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 마가복음 5:1-20 요절 / 마가복음 5:9
9절 이에 물으시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이르되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입니다 하고 우리나라 연예계를 이끄는 YG엔터테인먼트는 한류의 진원지로서 우리나라 대중문화를 알리는 큰 역할을 해왔습니다. 그런데 최근 불거진 사건들을 보면 우리나라 마약 유통과 섹스 산업의 진원지로 여겨질 만큼 엄청난 권력의 뒷배아래 음성적으로 불법을 행해 온 사실들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한 때 한류 열풍을 주도했던 인기 가수와 연예인도 마약과 정욕을 물리치지 못하고 변기유통(?)이라는 불명예를 안고 감방에 갔습니다. 정욕과 마약 등 중독으로 인한 악령의 세력을 우리 안에 쫓아내지 못하면 한사람의 인생은 파괴되고 맙니다.
지난 4월 경남 진주에서 정신분열증을 앓던 한 40대 남성이 아파트 건물에 불을 지르고 대피하던 이웃 들을 흉기로 공격해 사람들이 많이 죽었습니다. 지난 5년 간 우리나라 정신분열증 환자에 대한 통계를 보면 지난해까지 12만 2천명으로 집계됐고, 매년 2~3천명이 증가하면서 사회적으로 심각성을 더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2000년 전 심각한 정신분열증과 같은 귀신들린 사람을 예수님이 치료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정신분열과 중독은 나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문제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상관있습니다. 이것들의 공통점은 자기를 스스로 통제할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의 심령가운데도 나의 힘으로 통제할 수 없는 어떤 세력이 있습니다. 특히 죄 문제는 우리 힘으로 극복할 수 없는 강력한 세력입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 어떻게 하면 우리가 자유롭게 될 수 있을까요. 오늘 귀신들린 거라사인을 도와주신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그 비밀을 발견하길 기도합니다. 본문 1절과 2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1절 “예수께서 바다 건너편 거라사인의 지방에 이르러, 배에서 나오시매 곧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라” 거라사인의 지방은 갈릴리 호수 건너편에 있는 지역입니다. 로마의 폼페이 장군은 이곳을 점령하면서 유대인들을 분열시킬 목적으로 10개나 되는 도시를 만들고 이방인들을 거주시켰습니다. 그래서 이곳을 데가볼리라고 합니다. 이곳에 거주하는 이방인들은 유대인들이 부정하게 여기는 돼지를 키워서 로마 군인들에게 납품했습니다. 다른 나라 군인들이 주둔하는 도시는 소비가 잘 이뤄져서 다른 지역보다 유흥과 먹거리 등이 풍부하게 발달합니다. 미군부대가 있는 이태원, 동두천만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거라사란 마을도 겉보기에는 부유하고 평화스러운 곳이었습니다. 군인들이 있으니 치안도 좋았을 것입니다. 소비가 심하니 당연히 사람들도 많고 식당이나 상점마다 손님들로 가득 넘쳐났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살기 좋고 평화스럽게 보이는 마을에도 그늘진 문제가 있었습니다.
앞서 예수님은 많은 병자를 고쳐주시면서 그 인기가 ‘아미’ 팬들을 몰고 다니는 BTS 방탄소년단을 버금케 했습니다. 어린 소녀 팬들은 그분의 옷자락만 만지고서도 병이 낫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런 대단한 인기를 갖고 계신 예수님이 거라사인 지방에 도착했을 땐 ‘허공에다 주먹질’을 해대며 소리를 질러대는 귀신들린 사람만 나와 예수님을 환영했습니다. 그만큼 영적 소원이 없는 삭막한 동네였습니다. 3절부터 5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그 사람은 무덤 사이에 거처하는데 이제는 아무도 그를 쇠사슬로도 맬 수 없게 되었으니(잠21:16, 민19:11), 이는 여러 번 고랑과 쇠사슬에 매였어도 쇠사슬을 끊고 고랑을 깨뜨렸음이러라 그리하여 아무도 그를 제어할 힘이 없는지라,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 지르며 돌로 자기의 몸을 해치고 있었더라” 귀신들린 이 사람은 마을 공동묘지에서 생활했습니다. 거라사 동네 사람들은 귀신들린 이 사람을 붙잡아 아주 굵은 쇠사슬로 매어놓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쇠사슬도 끊고, 고랑도 깨뜨려 자신의 몸에 엄청난 상처를 냈습니다. 그는 귀신 때문에 짐승처럼 밤마다 슬프고 고통스럽게 울어댔습니다. 그리고 피가 나도록 자기 몸을 바위에 대고 비볐습니다. 도저히 사람으로는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비참한 삶을 연명했습니다.
