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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19년 종로II_북악 여름수양회 5강 `울지말라` (누가복음 7:11-17)2019-07-04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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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여름수양회5강메시지

울지말라

말씀: 7:11 17

요절: 7:13 주께서과부를보시고불쌍히여기사울지말라하시고

 

안녕하십니까? 우리는어제저녁 강의를 통해십자가에서다이루었다!말씀하신예수님을만났습니다. 무거운죄의짐을벗어버린여러분의얼굴에기쁨과은혜가충만합니다.빛이 나십니다.다들옆에계신목자님들과인사하시겠습니다. 얼굴에서빛이나시네요~ 

오늘전할말씀의제목은울지말라입니다. 울지말라언제들어도참위로가되는말씀입니다. 어느날종로2부박엘리사목자님의딸이레가서럽게울고있었습니다. 애지중지하던인형의다리가튿어졌기때문입니다. 이레는닭똥같은눈물을뚝뚝흘리면서서럽게울었습니다. 아무도이레를말릴수없었습니다. 그러나이때아빠 박엘리사목자님이나타나이레를안아주면서이야기합니다. ~ 그래, 울지마 , 울지마. 아빠가인형다시사줄게~그러자이레는울음을그쳤습니다. 아빠는이레의눈물을닦아주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는 내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로 슬퍼할 때 찾아오시고 위로해 주기를 원하십니다.오늘본문을통해소망을잃어버린여인에게생명을선물하시는위로자예수님 ,누구도해결하지못한죽음의문제를정복하시는부활의예수님을만나보고자합니다. 이시간성령께서우리의마음문을여시고“울지말라” 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심령으로 들을 수 있기를기도합니다.

11절을형제님들께서읽어주시겠습니다. (시작) 그후에예수께서나인이란성으로가실새제자와많은무리가동행하더니갈릴리호숫가북쪽에가버나움이라고하는동네가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이곳에서로마백부장의하인을말씀만으로고치셨습니다. 그후에예수님께서는서남쪽으로하루길쯤떨어진나인이란성으로이동하셨습니다. 히브리어로나인이라는말은아름다운이라는뜻입니다. 실제나인성은나즈막한동산과계곡이있어살기좋고풍경이아름다웠습니다. 예수님께서이곳에오실때그의은혜로운말씀과병고침 받고자 하는많은사람들이따라왔습니다.예수님과함께떠나는나인성수양회로사람들은기쁨과 은혜가충만하였습니다. 하지만이 아름다운 성에는 안타까운상황이벌어지고있었습니다. 자매님들께서12절상반절 '메고나오니까지' 읽어주시겠습니다. (시작) 문에가까이이르실때에사람들이한죽은자를메고나오니예수님과무리들이나인성문에가까이이르렀을때에어떤한행렬이보였습니다.그것은바로장례행렬이었습니다.

고대중동에서는날씨가더워서사람이죽으면시신이 곧 부패하기 때문에 하루를넘기지않고바로장례를치뤘습니다. 충분한 애도의시간을가질 겨를도 없이 바로 시신을 무덤으로 옮겨야 했습니다.동네사람들은 죽은사람을위해곡소리를내며무덤까지함께걸어갔습니다."아이고... 아이고... 아이고... 이렇게가버리면어떡하니...혼자 남은 네 어미는 어찌 살라고" 행렬에서 애절한곡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저장례행렬에는 가슴이 미어지는안타까운사연이있었습니다.형제님들께서 12절하반절을읽어주시겠습니다. (시작) 이는한어머니의독자요그의어머니는과부라그성의많은사람도그와함께나오거늘" 그것은바로한 젊은이의 안타까운죽음이있었기때문입니다.오늘아침까지만해도다녀오겠습니다!하고나갔던아들이었습니다.그러나 지금은 새하얀수의를칭칭감고딱딱한 시체가 되어 누워 있을 뿐이었습니다.제가 당시의 상황을 현대의 상황에 맞게 조금 살을 붙여 설명해 보겠습니다.

과부의아들은어려서부터총명하였습니다. 아버지가일찍돌아가시고집안형편이넉넉하진않았지만구김살없고반듯하게자랐습니다. 항상홀로되신어머니를살뜰하게챙기는착한아들이었습니다. 아들은공부도잘하여외고에 진학하고 유수의 명문대학교에합격하였습니다.합격의기쁨을안고신입생환영회에참석하였습니다. 하지만뭣 모르고 선배들이냉면그릇에부어준소주3병을원샷하다가심장쇼크로사망하였습니다. 아들의사고소식을들은어머니는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 앉았습니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것 같았습니다.과부에게 존재의 목적이자 삶의 의미가 되어주던 아들이 죽어 버린 것이었습니다.아들의 죽음과 함께 여인의 삶의 의욕도 사라져 버렸습니다.

