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누가복음 제 5 강 다만 그를 섬기라 말씀 / 누가복음 4:1-15 요절 / 누가복음 4:8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된 바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예수님은 마귀에게 세 가지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첫 인류였던 아담과 하와는 마귀의 시험에 넘어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그래서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습니다.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히2:18)” 시험에 실패한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마귀의 지배 아래에 놓이게 되었었다면 이제 시험에 승리하신 예수님 안에서 모든 사람이 승리할 수 있는 새 시대가 도래하였습니다. 마귀의 세 가지 시험은 우리들에게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시험입니다. 예수님이 이 시험에서 어떻게 이기셨는지를 보면서 우리가 승리가 어디에 달려있는지를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오셨습니다. 3장에서 예수님은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성령이 비둘기처럼 임하였고 하늘이 열리고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었습니다. 메시아 대관식을 마치고 그가 돌아온 곳은 예루살렘 궁전이 아니라 광야였습니다. 그리고 취임 축하 40일 파티가 열리는 대신에 40일을 굶으셨습니다. 또한 그를 기다린 것은 수많은 인파가 아니라 마귀였습니다. 뭔가 엇나가는 것처럼 보이는 이 일의 배후에는 성령님이 계셨습니다. 이 시험은 마귀가 하는 것이긴 하지만 하나님의 뜻 가운데 벌어지는 일이었습니다. 40일을 굶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나흘은요?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니 인간의 고통을 초월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100% 동일한 인간으로서 겪으셨습니다. 내가 배고픈 만큼 배고프고 내가 피곤한 만큼 피곤을 느끼셨습니다. 마귀는 말합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이 되게 하라(3)” 마귀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전제하고 있지 않습니다.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라고 함으로서 하나님의 아들은 아래와 같은 일을 해야 한다는 식으로 말합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돌을 떡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돌을 떡으로 만들어야 합니까? 굶고 있기 때문입니다. 거의 죽을 정도로 굶주려 있기 때문입니다. 생존이 절박한 상황에서 먹는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떡을 위해서라면 돌로라도 기적을 일으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시험의 함정이 무엇입니까? 생존이 절박한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먹는 것을 확보하는 길이라고 여기게 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아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게 첫 번째라고 나타내보이도록 하는 것입니다. 돌을 떡으로 만들면 먹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고 메시아의 가장 큰 덕목이 먹는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이라는 말이 됩니다. 과연 먹고 사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까? 메시아가 하실 가장 큰 일이 먹는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대답하셨습니다. “기록된 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였느니라(4, 신8:3a)”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는 말은 떡도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떡도 사람의 생존을 지탱시키는 요소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게 전부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존재가 아니라고 말하면 배부른 소리하고 있다고 받아칠 수 있습니다. 취업이 안 되어 취업 재수, 삼수를 하고 다달이 날라 오는 연체 이자에 탄식이 나오고 신용불량자가 되어 통장도 만들지 못하는 신세가 되어도 그런 소리가 나오겠느냐고 말합니다. 갓난아이 분유 살 돈이 없어서 마트에서 분유를 훔쳐야 하는 미혼모, 단칸방에서 노모를 모시고 매일 삼각김밥으로 끼니를 때우는 소년가장에게도 그런 말을 할 수 있겠느냐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40일을 굶어 인간이 다다를 수 있는 가장 극한의 지경에서도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심으로 돌로 떡을 만들기를 거절하셨습니다. 