귀신은 한 사람을 파괴하고, 결국 그 사람도 곧 죽게 만듭니다. 귀신은 파괴적인 속성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6절에서 8절을 보겠습니다. “그가 멀리서 예수를 보고 달려와 절하며, 큰 소리로 부르짖어 이르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하건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히지 마옵소서 하니” 이 사람은 예수님께 달려와 꿇어 절을 했습니다. 그리고 큰 소리로 부르짖어 고통을 호소하였습니다. 하지만 그의 안에 있는 귀신은 말합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여, 나와 상관이 없는데 제발 나를 괴롭게 하지 말아주소’.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예수님이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귀신은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는 예수님의 말씀 앞에 두려워 벌벌 떨었습니다. 귀신은 예수님을 향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면서 자신과 상관이 없으니 떠나달라고 말합니다. 이는 우리가 우리 삶에 하나님을 모시고 살 때 귀신은 거할 수 없음을 증명해주는 말씀입니다. 우리도 혹시 오늘 귀신들린 사람처럼 예수님이 우리 삶에 상관없는 분으로 대하고 있지는 않은지 잠시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예수님과 적당히 거리를 두고 세상과 믿음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 우리도 이렇게 귀신들린 사람처럼 귀신의 세력에 사로잡힐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우리와 상관없는 분처럼 대해서는 안 됩니다. 마음을 확고히 정하지 못하고 ‘적당히 신앙생활’하려는 태도에서 벗어날 수 있길 기도합니다. 9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이에 물으시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이르되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 하고” 예수님은 그 귀신들린 자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그는 ‘군대’라고 대답했습니다. 저는 이 구절이 잘 이해가 안됐습니다. 군대는 뭐고, 우리는 뭐지? 여러분들은 귀신의 이름이 군대와 우리라는 것이 이해가 됩니까? 우리가 아는 귀신은 결혼을 하지 못하고 억울하게 죽은 ‘처녀 총각귀신’, 물에 빠져 죽은 ‘물귀신’ 이런 귀신들이 아닌가요? 군대 귀신이라니 선뜻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여기서 ‘군대’는 희랍어로 ‘Region’을 뜻하는데 로마 군인 6천명을 상징하는 군대를 말합니다. 이로 보건데 귀신들린 사람은 많은 수의 전투적 악령의 지배를 받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거라사 귀신들린 자는 그 이름이 너무 많아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래서 ‘군대’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름이 너무 많아 이름을 잃어 버린 사람이 되었습니다. 자기를 채우려는 욕망이 너무 많아 자기를 상실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좇아가는 목표가 너무 많아 자기 길을 잃어버린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거라사 귀신들린 자의 모습입니다. 철저히 파괴된 그의 인생 앞에 예수님은 찾아와 “네 이름이 무엇이냐” 고 질문하셨습니다. 이 때 그의 안에 있던 귀신은 정체를 드러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을 지배하는 더러운 세력을 내쫓기 위해 귀신더러 인간의 몸에서 나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신 데에는 우리가 귀신에게 지배당하지 않도록 악령의 세력을 물리치고 쫓아내길 원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에게는 아무리 강력한 귀신이 군대 급으로 떼거지로 몰려있어도 능히 쫓아낼 수 있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은 그 절대적인 권세와 능력으로 ‘네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으셔서 숨어 있던 귀신의 정체를 드러내셨습니다. 이 때 귀신은 예수님 앞에 전혀 힘을 쓸 수 없었습니다. 귀신은 정체가 드러나면 더 이상 그 한 사람의 몸속에 거할 수 없습니다. 귀신의 정체를 알고 대항하는 것이 그만큼 중요합니다.
