입니다. “부활이 실화냐?” 그런 말입니다. 왜 그들은 부활을 믿는 것을 어리석게 여겼을 까요? 첫째로 부활은 불가능하기에 어리석다고 생각했습니다. 죽음의 강은 넘사벽 입니다. 그래서 부활이란 태평양을 다시 헤엄쳐 오는 처럼 불가능해 보입니다. 혹 죽었다고 생각한 사람이 몇 시간 후에, 며칠 안에 살았다는 말은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몇 달 전에, 몇 년 전에, 심지어 수 백 년 전에, 수천 년 전에 죽은 사람도 부활한다니 믿기에 힘듭니다. 제가 가족묘 이장하면서 저의 증조할아버지의 뼈를 보았습니다. 이런 분이 다시 살아난다고 믿는 것이 부활신앙이구나 생각하니 내가 가진 부활신앙을 점검하게 되었습니다. 요새는 화장을 많이 하기 때문에 더더욱 부활은 불가능하게 보입니다. 이런 면에서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생각이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창조를 믿는다면 부활의 역사를 못 믿을 것은 없습니다. 창조는 아무것도 없는 무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에 비하면 부활은 그래도 재료가 이미 있는 상태에서 이루어지지 않습니까? 화장한 경우도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아이슈타인은 E=MC2 공식을 통해서 질량은 에너지로 바뀌어 우주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창조는 아무것도 없는 데서 되어지지만 부활은 어딘가에 있는 재료에 기초해서 재창조되는 것이기에 오히려 쉽습니다. 어떤 분은 창조는 믿지만 부활은 못믿겠다고 하는 분이 있는데 일관성 없는 이상한 논리입니다.
두 번째로 부활이 현재 삶의 반복이기에 불합리하다고 보았습니다. 당시 근동과 로마지배의 세계에는 헬라의 이원론이 퍼져있었습니다. 이원론에서 육체나 물질은 악하고 나쁜 것입니다. 그들은 육체를 영혼의 무덤으로 보았고 반면에 죽음은 참된 자유와 해방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전한 복음은 그런 영혼이 육체를 다시 덧입는다고 하니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우리들 가운데도 나의 몸이 다시 부활한다고 생각하면 거부하고 싶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신체에 콤플렉스나 장애를 가진 경우에 그렇습니다. 또 다시 병들고 죽을 텐데 하며, 이런 삶은 한번이면 족하다며 부활을 부정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들의 주장에 대해서 “정말 타당하고 합리적인 주장이네요” “그 말 듣고 보니 나도 확신이 없어지네요”라고 대답하였습니까? 36a 절 보십시오. 바울은 몸의 부활을 부정하는 주장에 대해서 곧 바로 “어리석은 자”라고 반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 만큼 몸의 부활에 대한 분명한 확신과 체계와 논리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면 바울은 타당해 보이는 그들의 주장을 어떻게 반박합니까? 첫째로 죽음은 부활의 장애가 아닙니다. 36절을 보십시오. “어리석은 자여 네가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부활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죽음을 부활을 가로막는 커다란 장애물로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씨의 비유를 통해서 오히려 죽음이야말로 부활을 가져오는 전제조건이라고 말합니다. 씨는 장래형체를 가져오는데 있어서 ‘죽음’이라는 과정을 필요로 합니다. 씨의 죽음은 배젖이 분해되면서 배에게 양분을 전이하는 작업입니다. 그러니까 죽음은 ‘멸절’이 아니라 ‘해체’이며 새로운 존재로 존재양식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죽음은 부활의 장애가 아니라 필수조건이며 그로 인해서 부활의 영광이 더 드러납니다. 죽음은 씨를 심는 것이라 했으니 우리가 앞으로 무덤에 묻히는 분들을 보면, “아 부활의 씨앗이 심겨지는 구나!” 이렇게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두 번째로 몸의 부활이 현재 삶의 반복이라는 견해에 대한 바울의 답입니다. 37,38절을 보십시오. “또 네가 뿌리는 것은 장래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맹이 뿐이로되 하나님이 그 뜻대로 그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 이제 바울은 우리가 어떤 형체로 부활하는 가를 말씀합니다. 밀이나 다른 식물의 알맹이가 땅에 심겨집니다. 씨는 작고 보잘것없습니다. 그러나 그 씨가 어떻게 바뀝니까? 그 씨와 비교가 안되는 장래형체로 다시 태어납니다. 그 장래형체는 씨에 비해서 너무나 크고 아름답고 찬란합니다. 하나님은 죽은 씨앗에게 새 삶에 알맞은 적절한 형체를 주십니다. 인간의 부활의 몸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각자에게 현재의 몸과 비교하여 그 아름다움과 그 기능과 퀄리티 면에서 비교불가의 새 몸을 주십니다. . 우리가 이시간 하나님이 창조시에 각 피조물에게 이 세상에서 살기에 가장 합당한 몸을 주신 것을 생각하면서 재창조인 부활의 몸에 대해서 정리해 보겠습니다. 