40일 굶주림 속에서도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고 하신다면 우리가 처한 어떤 상황이 먹고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딱한 처지가 이해는 되지만 예수님은 먹는 문제 해결을 가장 우선시하려는 마귀의 시험 앞에서 “No!”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아니라’고 하신다면 우리도 언제 어디서나 ‘아닙니다’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내가 취업이 안 되고 있고 연체 이자 갚으면 다음 달 살아갈 물질이 없더라도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닙니다”, “떡보다 더 중요한 게 있습니다” 분명히 말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면 떡 말고 또 중요한 무엇으로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까? 마귀는 첫 시험에서 예수님을 무릎 꿇리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방향을 바꿉니다. “좋다!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닌 것을 인정해주겠다” 그러면서 데리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만국을 보여줍니다(5). 그리고 이 모든 권위(권세)와 영광을 주겠다고 말합니다(6). 마귀는 사람이 떡만이 아니라 권세와 영광으로 사는 게 맞지 않느냐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매우 그럴듯합니다.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이 되면 권세와 영광을 추구하는 것이 인간이라는 말을 합니다. 지난 국민대 입학식 날이었습니다. 입학생들과 학부모들이 학교에서 제공해주는 잔치국수를 먹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국수가 다 불어 가는데 배식을 하지 않았습니다. 총장님이 오실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30분 이상을 기다렸고 몇 학부모들은 항의까지 하였지만 요지부동이었습니다. 마침내 학과장들이 나타나고 카메라맨이 사다리를 들고 등장하고 맨 마지막에 총장님이 오셔서 앞치마를 두르고 비닐장갑을 끼자 배식이 시작되었습니다. 총장이란 권세가 뭐길 레 불어터진 국수를 먹어도 참아야만 하는가 하는 생각에 씁쓸하였습니다. 경영학과 교수인데 인문사회계열 학과의 입학정원을 줄이고 줄인 것만큼 경영학과 정원을 늘렸다고 들었습니다. 마귀는 이 모든 권세와 영광을 주겠다고 말합니다.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내가 원하는 자에게 주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는 거짓말입니다. 누가 넘겨줍니까? 권세와 영광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자에게 주는 것이지 마귀가 줄 수 없습니다. 다니엘서에 보면 느부갓네살 왕이 나옵니다. 그는 바벨론 제국을 통일한 왕입니다. 인류역사상 가장 강력한 왕이었습니다. 그는 자기를 위하여 30미터 높이의 금신상을 만든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최고이고 이 모든 것을 자기가 이루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그는 자신을 짐승으로 인식하고 풀을 먹는 특수한 병에 걸렸습니다. 그리고 칠년을 짐승처럼 뛰어다니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회복되었는데 그때서야 깨달았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사람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누구든지 그 자리에 세우시는 줄을 알기에 이르렀나이다(5:21)” 자기가 세상을 다스리는 줄 알았는데 하나님이 다스리는 것이었고 자기가 뜻대로 하는 것인 줄 알았는데 하나님이 그 분의 뜻대로 왕도 세우고 폐하는 분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좌우편에 앉으려고 혈안이 된 제자들에게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줄 것이 아니고 누구를 위하여 예비 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막10:40)’이라고 하심으로 권세와 영광은 하나님에게 속한 것임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권세와 영광을 얻고자 별의별 짓을 다 합니다. 7절을 보면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고 말합니다. 얼마나 쉽습니까? 절만 하면 되다니! 절은 명절에 웃어른에게 절하는 그런 절이 아닙니다. 절은 경배입니다. 8절에 나오는 ‘경배’라는 단어와 여기서 ‘절’이라는 단어가 같습니다. 마귀에게 경배하고 마귀에게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물리적으로는 어떤 불이익도 일어나지 않는 일일 수 있습니다. 괴테의 파우스트는 부귀영화를 얻고자 자기영혼을 악마 메피스트펠리스에게 팝니다. 마귀는 지금도 권세와 영광을 얻기 위해 무슨 짓도 서슴지 않고 하라고 속삭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권세와 영광을 위해 어떤 불의한 방법도 사용합니다. 사람을 몇 명 죽이는 것도 예사롭게 행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권세와 영광으로 산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권세와 영광이 내 인생을 더 멋지고 행복하게 만들어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대답하십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된 바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8, 신6:13)” 예수님은 단호하게 이번에도 “노!”