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민수기 8강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말씀/ 민수기 15장 요절/ 민수기 15:41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내었느니라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이니라” 오늘 말씀을 시작하기 전 1차 세계 대전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나누고자 합니다. 1914년 7월 28일 시작된 세계 제 1차 대전은 1918년 11월 11일 휴전 조약이 발효하면서 끝나게 되었습니다. 이 전쟁은 인류의 가슴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은 큰 상처와 아픔을 남겼습니다. 1차 대전 중 가장 치열했던 전투 중 하나가 베르됭 전투였습니다. 당시 독일군은 파리로 들어가는 길목에 위치한 베르됭에 모든 화력을 쏟아부어 프랑스의 전력을 고갈시키는 작전을 세웠습니다. 베르됭 전투는 8개월 동안 무려 6천만발의 포탄을 쏟아부으며 약 60~70만명의 사상자를 낸 끝에 전투 전 상태와 하나도 다를 바 없는 상황에서 중단되었습니다. 이 비참한 1차 대전의 결과 프랑스에서는 총 140만명의 젊은이들이 희생되었습니다. 특히 1915년에 20세였던 세대는 4명 중 3명이 죽거나 심각한 부상을 입었습니다. 프랑스의 명문 대학 에콜 노르말은 1914학번 211명 중 107명이 사망했습니다. 살아남은 학생들도 절반 가까이 전쟁에서 입은 부상으로 장애인이 되었습니다. 1914년에 대학을 입학하고 1915년에 20세 청년이 된 이 세대 젊은이들은 그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았을까요? 4명 중 한 명꼴로 운좋게 살아남았지만 그들의 마음에는 우리가 가늠하기 힘들만큼 커다란 트라우마가 있었을 것입니다. 수만발의 포탄이 머리 위로 떨어지는 참호 속에서 죽음의 공포에 떨었던 순간들, 포탄 소리가 잠시 멈춘 후 자기 주변에 널부러져 있던 전우의 시체들. 방금 전까지 함께 수프를 끓여먹으며 담소했던 전우들이 한 순간 시신이 되어버린 모습들. 이런 기억들은 평생의 트라우마가 되어 그들을 괴롭혔을 것입니다. 역사의 기록을 보면 그러나 그들은 트라우마 속에 인생을 허비하거나 낭비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들 중에 전쟁의 트라우마로 남은 평생을 술이나 도박에 빠져 인생이 망가진 사람들도 분명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 중 대다수의 청년들은 이 트라우마를 이겨내고 조국 프랑스의 재건을 위해 다시 일어섰습니다. 그 결과 프랑스는 다시 세계 무대에 강대국으로 우뚝 설 수 있게 되었습니다. 민수기 13장과 14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은 마침내 약속의 땅 가나안 입성을 눈 앞에 두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먼저 가나안 땅 정탐을 하였습니다. 정탐의 결과가 어떠했습니까? 갈렙과 여호수아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가나안 땅에는 거인들이 살고 있어서 우리는 그들과 비교해 볼 때 메뚜기같았다고 했습니다. 마치 코로나 팬데믹처럼 정탐군의 입에서 나온 불신과 두려움의 바이러스가 온 회중에 퍼졌습니다. 갈렙과 여호수아가 말로 그들의 마음에 믿음을 심고 백신을 뿌렸지만 아무 효과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모세와 갈렙, 여호수아를 돌로 쳐 죽이려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이스라엘에게 심판과 징계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20세 이상 된 사람들 중 갈렙과 여호수아를 제외하고 하나님을 원망한 사람 전부가 다 광야에서 40년을 배회하다가 광야에 엎드러져 죽을 것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모세가 이 말씀을 전하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크게 슬퍼하며 이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겠다고 말했습니다. 모세는 그들을 말리며 말했습니다. “또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느냐, 하나님이 40년간 광야에 머물도록 말씀하셨는데 다시 그의 말씀을 불순종하려 하느냐?” 그러나 그들은 다시 모세와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고 고집을 부리며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결과가 어떠했습니까? 모세가 경고했던대로 비참한 패배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배경 가운데 오늘 본문의 15장 말씀이 주어졌습니다. 15:1,2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그들에게 이르라 너희는 내가 주어 살게 할 땅에 들어가서”
15장은 “너희는 내가 주어 살게 할 땅에 들어가서”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정확하게 이 말씀이 언제 주어졌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 여러 견해가 있지만 본문이 기록된 위치로 볼 때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이 범죄한 후 얼마 되지 않아 주어졌을 가능성이 큽니다. 현재 이 말씀을 듣는 이스라엘 회중은 대다수가 20세 이상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이들에게 본문의 말씀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첫째, 그들은 들어가지 못하지만 그들의 후손은 들어가게 되리라는 믿음과 소망을 줍니다. 그들의 인생에는 이제 아무런 소망이 없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밥을 먹고 살지만 우리의 마음은 미래의 꿈과 소망을 먹고 삽니다. 