담배와 술에 빠진 사람이 그게 몸을 망가뜨리고 가정을 파괴하고 영혼을 무너뜨린다는 사실을 인지할 때 그것들을 끊고자 합니다. 죄 문제도 우리가 알지 못해 저지를 때가 많지만 죄인지 알면 죄를 짓기 힘들어 집니다. 이 말씀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우리 안에 악한 귀신의 정체를 아는 것으로부터 귀신세력을 내어 쫓는 역사가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앞에서 우리도 우리 안에 숨어 있는 죄의 세력을 분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 안에 있는 시기심이 있다면 그것이 죄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게 중요합니다. 그 시기심에 대해 감각이 무디어져 “어쩔 수 없다. 시기심이 있는 모습이 바로 나야”라고 합리화하면 시기심과 미움을 부추기는 사탄의 세력이 그 한 사람의 마음 가운데 죄악 된 모습으로 역사하게 됩니다. 정욕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욕에 대해 “인간의 자연스런 욕망이고 이게 바로 나야” 라고 생각하면 우리 안에 있는 죄의 세력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게 죄고, 인간이 함께해서는 안 되는 더러운 것임을 인식할 때 그런 귀신의 세력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악의 세력은 우리 힘으로 벗어나기가 매우 힘듭니다. 이러한 문제에서 우리가 어떻게 벗어날 수 있습니까? 오늘 본문에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 죄의 세력이 밝히 드러나면 우리 안에 있는 중독과 죄의 세력이 거할 수 없게 됩니다. 우리가 성경 말씀을 진지하게 읽고 묵상하고, 예배와 성경공부를 통해서 내 안에 이런 죄와 시기심, 정욕 등에 대해 중독에 빠져 있구나! 내 힘으로는 어쩔 수 없구나! 하는 점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죄에 대한 힐링과 귀신의 세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시작을 할 수 있습니다. 10~13절 말씀을 보십시오. “자기를 그 지방에서 내보내지 마시기를 간구하더니, 마침 거기 돼지의 큰 떼가 산 곁에서 먹고 있는지라 , 이에 간구하여 이르되 우리를 돼지에게로 보내어 들어가게 하소서 하니, 허락하신대 더러운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매 거의 이천 마리 되는 떼가 바다를 향하여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서 몰사하거늘” 예수님은 귀신에게 돼지에게로 들어가라고 허락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돼지를 희생하고서라도 한 사람을 자유하게 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인간을 돼지 2천 마리가 아니라, 온 천하보다도 더 귀한 존재로 여겼습니다. 돼지 이천 마리가 아니라 우리 인생들을 자유하게 하시기 위해서 당신의 생명까지 희생하셨습니다. 나 한 사람의 생명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은 세상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도와주심으로 그 귀신들린 자는 정신이 온전하여 졌습니다. 그런데 마을 사람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대했습니까? 16,17절을 보십시오. “이에 귀신 들렸던 자가 당한 것과 돼지의 일을 본 자들이 그들에게 알리매, 그들이 예수께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그 지방에 귀신들린 사람이 이 한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주민들은 예수님이 떠나시길 간구했습니다. 왜냐하면 주민들은 귀신들린 사람들의 몸에서 귀신을 다 쫓아낼 것 같으면 그 지역에 남아나는 돼지가 없을 것이란 두려움 때문입니다. 