여러분도잘아시는소설가박완서씨는남편과외아들을3달간격으로잃었습니다. 아들은 어머니와 너무나도 말이 잘 통했고 같은 생각을 공유하였습니다.게다가 이 아들은 유능하기까지 하여 명문대 레지던트의사로 , 어머니는 아들에대한사랑과자부심이충만하였습니다.그런박완서씨에게갑작스런아들의죽음은처절한고통을 가져다 주었습니다.그녀는하나님께따져묻습니다. 주님, 당신은과연계신가요?계시다면내아들은왜죽어야했나요?내가이렇게고통받고 있는데더도말고덜도말고한말씀만해보세요!

과부는아들의갑작스러운죽음의이유를 알 수 없었습니다.아들이죄를 지어 저주를받은것인가? ,아니면나의죄로인한것인가? 당시 사람들은부정하거나죄를지으면그대가로벌을받는다는인식이강하였습니다. 여인의 내면에는 정죄감이 몰려들었습니다.자신이 잘 못해서 아들이 죽은 것만 같았습니다. “내 착한 아들이 무슨 죄가 있다고!하나님도 너무하시지!차라리 저를 데려가세요!여인은 괴로움과 절망과 분노 속에 고통 하였습니다.

이러한 죽음의 행렬 앞에서 예수님은 무엇을 하셨습니까?

다같이13절을읽겠습니다. (시작) 주께서과부를보시고불쌍히여기사울지말라하시고예수님께서는먼저 과부를주목하셨습니다.주께서 과부를 보셨다는 말은 그냥 겉모습만 보셨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녀의 내면 깊은 곳까지 이해하시고 그녀의 심정을 마음으로 느끼셨다는뜻입니다.외아들이 과부에게 어떤 의미인지 깊이 공감하셨습니다.성경에는예수님께서우리를불쌍히여기신다.’‘긍휼히 여기신다’는 표현이무척많이나옵니다. 육체의질병을안고사는사람들, 죽음과 죄의 세력 앞에 무너지는인생들을보시며안타까워하십니다.그래서 예수님은그들의 친구가 되셨고 자신의 하나뿐인 목숨까지 십자가에서 희생하심으로 우리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신 예수님께서는무슨 말씀을 하십니까?13절을 다시한번 읽겠습니다. (시작)주께서과부를보시고불쌍히여기사울지말라하시고” 예수님은 울지 말라고 하십니다.우리가 장례식에 조문을 가게 되면 상심이 크시겠습니다 , 힘내고 일어나셔야죠아니면 포옹을 하면서 실컷 우세요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울지말라고 말씀 하십니다.이 말씀은 슬픔의 근본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분만이 사용할 수가 있는 말입니다.

울지말라” 그러면 어떻게 예수님께서 우리의 슬픔의 근본문제를 해결해 주신다는 말입니까?계시록 5:5을 보면 사도 요한이 슬퍼서 우는 장면이 나옵니다. 세상 어디를 둘러봐도 하나님의 구원을 실행할 존재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때 한 천사가 울지 말라고 하면서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겼다!”하는 말을 전합니다.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셔서 구원을 주시기 때문에 울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웁니까?슬퍼서 우는 이유가 여러가지인 것 같지만 그 근본을 따라가면 거기엔 죽음이 있습니다.죽음으로부터 구원받지 못했기 때문에 웁니다. 질병 문제, 물질 문제, 장래 문제 , 성격문제 , 가정문제까지… 모든 인생 문제의 뿌리에는 죽음이 있습니다. 죽음을 극복할 수 없기 때문에 그로인한 슬픔의 문제 또한 벗어날 수 없습니다.그러나 예수님은 죽음권세를 파하시고부활하셨습니다!어제 밤에 우리는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 말씀하시고 죽으신 것을 목격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삼일 만에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죽음이 예수님의 부활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잡히시기 전날밤에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너희가 세상에서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예수님은 부활로서 세상을 이기셨고 죽음을 정복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에겐 죽음이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에게 죽음은 잠에 불과합니다.죽음을 정복하신 예수님만이 “울지말라”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이 예수님은 원래 누구십니까?천지를 말씀으로 창조하신 하나님이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셨습니다. 모든 생명체들에게 생명을 불어넣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원하시면 죽은 사람도 일으켜 세울 수 있습니다.