39-41절을 읽어 봅시다.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나는 새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의 육체라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사람의 육체는 사람이 이 세상을 살기에 가장 적절한 형체로 주어졌습니다. 짐승의 육체도, 새의 육체도 그러합니다. 탈무드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태초에 새들이 창조주에게 가서 항의를 했습니다. “왜 우리에게는 두 손 대신에 어깨 양쪽에 거추장스런 두 짐을 붙여 주셨습니까?” 창조주가 그들에게 대답했습니다. “그것은 짐이 아니라 날개라고 한다. 너희는 그것으로 창공을 훨훨 날아다니게 될 것이다” 물고기에게는 물에서 잘 살 수 있도록 아가미, 부레, 지느러미, 비늘을 주셨습니다. 부레 같은 경우는 공기주머니로 공기의 양으로 뜨고 가라앉는 것을 조정하는 기관입니다. 물고기는 아가미와 부레와 지느러미로 높낮이와 방향을 결정하면서 물속을 헤엄쳐 다닙니다. 너무나 적절한 기관들을 가지고 있기에 그들의 움직임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자유스럽습니다. 정말로 하나님은 물고기에 가장 합당한 몸을 주셨습니다. 새에게는 창공을 날아 다니기에 합당한 날개를 주셨습니다. 우주에는 해와 달과 별들이 있습니다. 제 각각 위치에서 가장 합당한 크기와 중력과 빛을 가지고 운행하고 있습니다. 이 우주에 1000억 개 ☓ 1000억 개의 별들이 있는데 하나님은 그 모든 별들에게 각자에게 알맞은 영광을 주셨습니다. 이상의 내용은 무엇을 말합니까? 창조 시에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와 피조물들에게 이 세상을 누리기에 가장 적절한 형체를 갖게 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부활의 몸도 그처럼 합당하게 재창조하여 주실 것을 믿으라는 메시지입니다. 바울은 이어서 우리가 어떤 몸을 덧입을 것인지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합니다. 42,43절입니다.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첫째로 썩지 아니할 몸으로 다시 삽니다. 현재의 몸은 썩을 몸입니다. 썩을 몸이기 때문에 우리 몸은 노화됩니다. 40대 초반이 되면 노안이 찾아옵니다. 50대가 되면 피부가 쭈글쭈글해지고 쳐집니다. 흰머리도 납니다. 몸이 썩어가다가 결국 죽습니다. 썩을 놈, 썩을 여자 분이라는 말이 정말 맞습니다. 노화와 죽음은 우리에게 큰 스트레스를 줍니다. 그러나 다시 덧입을 부활의 몸은 이런 썩음이 없습니다. 노화가 없고 죽음이 없습니다. 죽지 않게 되다니 우리가 얼마나 담대하고 자유로울까요?
둘째로 영광스런 몸으로 다시 삽니다. 현재의 몸은 욕된 몸입니다. 욕되다는 것은 우리 몸이 죄성을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죄성은 우리를 때마다 비참하게 만듭니다. 거룩하고 깨끗하게 살고 싶지만 죄의 소욕에 시달리게 합니다. 결심하지만 어느 순간에 이미 거기에 붙들려 있습니다. 사도바울과 같이 위대한 하나님의 종도 이런 죄의 소욕에 끌려 다니는 자신을 보며 탄식했습니다.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롬 7:24) 죄의 소욕은 우리를 부끄럽고 비참하게 만듭니다. 어떤 사람은 너무나 자신이 욕되게 느껴져서 그만 목숨을 끊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날에는 더 이상 죄의 소욕에 시달리지 않는 몸을 가지게 됩니다. 죄로부터 자유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그것은 마치 거미줄에 걸렸던 나비가 훨훨 나는 것같은 자유함일 것입니다. 셋째로 강한 몸으로 다시 삽니다. 약한 몸은 병들기 쉬운 몸을 말합니다. 사람은 강한 척해도 실상은 약한 존재입니다. 한 태권도 사범은 자신의 강함을 믿고 아프리카에서 말라리아 약도 먹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결국 말라리아 한방에 죽고 말았습니다. 사람은 독감만 걸려도 거의 죽을 것같은 고통을 겪습니다. 사람이 얼마나 약한 지, 병원에 가면 항상 병원주차장은 만차입니다. 인간은 수많은 종류의 크고 작은 질병으로 고생합니다. 우리 한 자매님은 지난주에 알 수 없는 두통으로 입원했는데 검사를 위해 피를 뽑는데 무려 6번이나 주사를 꽂았습니다. 마지막 6번째는 손등에 꽂았는데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그만 뜨거운 눈물을 흘렸습니다. 저도 어머니 간호할 때 병원에 갈 때 마다 피를 뽑기 위해 주사바늘을 꽂는 것이 너무 마음이 아팠습니다. 병원심방갔을 때 한분은 주사바늘을 6개를 꽂고 7개월 이상 누워 계셨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모두 병들거나 병들 가능성이 있어 마음이 아프고 괴롭고 불안합니다. 그러나 부활의 날에 우리의 몸은 더 이상 병들지 않는 몸을 갖게 됩니다. 그러니 새 하늘과 새 땅에는 병원이 사라지고 의대가 사라질 것입니다. 의사 목자님들은 모두 실업자가 됩니다. 참고로 부활의 날에는 의사뿐 아니라 검사, 경찰, 교도소, 병원, 군대 등이 사라질 것입니다. 44절을 보십시오.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 ” 현재의 몸은 한마디로 ‘육의 몸’입니다. 