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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19년 창세기 17강 `약속의 땅에 거주한 이삭`(창세기 25:1-26:35)2019-07-22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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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창세기 17강


약속의 땅에 거주한 이삭

말씀 창세기 25:1-26:35

요절 창세기 26:3,4 “이 땅에 거류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 내가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내가 네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것을 이루어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하게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믿음의 2대 조상 이삭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으로 불립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을 혈통과 타이틀로 계승해 믿음의 2대 조상이 된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의 믿음, 그의 순종으로 믿음의 2대 조상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본문을 통해서 이삭과 같은 믿음의 조상의 반열에 오르는 영적 무게를 지닌 이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1-11절은 아브라함의 노후와 죽음입니다. 아브라함의 나이가 최소 140세인데 후처를 맞이했습니다. 후처 그두라가 여섯 아들을 낳았는데 그 중 미디안에게서 후에 모세의 장인 호밥과 십보라가 탄생합니다. 아브라함은 서자들도 사랑하여 그들에게도 재산을 주었지만 하나님이 언약관계를 맺기 원하시는 이삭을 특별히 중히 여겨 그에게 자신의 모든 것들을 물려주고 175세에 병에 걸리거나 사고가 아니라 기운이 진하여 숨을 거둡니다. 이렇게 해서 그의 100년간의 이 땅에서의 믿음의 삶이 끝납니다. 이삭과 이스마엘은 당시 75세, 89세였는데 아브라함을 막벨라 굴에 장사합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하나님이 그의 아들 이삭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고려의 신하 야은 길재가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없다”라고 했는데 100년을 하나님과 동행했던 아브라함이 세상을 떠나 하나님께로 갔습니다. 사람은 이처럼 때가 되면 다 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는 중단되지 않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이 새로운 사람을 축복하시고 그와 동행하시기 때문입니다.


12-18절은 이스마엘의 족보입니다. 12명의 아들들을 낳았습니다. 한 사람이 열두 아들을 낳고 그 열두 아들이 모두 민족을 이루었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도중에 사고도 있을 수 있고 질병도 있을 수 있쟎습니까? 이스마엘이 이렇게 번성하게 된 것은 하나님이 그에게 복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그와 그의 어머니에게 하신 약속을 하나님이 지키셨기 때문입니다(21:18) 하나님은 여종이나 청소년에게 하신 약속도 신실하게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이처럼 이스마엘의 인생은 번성했으나 하나님과의 동행한 흔적이 없다는 것이 그의 인생의 특징입니다.


