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요한복음 5강
내가 그라
말씀/ 요한복음 4:1-42 요절/ 요한복음 4:25,26
“여자가 이르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로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
요즘 날씨가 갑작스럽게 더워졌습니다. 잠시 후 여름이 되면 사람들은 타는 목마름을 자주 느끼게 될 것입니다. 더운 여름철에 목마름을 심하게 느끼는 우리 몸과 달리 우리의 영혼은 항상 목이 마릅니다. 오늘 말씀은 이러한 목마름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원인과 그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인생의 목마름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받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제자를 삼고 세례를 베푸시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께서 아신지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날로 늘어가고 예수님으로부터 세례받는 수가 요한보다 많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백성들의 인기는 곧 정치적 영향력을 의미합니다. 과거 안철수 씨의 인기가 높아지자 한순간에 대선 후보 직전에까지 이른 적이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백성들의 인기를 등에 업고 곧 정치 무대에 등장하지 않을까 바싹 긴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정치를 하기 위함이 아니라 한 영혼을 만나 그의 인생 문제를 도와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정치 1번지인 예루살렘을 떠나 한적한 시골 갈릴리로 가고자 방향을 잡으셨습니다.
3-4절을 보십시오.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 그러나 예수님께서 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가실 때 한 가지 심각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 중간에 사마리아가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과거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한 뒤 앗수르의 혼혈정책으로 인해 반은 이스라엘 사람이었으나 반은 외국인인 혼혈아들이었습니다. 포로로 사로잡혀갔던 유대인들이 다시 돌아왔을 때 이들을 가장 괴롭혔던 이들이 외국인이 아닌 그래도 절반은 같은 동포인 사마리아 사람들이었습니다.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1세기 중엽 사마리아 사람들은 로마 총독에게 유대인들을 처벌해달라고 탄원한 적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런 사마리아 사람들을 외국인보다 더 미워하고 경멸했습니다. 당시 북쪽의 갈릴리에 남유대에서 이주해간 유대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는데 이 갈릴리 지역으로 갈 때에는 사마리아를 피해 요단강을 건너 우회하는 길을 택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다시 한 번 4절을 보십시오.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 통과하여야 하겠다는 것은 영어성경에 Now he had to go through Samaria로서 반드시 사마리아를 통과해 가야만 하겠다는 예수님의 강한 의지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하나님은 유대인들 뿐 아니라 사마리아 사람들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5-6절을 보십시오.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여섯 시쯤 되었더라” 마침내 예수님은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는 동네에 이르셨습니다. 그곳에는 그 옛날 야곱이 팠던 한 우물이 있었습니다. 한 목자님은 아프리카로 가는 길에 잠시 중동 지역을 경유하게 되었습니다. 잠간 공항 밖으로 나왔는데 사우나탕에 들어간 것과 똑같은 느낌을 받았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우나탕같은 중동의 뜨거운 뙤약볕 아래 예루살렘으로부터 약 55km를 걸어오셨습니다. 인간의 몸을 입으신 예수님은 온 몸이 탈진할 정도로 지치고 피곤하고 목이 마른 상태였습니다. 예수님은 우물 곁에 그대로 털썩 주저앉으셨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이때였습니다. 한 사마리아 여자가 예수님 계신 곳으로 물을 긷기 위해 다가오는 것이 아닙니까! 6절을 보면 그 때 시간이 여섯 시 곧 정오였습니다. 그 시간은 너무 더워 여인들이 물을 길러 올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더더군다나 가는 길에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르는 외진 곳에 여러 여인들과 함께 오지 않고 혼자 물을 길러 왔습니다. 무언가 범상치 않은 사연을 가진 여인임에 분명했습니다. 8절을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먹을 것을 사러 동네에 들어가고 아무도 없었습니다. 지금 현장에는 범상치 않은 포스를 내뿜는 여인과 예수님 단 둘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기준으로 보아도 이런 여자와 잘못 엮이면 큰 곤경을 당할 수 있으므로 말을 걸지 않는 것은 당연하고 눈빛도 마주치지 않도록 조심 또 조심하는 것이 상책입니다. 여인은 낯선 남자가 우물가에 앉아있는 것을 보고 흠칫 놀란 후 모른척하고 물 길을 준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였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물을 좀 마실 수 있을까요?” “Will you give me a drink?”