영어성경에는 ‘natural body’(자연의 몸)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몸이 부활의 날에 ‘신령한 몸’(spiritual body)로 부활합니니다. 신령한 몸이란 위에서 말한 ‘썩지않고 영광스럽고 강한 몸’을 말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이런 반문을 합니다. 우리가 죽어서 영혼이 그대로 천국에서 살면 안됩니까? 복잡하게 부활의 과정을 거쳐야 하나요? 그 답은 하나님이 정하신 인간의 존재양식은 반드시 몸을 가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 몸을 가지고 있기에 우리가 누리는 즐거움과 기쁨이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인간은 반드시 다시 몸을 덧입어야 하는데 현재의 몸과 다른 ‘영의 몸’을 덧입습니다. 어떤 학자는 그 신령한 몸을 ‘비물질적인 물질’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45-49절은 신령한 몸에 대한 보충설명입니다. 창세기 2:7b을 보면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습니다. 생령이란 살아있는 영적 존재라는 뜻입니다. 반면에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습니다. 아담은 자신의 생명만 유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을 살려내는 분이십니다. 첫 사람 아담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였습니다. 그러나 둘째 사람인 예수님은 하늘에서 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증명되었습니다. 우리가 아담에게만 속했다면 우리는 이 지상에 합당한 몸만을 덧입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부활의 주님께 속하였기에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 곧 부활의 몸을 덧입을 것입니다. 이상에서 바울은 왜 부활은 가능한지, 어떤 몸으로 부활할 것인지 설명했습니다. 50-58절은 부활을 확신하는 바울과 죽음에 대한 바울의 승리의 찬가, 그리고 당부의 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50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바울은 우리가 반드시 부활의 새 몸을 입어야 할 이유를 말씀합니다. 혈과 육은 우리의 현재의 몸을 의미합니다. 이 육의 몸으로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장차 들어가게 될 하나님의 나라의 나라는 현재의 하늘과 땅과 다릅니다. 그러니 현재의 몸을 가지고 들어갈 수 없는 것은 당연하고 혹 들어가더라도 그 나라를 누릴 수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물고기가 하늘을 나는 것과 같고 새가 물속을 헤엄치는 것처럼 부적절하고 불가능합니다. 때문에 우리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걸맞은 불멸의 몸을 필연적으로 덧입을 것입니다. 51절을 보십시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바울은 모두가 주목해야 할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울이 연구한 것이 아니고 주의 말씀이라고 데살로니가 전서 4:15절에 되어 있습니다.(마 24:31) 그럼 온 인류가 관심갖고 주목해야 할 하나님의 계시가 무엇입니까? 일순간에 죽은 자들이 다 살아나고 산 자들이 변화되는 우주적 사건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 우주적 사건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먼저,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납니다. 죽음은 잠과 같습니다. 우리가 잠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반드시 깨어나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우리 살아있는 자들도 신령한 몸으로 변화됩니다. 죽지 않고 살아서 변화되는 사람들은 죽음의 고통을 겪지 않으니 이게 최고입니다!! 이렇게 불멸의 몸을 덧입는 그 순간이 우리가 바라봐야 할 최대 관심사요 소망입니다. 그러면, 언제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마지막 나팔소리가 울려퍼질 때입니다. 데살로니가 전서 4:16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인류역사의 마지막을 알리는 나팔소리가 납니다. 빰빠라빰, 빰빠라빰~ 그때 죽은 신자들의 다시 살아나고 살아있는 이들이 변화되는 그 놀라운 사건이 순식간에 일어납니다. 여기서 순식간에 라는 말은 ‘눈 깜짝할 사이’라는 말인데 과학자들은 눈 깜짝할 사이는 0.04초라고 합니다. 원어로는 ‘아토모스’ 란 말로 더 이상 쪼개질 수 없는 시간단위를 말하는 데, 현재 가장 짧은 시간단위는 소수점 아래 열여덟번째 자리에 1이 오는 아토초로서 100경분의 1입니다. 주님이 재림할 때 회개할려고 하는 분들이 있는데 쉽지 않음을 아셔야 하겠습니다. 53절을 보십시오.