우리의 몸은 영양이 가득한 식사를 잘 하면 힘이 생기고 삶의 의욕이 생깁니다. 그런데 마음은 어떠합니까? 우리의 마음은 미래의 꿈과 소망에서 힘을 얻습니다. 내가 지금은 알바를 하면서 그달 벌어 그달 먹고 살고 있지만 나중에는 좋은 직장을 다니며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으리라는 꿈과 희망을 가질 때 현재 알바의 고충과 어려움을 이겨낼 힘을 얻습니다. 내가 지금은 전세살이, 월세살이를 하면서 어렵게 어렵게 살지만 언젠가는 나도 화장실이 2개 있는 내 집을 소유하게 되리라는 꿈과 희망을 가질 때 현재 전세살이, 월세살이 고충과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들이 광야에서 40년을 방황하다가 죽는 것은 불순종의 죄에 대한 결과입니다. 그러나 자비로우신 하나님은 그들이 비록 광야에서 방황하다가 죽게 되지만 그들의 마음에 미래에 대한 꿈과 비전과 소망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그들은 비록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지만 그들이 사랑하는 그들의 자녀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리라는 소망이었습니다.
둘째, 그들의 자녀들을 신앙으로 교육하고 미래를 대비하게 되었습니다. 구한말 선교사들의 기록을 보면 당시 아버지들이 얼마나 자녀들을 무관심 가운데 방치하거나 학대했는지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겨울철 농한기 때 술과 노름에 빠져 전재산을 탕진하기도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노름하다가 자기 딸을 팔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뉴스를 보면 오늘날에도 게임과 도박에 빠져 자기가 낳은 자녀를 방치하여 죽음에 이르게 하기도 합니다. 이들이 이렇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삶에 그 어떤 꿈과 소망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절망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절망이 가득하니 괴로운 현실을 잊게 해 주는 술과 노름, 도박에 빠지는 것입니다. 바가지를 긁는 마누라를 두들켜 패고 자기가 낳은 자식을 방치하는 것입니다. 현재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갈 꿈과 소망을 잃어버렸습니다. 그 결과 남은 인생을 구한말 때 노름으로 마누라를 두들겨 패고 자식들을 방치한 우리 조상들처럼 살게 될 가능성이 높아졌습니다. 요즘 신문에 나오는 게임하다가 아이를 굶겨죽인 부모들처럼 살게 될 가능성이 높아졌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들에게 오늘 본문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꿈과 소망을 갖도록 도와주시고 40년간 광야에서 방황하면서 그들에게 집중해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그들의 자녀들을 신앙으로 교육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조상들이 지난 400년간 이집트에서 바로의 노예로 살면서 얼마나 비참하게 살았는지, 지금 비록 우리가 광야에서 배회하며 고생하고 있지만 그래도 우리에게는 자유가 있고 이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또 40년이 지나면 너희는 반드시 가나안 땅에 들어갈 것이며 그 가나안 땅에서 어떤 자세로 하나님을 섬겨야 할 것인지를 교육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치 세계 1차 대전 때 1914학번 젊은들처럼 삶에 큰 아픔을 겪은 세대입니다. 바이러스가 퍼지면 누구나 픽픽 쓰러지듯 불신앙의 바이러스가 온 회중에 퍼졌을 때 갈렙과 여호수아 단 두 사람을 제외하고 모든 사람들이 다 불신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쓰러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자비로우신 하나님은 그들의 마음에 꿈과 소망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40년간 광야에서 집중해야 할 한 가지 분명한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 사명에 집중할 때 광야 생활의 고난과 어려움을 잊을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미래에 대한 꿈과 소망을 먹으며 마음에 힘을 얻도록 하셨습니다. 오늘날 코로나 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강타하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세계 경제가 마비되었습니다. 그러나 코로나 바이러스보다 더 심각한 것은 불신 바이러스입니다. 요즘 청년들 가운데 교회 다닌다, 더 나아가 교회를 열심히 다니고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있다 - 이런 청년들은 좀 정신이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받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산다 - 이렇게 말하는 청년은 좀 또라이가 아닐까 하는 이런 취급을 받습니다. 요즘 청년들이 주로 보는 영상, 뉴스, SNS 등의 수많은 글들이 은근히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지 말고 너의 마음이 원하는대로 너의 눈이 좋아하는 것을 따라 살라고 말합니다. 이런 시대를 살면서 교회다니고 또 신앙생활하는 것은 외로움을 가져다 줍니다. 영적으로 황량한 시대에 광야를 지나는 것 같은 느낌을 줍니다. 교회사 책을 읽어보면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 후 지난 2000년간 영적으로 광야와 같은 황량한 때가 있었던가 하면 영적 부흥의 때가 있었습니다. 제가 학생이었던 1980년대 한국은 영적 부흥의 때였습니다.