9절을 보십시오.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 탈무드 기록에 보면 당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여자는 요람에서부터 부정(unclean)하다고 여겼습니다. 이런 정황을 잘 알고 있는 여자는 낯선 유대인 남자가 당연히 자기를 못본척 무시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유대인 남자가 자기에게 말을 걸어오는 것에 화들짝 놀랐습니다. 여자는 쏘아붙이듯 말하였습니다.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말은 하지 않았지만 다분히 “혹시 수작부리는거 아니야?” 하는 뉘앙스가 있었습니다. 보통 여자가 이렇게 나오면 매우 기분이 나쁘고 화가 나서 성깔있는 사람이라면 대노하여 그녀의 무례함을 큰 소리로 책망했을 것입니다. 참을성이 많은 사람이라면 ‘아, 내가 뭐 밟았구나’ 생각하고 그녀가 사라질 때까지 눈을 지긋이 감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10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예수님은 무례한 그녀를 책망하거나 화를 내는 대신 그에게 줄 하나님의 선물이 있으며 구한다면 그 선물인 생수를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생수는 영어로 living water로서 살아있는 물을 가리킵니다. 당시 물이 귀한 중동 지역에서는 비가 전혀 오지 않는 건기를 대비하여 물이 새지 않는 웅덩이를 만들어 우기 때 비를 받아 물을 저장해 두었습니다. 하지만 이 물은 오랜기간 묵힌 물로 식수로 사용하기에는 부적합하고 주로 농사 용도로 사용되었습니다. 만약 이런 물을 마신다면 당장 배탈이 나거나 잘못하면 콜레라 같은 병에 걸릴 위험이 있었습니다. 이에 비해 생수는 땅속 깊은 곳에서 흐르는 지하수로부터 끌어올린 물로 피곤함과 더위에 지친 여행객에게 생명을 주는 것같은 시원함과 목마름의 해갈, 또 기쁨을 줍니다. 예수님은 여인이 만약 구한다면 하나님의 선물인 생수를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11-12절을 보십시오. “여자가 이르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예수님의 말씀에 여자는 “아 그렇습니까? 그러면 저에게도 그 생수를 선물로 주실 수 있으신가요?” 라고 말해야 마땅했습니다. 그런데 여자는 또다시 쏘아붙였습니다. 11절에서 주여라는 말은 영어성경에 Sir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존칭의 의미라기보다는 다소 비아냥거리는 의미입니다. “선생 양반, 보아하니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13-14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보통 남자들은 여자가 자신을 다른 남자와 비교하여 무시하면 자존심이 크게 상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화를 내는 대신 오히려 보배로운 생명의 말씀을 여인에게 주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이 물이란 1차적으로는 여인이 긷고자 하는 야곱의 우물에서 나오는 물을 의미합니다. 야곱의 우물에서 나오는 물을 마시는 자는 곧 다시 목마르게 됩니다. 그래서 또 우물에 물을 길으러 와야 합니다. 이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에는 그런 당연한 사실을 넘어 깊은 영적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이 말씀은 인간의 몸이 70%의 물로 이루어져 있고 때마다 물을 몸에 적절히 공급해주지 않으면 심한 갈증을 느끼고 마지막에는 죽음에 이르는 것처럼 인간의 영혼에도 채워주지 않으면 도저히 살아갈 수 없는 타는 듯한 영혼의 목마름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인간의 영혼에는 어떤 목마름이 있습니까? 먼저 사랑에 대한 목마름이 있습니다. 특히 청년들은 이성의 사랑에 대한 타는 듯한 목마름이 있습니다. 뜨거운 사막을 여행하는 여행객이 당장 물을 마셔주지 않으면 죽을 것 같은 타는 목마름으로 고통하는 것처럼 청년들은 이성의 사랑이 주는 물을 마셔주지 않으면 살아갈 없을 것 같은 타는 목마름을 느낍니다. 이번에 가수 백지영이 평양에 가서 공연을 하였는데 그 중 ‘총 맞은 것처럼’이라는 곡이 김정은 위원장의 마음에 깊은 감화를 주었다고 합니다. 이 곡은 갑작스런 이별 통보를 받은 이가 마치 가슴에 총을 맞은 것 같은 충격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심장이 멈춰도 이렇게 아플꺼 같진 않아 어떻게 좀 해줘 날 좀 치료해줘 이러다 내 가슴 다 망가져 총맞은 것처럼 정말 가슴이 너무 아파 이렇게 아픈데 살 수가 있다는 게 이상해 가슴이 뻥 뚫려 채울 수 없어서 죽을만큼 아프기만 해 총맞은 것처럼”