19-26절에 드디어 이삭의 족보가 등장합니다. 이삭도 두 아들을 낳고 그 아들중 둘째인 야곱(:이스라엘)을 통해 12아들을 낳습니다. 그러니까 이삭이나 이스마엘이나 결국 12 족속을 이룬 것으로 같지만 이스마엘의 족보는 단 7줄로 기록되어 있는 반면 이삭의 족보는 25-50장까지 총 25장, 845줄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관심은 번성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에게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스마엘은 12아들을 아무 문제없이 쑥쑥 낳은 반면에 이삭은 20년 동안 마음고생 엄청 많이 하고 겨우 둘을 낳습니다. 이삭은 40세의 늦은 나이에 아무 조건도 보지 않고 오직 믿음으로 믿음의 여인 리브가와 결혼했습니다. 그렇다면 임신과 출산이 축복의 기본이던 시절에 결혼하자마자 허니문 베이비가 태어나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아이는 천신만고 끝에 20년 만에 태어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21절을 보십시오. 이삭이 그의 아내가 임신하지 못하므로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의 간구를 들으셨으므로 그의 아내 리브가가 임신하였더니 첫째는 진정한 배우자 사랑을 열매 맺게 하심입니다. 결혼할 때 보통 결혼서약을 합니다. “신부에게 묻겠습니다.” “그가 성공의 때에나, 혹 실패에 때에도 변함없이 사랑하고 존경하며 동역하겠습니까?” “신랑에게 묻겠습니다” “그녀가 젊었을 때나 나이 들었을 때나, 건강할 때나 병들었을 때나 변함없이 사랑하겠습니까?” 어떤 경우에도 사랑하겠는 가라는 질문과 대답들입니다. 이삭은 리브가가 아이를 낳거나 못 낳거나 변함없이 그녀를 아끼고 사랑했습니다. 리브가를 구박하지 않고 리브가를 깊이 이해하며 그녀를 위해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어려울 때 참 사랑이 증명됩니다. 어려울 때는 믿음의 가정에 대해 회의할 것이 아니라 서로에 대한 참 사랑을 열매 맺을 기회입니다. 우리 믿음의 가정들에게 이런 참된 사랑이 있어 서로가 서로에게 감동이 되고 인간존재에 대한 믿음을 주면 좋겠습니다. 특히 형제 여러분들께서 아내에게 문제가 있을 때 이삭처럼 상남자임을 증명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삭과 리브가가 참 사랑을 열매 맺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두 부부가 여호와를 찾는 것입니다. 사람은 절실한 문제가 있을 때 하나님을 찾습니다. 이성적이고 지적인 한 목자님도 오라는 회사가 없고 심지어 중소기업에도 취업하지 못하게 되자 눈만 뜨면 기도했습니다. 이스마엘의 족보에는 문제도 없고 여호와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삭의 족보에는 여호와가 많이 등장합니다.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여호와께 묻자온대” 시편에 보면 여호와를 가까이 함이 복이라고 했습니다(시73:28). 복은 번성이 아니라 여호와를 찾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왜 믿음의 가정에 문제가 많은 가 회의할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가정이니까 문제를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문제를 통해 원튼 원하지 않던, 많이 든, 적게 든 여호와께 가까이 나갔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없으면 사람은 육체, 곧 동물과 다를 바 없습니다. 영적 투쟁이 없으면 사람은 걸어 다니는 정육점 고기 일뿐입니다.


기도의 결과인지, 쌍둥이가 임신 되었습니다. 둘은 뱃속에서부터 싸웠습니다. 엄마인 리브가는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었습니다. “이럴 경우에는 내가 어찌할꼬”(22) 리브가는 이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 물었습니다. 어찌할지를 모를 경우는 곧 여호와께 물을 때입니다. 하나님께 묻자 하나님은 친절하게 뱃속의 상황을 해석해 주시고 아이들의 장래까지 알려주셨습니다. 두 아이는 서로 나누이고 먼저 태어난 아이가 나중에 태어난 아이를 섬기게 됩니다. 이것은 둘째로 태어날 야곱이 이삭의 계승자가 될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들도 싸우는 문제가 있습니다. 아이들도 싸우고, 공동체에서 서로 갈등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때는 기도할 때입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은 상황을 내시경 보듯 밝히 보게 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섬기도록 하십니다.


결국 쌍둥이 두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첫째 아들은 피부가 붉고 전신이 털로 뒤덮여 있고 우람한 아이였습니다. 그가 먼저 나온 것은 육체적으로 강했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힘이 약해 밀렸고 그래도 어떻게 해보려고 첫째의 발꿈치를 잡았습니다. 첫째 아들은 외모를 보고 에서(:털이 많음)라고 이름을 지었고 둘째 아들은 성향을 따라 야곱(발꿈치를 잡는 자, 경쟁하는 자. 지지 않는 자)라고 지었습니다.


