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누가복음 제 39 강
메시지 (이아브라함)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말씀 / 누가복음 23:1-49
요절 / 누가복음 23:34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이제 누가복음도 끝나갑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왜 오셨습니까?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러 오셨습니다(19:10). ‘잃어버린
자를 찾는 행위’를 ‘여행’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누가복음을 ‘예수님의 여행 기사’라고도 합니다. 자! 잃어버린
자를 찾았어요. 그러면 구원을 해야죠. 그런데 그냥 되는
것이 아니라 댓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그 댓가는 바로 예수님의 살과 피, 곧 십자가 죽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다른
말로 하면 죽으러 오신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구원하는 방법이죠. 그런데
이것이 너무나 힘든 것이어서 예수께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셨죠.
누가복음은 사도행전과 짝이 됩니다. 그리고 역설이 많이 나옵니다. 역설이 뭐죠?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고, 낮아지는 것이 높아지는 것이고, 죽는 것이 사는 것입니다. 특히 누가복음에는 비천한 자들이 복을 받는다고 나옵니다. 가난한
자들이 기뻐하는 반면, 부자들은 빈 손으로 보내집니다.(눅1:53) 그래서 누가복음을 ‘비천한 자들의 복음’이라고도 합니다. 소외되고 비천한 자들이 많이 나오는데. 자식 없고 늙은 사가랴 부부, 비천한 시골처녀 마리아, 예수 탄생을 목격한 비천한 목자들, 당시 죄인 취급받았던 세리, 창기, 죄인들, 사람
수에도 넣지 않았던 여인들입니다. 이들은 요즈음 말로 하면 앗싸들입니다. 이들이 하나님 나라에 초대받고 구원받죠. 반면 당시 인싸들이었던
바리새인, 서기관, 종교지도자들은 오히려 예수님을 배척하고
대적함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누가복음에서 역설의 최고봉은 누구인가요? 예수님 자신 입니다. ‘왕이 마굿간에서 태어나서 구유에 누었다’, ‘구주가 제자에게 배반당하고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았다’ 그리고 ‘그 구주가 십자가에 달려 죄인으로 처형되어 죽었다’ 세상 지식으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내용입니다. 누가가 이 복음서를 쓴 A.D.60년대초
십자가는 유대인에게 거리끼는 것이었습니다. 나무에 달린 자마다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자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죠.(신21:23) 또한 헬라인에게 십자가는 연약함과
수치의 대명사였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은 사형수가 인류의 구원자다’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런 그들에게 누가는 역설의 진리를 통해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려줍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 달리셨는지,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성령께서 깨달음 주시길 기도합니다.
1,2절을 보십시오. “무리가
다 일어나 예수를 빌라도에게 끌고 가서 고발하여 이르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 하니” 예수님이 무리들에게 체포당하시고 심문받으셨습니다. 여섯차례 심문을 받았는데, 전직 대제사장 안나스, 현직 대제사장 가야바, 공회에 끌려가 심문받습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에 나오는 빌라도, 그리고 헤롯, 다시 빌라도에게 와서 심문받죠. 1절에서 무리가 예수를 끌고와서
고소합니다. 무리는 산헤드린 공회원과 성전 경비대(무장군인)입니다. 이들은 유대 토착 실세입니다. 이들이 빌라도에게 고소를 하는 것이니 빌라도에게 상당한 압박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는 긴장을 했겠죠. 여기서 까딱 잘못되면 토착세력과 로마세력간의
무력 충돌도 일어날 수 있는 긴박한 상황입니다. 무리들이 고소한 내용이 무엇인가요? 세 가지입니다. ‘우리 백성을 미혹했다’,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했다’, ‘자칭 왕 그리스도라
했다’. 이것이 사실인가요? 예수님이 백성을 미혹했나요? 아니죠. 예수님은 백성에게 오히려 선한 일을 하셨습니다.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 진리를 가르치시고 소외된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지 말라고 했나요? 아니죠.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라고 했습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도전하셨습니다. 자칭 왕 그리스도라 했나요? 예수님은 세상 나라 왕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끌고 내려오셔서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에게 하나님 나라를
그 마음속에 임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기쁨과 생명과 풍성함을 누리게 하셨죠. 그게 진실이죠. 그들의 고소는 모두 거짓입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심문합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님께서 대답합니다. ‘네 말이 옳도다’ 빌라도가 심문한 후 뭐라고 말하죠? ‘이 사람에게 죄가 없다’ 몇 번이나 말하죠? 3번 말합니다.