그때 신앙생활하는 것은 신나는 일이었습니다. 뜨거운 믿음으로 사는 청년들, 친구들이 많았습니다. 그들과 함께 힘을 받아 믿음으로 살 수 있었고 뜨겁게 신앙생활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영적으로 황량한 시대입니다. 시대가 이렇게 황량하게 된 것이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전적으로 크리스챤들이 제대로 신앙생활을 잘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어느 정도 책임은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날이 갈수록 영적으로 더 메마르고 더 황무해질 것이라고 요한계시록에 이미 예언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영적으로 황무해지고 메말라가는 도중에도 영적인 부흥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기 전까지 전체적으로는 황무해지고 메말라가지만 그 사이사이 영적인 부흥이 일어나고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오늘날 코로나 바이러스보다 더 무서운 불신 바이러스가 창궐하는 광야같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붙들어야 할 소망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젊은 청년들 가운데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뜨거운 믿음으로 살고자 소원하고 기도하는 청년들이 반드시 나올 것이라는 소망입니다. 또한 우리가 집중해야 할 한 가지 사명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젊은 청년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을 신앙으로 가르치는 것입니다. 분단국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꿈에도 소원은 통일입니다. 영적으로 황무한 시대를 살아가는 크리스챤들에게는 꿈에도 소원은 믿음으로 살기를 소원하고 기도하는 크리스챤 청년들이 서는 것입니다. 그들이 우리 조국 한반도에 굳게 서서, 믿음으로 사는 이 믿음의 계보를 잇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꿈과 비전을 통해 마음에 큰 힘을 얻기를 기도합니다. 이 꿈과 비전을 가슴에 품고 청년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그들의 가슴에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심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3-16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 화제나 번제나 서원을 갚는 제사나 낙헌제나 정한 절기제에 소나 양을 여호와께 향기롭게 드릴 때에 그러한 헌물을 드리는 자는 고운 가루 십분의 일에 기름 사분의 일 힌을 섞어 여호와께 소제로 드릴 것이며 번제나 다른 제사로 드리는 제물이 어린 양이면 전제로 포도주 사분의 일 힌을 준비할 것이요 숫양이면 소제로 고운 가루 십분의 이에 기름 삼분의 일 힌을 섞어 준비하고 전제로 포도주 삼분의 일 힌을 드려 여호와 앞에 향기롭게 할 것이요 번제로나 서원을 갚는 제사로나 화목제로 수송아지를 예비하여 여호와께 드릴 때에는 소제로 고운 가루 십분의 삼 에바에 기름 반 힌을 섞어 그 수송아지와 함께 드리고 전제로 포도주 반 힌을 드려 여호와 앞에 향기로운 화제를 삼을지니라 수송아지나 숫양이나 어린 숫양이나 어린 염소에는 그 마리 수마다 위와 같이 행하되 너희가 준비하는 수효를 따라 각기 수효에 맞게 하라 누구든지 본토 소생이 여호와께 향기로운 화제를 드릴 때에는 이 법대로 할 것이요 너희 중에 거류하는 타국인이나 너희 중에 대대로 있는 자나 누구든지 여호와께 향기로운 화제를 드릴 때에는 너희가 하는 대로 그도 그리할 것이라 회중 곧 너희에게나 거류하는 타국인에게나 같은 율례이니 너희의 대대로 영원한 율례라 너희가 어떠한 대로 타국인도 여호와 앞에 그러하리라 너희에게나 너희 중에 거류하는 타국인에게나 같은 법도, 같은 규례이니라” 3-16절은 가나안 땅에서 그들의 자손들이 드릴 제사에 대한 내용입니다. 제사에는 크게 5가지가 있습니다. 불로 태워서 드리는 번제, 곡식을 갈아서 드리는 소제, 불로 다 태우지 않고 사람과 제사장이 남은 부위를 먹는 화목제, 또 죄문제를 해결하는 속죄제, 남에게 끼친 손해를 배상하는 속건제가 있습니다. 이중 화목제는 다시 감사할 때 드리는 감사제, 하나님께 약속한 것을 지키는 의미의 서원제, 또 드리고 싶은 마음이 생겨 드리는 낙헌제(freewill offering)로 나눌 수 있습니다. 또 제사를 드리는 방법으로 3가지가 있는데 흔들어서 드리는 요제, 손으로 올려 드리는 거제, 제단에 붓는 전제가 있습니다. 이러한 제사는 어린 양 혹은 다 큰 숫양, 혹은 수송아지를 드릴 수 있습니다. 짐승을 제사로 드릴 때에는 고운 가루에 기름을 섞어 소제를 함께 드리도록 되어 있습니다. 또 포도주를 제단에 붓는 전제를 함께 드리게 되어 있습니다. 