27-34절은 두 아이가 장성해서 일어난 일입니다. ‘장성했다’는 것은 사리 분별력이 있고 행동에 따른 책임을 져야 할 나이가 되었음을 뜻합니다. 에서는 익숙한 사냥꾼이요 최고의 쉐프였습니다. 사냥한 고기를 잡아와 포도주와 함께 마늘양파 스테이크를 만들어 아버지에게 드렸습니다. 이런 에서를 이삭은 사랑했습니다. 에서가 힘 있고 남자다워 자신을 이을 듬직한 계승자로 생각했을 것 같습니다. 반면에 야곱은 조용하고 주로 장막에 거했습니다. 그는 야성미도 없고 털도 없는 잔털맨이었습니다. 이삭은 이런 야곱을 너무 약하고 부족을 이끌만한 사람은 못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머니인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했습니다. 부엌일을 도와주워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야곱에게 있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장자가 못된 것에 대한 한이 있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축복을 자신이 이어받고 싶었습니다. 장자는 가문의 대소사를 결정하고 리더십을 발휘하며 물질적인 유산을 두 배로 물려받습니다. 또한 어머니와 미혼 자매들을 부양할 책임을 집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언약관계를 물려받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언약관계의 대표가 되어 하나님과 가장 친밀하게 동행합니다. 한마디로 장자의 명분은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는 것입니다. 야곱은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는 장자의 명분을 사모했습니다. 그런데 장자의 명분이라는 것은 이미 정해진 것이 아닙니까? 어찌 판다고 팔리고 산다고 살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는 운명에 도전합니다. 나중에도 얼룩덜룩한 양새끼를 얻으려고 얼룩덜룩한 나뭇가지를 만들어 흔드는 행위를 합니다. 팥죽으로 장자의 명분을 사려고 하는 야곱의 투쟁은 한마디로 눈물겹습니다. 그는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싶어 함을 나타내었고 하나님은 이것을 보신 것 같습니다.


반면 에서는 어떻습니까?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겼습니다. 장난 같은 행동으로 치부하고 팔았다고도 할 수 있지만 거기에는 그의 가치관이 담겨 있습니다. 만약 그가 장자의 명분을 귀히 여겼다면 야곱이 그런 제의를 했을 때 “장난 하냐” 하며 야곱을 꾸짖은 다음에 팥죽을 뒤엎어버리든지 아니면 부드럽게 “배고프지만 참고 내가 만들어먹겠다” 라든지 해야 했습니다.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겼다’는 것은 원어로 보면 ‘멸시했다’는 뜻입니다. 무가치하게 여긴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있는 기도시간이나 기도모임시간은 얼마나 가볍게 여깁니까? 기도시간을 유투브 팥죽 한 그릇에 팔아 먹어버리지 않습니까? 골방보다 먹방을 사랑하지 않습니까? 이 시대는 에서들로 들끓고, 하나님과의 친밀함에 집착하는 야곱 같은 이들은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야곱과 에서의 문제는 다음 강에서 자세히 다루니 이정도로 끝내고 오늘 말씀의 주인공인 이삭에게 집중하겠습니다.


26장은 이삭이 드디어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깊이 만나고 하나님의 파트너가 되며 무게 있는 하나님의 종이 되는 내용입니다. 이삭 인생의 영원한 트레이드마크와 같은 사건입니다. 그가 어떻게 자기의 하나님을 만나고 명실 공히 믿음의 조상 반열에 올라서게 되었습니까?


26:1절을 보십시오. 아브라함 때에 첫 흉년이 들었더니 그 땅에 또 흉년이 들어 이삭이 그랄로 가서 블레셋 왕 아비멜렉에게 이르렀더니 흉년이란 말은 원어로 라아브로 ‘굶주림’을 뜻합니다. 흉년은 어떻게 옵니까? 보통 하늘에서 비가 오지 않아 생깁니다. 혹은 농사가 잘 되었는데 메뚜기 떼가 덮쳐서 열매를 거두지 못함으로도 발생합니다. 약속의 땅이라면 하나님이 이슬과 비를 잘 내려주시고 메뚜기 떼들로부터도 지켜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약속의 땅에 흉년을 허락하셨습니다. 아브라함 때도 흉년이 있었는데, 이삭 때도 흉년이 있고 나중에 야곱 때도 큰 흉년이 있습니다.

