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봄맞이 수양회 주제 1 강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말씀/디모데후서 3:1-17
요절/디모데후서 3:14a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2019년 홍릉에 위치한 KAIST 경영대학원에서 교육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교육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한 가지 기억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강의실 벽면에 쓰인 문구였습니다. ‘Back to the basic’ 기본으로 돌아가라? 우리 나라에서 나름 똑똑한 사람들이 모여 ‘변화와 혁신’을 연구하는 곳과는 왠지 맞지 않는 문구 같아 기억에 남았습니다. 그런데 ‘기본’을 강조한 또 한 분이 있는데 바로 축구선수 ‘손흥민’의 아버지 ‘손정웅’씨입니다. 그 분이 쓴 ‘모든 것은 기본에서 시작한다’는 책을 보면 오늘날 손흥민 선수가 ‘월드클래스’로 인정받는 이면에는 ‘기본’에 충실한 훈련 덕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듯 학문, 스포츠등 모든 분야에서 ‘기본’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황금률인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으로 사는 우리에게 ‘기본’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성경’입니다. ‘Back to the bible’ ‘성경으로 돌아가라’ 독일과 프랑스 종교개혁을 이끈 마틴 루터, 존 칼빈의 구호이자, 오늘 말씀의 저자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남긴 유언이기도 합니다. 이 시간 말씀을 통해 새 봄학기를 어떤 자세와 방향 가운데 준비해야 하는지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 네가 돌아서라(1-10)
1절을 보십시오.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여기서 말세란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부터 재림하실 때까지를 말합니다. ‘고통하는 때’란 영어로 ‘terrible time’ ‘hard time’ ‘time of stress’로 말세가 될수록 무섭고 소름끼치며 괴롭고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의미입니다. 사람들은 21세기에는 ‘테크노피아’ ‘유토피아’가 이루어져 더 살기 좋은 세상이 올 거라 기대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더 고통스러워질 거라 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첫째,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2-4a절을 보십시오.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말세가 될수록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합니다. 여기서 ‘자기 사랑’은 남이야 어찌되든, 혼자만 잘 먹고 잘 살면 되지라는 ‘이기주의’입니다. 이러한 자기 사랑의 결과 ‘돈’을 사랑합니다. 몇 년 전 한 단체에서 초중고 학생을 대상으로 이런 질문을 하였습니다. ‘만약 여러분에게 10억을 주는 조건으로 죄를 짓고 감옥에 가야 한다면 하겠습니까?’조사결과 초등생 17%, 중학생 39%, 고등학생 무려 56%가 긍정적 답변을 했습니다. 애 어른 할 것없이 머니 머니 해도 ‘Money’가 최고라고 생각하는 시대입니다. 그런데 이런 ‘돈’사랑은 그 자체로 끝나지 않습니다. 은근히 가진 것을 자랑하고 자기능력으로 이렇게 된 것인냥 교만해지고 없는 사람은 비방하며 무시합니다.
현재 제가 모시는 상사도 이런 면이 있습니다. 한번은 프랑스 출장 중에 ‘샤넬’가방을 샀는데 세금을 500만원이나 뜯겼다고 투털거려, 도대체 얼마짜리 가방이길래 세금을 그렇게나 많이 내냐고 물었더니 ‘1,300만원’. ‘130만원도 아니고 1,300백만원? 저는 13만원짜리 가방하나 동역자에게 사준 적 없는데’ 황당하고 어이없어 할말을 잃었던 일이 있었습니다. 이에 더해 요즘에는 타고 있는 자동차가 어떤 브랜드인지, 크기는 어떤지에 따라 그 사람의 신분을 나누는 ‘Car스트’가 문화까지 있다고 하니, 참 웃을 수 없는 슬픈 현실입니다. 하지만 고가의 백을 메고, 외제차를 타고 다닌다고 행복할까요? 오히려 감사함이 없어집니다. 있는 사람은 더 가지지 못해서, 없는 사람은 없다고 불평합니다. 불평을 넘어 분노합니다. 그래서 SNS에 비방하는 댓글을 달고, 있지도 않은 일을 거짓으로 꾸며 당사자의 고통을 즐거움 삼습니다. 이로 인해 원통한 사람들이 많아지고, 대낮 길거리에서 칼을 들고 무고한 사람을 죽이는 ‘묻지마 살인’까지 벌입니다. 거룩함, 선함은 말만 들어도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고 무정함,원통함,모함 가운데 사납고 서로 속이고 배신하며 참지못하고 조급합니다.