청년들은 노래가사처럼 이별통보를 받으면 이렇게 총맞은 것처럼 큰 충격과 아픔을 느낄 수 있는 그런 사랑을 한 번 해보기 원합니다. 그래서 여러 이성들을 만납니다. 그러나 그런 사랑을 찾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어쩌다가 정말 어쩌다가 그런 사랑을 만납니다. 그런 사랑을 하고 있으면 내가 혹시 드라마 찍고 있는건 아닌지 주위를 살펴보기도 합니다. 그런데 주위에 카메라맨이 없습니다. 아 현실이구나 생각할 때 너무 행복합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나의 영혼에 생수와 같던 사랑을 주던 그 이성이 어느 날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질 수밖에 없다는 이해불가한 말로 이별통보를 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때 정말 노래가사처럼 그동안 함께 한 모든 추억이 마치 피처럼 가슴에서 흘러나오는 것 같고 총맞은 고통에 죽을 것처럼 괴롭습니다. 그 총상에서 어느 정도 회복되기까지 최소한 3년 이상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 상처에서 회복되어 다시 이성의 사랑이 주는 물을 마십니다. 한 번 더 총을 맞으면 이번에는 정말 죽을 것 같기 때문에 상대방의 단점이 크게 보여도 못본척하고 또 상대방이 원하는대로 웬만하면 다 맞춰주면서 동등한 관계가 아닌 갑과 을의 관계가 됩니다. 그러면 상대방은 귀신같이 그것을 알아서 온갖 갑질을 합니다. 한 3년간 갑질을 당하면서 몸과 마음과 영혼까지 다 털리고 난 후 이별통보를 받으면 내 평생 다시는 연애를 하지 않으리라 굳게 결심합니다. 그러나 또 목이 마르기 때문에 다시 이성의 사랑의 물을 찾아 밤거리를 헤맵니다.
또 청년들은 사회적 인정, 사람들의 인정에 대한 목마름이 있습니다. 많은 청년들이 이름있는 대학, 사람들이 알아주는 대학에 가려는 이유가 그래야 사람들의 인정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름이 널리 알려진 직장에 다니려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정에 대한 목마름은 때로는 우리를 나태하지 않고 열심히 살게 만들므로 긍정적인 효과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인정에 대한 목마름은 더욱 타는듯한 목마름을 가져올 뿐입니다. 아무리 인정의 물을 마셔도 또 목마르고 그래서 더 인정을 받기 위해 뭔가를 시도하고 그래서 인정을 받지만 다시 목마르게 됩니다.
이 외에도 지식에 대한 목마름, 성공과 성취에 대한 목마름, 좀 고상한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삶의 진정한 의미와 가치에 대한 목마름이 있습니다. 이와같이 청년들은 사랑과 인정의 목마름을 해갈해주는 물을 찾아 세상을 방황하지만 세상 그 어디에서도, 그 누구도 그 목마름을 해갈해주지 못합니다. 오늘 소감발표하는 김경찬 형제처럼 세상의 물은 밤새도록 친구와 이야기를 해도 외로움을 느끼게 만듭니다. 자기가 정말 해 보고 싶었던 일을 마음껏 하는데도 그 속에서 지겹고 권태롭다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인간이 본래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의 물을 마실 때만 참된 만족을 느낄 수 있는 존재로 지어졌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2:13절은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예수님은 세상 그 어떤 물로도 채워지지 않는 우리의 영혼을 채울 참된 생명수를 주십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생명의 물을 주십니까? 먼저 주님은 우리에게 최고의 사랑을 생명수로 주십니다. 많은 대중 가수들이 가슴 찢는 사랑,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사랑을 노래합니다. 그러나 그런 사랑은 노래 속에서나 존재할뿐 실제 현실 세계에서 사람들의 사랑은 지극히 현실적이고 계산적이고 이기적인 경우가 허다합니다. 또한 정말 그렇게 사랑했다 하더라도 그 사랑이 상대방을 죄와 심판으로부터 구원하고 생명을 얻게 할 수 없습니다. 이에 비해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위해 말 그대로 가슴찢는 사랑, 총 맞은 것 같은 아픔 속에서도 포기할 수 없는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손목과 발목에 녹슨 대못이 박히는 그 모진 고통을 감내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릴 때 천 번은 까무라친다고 하는데 그 까무라치는 고통 속에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이러한 사랑으로 사랑하신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은 결코 사람들의 사랑 때문에 목마르지 않게 됩니다. 그 사랑이 나의 영혼을 가득 채우게 됩니다. 또한 그 사랑이 나를 죄로부터 구원하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합니다.