‘죄가 없다’, ‘죄가 없다’, ‘죄가 없다
그러니 때려서 놓겠다’. 로마 재판관을 통해, 세상 권력자를
통해 예수님에게 죄가 없다는 것이 지금 증거되고 있습니다.
이에 5절에서 무리들은 ‘그가
온 유대에서 가르치고 갈릴리에서부터 시작하여 여기까지 와서 백성을 소동하게 한다’ 무리가 어느 지역을
들먹이죠? ‘갈릴리’입니다.
갈릴리는 열심당원의 본거지로 끊임없이 로마에 대항하여 봉기를 일으켰던 지역입니다. 과거
빌라도가 무력으로 봉기를 진압하여 갈릴리 사람 수천명을 죽인 적도 있었습니다. 이들의 속셈은 ‘갈릴리’와 ‘예수’를 엮어서 빌라도가 ‘이 사람, 가만
두어서는 안되겠네’ 이런 생각을 하도록 만들려는 속셈인거죠. 그러나
빌라도가 보기에 ‘예수가 그럴 위인이 아닌 것 같은데~’ 눈치채고서
생각합니다. ‘예수가 갈릴리 사람이라고~ 헤롯에게 넘기면
되겠네’ 그리고 갈릴리 분봉왕 헤롯에게 보냅니다. 헤롯은
지금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와 있습니다. 예수를 넘겨받은 헤롯은 기뻐했습니다.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고 보고자 한지 오래 되었습니다. 소경의 눈을
뜨게 하고, 귀머거리를 듣게 하고 오천 명을 먹이고 죽은 자까지도 살렸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확인해 보고 자기 앞에서 한번 해보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해롯은
진리보다 재미를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쾌락을 추구하는 사람이죠. 마술사가
마술을 하여 자기를 즐겁게 해 주었듯이 예수님의 이적 행함을 보고서 재미를 좀 보자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무 말도 안합니다. 귀를 즐겁게, 눈을 즐겁게
할까 했는데, 아무것도 안하니~ 실망하죠. 재미가 없으니 흥미가 없어지고 흥미가 없어지니 희롱을 합니다. 희롱하여
재미를 느끼려는거죠. 재미를 추구하는 사람이라 빛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보냅니다. 역설적이게도 빛난 옷은 예수님이 영광스런 왕임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은 다시 빌라도에게 끌려오죠. 빌라도는 어찌하든 예수님을 석방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뜻대로 안됩니다. 그러니 이제 타협책을 내
놓습니다. 예수와 바라바 중 한 사람을 석방하자고 제안하였으나 무리들은 바라바를 선택하죠. 이제는 때려서 놓겠다 하지만 무리들은 ‘십자가에 못박도록’ 강력하게 요구합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그들의 소리가 이긴지라’
이 말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무리들의 배후에는 종교지도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진짜 배후는 사단 마귀입니다. 지금 사단
마귀가 이겼다는 것입니다. 사단 마귀의 조정에 의해 무리들을 동원했을 때 세상 권력도 굴복하고 결국
사단 마귀의 뜻대로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졌을까요? 그리고
예수님이 졌을까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수님이 지금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양처럼 어찌보면 바보처럼 당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소리가 이긴지라’ 여기에는 역설이 들어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들이 이겼습니다. 그러나 실은 ‘하나님께서 승리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승리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고 체포당하실 때 ‘지금은 어둠의 시간이다’, ‘그들의
때다’고 하셨습니다.(눅22:53)