 

도대체 약속의 땅에 흉년은 왜 오는 것입니까? 믿음과 순종을 테스트하고 그 가운데 하나님이 여전히 순종하는 자들과 함께 하심을 보이시고, 한 사람을 명목상의 신자에서 명실 공히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기 위해 옵니다. 흉년의 때는 양식이 떨어져 굶어죽을 상황입니다. 견디기가 너무 힘듭니다. 아브라함도 얼마나 힘들었는지 하나님과 어떤 상의도 없이 애굽으로 내려가 버렸습니다. 2절에서 하나님이 이삭더러 애굽에 내려가지 말라고 하는 것을 보면 이삭도 애굽으로 내려가려 했습니다. 그랄은 애굽으로 가는 약속의 땅 남쪽 마지막 도시입니다. 그랄을 넘어서면 이제 애굽 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 중에도 마음으로 짐싸서 애굽바라보며 그랄에 서 계신 분 있습니까?


그러면 사람들이 왜 흉년의 때에 애굽으로 가려 합니까? 가나안 땅은 물을 풍부하게 가진 큰 강이 없습니다. 그래서 흉년이 들면 작은 강들은 마르고 농작물도 마릅니다. 그러면 농산물이 없어지고 물가는 비싸지고 살기는 팍팍해집니다. 나중에는 가만히 있어서 숨쉬기도 힘든 곳이 되어 버립니다. 그러나 애굽에는 수원이 풍부하고 긴 나일강이 있고 관개시설이 잘되어 있어 어지간해서는 흉년이 없고 곡식을 늘 구할 수 있습니다. 이곳은 숨 좀 쉬면서 살만한 곳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삭과 그 족속이 애굽으로 가는 것은 불가피해 보입니다. 인간적으로, 합리적으로 볼 때 약속의 땅에 남아있다가는 말라 죽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삭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2절을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삭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주하라” 애굽으로 내려갈 수밖에 없는 것 같은데 가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로 애굽에 가면 그들이 세속화되기 때문입니다. 애굽은 당시 최고 선진국이었습니다. 그곳의 문화를 접하게 되면 이삭과 그 족속은 세속화됩니다. 그들이 애굽에 있게 되면 롯이 소돔에 있는 것처럼 그들은 애굽문화의 용광로 속에서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신앙과 혼이 녹아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그들이 어려울 때 애굽으로 가면 그들이 어려울 때만 배울 수 있는 믿음을 못 배우고, 어려울 때만 받을 수 있는 축복을 받을 기회를 상실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1대 조상 아브라함에게는 풍요와 안락의 땅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 집을 떠나 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믿음의 2대 조상 이삭에게는 흉년이 닥친 약속의 땅에 어떻게든지 남도록 방향을 주셨습니다. 둘 다 죽을 것처럼 어려운 방향입니다. 사느냐 죽느냐와 같이 모험과 용기를 요구하는 방향들입니다.


그러면 이삭이 자신에게 순종하면 하나님은 어떻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까? 3,4절을 보십시오. 이 땅에 거류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 내가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내가 네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것을 이루어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하게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첫째로 이삭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아브라함과 함께 하셨던 하나님이 이삭과 함께 하십니다. 둘째로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이 그에게 복을 주십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시면 환경이 문제가 안 됩니다. 그 삶에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납니다. 역전, 반전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셋째로 아브라함에게 하신 모든 약속이 이삭에게 하신 약속이 됩니다. 약속의 계승이 이루어집니다.