둘째로,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기 때문입니다.
4b-5절을 보십시오.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앞서 본 말세의 증상이 세상사람들의 모습이라면, 방금 읽은 말씀은 하나님을 믿은 신자에게 나타나는 말세의 증상입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믿지 않는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하나님과 멀어지고 죄와 가까워집니다. 그래서 더 고통하고 어둠 속에 방황하죠. 그래서 하나님은 믿는 자들을 통해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도록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말세가 될 수록, 신자들 조차 하나님을 멀리하고, 대신 ‘쾌락’을 더 사랑합니다. ‘경건의 모양’은 갖추길 원하지만 ‘경건의 능력’은 부인합니다. 경건이란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삶입니다. 이런 삶은 흉내는 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능력은 흉내 낼 수없습니다. 왜냐하면 능력은 ‘순종’ ‘희생’ ‘인내’ 같은 ‘고난’을 통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당시에도 경건의 모양만 있지 능력이 없는 신자들이 있었습니다.
6-9절을 보십시오. “그들 중에 남의 집에 가만히 들어가 어리석은 여자를 유인하는 자들이 있으니 그 여자는 죄를 중히 지고 여러가지 욕심에 끌린 바 되어 항상 배우나 끝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느니라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한 것 같이 그들도 진리를 대적하니 이 사람들은 그 마음이 부패한 자요 믿음에 관하여는 버림 받은 자들이라 그러나 그들이 더 나아가지 못할 것은 저 두 사람이 된 것과 같이 그들의 어리석음이 드러날 것임이라.” 당시 트렌드 중 하나가 철학, 예술, 각종 학문에 전문성을 갖춘 강사를 집으로 초대해 듣는 것이 있었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여자들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남자에 비해 교육의 혜택이 부족했던 터라, 배움의 욕구가 남달랐습니다. 십자가,부활 같은 복음은 너무 단순하고 재미없고 딱딱했습니다. 반면, 그들의 강의는 새롭고, 재밌고, 뭔가 있어 보였습니다. 무엇보다 교회는 ‘믿음’ ‘순종’ ‘헌신’등 경건한 삶을 살라고 하는대신, 그들은 한번 뿐인 삶 즐겨~ ‘욜로’를 가르쳤습니다. 이렇게 ‘귀’를 간질간질 해주는 사람들의 말만 들으면 어떻게 됩니까? 죄를 중히 지고 여러 가지 욕심에 끌려 항상 배우나 끝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습니다. ‘진리의 지식’이란 예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이 지식은 ‘구원’과 ‘영생’을 얻게 하는 지식입니다. 그런데 이 지식을 깨닫지 못하여 구원과 영생에 이르지 못합니다. 얀네와 얌브레처럼 진리를 대적하게 되어 믿음에 관해 버림 받는 심판을 받습니다.
이처럼 말세의 때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며 쾌락을 사랑합니다. 신자들 조차 경건의 모양만 있지 그 능력은 부인합니다. 그래서 삶은 풍요로운데 정신적으로는 더 고통스럽습니다. 디모데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는 데 그치지 말고 어떻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다시한번 5b절을 읽겠습니다.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이 말은 ‘그러나 너는 이 시대가 어떠하든 달라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시대가 아무리 죄악되고 타락해도 ‘그러나 너는 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삶은 무엇입니까? 로마서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한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그것은 물질주의, 쾌락주의, 상대주의 시대를 따라가지 않고 대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경건한 삶을 살고자 씨름하는 것입니다. 마치 연어가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듯 시대의 흐름을 거슬러 사는 것이죠. 이런 삶은 당연히 힘듭니다. 나만 바보처럼 사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경건하게 사는 것이 지혜롭고, 세상을 따라가는 것이 어리석었음이 드러날 것입니다. 이것을 믿음으로 자기와 돈을 사랑하며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는 자들에게서 분명하게 돌아서기를 기도합니다.