라고 외치신 것입니다. 사람은 권세와 영광으로 사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을 경배하고 그를 섬김으로 사는 존재임을 천명하십니다. 권세와 영광은 앞에 나온 떡이라는 삶을 지탱하는 요소 중의 하나가 아닙니다. 권세와 영광 없이도 삶은 유지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예수님을 알기 전에도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낫다”는 말처럼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는 명제에는 깊이 공감하고 있었습니다. 먹을 것이 부족해서 힘든 적은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권위와 영광은 매우 좋아했습니다. 그게 없다면 삶의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공부를 하는 것도, 도덕적으로 바른 사람으로 살려고 했던 것도, 심지어 축구를 해도 골기퍼는 안 보고 공격수만 하고자 했던 것도 인정받고 권위와 영광을 얻고자 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뒤에도 이것은 쉽게 수그러들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제자로 사는 것 자체가 즐겁고 행복해야 하는데 물론 그 점도 있지만 나에 대한 존재감이 언제나 부각되어야 했습니다. 예를 들어 여름수양회에 큰 성령의 역사가 있었는데 내가 한 명의 양도 초청하지 못하고 메신저도 아닌데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 별로 기쁘지 않았습니다. 사소한 일에서도 내가 거기에 끼어있고 나로 말미암아 되었다는 것이 조금이라도 있어야 살맛이 났습니다. 25년 전 전공 석사 과정을 마치기 전에 서둘러 러시아로 가고자 했던 것도 젊은 20대 시절에 모임 안에서 존재감이 부각되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내가 있어야 잘 돌아가고 내가 없으면 잘 안 돌아간다는 소리를 듣고 싶었습니다. 저는 파우스트가 공감이 됩니다. 마귀가 천하를 보여주며 권위와 영광을 주겠다고 하면 절은 당연하고 발바닥이라도 핥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원래 지극한 권세와 영광 가운데 있던 분이었습니다. 이런 분이 종의 형체를 지니고 온갖 수모와 굴욕을 받으셨습니다. 그는 십자가 고난의 길을 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는 그 전날 밤 이 고난을 피하면서도 인류 구원을 이룰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그 길을 가고자 몸부림을 치셨습니다. 그러므로 고난 없이 권세와 영광을 얻는 길이 있다면 매우 매력적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말씀으로 극복하십니다. 권세와 영광을 얻어야 하고 그것을 갖는 것이 당연한 하나님의 아들, 창조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권위와 영광을 마다하시고 하나님을 향한 경배와 섬김을 택하셨다면 우리는 무엇을 택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아들도 권위와 영광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경배와 섬김으로 사는 것이라고 하셨다면 사람인 우리는 무엇으로 살아야 합니까? 우리가 잘 아는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1문을 보면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로 말미암아 영원히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은 하나님을 경배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도 처음 구절이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입니다. 하나님을 경배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사탄은 이 본질적인 것을 뒤틀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이 에덴동산 중앙에 선악과를 두신 것은 이를 통해 하나님만을 경배하고 섬기는 것이 인생의 본질임을 잊지 않도록 하시기 위한 배려였습니다. 그러나 사탄은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시기” 때문에 먹지 못하게 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과 같이 되는 길이 있다는 사탄의 말은 가장 큰 거짓말이면서 소름끼치도록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의 가장 큰 특징은 자기 자신을 경배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내가 우주의 중심입니다. 내가 생각하고 내게 유익한 것이 선이고 진리입니다. 