지금은 마귀의 시간이라는 것이죠. 하나님은 이것을 이용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십니다. 유다가 예수님을 팔고, 제자들이 도망가고, 베드로가 예수를 세 번 부인하고, 예수님이 힘없이 십자가 형벌을
받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예수님과 제자들과 교회가 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일시적인 것이고 궁극적으로 승리합니다. 마치 하늘이 땅보다
높은 것 같이 하나님의 길은 사람들의 길보다 높고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보다 더 높습니다.(사55:9) 마귀는 자기가 이겼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사용된 것입니다. 이것이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세상 사람들이 이긴
것처럼 보이고, 마귀가 이긴 것 같고, 우리는 절망가운데
빠지고, ‘이제 망했다~’ 생각되어질 때 하나님은 역전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빌라도는 그들이 원하는대로 예수를 넘겨줍니다. 무리의 뜻대로 되었지만
실은 하나님의 뜻대로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게 된 것입니다. 역설의 클라이막스가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세상 여행의 종착지인 십자가에 달리십니다. 그리고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하늘로 올라가실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약속이 예수님에 의해 온전히 이루어집니다. 구속역사가 완성이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는 승리의
십자가요 영광의 십자가입니다.
26절부터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감당하시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신 내용입니다.
첫 번째가 누구죠? 구레네 사람 시몬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가다가 넘어지고, 가다가 또 넘어지고, 더 이상 지지 못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했습니다. 군인들이 시골에서 올라온 시몬을 붙잡아 ‘네가 십자가를 져’하며, 대신 억지로 십자가를 지고 예수의 뒤를 따르게 합니다. 사실 예수님은 파도를 잠잠케 하셨고 물 위를 걸으셨던 그 신적 능력을 사용하여 능히 끝까지 지고 갈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I need you’ 시몬의 도움을 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뭡니까? 그에게 십자가를 지는 은혜, 그 축복을 받도록 하기
위함이 아닌가요? 시몬은 이때 ‘재수없이 걸려서 이게 뭔
고생이람~. 하필이면 왜 나야~.’ 십자가를 힘들게 지고
가면서 속으로 ‘아~ 힘들어 죽겠네. 죄짓고 십자가 지는 마당에 끝까지 남에게 피해주냐~’ 이렇게 욕했을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현재 억지로 십자가를 졌지만 나중에 그것이 얼마나 큰 축복이었는지 알았을 때
감격했을 것입니다. 이 사람은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라고 마가복음에 나오는데, 후에 구원받고 이 가정이 초대교회에 중요하게 쓰임 받습니다.(롬16:13) 우리의 삶 속에서 예수님께서 ‘I need you 당신의
도움이 필요해요’ 이럴 때 ‘내가 왜 이 십자가를 져야 해? 다른 사람을 시키지~’ 이렇게 하지 마시고 ‘이것은 나를 향한 주님의 사랑이다. 은혜다. 나를 동역자 삼으시는구나! 예수님을 깊이 알게 하고자 하는거구나!’ 이렇게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지는 십자가는 은혜요 특권입니다.