이삭은 엄밀한 의미에서 아직까지 자기 믿음이 없었습니다. 이삭은 지금까지 믿음으로 결혼도 했고 믿음으로 아이도 낳았습니다. 그 나름대로 믿음으로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모두 믿음의 1대 조상인 아브라함이 살아있는 가운데 그 영향력과 후원가운데 이루어진 일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삭은 자기 믿음으로 믿음의 새 조상이 되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세상을 떠났잖습니까? 그래서 이삭은 이제 자기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께 믿음의 2대 족장으로 인정을 받고 그의 족속과 자녀들도 그의 믿음을 본받는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축복의 계승자가 되는 것은 혈통이나 사람이 붙여준 타이틀로 되는 것이 아님을 배웁니다. 생명과 삶 전체를 걸고 자신이 하나님께 순종할 때 실제적으로 주어집니다. 얼마 전에 외국 유명 영화제에서 대상을 받았다는 영화를 보았는데 그 내용은 부자에 기생하는 가난한 사람들의 비참한 삶을 그린 것이었습니다. 기생한다는 것은 좋은 말로 하면 의존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훌륭한 믿음을 가진 부모님의 2세로 태어났습니다. 또는 위대한 믿음의 선배들의 이야기들을 많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이야기고 나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이제 내가 나의 하나님을 만날 때입니다. 이제 부모님의 하나님이 아니라 나의 하나님, 조상들의 하나님이 아니라 나의 하나님을 만날 차례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에 이삭은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이삭은 믿음 좋은 아버지도 애굽에 가지 않았느냐며 불순종을 합리화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이건은 자신만 관련된 것이 아니라 가문전체의 존망이 걸린 것이니 이 건만큼은 순종하지 못한다고 하소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조용히 순종했습니다.


6-11절은 이삭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을 때 하나님이 두려움에 떠는 이삭과 그의 아내를 보호해 주신 내용입니다. Security는 삶의 울타리와 같은 데 하나님은 강력한 왕의 포고령을 통해 그 가정을 안전히 지켜주셨습니다.


다음으로 하나님은 이삭이 하는 일을 축복해주셨습니다. 이삭은 유목민이었는데 그랄에서 창업을 했습니다. 해보지 않는 농업에 손을 대었습니다. 그런데 백배나 얻었습니다. 감자를 한 개 심으면 100알이 달리고 100알을 심으면 10000알을 거두었습니다. 10가마를 뿌리면 1000가마를 거두고, 100가마를 뿌리면, 만가마를 거두어 천석꾼, 만석꾼이 되었습니다. 헐~ 대박! 그랄에 얼마나 거했는지 모르겠지만 이삭은 창대하고 왕성하여 거부가 되었습니다. 양과 소가 떼를 이루고 종이 심히 많아졌습니다. 흉년의 때에 겨우 먹고 살기도 힘든 데 거부가 된 것은 참 계산이 안 되는 믿음의 방정식이었습니다. 이것을 보고 불신자들도 하나님이 이삭과 함께 계심을 깊이 인정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 원합니다. 믿음의 영적 무게를 지닌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내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나의 모든 것을 걸고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내게 주시는 한 말씀에 상황과 형편을 넘어 순종하므로 이삭과 같은 믿음의 조상 급의 사람들로 영적 체급을 올리고 삶의 현장에서 100배의 축복을 받기를 기도합니다.


14b-33절은 이삭이 믿음으로 블레셋 사람들에게 생명 같은 우물을 양보한 이야기입니다. 이삭은 그곳이 블레셋 지역이고 자신이 약자지만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고 대항하고 싸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삭은 한마디 말도 없이 양보했습니다. 이는 그가 지켜보시는 하나님을 경외했고 하나님이 진정한 축복의 주관자요 근원이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랄 왕 아비멜렉과 군대장관이 찾아와 이삭에게 화친조약을 청했습니다. 그들은 불신자들이었습니다만 하나님이 이삭과 함께 하심을 보았다고 하며 이삭에게 머리를 숙였습니다. 우리가 다툼에서 승리자가 되는 비결은 말이나 물리력으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결론입니다. 축복의 계승은 혈통이나 타이틀로 되지 않습니다. 내가 나의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깊이 체험해야 합니다. 그 비결은 바로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순종하면 망할 것같은 하나님의 말씀에 용기 있게 순종하여 진정한 축복의 계승자요 100배 축복의 주인공들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