그래서 딤후 3:2에 보면 말세의 가장 큰 특징이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인정받고 싶고 자신이 부각되기를 바라고 자기 영광을 추구하는 모든 것이 다 자기를 사랑하고 경배하는 본질이 뒤틀린 것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모두가 자기의 유익을 구하고 자기의 욕심을 좇아 살아가는 이 시대의 모든 사람들을 향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것도 하나님을 경배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내 마음이 가는 데로 행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이 가는 데로 움직이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곧 그의 말씀을 청종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마귀를 대적하시는 예수님의 대답이 다 어디에서 왔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서 왔습니다. 40일 굶어 배가 고프지만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고 하시니 그 말씀을 앞세우셨습니다. 권위와 영광을 얻고 싶지만 하나님께 경배하고 그를 섬기라 하셨으니 그 말씀을 앞세우셨습니다. 예수님도 육신의 마음이 가고 싶은 데로 가지 않고 말씀이 가는 데로 순종하심으로 하나님만을 경배하고 섬기셨습니다. 우리 모임은 ‘대학생 성경읽기 선교회’입니다. 올해 포스터 슬로건이 무엇입니까? ‘성경 읽고 생각하고 실천하자’입니다. 성경을 읽어도 좋고 묵상해도 좋고 암송하면 더 좋은데 말씀을 앞세우는 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경배하고 섬기는 가장 좋은 길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경배하고 섬기는 삶은 성공하거나 유명한 인생이 되는 게 아니라 일생 내게 두신 뜻을 이루어드리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생물학적으로도 수정과 탄생으로부터 특별한 선택을 받은 매우 귀하신 몸들입니다. 곧 개나리, 진달래, 벚꽃 등이 필 텐데 그 존재로서의 역할을 다하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났다면 존재의미와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통해 나타내고자 하시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이 나의 기질이나 능력이나 꿈이나 열매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찾아가는 것이고 그것을 더욱 갈고닦아 하나님에게 돌려드리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만을 경배하고 섬기면 하나님의 뜻 가운데 권위와 영광이 덤으로 주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권위와 영광에 매이면 그것을 얻지도 못할뿐더러 하나님도 섬기지 못하는 비참한 인생이 되고 말 것입니다. 우리 마음의 중심에서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하는 말씀이 늘 생의 좌표가 되어주기를 기도합니다. 두 번째 시험에서도 여지없이 패배한 마귀는 이번에는 예수님을 이끌고 예루살렘 성전 꼭대기에 세웠습니다. 그리고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여기서 뛰어내리라” 말합니다. 왜 갑자기 높은 데서 뛰어내리라고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너를 사랑하는 것을 입증해보이라는 것입니다. 떡을 만들지도 않고 하나님만을 경배하고 섬기는 너를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시겠는가, 그러니 이런 너를 하나님이 지켜주지 않으시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네가 좋아하는 하나님의 말씀인 시편에도 기록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네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시리라” 사탄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사랑을 매순간 확인해보도록 시험합니다. 과연 하나님이 지금도 사랑하시는지, 혹 그 사랑이 변한 것은 아닌지 점검해보도록 합니다. 무엇인가 돌보심과 인도하심을 체험해야 마음이 안심이 되는 점은 있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했습니다. 앞에 홍해가 있으면 의심하고, 가는 길이 거칠면 의심했습니다. 물이 없으면 의심하고 음식이 원하는 대로 생기지 않으면 의심했습니다. 출17장을 보면 므리바에서 먹을 물을 달라고 원망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목이 마른 것도 문제지만 하나님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 이것을 통해 확인해보고 싶은 마음이 더 컸습니다(17:7). 이를 두고 모세는 “너희가 어찌 여호와를 시험하느냐?(17:2)” 하였습니다. 뭔가 바라는 것을 들어주시는 것을 통해 하나님의 계심을 확인하고 그의 사랑을 검증하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대답하십니까?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12, 신6:16)” 하나님은 신뢰의 대상이지 시험의 대상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만을 경배하고 섬긴다고 해서 하나님이 내가 바라는 것을 들어주신다고 생각해야 합니까? 내가 이렇게까지 헌신하는데 이 정도를 들어주지 않으신다면 그것은 하나님도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가장 고질적인 병폐였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그들은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만을 구했습니다. 