예수님이 두 번째로 관심을 가진 사람은 슬피우는 여자들입니다. 28절을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왜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합니까? 누가복음의 특징 중 하나가 심판의 무서움을 굉장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부자와 나사로 비유에서 부자가 불이 타는 지옥에 가서 너무나도 고통스러워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을 배척하고 대적하는 자들에게 임할 심판의 결과가 얼마나 엄중한가를 알려줍니다. 구약에 보면 무고한 피를 흘리면 그 피 값을 하나님께서 반드시 찾는다고 했죠.(신19:10) 땅이 그 피를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그래서 가인이 아벨을
죽이고 나서 땅이 호소하자 가인이 괴로워 하죠. 그에게 임한 형벌이 중하여 죽겠다고 합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이 멸망하는 이유가 뭐였습니까? 그들의 죄악도 있지만
선지자들의 피를 흘렸기 때문이죠. 전에 예수님께서 ‘화 있을진저
바리새인들이여~’ 책망하시면서 모든 선지자들의 피를 이 세대가 담당해야 한다고 경고했습니다.(눅11:51). 한번 생각해 봅시다. 선지자의 피 값도 이러할진데, 예수님의 피 값은 어떠할 것 같습니까? ‘죄없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피흘리게 했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최고의 형벌을 받겠죠. ‘푸른 나무에도 이렇게 하거늘’ 푸른 나무는 예수님이죠. ‘마른 나무는 어떻게 되겠느냐’ 마른 나무는 ‘너희’입니다. 인류가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을 받을 것인데, 그 이유가 우리의 죄
때문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피 흘리게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에게 예수님의
피 값을 물으시고 심판하실 것입니다. 반대로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면 어떻게 되죠? 생명을 얻습니다. 피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죽음, 하나는 생명입니다.
예수님은 슬피우는 여자들을 걱정하시면서 예수의 피를 흘리게 한 그들의 죄, 곧 예루살렘에
임할 심판에 대해 말씀하심으로 그들에게 관심을 나타냅니다. 자신의 죽음보다 그들이 받을 형벌이 얼마나
중한지, 너희가 얼마나 심각한 죄를 지금 짓고 있는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것을 알아야 우리가 엄중한 심판에 대해 대비하고 그 해결책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예수님이 세 번째로 관심을 가진 사람들은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은 자들입니다.
34절을 다함께 읽겠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이 당시 십자가 형벌을 받고
죽는 사람은 이렇게 기도했다고 합니다. “나의 죄로 말미암아 죽으니,
하나님~ 나를 용서해 주세요” 그런데 예수님은
무죄합니다. 무흠합니다. 의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기도해야 상식적일까요? “하나님, 전 억울합니다. 저의 억울함을 풀어주세요. 이 형벌은 부당합니다. 저를 살려주세요. 저들을 손 좀 봐주세요” 그런데 예수님은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용서의 기도를 합니다. 그들의 죄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떠나 자기 길을 가는 죄입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은 죄입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단 죄입니다. 이렇게 자기를 대적하며 죽이고 있는원수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나에게 조금만 섭섭하게 해도 험한 말로 반격하지 않습니까? 마음으로 살인하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의 용서의 기도는 우리 범죄한 인간들을 향한 성자 하나님의 한량없으신 자비와 긍휼입니다. 이를 우리가 배울 때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은 미국 몽고메리에서 인종차별을 하는 버스 승차 거부 운동을 하다가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때 나이가 28세였습니다. 옥중에서
그는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제목으로 설교 말씀을 썼습니다. 거기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우리를 투옥해도 그대를 사랑하리라. 우리 집에 폭탄을 던지고 우리 아이들을 위협해도 그대를 사랑하리라. 한밤중에
우리 마을을 습격하여 우리를 때리고 반쯤 죽여 놓아도 그대를 사랑하리라. 그러나 우리의 대장은 예수시오. 우리의 깃발은 하나님이시니 결국 어느 날인가 사랑이 승리할 것이다. 우리의
승리는 우리 흑인만의 승리가 아니라 전 세계에서 차별받고 사는 모든 민중의 승리이므로 우리는 이중의 승리를 거두리라” 이 설교를 들은 사람들이 그에게 ‘어떻게 이렇게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가?’ 물었습니다. 그가 대답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생각하는 일 없이 원수 사랑은 불가능합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를 대면할 때 용서가 가능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렇게 용서의 기도를 하는데 사람들이 어떻게 하는지 보세요. 관리들은
비웃었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 군인들은 못 먹을 신 포도주를 주면서 죽어가는 사람을 놀리고 있습니다.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네가 너를 구원하라” 행악자, 곧 같이
십자가에 달려 죽는 행악자 조차도 예수님을 비방합니다.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이러한 것들이 예수님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요? 이것은 십자가에서
내려오도록 하는 사단의 시험입니다. 예수님이 공생애 시작할 때 광야에서 사단 마귀는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해 봐’ ‘나에게
절 한번 꾸벅하면 세상 다 줄게’ ‘성전에서 뛰어내려 봐. 안
다칠거야’ 이렇게 유혹했죠. 그 마귀가 예수님의 생애 마지막까지
유혹하며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유혹합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극복하셨죠.
