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로마서 제 17 강 너희도 서로 받으라
말씀/ 로마서 14:1-15:13 요절/ 로마서 15:7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오늘 말씀은 신앙 공동체에서 신자들 가운데 발생할 수 있는 갈등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모두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로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을 한 아버지로 모시는 가족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이런 우리는 서로 사랑하며 한마음과 한뜻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게 쉽지 않습니다. 이는 우리 각자의 기질과 성격이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또 서로 다른 환경 가운데 성장하여 다른 점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크리스천 공동체도 세상의 모임과 같이 인간 갈등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이 편지의 수신자인 로마교회는 유대인 출신 크리스천들과 이방인 출신 크리스천들이 함께 모인 공동체였습니다. 그들은 본질적인 문제, 곧 예수님을 믿어 죄 사함과 구원을 얻는 문제는 일치했지만 다른 비본질적인 문제들에 대해서는 서로 많이 달랐습니다. 그런데 비본질적인 문제들이라고는 하지만 이러한 문제들을 서로 용납하며 하나 되고자 힘쓰지 않으면 그런 문제들이 크게 확대되기 쉽습니다. 공동체가 갈등하고 심지어 분열하게 됩니다. 오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이런 문제들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 가르쳐줍니다. 우리가 본문을 통해 예수님을 본받아 서로를 영접하고 동역하는 성숙한 믿음을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 믿음이 연약한 자를 비판하지 말라 1절입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 “믿음이 연약한 자는 어떤 사람을 말할까요? 여기서 "믿음이 연약"한 것은, 구원의 도리에 대한 믿음, 곧 예수님을 구주로 믿어 구원에 이르는 그 믿음이 연약하다기보다는, 어떤 특정한 일을 행함에 있어서 확신이 약한 것을 의미합니다. 즉,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것은 알지만 아직 그리스도인으로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확신이 없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아직 성경 말씀에 대한 깊은 이해와 실제적인 경험이 부족한 사람을 말합니다. 믿음이 장성한 사람이 이런 사람을 볼 때 그의 부족함이 보입니다. 확신을 갖고 행하지 못하고 자주 의심에 빠지는 모습, 사람들의 말에 쉽게 휘둘리는 모습을 봅니다. 이럴 때 그를 비판하지 말라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는 어떤 사람이든지 모두 연약한 단계를 거치면서 점점 성숙한 사람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목자님들도 과거를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모임에 처음 나왔을 때 얼마나 믿음이 연약했습니까? 어떤 것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잘 모를 때가 많지 않았습니까? 이런 우리를 받아주시고 믿음을 도와주신 여러 선배 목자님들이 있었습니다. 그분들이 우리의 울타리가 되어 주셨고 격려해 주셨고 본을 보여 주셨기에 오늘의 우리가 있는 것입니다.
오래 전에 제가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을 했습니다. 월급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부모님에게 생활비로 매달 일정 금액을 보내드렸습니다. 그런데 제가 아직 믿음이 어려서, 그렇게 부모님에게 물질을 보내드리는 것이 옳은 것인지 아닌지 확신이 들지 않았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 또는 "네 소유를 다 팔아 하늘에 쌓아두라", "아무든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나를 따를 수 없다" 이런 말씀을 들을 때마다, 부모님께 보내드리는 물질을 하나님께 다 드려야만 할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당시 우리 모임의 분위기도 몽땅 하나님께 드리는 분위기였습니다. 여하튼 저는 이 일로 양심이 눌리게 되었고 정죄감으로 인하여 기도가 되지 않았습니다. 심령이 답답했습니다. 그때 저는 전요한 목자님을 찾아가 상담을 했습니다. 그러자 목자님은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말씀을 주셨습니다. 제가 천국 시민이지만 이 땅에서도 좋은 시민으로 살아야 하며, 부모님을 섬기는 것이 옳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전요한 목자님의 조언으로 눌렸던 제 마음이 활짝 펴졌습니다. 자유함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제가 목자요 선교사로 쓰임 받기까지 전박사님의 기도와 사랑의 도움이 많이 있었습니다. 우리 모임에 후배들을 말씀과 사랑으로 도우시는 이런 선배 목자님들이 많이 있는 것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런데 신앙 경륜이 높은 시니어 목자님들도 처음 부터 믿음이 좋았던 것은 아닙니다. 저도 지금은 이렇게 앞에서 말씀을 전하는 입장이지만, 우리 청년들, 또는 모임에 새로 나오신 학사님들을 볼 때 저분들이 정말 나보다 낫다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분들보다도 훨씬 더 어리고 약한 시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가운데 믿음이 성숙한 분들은 약한 분들을 사랑으로 품고 격려하고 세워주는 역할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아, 그럴수도 있겠구나.. 아, 그래도 과거의 나 보다는 훨씬 훌륭해, 세상의 청년들처럼 살지 않고 그래도 이렇게 모임에 나와서 훈련받고 애쓰는 것이 얼마나 귀해!“ 하는 마음을 가져야겠습니다.