다음으로 주님은 우리에게 참된 인정의 물을 주십니다. 많은 청년들이 자신이 수고하고 헌신한 것에 대해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며 살아간다는 아픔이 있습니다. 자신이 음으로 양으로 수고를 많이 했는데 엉뚱한 사람이 인정과 칭찬을 받으면 정말 속상합니다. 그런데 이때 하늘에서 은밀한 중에 보시는 주님을 생각하고 그 주님의 인정과 칭찬을 구할 때 사람이 주는 모든 인정에 대한 목마름이 사라지고 영혼에 참된 만족이 임하게 됩니다. 사람의 인정을 구하는 삶은 정말 피곤하고 지치고 목이 마릅니다. 그러나 주님의 인정을 구하는 사람은 자유함이 있고 기쁨과 행복이 있고 오직 주님과 나만 아는 삶의 스토리가 있습니다. 장차 천국에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특별한 칭찬과 상은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는 부분일 가능성이 큽니다. 사람들이 이미 다 알아주고 칭찬한 것에 대해서는 주님께서 다시 주실 상이 없습니다. 사람의 인정을 구하는 사람은 나의 수고하는 이 모습을 사람들이 어찌하든 봐주고 알아주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자꾸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게 되고 말 한 마디에 서운한 마음이 들고 상처받고 영혼이 목마르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의 인정과 칭찬을 구하는 사람은 오히려 은밀한 중에 섬기고 사랑하고 기도하는 것을 즐거워합니다. 주님께서 보고 계시고 인정하여 주심으로 전혀 목마르지 않습니다. 또한 그 주님의 인정이 영원한 상급과 생명으로 열매맺게 됩니다.
15절을 보십시오. 여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말하였습니다.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드디어 여인은 예수님의 말씀에 깊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 물을 달라고 하였습니다.
16-18절을 보십시오. “이르시되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예수님은 드디어 자신에게 물을 달라고 요청하는 여인에게 물을 주고자 하셨습니다. 그 물을 주시는 첫 단계로 먼저 남편을 불러오라고 하셨습니다. 왜 예수님은 여자에게 생뚱맞게 남편을 불러오라고 하셨을까요? 이는 여인의 답변을 통해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녀는 자기는 남편이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이런 그에게 예수님은 과거 그에게 다섯 남편이 있었으나 지금 동거하는 자는 정식 남편이 아니니 너의 말이 맞다고 인정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남편을 불러오라는 말씀을 통해 그녀가 지금까지 남편을 통해 영혼의 물을 마시려 했다는 사실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더 나아가 그 남편이 그를 더욱 목마르게 하였고 근본적으로 그녀 영혼의 목마름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다는 사실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19-20절을 보십시오. “여자가 이르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여자는 자신의 모든 과거를 알고 있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선지자로 인정했습니다. 여자는 대화의 주제를 예배로 돌렸습니다. 어떤 이는 여자가 남편 문제에 대해 더 이상 대화하고 싶지 않아 주제를 돌렸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보다는 여자가 예수님과의 대화를 통해 자신의 근본문제가 하나님 대신 남편을 경배한 문제임을 깨닫게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배란 worship으로 최고의 가치와 의미를 부여함을 의미합니다. 원어상으로는 엎드려 절함으로 최고의 존경과 복종과 사랑을 고백한다는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바벨론 포로기 이후 예루살렘 성전 건축에 참여하지 못하게 된 사마리아 사람들은 BC 322년 그리심산에 성전을 짓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 성전은 BC 129년 유대를 통치하던 요한 힐카누스에 의해 파괴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예루살렘으로 오는 것이 금지되었으므로 그리심산에서 나름대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시온산이 아닌 이 산이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사드렸던 산이며 모세가 제단을 쌓았던 곳이라고 주장하면서 이 산에 정통성을 부여했습니다. 여자는 이제 남편 대신 하나님을 예배할 때 그녀의 이 목마름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유대인들의 주장에 의하면 참된 예배는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야 드릴 수 있는데 이 문제에 대해 선지자되신 예수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여쭈었습니다.
21-24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예수님은 여자가 드디어 예배에 관심을 갖는 것을 귀하게 보시고 그녀에게 참된 예배의 진리에 대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먼저 예수님은 예배드리는 장소가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이 아님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장소보다 중요한 것은 예배의 대상과 예배자의 자세입니다. 예배의 대상은 하나님입니다. 예배자가 가장 주의해야 할 점은 내가 중심이 되는 예배, 나의 만족과 기쁨을 구하는 예배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설교자의 메시지가 재미있고 내 귀에 쏙쏙 들어오고 마음에 감화력이 있었다고 예배를 잘 드린 것이 아닙니다. 좋은 설교를 들어서 여기 온 시간이 아깝지 않고 마음이 흡족한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배를 통해 우리 영혼이 주님을 높이고 찬양하고 가장 존귀히 여기는 가운데 주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것입니다. 또한 설교자가 전하는 본문의 말씀을 통해 주님의 뜻을 발견하고 내 생각과 뜻을 내려놓고 그 주님의 뜻에 순종하고자 결단하는 자세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내 의지로는 불가능합니다. 성령께서 주님의 뜻, 곧 진리를 내 영 안에서 깨닫게 하여주시고 내 뜻을 내려놓고 그 주님의 진리에 순종할 수 있도록 은혜 안에서 힘을 주셔야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참된 예배는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십니다.