예수님이 아무리 좋은 말씀을 하셔도 그들의 관심은 자신들이 바라는 기적적인 일들이 계속 일어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주지 않으시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마귀가 하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살았습니다. 제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크게 하나님을 시험했던 일 중의 하나는 러시아 선교사로 살다가 귀국할 때 발생했습니다. 공산주의 국가에서 병역 미필자가 계속 수학을 할 수 없다는 당시 외무부 조항에 걸려 어쩔 수 없이 박사과정 중간에 돌아와야 했는데 저는 짐들을 가지고 오지 않았습니다. 무거워서 갖고 오지 않은 것이 아니라 이렇게까지 비싸고 요긴한 짐들을 하나님을 믿고 놓고 가니 반드시 돌아오게 해달라는 일종이 시위요 배수의 진이었습니다. 그리고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말씀을 붙들었습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제가 바라는 결과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일은 더 꼬였고 이왕 가게 된 군대는 가장 열악한 전방창설부대의 취사장도 지어지지 않은 곳의 취사병으로 배속이 되어 몇 달을 악몽을 꾸며 살았습니다. 당시는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전혀 몰랐고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 가득했습니다. 25년이 지난 지금도 그런 마음이 있습니다. 첫째 모세가 재수를 해서 시험을 치렀습니다. 그는 대학에 들어가지 않았음에도 작년 가을에 소감모임에 나오고 소감을 썼습니다. 아침 저녁으로 합심기도도 했습니다. 상위권에 있는 한 대학의 1차 실기시험에 합격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붙여주실 줄 알았는데 2차 시험에서 떨어졌습니다. 낙심하고 있었는데 예비2번이라고 떴습니다. 다시 희망이 살아났습니다. 지난 봄맞이 수양회를 다녀오는 날 예비1번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기적의 드라마를 쓰실 것 같았습니다. 모세가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말씀을 받고 연요절로 삼았다는 것이 마음에 약간의 걸림이 되었지만 말입니다. 2월이 다가도록 예비1번이란 자막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몇 몇 목자님들과 가족들이 하나님이 마지막에 반전을 이루셔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실 것 같다고 하였습니다. 저도 모든 인간적인 기대가 다 없어졌을 때 합격이 되어야 정말 하나님의 은혜만이 드러나니 그렇게 될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또한 하나님 꼭 그렇게 해주셔야 한다고 윽박질렀습니다. 물질도 부족하고 둘째도 올해 고3이고 풀타임 목자가정이 이렇게 되는 것을 하나님도 원하지 않으시지 않느냐며 이것을 통해 하나님의 변함없으신 사랑을 보여주시라고 하는 마음으로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국 3월이 되었고 이젠 아무도 제게 모세가 어떻게 됐느냐고 묻지 않습니다. 모세가 요21:15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말씀을 읽으며 눈물을 흘렸다는 얘기를 듣고 마음에 다소 위안은 됐지만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 있었습니다. 저는 이를 통해 아직도 제 안에 하나님을 시험하는 마음이 있음을 보게 되었습니다. 뭔가 기도의 응답이나 기적이 일어나서 간증거리가 생기길 원했습니다. 이것도 더 깊이 들어가 보면 자기 영광을 구하는 죄 문제입니다. 주님은 이런 제게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오랜 숙원이 풀리고 인생문제가 해결이 되는 것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려고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내가 하나님을 경배하고 섬기며 살아온 삶에 대한 보답으로 기브 엔 테이크 식의 삶을 살지 말라고 하십니다. 내 문제가 풀리든 안 풀리든, 원하는 것을 얻든 얻지 못하든,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절대 신뢰와 의지의 대상이십니다. 예수님이 40일 굶주린 극한의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그 어떤 상황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는 것을 당연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번 일을 계기로 저의 신앙이 한 단계 더 성장하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입니다. 예수님은 마귀의 세 가지 시험을 물리치셨습니다. 이러므로 첫 인류가 실패했던 시험에서 이기시고 우리 앞에 이기는 새 시대를 열어놓으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우리가 마귀의 시험이 들끓는 이 세상에서 어떻게 승리할 수 있는지 본이 되어주셨습니다. 우리는 떡으로만 살 수 없고 하나님을 경배하고 섬김으로, 그리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함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 삶의 본을 보여주신 예수님을 따라 세상을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기를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