다같이 14절을읽겠습니다. (시작)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예수님은 관에 손을 대셨습니다.관이 더 이상 죽음으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정지시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명령하십니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예수님의 말씀이 시신에 꽂혔습니다. 그 순간 부패되어 가던 시신에 생기가 돌고 꿈틀거리기 시작하더니 스스로 일어나 앉았습니다.스스로 온 몸에 감고 있던 붕대를 풀었습니다. 청년은심장만겨우뛰는혼수상태로살아난 것이아니라전하게회복 되었습니다.예수님은 살아난 그를 어머니에게 주셨고 어머니는평생에 가장 귀한 선물을받았습니다.과부는 가장 불행했던 사람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과부도 살리시고 그 아들도 살리신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우리는 각자 슬픔의 무게를 견디며 살아갑니다. 드러내지 않았을 뿐 감추어진 슬픔들이 있습니다. 과부와 같이 극단적인 상황은 아니더라도 내가 어쩔 수 없는 문제 , 주변 사람들도 안타까워 하지만 도와줄 수 없는 문제들이 있습니다.겉으로 티를 내지는 않지만 속으로 고통하고 신음하는 문제 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우리를 슬프게 하고 눈물 짓게 하고 어둡게 합니다.그래서 때로는 나를 간음중에 잡힌 여인처럼 만들기도 하고 ,때로는 거라사 광인처럼 만들기도 합니다. 죄의 세력 , 사망의 세력 앞에 무릎 꿇게 합니다.이러한 문제 앞에 사람들은 나를 도울 수 없고 위로할 수 없습니다.히4:16은 말씀합니다.“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오직 부활의 능력자 예수님께 나아가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그렇게 할 때에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예수님께서 넘치는 은혜를 주십니다!참 위로를 주십니다!

저는 1980년에 서울에서 태어나고 자랐습니다.집안 형편은 넉넉하지 못했지만 부모님 모두 신실하게 믿음생활을 하셨습니다.제게는 부모님 문제는 없었지만 남동생과의 문제가 있었습니다.동생은 저보다1살이 적었는데저는 비교적 침착하고 갈등을 싫어하는 내성적인 성격이었던 반면에 동생은 신경질적이고 호전적이며 분을 잘 내는 성격이었습니다.남동생과는 자주 싸웠는데 싸우면 독하게 달려드는 동생의 기세에 눌려 저는 매번 얻어 터졌습니다. 일진 선배가 신참 내기 후배를 관리하듯동생은 저의 잘못된 점에 대해서 세세하게 훈계하였습니다.그리고 굴을 무차별적으로 가격 하였습니다.저는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면서날아오는 주먹을 그냥 맞았습니다. 분했지만 같이 주먹질 하지 못했습니다.몇 번은 같이 주먹질을 하며 싸운 적도 있지만 그렇게 되면 싸움의 시간이 길어지고 싸움이 더욱 격렬해졌습니다.저는 그런 긴장이나 갈등상태가 지속되는 것이 너무나 감당하기 힘들었습니다.그래서 나중에는 그냥 제가 샌드백처럼 다 맞는 방식을 택하였습니다.동생은 자기 분이 풀릴 때까지 저를 때리고 저에게 모욕을 주고 나서야 끝을 냈습니다. 동생에게 얻어 터진다는 사실이너무 자존심이 상하고 분했지만 저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를 몰랐습니다. 그냥 그렇게 문제를 회피하고 스스로 괜찮다고 하는 것이 제가 인생을 헤쳐 나가는 방법이었습니다.