25절을 보십시오. “여자가 이르되 메시아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 히브리어로 메시야, 헬라어로 그리스도란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의미입니다. 메시야는 곧 사람들을 구원할 구세주입니다. 당시 사마리아 사람들은 모세의 예언에 기초하여 장차 메시야가 모세와 같은 선지자의 모습으로 오시리라 믿었습니다. 메시야과 오시면 십계명의 말씀을 전해주었던 모세처럼 사마리아 사람들을 더욱 깊고 풍성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으로 인도하시리라 믿었습니다.
2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그녀에게 놀라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I who speak to you am he.” 그러면 이 예수님의 말씀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첫째, 예수님은 사람들을 영이신 하나님께 인도하는 참된 인도자가 되신다는 의미입니다. 지금까지 사마리아 사람들은 하나님이 정하신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드릴 수 없었습니다. 이로 인해 큰 아픔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예수님을 통해 영이신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예수님 자신이 성전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어린 양의 피의 제사를 드리는 대제사장이 되시고 동시에 희생의 제물이 되십니다. 그러므로 사마리아 사람들은 더 이상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으로 갈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 나와 죄사함 받고 하나님께 나아가 예배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둘째, 내가 그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그녀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참된 남편이 되신다는 의미입니다. 여자는 사실 어떤 남편이 자신의 참된 남편인지 자신도 정확히 알지 못하였습니다. 막연히 지성적인 남편을 만나 남편에게 여러가지 배우면 행복하지 않을까, 감성적인 남편이 따스한 사랑으로 자기를 사랑해주면 행복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보니 예수님이 그녀가 그토록 바라던 참된 남편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보통 남편들은 밖에서 하루종일 일하고 난 후 집에 돌아오면 곧바로 TV를 켜거나 신문을 보거나 혹은 게임을 하면서 나름대로 하룻동안 직장 상사 혹은 여러 사람들에게 받은 스트레스를 풉니다. 그리고 아내와는 거의 한 마디 대화도 없이 불끄고 잡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중동의 뙤약볕 55km를 걸어오신 그 피곤함 가운데서도 여인에게 깊은 관심을 가지고 그녀의 문제를 중심으로 대화해 주셨습니다. 또한 여러 남편들은 부인이 떽떽거리거나 자존심 상하는 말을 하면 팩 토라지거나 밥상을 뒤엎으며 혈기를 부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유대인이면서 왜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말을 거냐는 여인을 온유와 참 사랑으로 감당하여 주셨습니다. 또한 그녀의 인생 문제에 대한 정확한 진단과 해결책을 제시하여 주심으로 참된 상담자가 되어주셨습니다. 이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여자는 바로 이 예수님이 그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참 남편이신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28-29절을 보십시오.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사마리아인들이 그토록 바라던 선지자와 같은 그리스도를 만난 사마리아 여인은 기쁨이 충만하여 이 그리스도를 동네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전파하였습니다.
31절을 보면 그 사이에 음식을 구한 제자들이 돌아왔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음식을 잡수시도록 말씀드렸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다” 하셨습니다. 목마른 사마리아 여자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참으로 예배드리게 되며 예수님을 메시야로 만나게 되어 예수님의 영혼은 깊은 만족을 느끼셨습니다. 34절에서 예수님은 그의 양식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35절을 보십시오. 보통 씨를 뿌린 후 추수하려면 최소한 넉 달이 필요합니다. 사마리아에 예수님을 통해 복음의 씨가 뿌려졌습니다. 그런데 벌써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사마리아를 위해 여러 선지자들이 눈물을 흘리며 수고하였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통해 그 열매를 거두게 되었습니다.
결론입니다. 예수님은 목마르고 지치고 피곤하신 가운데 영혼의 목마름을 안고 나아온 사마리아 여자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영생수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이 주님은 이 시간 지금 우리에게도 영생수를 주기 원하십니다. 주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영생의 샘물을 마심으로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늘 주님을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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