그들은 물질 중심적인 가치관을 그대로 드러냈습니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미친 사람들이 생겨나지 않았나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정말 한 영혼을 사랑하고 돼지를 희생해서라도 귀신들린 사람을 살리려는 마음을 가졌다면 저렇게 미친 사람들이 많아질 리가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가정에서 아이가 그릇을 깰 때 부모가 아이에게 “그릇이 비싸긴 하지만 너가 안 다쳐서 다행이다”라고하면 아이가 정신적으로 건강하게 자랄 수 있습니다. 반면 “그게 얼마나 비싼 건데”라며 물질 중심적인 가치관으로 아이를 대한다면 아이는 그릇보다 못한 무가치한 존재로 자신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대하면 아이는 스스로 파괴적이 돼서 가치 있는 존재라는 인식을 할 수 없는 자존감이 매우 낮은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자녀와 양들을 대할 때 그 한 사람을 세상적 기준과 가치로 평가할 게 아니라 영혼 자체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온 천하보다 중요한 존재로 대해야 합니다. 그 사람이 어떤 결과물을 내던지 간에 존재 자체를 가치 있다 여기는 영혼 중심의 가치관를 가질 때 그 한 사람이 온전한 믿음의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18~20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귀신들렸던 자에게 구원의 은혜를 증거하며 살도록 도와주셨습니다. 데가볼리에서 가장 유명한 귀신들린 자가 예수님을 증거 하는 증인으로 살게끔 도우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능력이 귀신들려 죽을 수밖에 없는 한 인생을 이처럼 크게 변화시켜 주셨습니다. 귀신들린 한 영혼을 불쌍히 여기사 구원해 주신 예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사실 저도 더러운 귀신들린 자처럼 믿음 없이 살아 갈 때가 있었습니다. 고등학교 때부터 교회를 나갔던 저는 군 입대를 하기 전까지 독실한 크리스챤으로 모범적인 생활을 했었습니다. 저는 공업고등학교 기계과에서 기계제도를 전공했습니다. 학교를 입학하고 몇 달 안 돼 곧바로 자격증을 취득했습니다. 사실 공업고등학교에서 3년간 자격증 취득을 목표로 공부하는데 자격증을 일찍 취득하고 나니까 시간이 엄청 많아졌습니다. 또 시험을 봐도 일단 기계 과목에서 자격증 프리미엄이 있다 보니 성적이 늘 잘나왔습니다. 학교에서 주는 장학금 외에도 자격증을 취득하자 H기업에서 스폰이 들어와 3년 간 기업체 장학금도 받으며 학교를 다녔습니다. 식당에서 잡일로 생계를 유지해 온 어머니와 함께 살면서 어려운 가정 형편이었지만 저는 장학금 덕분에 집에 경제적 도움을 받지 않고 학교생활을 해나갈 수 있었습니다. 3학년 현장 취업에서는 스폰을 해준 H기업에 입사해 기계설계를 잠깐 하다가 담임선생님께 얘기하고 입시학원을 다녔습니다. 입시철이 다가오자 담임선생님은 당시 신생대학인 한국기술교육대와 지금의 서울과학기술대를 추천해 주셨습니다. 그땐 내신전형이 없던 시절이지만 일부 신생대학이나 산업대학은 내신 좋은 기능계 학생들을 유치하기 위해 동일계로 전형할 경우 학력고사 성적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고 대학에 들어갈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저는 하늘이 준 기회를 마다하고 제 자신을 과신한 나머지 마지막 학력고사가 있던 93년, 신촌에 있는 한 대학에 원서를 넣었다가 보기 좋게 떨어졌습니다. 입시학원을 다녔지만 제 수준으로는 들어가기 어려운 대학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 열심히 공부했으니까 당연히 합격할 수 있다는 교만이 제 안에 있었습니다. 남들이 알아주는 좋은 대학에 가서 주위에서 인정받고 싶은 욕구도 있었습니다. 그런 허영심과 교만의 귀신이 내안에 들어와 현실적 판단과 올바른 선택을 하지 못하게 막아버렸던 것입니다. 