2,3절을 보면 바울은 먹는 문제를 언급합니다.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믿음이 연약한 자는 채소만 먹느니라.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 (2,3) 구약성경 레위기 11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어서는 안 되는 것들이 나옵니다. 네 발 가진 짐승 중에 굽이 갈라지고 되새김질하는 짐승, 예를 들어 소, 양, 염소 등은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돼지는 굽은 갈라졌지만 되새김질을 하지 않으므로 먹을 수 없습니다. 바다에 사는 생물 중에, 지느러미와 비늘이 있는 생선은 먹을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것, 예를 들어 조개, 새우는 먹을 수 없습니다. 맛있는 장어구이도 먹을 수 없습니다. 비늘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규례를 주신 것은 위생이나 건강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이 거룩한 삶을 살도록 훈련하는 목적이었습니다. 물론 제육덮밥이나 장어구이를 먹는다고 죄를 짓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로마에 사는 많은 유대인 크리스천들은 그들의 전통적인 생활 풍습으로 인해 가능하면 레위기에서 금지한 것은 피했습니다. 더 나아가 당시 로마에는 많은 고기들이 로마의 신전에서 제사드리고 나서 시장에 유통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이방 신에게 제사드렸던 고기를 피하는 유대 출신 신자들이 많았습니다.
물론 우리 크리스천들은 모든 것을 먹을 수 있습니다. 딤전4:3b,4는 말합니다. "음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능력은 심히 큽니다. 엄청납니다. 우리로 하여금 음식 규례에 매일 필요 없이 모든 것을 먹을 자유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선지국을 먹어도 되고 사철탕을 먹을 수도 있습니다. 이에 대해 자기 마음에 확신을 갖으면 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이런 믿음의 자유를 누리지 못합니다. 그때, 우리는 그런 사람을 판단하지 말고 이해를 해야 합니다. ”아, 유대 문화권에 익숙한 사람이구나!“ 그의 선호와 취향을 이해하고 그를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한 문제는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라 비본질적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본질적인 문제에서는 일치를, 비본질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자유를" 이것이 신자의 삶의 원칙입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본질적인 문제와 비본질적인 문제를 어떻게 구분하는가 궁금해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에서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명확히 말하는 바, 또는 성경 말씀을 근거로 명확히 추론할 수 있는 바는 본질적인 사항입니다. 그렇지 않은 것들은 비본질적인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비본질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서로 용납하며 존중하는 자세를 갖는 것입니다. 그럴 때 서로 사랑하며 하나됨을 이룰 수 있습니다.
4절을 보겠습니다.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으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 우리가 판단하는 그 사람은 하나님이 세우신 하인, 곧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을 세워 쓰시거나 쓰지 않으시는 것이 주인이신 하나님께 달려있습니다. 우리가 그 사람에 대해 왈가왈부할 권한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하나님의 소유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가 남을 판단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권한을 침해하는 월권이요 교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만 하나님께서 내게 하라고 하신 일에 충성할 따름입니다. 다른 사람이 세움을 받는 것에 대해 하나님의 주권을 겸손히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2. 무엇을 하든지 주를 위하여 5절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 유대교 출신 크리스천들은 유대교에서 중요시 여겼던 날들, 예를 들어 유대 3대 절기, 또는 초실절, 나팔절, 부림절, 수전절 등의 절기를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주일에 모여 예배를 드렸지만,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켰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그들이 이러한 것을 비본질적인 것으로 지켰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서신, 특히 갈라디아서를 보면 바울이 유대 율법주의를 격렬하게 비판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너희가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갈 3:3)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갈5:2) 바울이 격렬하게 비판한 것은 유대 율법주의 자들의 주장, 곧 사람이 구원을 얻는 길이 예수님을 믿어서만이 아니라 율법도 지켜야만 한다는 그들의 잘못된 구원관을 비판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오늘 보는 본문의 내용은 그러한 구원관을 타협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라, 비본질적인 차원의 문제, 소위 관습과 문화 차원에서 구약의 전통을 지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한 문화와 관습에 관한 문제들은 서로 용납하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한국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점들이 있습니다. 우리 선교사님들은 해외에 계시지만, 설과 추석 명절에 고국에 계신 부모님께 전화를 합니다. 그날은 녹두전이나 잡채 같은 명절 음식을 만들어 먹기도 합니다. 그러나 현지 목자님들에게는 동일한 날입니다. 그런 비본질적인 문제를 서로 관용하고 자유를 주라는 것입니다.