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바울은 ‘반드시’ ‘must’ 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위의 논리로 볼 때 우리가 불멸의 몸을 덧입는 것은 필연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일입니다. 54절을 보십시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우리가 불멸의 몸을 덧입을 때 이사야 25:8절에 기록된 말씀이 성취됩니다.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자기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이 날은 어떤 날입니까? 인류의 대적, 인류의 원수 사망이 없어지는 날입니다. 사망은 지금껏 인류위에 왕노릇하면서 인류를 지배해 왔습니다. 우리들의 눈에서 피눈물이 나게 하며 우리를 근본적으로 슬픔의 종이 되게 하였습니다. 이런 사망의 지배하에 있는 우리 인생에게는 진정한 행복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죽음의 세력을 누구도 대항할 수 없었습니다. 영웅호걸도 두손두발 들고 아무 말도 못하고 끌려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잔인한 독재자 사망이 그 날에 없어집니다. 이것을 생각할 때 사도바울은 감격하여 외칩니다. 55절을 보십시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바울은 사망의 무력함을 비웃고 사망에 대한 우리의 승리와 자유를 선언하고 있습니다. 사망에 대한 이 승리의 선언은 그날에만 외칠 것이 아닙니다. 물론 부활의 그날에 우리가 참 자유와 해방을 온전히 누릴 것이지만 지금도 누립니다. 믿음으로 누립니다. 우리가 죽긴 죽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잠에 불과하고 반드시 부활합니다. 이것을 믿으면 우리에게 죽음은 더 이상 큰 의미가 없습니다. 죽음은 부활을 믿는 우리에게 발톱 빠진 호랑이입니다. 아니 종이 호랑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도 이렇게 외칠 수 있습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있느냐” 부활신앙을 가진 우리는 죽기를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죽음을 두팔 벌려 환영합니다. 요한웨슬리는 “모든 것중에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안녕히, 안녕히”라는 말을 남기고 기대감가운데 하나님께로 갔습니다. 구드윈이라는 사람은 “아, 이것이 죽음인가? 나는 얼마나 미소짓는 친구를 적으로 두려워해 왔던 가!” 라고 말한 후 평안히 죽었습니다. 에베레트는 “영광!, 영광!, 영광!” 이 말을 25분간 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처럼 분명한 부활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 죽음은 두려움이 아니라 영광이었습니다. 56절을 보십시오.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사망은 우리에게 독침을 날렸습니다. 그것은 죄의 독침입니다. 사망은 우리에게 허무주의, 쾌락주의 독침을 날렸습니다. 우리는 허무한 인생, 죄나 짓자 하며 수많은 죄들을 지었습니다. 그러나 죄는 달콤하고 만만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권능이 있습니다. 죄의 권능은 율법입니다. 사람에게는 성문, 불문 율법이 있습니다. 그래서 죄를 지으면 정죄의식, 수치심, 자괴감, 심판에 대한 두려움에 시달립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죄에 대해서도 승리를 선언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57,58절을 보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부활의 첫 열매 예수님으로 인해 우리는 죽음에 대해서, 죄에 대해서 승리자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삶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부활의 날 평가와 심판이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죄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종종 우리에게 주안에서 하는 수고가 헛되게 느껴집니다.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성과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평가의 기준은 내가 정한 때나, 이 땅에서 어느 시점이 아닙니다. 부활의 그날입니다. 그 날에 나의 수고에 대해 주님으로부터 온전한 평가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나의 수고에 대한 보상이 없어도 흔들리지 않고 주의 일에 힘쓸 수 있습니다. 결론입니다. 우리가 부활에 대한 견고한 믿음가운데 그 영광과 승리를 바라보며 죄에 흔들리지 않고, 주의 일에 더욱 힘쓰기를 기도합니다. 자기 일만 힘쓰지 않고 주의 일에 더 힘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