어떻게요? 이미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심으로 승리를 하셨죠. 예수님은 지금 십자가에서 승리를 체험하고 계십니다. 십자가에서 내려와서
사는 것이 승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승리입니다. 우리가 잘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까딱 잘못하면 세상에서 잘 되는 것이 승리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세상에서
가난하게 살고 병에 걸리고 죽임을 당하고 세상 사람들에게 조롱을 당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승리입니다.
누가는 대적자들의 말을 통해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를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이들의
말에서 ‘만일’을 빼면 어떻게 됩니까? 예수님은 ‘그리스도다’ ‘유대인의
왕이다’ ‘자신과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구원자다’ 입니다. 행악자가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고
비방했는데, 예수님은 그렇게 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다음에 나오는 십자가에 달린 다른 행악자와의
대화를 통해 보여주십니다.
예수님은 네 번째로 한 행악자에게 관심을 갖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한 행악자가 말합니다. 40,41절을 읽습니다.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그는 회개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기도합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그는 자신을 주님께 의탁합니다. 이때 예수님은 뭐라고 답하십니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낙원은 ‘에덴동산’을 지칭합니다. 우리 인간은 범죄함으로 낙원에서 쫓겨났습니다. 에덴동산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이 지키고 있어 아무도 들어갈 수 없었어요. 그런데 이제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으심으로 그 길을 활짝 여셨습니다. 들어가면서, 회개한 행악자도 데리고 들어가겠다고 하십니다. 첫째 아담은 범죄함으로
에덴동산에서 쫓겨났고, 둘째 아담은 막힌 낙원 문을 여십니다. 이것이
실제라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이 바로 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진 것입니다.(45절)
여기서 ‘십자가에 달린 행악자가 낙원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구원은 우리의 행위나
인격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예수님의 공로에 바탕을 둡니다. 또한 예수님 안에서 그 어떤 죄인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소망을 가집니다. 착한
일을 한 적도 없고, 앞으로 그럴 기회조차 없는 세상의 쓰레기 같은 사람도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아멘~
44절을 보면, 제육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됩니다. 가장 햇빛이 쨍쨍 내리쬘 시간인
정오에 해가 빛을 잃고 어둠이 세상에 임하여 오후 3시까지 계속됩니다.
이는 자연계를 통해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이 얼마나 엄중한가를 나타내기도 하고 사단의 시간임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돌아가시기 바로 직전 큰 소리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영혼을 성부
하나님께 의탁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나요? 예수님을
죽음에서 살리십니다. 예수님이 스스로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그를 살리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로 올리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게 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께 우리를 의탁해야 합니다. 행악자처럼
예수님께 의탁하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살리시고 우리를 하늘로 올리십니다.
예수님은 드디어 숨을 거둡니다. 이를 지켜본 백부장이 말합니다.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예수님이 죄가 있어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예수님이 죽으시는 것입니까? 벧전3:18은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도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써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해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여 죽으셨다는 것이죠. 그 목적은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신 후 구경하는 이들이 어떻게 합니까? 가슴을 치며 돌아갑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목격한 이들의 마음에 찔림이 있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들 중 나중에 사도행전에서 베드로가
설교할 때 믿게 된 자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마음을 구원에 이르도록 준비시키는 일을
하셨습니다.
마무리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고 대신 죄 값을 치루셨습니다. 우리를 용서하는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그 분의 자비와 긍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죄사함을 받고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더욱 깊이 십자가 용서의 사랑을 배워 예수님을 닮아가며 생명을 살리는 일에 쓰임받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