2.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10-17)
말세에 고통이 있다는 것을 알고 결연한 각오를 해야 함을 말한 바울은 이제, 디모데가 어떤 삶의 자세와 방향으로 살아야 하는지 말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첫째, 예수님을 배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10-12절을 보십시오. “나의 교훈과 행실과 의향과 믿음과 오래 참음과 사랑과 인내와 박해를 받음과 고난과 또한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당한 일과 어떠한 박해를 받은 것을 네가 과연 보고 알았거니와 주께서 이 모든 것 가운데서 나를 건지셨느니라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바울은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복음을 가르쳤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비량하며 삶에서 본을 보였습니다. 이는 자신의 유익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한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에서 비롯한 것입니다. 이를 위해 믿음과 오래 참음과 사랑과 인내를 실천하였습니다. 그는 밀레도에서 에베소 장로들을 앞에 두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여러분 가운데서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여러분도 아는 바니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유익한 것은 무엇인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무엇보다 바울은 ‘박해’와 ‘고난’을 많이 겪었습니다. 안디옥에서는 유대인들이 성내 귀부인과 유력자를 선동해 바울과 바나바를 쫓아내고, 이고니온에서는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는 바울을 능욕하고 돌로 치려했습니다. 실제로 루스드라에서는 돌에 맞아 죽은 줄 알고 성 밖으로 내쳐지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바울은 복음과 함께 고난받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을 배우고자 힘썼기 때문입니다. 그의 일생 인생목표는 예수님을 알고자 그의 고난에 동참하는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이런 자신의 삶의 자세, 스피릿을 배우라 말합니다.
둘째,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해야 합니다.
14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
바울은 다른 무엇보다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며 디모데가 배워서 깨닫고 확신했던 것에 거하라 말합니다. 디모데는 누구에게서 배웠습니까? 우선 어려서는 외조모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로부터 말씀을 듣고 배웠습니다. 20대 청년때는 바울을 만나 성경을 깊이 체계적으로 배웠습니다. 이런 배움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자기는 누구인지를 깨달았습니다.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의 큰 사랑을 듣고 감격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예수님이 길과 진리와 생명임을 확신하였습니다. 주와 복음을 위해 사는 삶이 참 의미있고 가치있는 삶임을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고난이 왔습니다. 네로황제의 핍박으로, 거짓 교사와 이단사상으로 성도들이 하나 둘 떠나갔습니다. 무엇보다 바울이 죄수의 신분으로 감옥에 갇히자 이 길이 맞는 것일까? 회의감이 밀려왔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흔들리지 말고 배우고 확신했던 일에 거하라 합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배우고 확신한 일이란 무엇일까요? 저는 우리 모임에서 훌륭한 믿음의 종들에게 말씀을 배웠습니다. 특히 지금은 하나님 나라에 계신 ‘최사무엘’목자님께 배운 말씀이 신앙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목자님은 치과업무로 피곤함을 무릎쓰고 성경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목자님은 말씀 자체만을 쉽고,분명하게 가르쳐 주셨을 뿐 아니라 삶으로도 보여주셨습니다. 항상 미소를 잃지 않으시며, 흔들리지 않은 믿음으로 ‘항공모함’이라는 별명이 기억납니다. 이를 통해 제 안에 ‘믿음’이 심겨지고, 지금까지 ‘믿음’으로 직장생활을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말씀’안에 능력이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또한 우리 모임의 목자님/사모님들의 삶을 보면서 이런 삶이 가장 의미있고 가치있다는 확신이 있습니다. 특히, 나이가 들수록 더 그런 것 같습니다. 제가 직장에서 잘 나갈 때는 여기 저기서 귀찮도록 전화오고 만나자고 하더니 직장을 그만두고 집에서 구직하며 별 볼일 없자 문자 한통 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우리 모임의 목자님/사모님들은 반대였습니다. 제가 구직으로 힘듬을 아시고 기도해주시고, 위로의 문자,카톡을 주셨습니다.친인척보다 더 잘 챙겨주시는 우리 모임을 볼 때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지 나날이 깨닫습니다. 이 모임에 저를 부르시고, 사용하신 하나님께 더 감사가 됩니다. 솔직히 한동안 모임에 대해 시니컬한 눈빛으로 나올 때가 있었습니다. 차가운 말투로 상처를 주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때마다 목자님들은 겸손히 저를 감당해 주시고, 기도해주셨습니다.세상에 이런 모임이 어디 있을까요? 이런 삶을 사는 목자의 길이 가장 행복한 길임을 확신합니다. 제가 이 확신 가운데 거함으로 이 시대 양들과 후배들을 말씀과 사랑으로 섬기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성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15을 보십시오.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세상에는 수 많은 책들이 있습니다. 작년한해 6만여권의 신간도서가 출판되고, 약 1억 6백만부 이상의 책이 발행되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엄청난 양의 책들이 쏟아져 나오지만 그 어떤 책도 근본적으로 사람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지혜를 주지 못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를 구원할 능력이 있는 책입니다. 왜냐하면 참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과 지혜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를 수 있습니다.