결국 저는 이렇게 대학에 떨어지고 난 뒤, 재수도 해보려고 했지만 집안 형편상 대학입시를 접고 군에 입대했습니다. 해군 부사관으로 입대해서 4년 간 군 생활을 하면서 음란하고 쾌락적인 귀신의 세력에 휘둘려 타락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착실하게 살아 온 과거는 온데간데없이 군 생활은 쾌락을 즐기기 위해 들어 온 것처럼 살았습니다. 군 생활을 하면서 동료들과 어울려 밤새도록 술을 퍼마실 때도 있었고, 술 동료와 함께 휴가를 나가면 술집에서 정욕 죄를 짓곤 했습니다. 기독교인으로서 영성은 완전히 무너졌고 정욕 귀신, 술 귀신이 되어 눈이 시뻘게 질 때까지 밤새 술을 마시다가 해가 뜨면 부대로 다시 들어가곤 했습니다. 군 전역을 1년 앞두고 하나님은 쾌락에 취한 저의 삶을 심판하시듯 육지와 멀리 떨어진 연평도로 보냈습니다. 그곳에서 저는 근신하면서 차분히 전역 후의 삶을 준비했습니다. 대학입시에 다시금 소원을 갖게 됐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98년, 스물 네 살의 늦은 나이에 국민대에 합격할 수 있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군대를 전역하고 대학을 다니면서 다시 믿음의 삶을 회복하고 싶은 마음의 소원이 생겼습니다. 요셉과 같은 순수한 신앙을 닮고자 했던 저의 어린 시절 신앙은 군대 악령의 세력 앞에 속절없이 무너져 다시 믿음이 회복될 수 있을 까하는 답답한 심정이 제 안에 있었습니다. 대학 1학년 가을학기 어느 날 빈 강의실에 홀로 앉아 있을 때 성에스더 목자님이 찾아와 “성경 공부 해보지 않을래요?” 하고 물었습니다. 그 때 저는 곧바로 “네” 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성하진 목자님과 성경공부를 시작했고, 이듬해 여름 수양회에 초청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수양회에서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에게 예수님이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는 말씀이 제 마음에 역사했습니다. 저는 이 말씀에 은혜를 받고, 소감을 발표하면서 정욕과 죄악에 물들었던 시간을 많은 눈물로 회개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캠퍼스 목자로서 살겠다는 확신이 당시에는 없었습니다. 서지 않았습니다. 캠퍼스 선교사로 살겠다는 생각은 조금도 없었습니다. 일반 교회에서 있는 듯 없는 듯 신앙생활 하는 그런 삶을 살고 싶었습니다. 모임을 떠났고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나오지 않았습니다. 다시 모임에 나와서는 한쪽다리는 기성교회에 걸쳐놓고 다른 다리는 UBF에 걸치면서 믿음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당시 목자님은 집까지 심방을 와주시고 기도해 주셨습니다. 그렇게 믿음의 뿌리를 내리지 못한 생활을 이어 갈 때 하나님은 저에게 뜻밖에 방향을 주셨습니다. 독일 현지에 취업시켜 주신 것입니다. 독일에 나갈 때 스텝목자님이랑 평신도 목자님들이 독일로 파송하는 안수기도를 해주셨습니다. 캠퍼스 목자로 살고자 하는 마음도 없는데 목자님들에게 안수기도를 받을 때 참 민망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게다가 스텝목자님은 제가 머무는 독일에 연락해 현지 선교사로 나가계신 선교사님과 성경공부를 예약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뜻하지 않게 독일 현지 센터에서 예배도 드리고 선교사님과 성경공부도 하면서 하루하루가 정말 신기하게 느껴졌습니다. 캠퍼스 선교사로, 캠퍼스 목자로 살고자 하는 마음에 확신이 서지 않았던 저에게 독일에서 신앙생활은 믿음의 방향을 잡을 수 있도록 돕는 기적과도 같은 체험이 됐습니다. 그 동안 제 마음 한 곳에는 캠퍼스 선교사로, 목자로 선택 받는 사람들은 공부도 잘해야 하고, 소명에 대한 확신과 지성인으로서 지적 소양도 잘 갖춰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영어도 잘해야 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별 볼일 없고 양다리 걸치며 불신으로 가득 찬 인생에게 독일 선교지를 체험케 하심으로 세계 캠퍼스 사역자로 비전을 보이셨습니다. 