또 짐승의 종류에 따라 짐승이 더 클수록 그에 비례하여 밀가루와 기름, 포도주의 양을 점차 늘리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제사는 정해진 절기에 드리도록 되어 있고 또 개인적으로 감사한 일이 있거나 자원하는 마음이 들 때 언제든지 드리도록 되어 있습니다. 또 이스라엘 백성들 뿐 아니라 그들 가운데 거주하는 외국인들도 똑같이 드리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을 듣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에 어떤 느낌이 들었을까요? 어린 양, 숫양, 수송아지는 풍요의 상징입니다. 2015년 기준으로 생후 4개월 된 암송아지 한 마리가 시가 160만원이라고 합니다. 이런 값비싼 송아지를 막 절기 때마다 드리는 것입니다. 감사한 마음이 들면 하나님께 드립니다. 또 고운 밀가루, 감람나무의 열매를 빻아 짜낸 고운 기름, 포도열매를 갈아 만든 포도주 - 이 모든 것들은 풍요의 상징입니다. 이런 것들을 제사드릴 때 마음껏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들은 지금 광야에서 만나만을 먹으며 생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머지 않아 그들의 자손들은 가나안의 풍요를 마음껏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마음껏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 감사의 마음으로 제사드리게 될 것입니다.
제가 아까 전 우리가 불신 바이러스가 가득한 광야같은 세상을 살고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 우리가 가나안 땅의 풍요로움을 누리고 있습니다. 1950년 발발한 한국 전쟁 이후 약 70년간 한반도에 전쟁이 없었습니다. 거의 모든 국민이 하루 세끼 크게 걱정없이 잘 먹고 있습니다. 북한에서는 지난 70년 세월 중 홍수 등으로 인해 먹을 식량이 없어 사람이 굶어죽는 이들이 속출했습니다. 그러나 남한에서는 특별한 사정이 있지 않은 한 굶어죽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이러한 풍요 가운데 특히 신앙인인 우리는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합니까?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시편 50:23절에서 시인은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것은 하나님께 우리가 드릴 수 있는 최고의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제사의 가장 기본적인 특징은 제물을 태울 때 그 연기가 하나님의 보좌에 이르는 것입니다. 3-16절에서 반복되는 표현은 제사가 여호와 앞에 향기로운 냄새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짐승의 제물이 탈 때 나오는 그 냄새 자체보다 그 제사를 정성스럽게 준비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사람의 그 마음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때 그 감사하는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 앞에 향기로운 냄새가 됩니다. 구약시대의 제사는 신약 시대의 예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약시대 때 제사드리기 위해 각자 짐승을 제사 제물로 준비해왔다면 신약시대에 예배드리는 자는 감사한 마음을 주님께 예물로 드려야 합니다.
다음 주 예배가 추수감사 예배입니다. 감사에 대해 다음 주에 자세히 나눌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간략하게 다루겠습니다. 감사는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최고의 제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때 최고로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눈 앞의 상황만을 바라볼 때 때로 감사한 마음이 갖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눈 앞의 상황에도 불구하고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지금까지 나에게 큰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을 바라볼 때 감사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눈 앞의 어려운 상황을 통해 더 큰 선, 더 큰 유익을 이루실 하나님을 믿을 때 감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추수감사 절기를 맞이하여 하나님께 감사로 제사드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7-21절은 가나안 땅에서 곡식의 첫 열매를 하나님께 거제로 드리도록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첫 열매를 주신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표현입니다.