이후 국민대 건축학과로 진학 하였습니다. 신입생 등록하는 날 강인숙사모님을 만났습니다. 목자님은 저를 처음 봤으면서 마치 나를 원래 알고 있다는 듯한 환한 웃음과 친절로 대해 주셨습니다.말씀공부를 하면서 제가 그동안 교회에서 피상적으로 배웠던 말씀을 깊이 있게 배울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상처받지 않으려고 동생에게 거리를 두며 살았던 것처럼 역시 UBF 모임, 그리고 목자님 들과도 거리를 두었습니다.학교를 졸업하고 전역한 이후에 한 작은 설계사무실에 취업을 하였습니다. 저는 거기서 애굽의 바로와 같은 건축소장님을 만났습니다. 스파르타식으로 3년동안 많은 것을 배웠지만 그의 폭언과 임금체불 등의 문제로 저는 많은 상처를 입게 되었습니다. 회사를 그만 두는 날 그는 저에게 “너는 건축은 아닌 것 같다.다른 분야를 해봐라”는 심히 자존심 상하는 말을 들었습니다.저는 모욕을 받으면서도 해야할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평상시에 그만두고 싶어도 그만두겠다는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동생과의 관계에서도 그랬듯 소장님과의 관계에서도어느덧 늘 내가 참고 손해보고 방식으로 문제를 풀어갔습니다.슬픔과 어두움은 늘 저의 내면에 자리잡았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막5장을 읽었을 때열두해 혈루증 앓는 여인을 치료해주신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남에게 드러내고 싶지 않은 상처와 어두움이 있었지만 예수님께 나아가면 나을 수 있겠다고 하는 작은 소원이 생겼습니다. 본문을 보면 혈루증 앓는 여인은 예수님께 나아가 그 옷자락에 손만 대어도 낫겠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수많은 인파가 있었고 밀고 당기며 예수님께 많은 사람들의 접촉이 있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작은 믿음의 터치에 반응하셨습니다. 믿음생활을 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고나의 이런 작은 믿음이 예수님께 아무런 의미도 없다고 생각 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작은 믿음의 터치라 할지라도 그것을 주목하시고 반응하신다는 사실이 은혜가 되었습니다.내 안에 있는 작은 믿음도 귀하게 여기신다는 것을 붙들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위로자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이후에 한 유명 건축가의 사무실에 입사공고가 뜬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는 곳이라고 생각했지만 1:1 목자님이 도전하도록 방향을 주셨습니다. 매일 그곳을 7바퀴씩 돌며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회사 주위를 돌면서 지나간 과거를 돌아보니 제 인생이 감사가 되었습니다. 감사하며 예수님을 바라보니 앞으로도 하나님께서는 나를 계속해서 좋은 길로 인도하실 것이 믿어졌습니다. 망할 것 같은 두려움이 사라지고확신이 생겼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회사에 들어갈 수 있도록 은혜를 허락해 주셨습니다.이 작은 사건은 제가 슬픔 속에서 부활의 능력자 예수님을 체험한 사건이었습니다. 누군가 저를 알아봐 주시고 제 소원을 들어주는 분이 있다는 것은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이후 회사를 나와서 개인 건축회사를 차려서일을 한지4년이 지났습니다.믿음 생활은 겨우 연명할 정도만 하고 나머지는 모두 일에 시간을 쏟았습니다. 하지만 시간을 쏟은 만큼 돈을 번다 던가 업계에서 인정을 받는 다던가 하지는 못했습니다. 여전히 문제가 생기면 제가 떠안고 감당하는 식이 많았습니다.책임감으로 그렇게 해야한다고 생각했지만그것을 실제로 감당하는 것은 너무 힘이 들었습니다. 버는 돈의 상당액이 여러가지 사업상의 문제를 처리하는데 소모되었습니다.열심히 일을 하고 제대로 된 수확을 얻지 못하는 것은 마음에 슬픔과 두려움이 되었습니다.이것은 마치 내가 살아온 삶이 모두 헛수고인 것처럼 느껴지게 하였습니다.눅5장 말씀을 보는 중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부르시는 말씀을 받게 되었습니다. 빈그물 씻으며 낙담하는 베드로에게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하시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은 저를 보셨고 저의 헛수고를 책망하거나 판단하지 않으셨습니다. 나의 경험과 지혜로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방법대로 살고자 하는 소원이 생겼습니다. 그토록 갈망했던 물고기를 많이 잡게 되었지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른 그 삶을 저도 닮고자 하는 소원이 생겼습니다.

삶의 방식을 바꾸고자 할 때 믿음의 가정교회를 이루고자하는 소원이 생겼고 그 방향에 순종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올 해 3월에는 경성센터의 보배인 박혜진 목자님과 믿음의 가정교회를 이루게 되었습니다.저의 어두운 내면과 달리 세상에서 가장 밝고 명랑하며 낙천적이고 사랑스러운 동역자를 주셨습니다.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결론입니다.슬픈 마음을 안고 있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합니까?

예수님께 나와야 합니다. “울지말라”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그의 음성을 들을 때 슬픔의 문제를 해결 받고 영원한 기쁨을 얻습니다.이 시간 우리 모두 울지말라 하시며 인생을 회복시키시는 부활의 예수님을 만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