또 뜻하지 않게 독일에서 돌아 올 때 하나님은 창세기 28장 15절 “내가 너와 함께 있어 어디로 가든지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는 약속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너를 떠나지 않겠고, 늘 함께 하시겠다’는 말씀으로 UBF 모임 가운데 뿌리를 내리게 해주셨고, 저의 믿음이 견고해지도록 도와주셨습니다. 독일에 페터 슈바이처 스텝목자님은 저에게 "I hope you change from machinery to missionary" 이 말을 해주셨는데 아직도 또렷이 기억납니다. 확신이 없이 그냥 다리만 걸쳐 놓으려고 했던 저에게 하나님은 확신을 주시고, 우리 모임가운데 붙들어 주셨습니다. 말씀과 기도 가운데 저는 장막생활을 하게 됐고, 믿음의 결혼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포항 한동대 개척역사를 섬겨 올 수 있었습니다. 성경공부를 통하여 더러운 정욕과 세상에서 방탕한 삶을 살았던 것을 회개하고 악령의 세력으로부터 벗어 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저에게 비전을 보이시며 캠퍼tm 목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에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아직도 저에게는 쫓아내지 못한 악의 세력이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저는 화가 나면 삭히지 못하고 귀신들린 자처럼 소리를 지르며 혈기를 부리는 습관이 있습니다. 이런 혈기는 제 삶에 늘 가시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화가 나면 분노조절이 잘 안되고 소리를 지르기 일쑤이고, 차를 타고 가다가 도로 위에서 시비가 붙으면 장소가 어디든 간에 멱살을 잡고 흔들었습니다. 사람들이 보고 있는 곳에서도 그런 행동이 지속됐습니다. 저의 혈기는 집에서도 아이들에게 여과 없이 드러났습니다. 동역자도 아이들도 많이 힘들어 했습니다. 밥상을 엎은 적도 있고, 입에서 쌍욕도 내뱉은 적이 있습니다. 회사에서는 흉기를 들고 쫓아간 적도 있고, 직장동료의 팔을 꺾은 적도 있습니다. 이렇게 혈기 귀신에 사로잡히면 저는 정말 아주 심각해집니다. 상담대학원을 다니면서 혈기에 대해 상당한 도움을 받고 혈기가 제 안에서 사라진 줄 알았는데 어머니 장래를 치르고 난 뒤 친형과의 다툼에서 역대급 혈기를 드러내 가족들과 관계성이 절단 났습니다. 정말 귀신들린 사람처럼 달려들었습니다. 끊어지지 않는 죄악 된 쇠사슬이 저를 괴롭혔습니다. 예수님은 제가 허랑 방탕하고 정욕과 죄악에 물었을 때, 말씀으로 구원해 주셨듯이 이문제에서도 구원해 주실 줄 믿습니다. 혈기 왕성한 베드로를 변화시켜 주셨듯이 저를 변화시켜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겸손하고 온유하신 예수님을 배우며 캠퍼스 목자로서 믿음의 달음질을 이어 갈 수 있길 소망합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내적으로 귀신과 악령의 영향력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한 영혼을 불쌍히 여기시고 귀신의 세력으로부터 자유를 주길 원하십니다. 이 예수님을 내 마음에 영접할 때, 우리는 내면의 자유와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자유롭게 해주시기 위하여 말씀으로 죄인 된 자아를 발견하게 도와주십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예수님의 말씀 앞에 죄인 된 자아를 발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가 참 자유를 누리며, 예수님의 증인된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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