16-17절을 보십시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로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성경 66권의 저자는 각기 서로 다른 시대에 태어나 직업도 다르고 출신 배경도 다릅니다. 어부에서부터 왕에 이르기까지 다양합니다. 무려 1,500년이라는 시간차도 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한가지 주제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에 이름을 말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그것은 성경의 저자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감동을 받은 사람이 하나님 뜻에 따라 쓴 것입니다.
하나님의 감동으로 쓰인 성경에는 어떤 유익이 있습니까?
먼저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합니다.’
오늘날은 교육의 위기 시대라고 합니다. 그만큼 교단에 선 선생님들이 학생들을 바르고 훌륭하게 키우기 힘들다는 뜻이겠죠. 아예 가르치기를 포기하고, 점점 입시를 위한 학원이 된지 오래입니다. 이런 시대 성경은 교육의 툴로써 유용합니다. 특히, 성경말씀을 통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무엇이 죄인지를 깨닫습니다. 그래서 올바른 삶, 의로운 삶을 살도록 방향을 제시합니다.
다음으로 디모데와 같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합니다.
복음의 일꾼으로 살고자 할 때, 부족하고 연약한 자신으로 낙심하고 절망할 때가 있지 않나요? 제가 그렇습니다. JBF 교장이지만 두 아들을 아빠답게 품지 못했습니다. 밥 먹을 때 귀에 이어폰 꼽고 폰만 쳐다보는 첫째아들, 집에 오면 본체 만체 방에 들어가는 둘째아들의 행동을 판단하고 혼내려고만 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저도 다를 바 없었습니다. 유투브 영상에 빠져 밤 늦도록 공부하다 돌아온 두 아들을 본체만체 했습니다. 동역자는 이런 저의 모습을 보고 ‘아빠가 아니라 아저씨’ 같다며 책망을 하였습니다. 이런 자신을 볼 때 목자로써, JBF 선생으로써 자격이없고 절망감이 듭니다. 그래서 저의 가장 큰 기도제목은 사랑과 심정이 풍성한 사람이 되는 것 입니다. 그리고 그 답이 바로 ‘성경’에 있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줍니다.
이처럼 디모데가 말세의 때 승리하는 방법은 예수님을 배우고자 힘쓰고,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새로운 것을 배우고 적용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장 기본이 되는 ‘성경’으로 돌아가 성경을 연구하고 순종하며 가르치기에 힘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말씀을 준비하며, 제가 돌아서야 하는 것과 거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방향 주심에 감사합니다. 저는 돈과 성공을 위해 살았습니다. 가난한 집과 결핵으로 세상을 떠난 누나를 보면서 돈과 성공안에 행복이 있다고 믿었습니다.그래서 명문대를 진학을 목표로 머리를 빡빡깍고 쌍코피 흘려가며 열공하였습니다. 그러나 수능시험을 망치고 원하던 대학에 가지 못하자 운명과 패배주의자가 되었습니다. 깡소주를 마시고 담배를 피며 ‘빌어먹을 세상 전쟁이나 나버려랴’며 소리질렀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죄인을 찾아오사 말씀공부로 인도하셨습니다. 말씀을 배우는 가운데 하나님이 살아계시며 내 인생의 선하신 뜻과 계획을 두고 계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안에 내가 찾던 그 행복이 있음을 깨닫자, 누구보다 예수님을 만나고 싶었습니다. 97년 여름수양회는 평생 잊을 수 없는 제 인생의 큰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수양회 내내 눈물, 콧물 흘리며 뜨겁게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을 결단하였습니다. 구체적으로 미국유학생 선교사로 살고자 방향잡고 기도하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계획은 달랐습니다. 선교사가 아닌 국내 평신도 목자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리고 18년간의 직장 생활 가운데 함께하시고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여 주셨습니다. 하지만 월급을 받기 무섭게 빠져나가는 카드값과 점점 늘어가는 학원비를 생각할 때, 투 잡을 뛰어야 하는 것 아닌지 염려가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작년에 잘 다니던 좋은 직장을 그만두는 바람에, 물질이 부족했고 결국 동역자마저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 했습니다. 추운겨울 졸린 눈을 비비며 출근하는 동역자를 보니 마음이 무겁고 미안했습니다.