22-31절은 부지중에 범한 죄문제를 용서받기 위해 드려야 할 제사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30,31절을 보십시오. “본토인이든지 타국인이든지 고의로 무엇을 범하면 누구나 여호와를 비방하는 자니 그의 백성 중에서 끊어질 것이라 그런 사람은 여호와의 말씀을 멸시하고 그의 명령을 파괴하였은즉 그의 죄악이 자기에게로 돌아가서 온전히 끊어지리라” 이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도 고의로 그 말씀을 불순종하는 자가 당할 형벌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32-36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자손이 광야에 거류할 때에 안식일에 어떤 사람이 나무하는 것을 발견한지라 그 나무하는 자를 발견한 자들이 그를 모세와 아론과 온 회중 앞으로 끌어왔으나 어떻게 처치할는지 지시하심을 받지 못한 고로 가두었더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그 사람을 반드시 죽일지니 온 회중이 진영 밖에서 돌로 그를 칠지니라 온 회중이 곧 그를 진영 밖으로 끌어내고 돌로 그를 쳐죽여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하니라” 이스라엘 백성 중 한 사람이 안식일에 나무를 했습니다. 안식일에 일을 하지 않도록 말씀하신 것은 출애굽기에 이미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도 고의적으로 그 말씀을 불순종한 것이 분명합니다. 이 사람이 왜 이렇게 했는지 그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습니다. 나무를 할 수 있는 6일동안 뭐하다가 꼭 안식일에 나무를 하려 했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아마 6일동안 딴 일을 하다가 안식일이 되어 아 나무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안식일법을 어기면 죽는다고 말씀하셨는데 어떻게 하지 이렇게 한 5분 정도 고민을 했을 것입니다. 그는 ‘에이, 설마 이깟 일로 죽이기야 하겠어?’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한편 이 사람이 나무를 하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 발각되었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모세와 회중 앞으로 끌고 왔습니다. 이 사람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묻는 모세에게 하나님은 그 사람을 돌로 쳐 죽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에 온 회중이 그를 진영 밖으로 끌어내고 돌로 쳐 죽였습니다. 본문은 그들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대로 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민수기 13,14장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불신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지 않은 것이 반복되어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나안 땅에 가라고 하니까 가지 않겠다고 하고 이제 가지 말라고 하니까 가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모세를 돌로 쳐 죽이려고 했습니다. 이런 그들이 이제는 모세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준행합니다. 이것은 민수기 15장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 미래에 대한 꿈과 비전과 소망의 말씀을 그들이 마음으로 받아들였음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소망의 말씀과 약속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힘을 얻게 됩니다. 37-41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대대로 그들의 옷단 귀에 술을 만들고 청색 끈을 그 귀의 술에 더하라 이 술은 너희가 보고 여호와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여 준행하고 너희를 방종하게 하는 자신의 마음과 눈의 욕심을 따라 음행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 그리하여 너희가 내 모든 계명을 기억하고 행하면 너희의 하나님 앞에 거룩하리라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내었느니라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이니라” 술은 옷 끝에 장식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가나안 땅에 거할 때 그들의 옷 끝에 장식을 만들도록 했습니다. 그 장식은 눈에 확 띕니다. 이 장식을 보고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기억하도록 하셨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눈이 보는 것에 약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에 마음이 기울기 쉽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옷을 입을 때마다 이 술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그 말씀을 순종할 때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거룩해집니다. 또한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이것이 그들을 애굽 땅에 불러낸 목적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옷 끝의 술에 해당하는 것은 성경책입니다. 성경책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세상을 바라보면 우리의 마음이 미혹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바라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힘을 얻게 됩니다. 우리가 매일 하루 첫 시간, 또 한 주일의 첫 시간 하나님의 말씀을 바라봄으로 세상에 미혹되지 않고 승리하여 하나님 앞에 거룩한 백성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입니다. 오늘 우리는 영적으로 광야같은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현실을 바라보면 황량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그것은 참된 믿음으로 살기를 소원하고 기도하는 청년들이 일어서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소망 가운데 광야 같은 세상에서 청년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의 가슴에 말씀을 전파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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