사실 직장을 그만둔 이유는 영적인 위기감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직장 안에서 ‘엔요의 아버지’ ‘영업의 신’이라는 애칭을 얻으며 상도 받고 승진도 하며 승승장구했습니다. 이때 겸손히 은혜를 잘 감당해야 했으나 그러지 못했습니다. 상사에게 잘 보이고자 권하는 술을 거부하지 못했고, 골프를 배워야 한다고 해서 비싼 돈을 들여 골프채도 샀습니다. 날마다 아침 저녁으로 북한산에 있는 골프연습장에 올라가 허리가 휠때까지 골프채를 휘둘렀습니다. ‘굿샷’하며 엄지척 해주는 맛에 시간가는 줄 몰랐습니다. 이처럼 인정과 재미에 푹 빠져 살 때 순간적인 즐거움이 있었지만 마음 깊은 곳엔 허무함이 밀려왔습니다. 동시에 사람의 매여 눈치보는 자신이 비참하게 느껴졌습니다. 이 때 깐깐한 사업부장이 새로왔고, 그 분과 갈등이 날마다 깊어졌습니다. 회의때마다 언성이 높아지고, 도저히 함께 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국 작년 이맘때 사표를 냈습니다.
이후 1년동안 세번이나 직장을 옮기는 불안정한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 기간동안 잃어버렸던 나의 하나님을 새롭게 만났습니다. 25년전 구원의 은혜를 다시 회복하였습니다. 그 때 안정된 삶에서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영적인 것들의 소중함이었습니다. 특히, 우리 모임과 목자님,사모님, 형제,자매들이 너무도 존경스럽고, 귀하고, 사랑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자격없고 부족한 저를 부르시고, 사용하신 하나님께 감사하였습니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게 뭘가 생각하다 친교부를 만들어 섬기게 되었습니다. 자녀들에 대해서도 판단하던데서 안아주고, 감당해주고자 하는마음을 갖게 되었고, 동역자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이쁘게 보였습니다. 캠퍼스 올라가 전도하는게 낯설었지만 감사함으로 동방 앞에서 말씀이 쓰인 과자를 나눠주었습니다. 출근전에 양식을 먹고, 기도하고자 방향잡고 씨름하게 되었습니다.
돌아보면 하나님께서 세상의 인정, 재미, 물질에 빠져 있던 죄인을 도우시기 위해 깐깐한 상사를 보내시고, 과감히 사표를 던지게 하셨습니다. 이후 3개월마다 직장을 옮겨야 하는 상황에서 자신의 능력이 아닌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케 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제가 구원의 은혜와 사랑를 회복하고, 세상에서 돌아서서 다시 하나님 안에 거하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특히 이번 말씀 통해 제가 배우고 확신했던 말씀이 모든 문제의 해결책임을 깨닫게 하심에 감사합니다. 제가 이 은혜와 사랑을 감사하며 현재 직장에서 성과를 내고, 맡기신 JBF와 청년들, 상명대 역사를 충성되게 감당하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입니다. 말세에 때가 될수록 사람들은 자기를 더욱 사랑하고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능력은 부인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같은 자들에게서 돌아서서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쓰인 성경에 거하는 것입니다. 이 성경이야말로 고통하는 시대 유일한 빛이요 희망입니다. 우리가 이 성경을 사랑하고 믿고 순종함으로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되어 새 봄학기를 능히 승리하기를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