6-8절에는 “주를 위하여”라는 말이 5번 반복됩니다. 우리가 비본질적인 이슈에 있어서 무엇을 하든 그 마음의 동기는 "주를 위하여"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을 위하여, 곧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하면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의 주님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주인이시요 왕이십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이런 주님을 위해 사는 것이 마땅합니다.
또한 어떠합니까? 11,12절를 보면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 우리의 행한 모든 것을 자백하고 하나님께 직고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아무 소용도 없고 가치도 없습니다. 우리 각자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행한 모든 것을 고하고 하나님의 판단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판단이 가장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겉모습이나 업적을 보지 않으십니다. 불꽃 같은 눈으로 우리 마음 중심의 동기와 목적을 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해야 합니다.
3.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라 13절입니다.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비판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칠 것이나 거칠 것을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하도록 주의하라." 이는 믿음이 강한 사람들이 주의할 내용입니다. 그것은 부딪칠 것이나 거칠 것을 형제 앞에 두지 않는 것입니다. 여기서 '부딪힐 것'은 KJV에 “stumbling block”으로 되어 있는데 사람의 발에 걸려 넘어지게 하는 어떤 것을 가리킵니다. '거칠 것'은 “obstacle”인데 장애물을 뜻합니다. 이는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할 때 설사 그 동기가 형제를 돕고자 하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로 인해 형제의 신앙 성장에 방해가 되거나 그를 넘어지게 하는 원인이 된다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자유보다 형제의 유익과 세움이 우선입니다. 자유의 최고 형태는 사랑이며, 사랑의 핵심은 형제를 넘어지지 않도록 하는 ‘자발적 절제’입니다.
17절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신앙 공동체 안에서 무엇을 먹고 안 먹고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입니다. 개인이나 공동체가 성령 하나님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을 누리는 것입니다. 19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 우리의 말과 행동으로 화평을 이루고 서로 덕을 세우는 일,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나로 인하여 형제들과 우리 공동체에 평화가 넘치고 모두가 힘을 얻어 영적으로 성장하고 주님을 더욱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21-23절입니다.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자기가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정죄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 제가 아는 한 목자님은 위장이 약해서 매일 밤에 자기 전에 양파즙에 포도주를 조금 넣어서 마신다고 합니다. 건강 효과를 보고 있다고 합니다. 자기 나름대로 양심의 확신이 있으니 문제될 게 없습니다. 그러나 연약한 사람의 마음을 거리끼게 할 수 있으므로 혼자서만 그렇게 하는 게 좋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먹든지 마시든지 하나님 앞에서 깨끗한 마음으로 하면 됩니다. 그러나 믿음 없이, 곧 확신 없이 하면 자기 양심이 깨끗하지 않고 불안합니다. 그 자체가 스스로 정죄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을 도울 때 각 사람의 믿음 수준에 맞게 섬겨야 합니다. 외적인 푸시나 일방적인 요구는 어떤 사람에게는 그의 믿음의 수준을 넘기게 됩니다. 결국 그가 감당하지 못하고 낙심하게 됩니다. 각 사람 마다 믿음의 수준이 다름을 인정하고 도매금이 아니라 인격적으로 섬기는 지혜와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무슨 일에든지 각 사람의 믿음이 성장하도록 섬기는 것이 가장 잘 돕는 길입니다.
4. 이타적인 사랑 15:1절입니다.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믿음이 강한 사람이 약한 자의 약점을 감당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고 이웃을 기쁘게 하기 위함입니다. 2절도 말합니다.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이는 참으로 놀라운 말씀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이기적인 본능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가 자기 자신을 얼마나 사랑합니까? 배고프면 먹습니다. 피곤하면 쉽니다. 조금이라고 불편하면 즉시 해결합니다. 자기의 요구는 귀신같이 알아챕니다. 그 요구를 채우기에 얼마나 빠릅니까? 그러나 타인의 어려움에 무심합니다. 잘 모릅니다. 타인의 요구를 묵살합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 자신이 태생적으로 이기적인 존재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크리스천은 그리스도로 인하여 새롭게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신 인류(New Humanity)입니다. 새로운 인류 크리스천의 윤리는 이타성입니다. 나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그러면 우리가 그런 이타적인 삶을 살아야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3절입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기록된 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이웃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하나님을 미워하는 사람들의 비방을 받아 친히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고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가장 이타적인 삶을 사셨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가 죄 사함과 구원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자들이 되었습니다. 이런 우리는 예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우리도 예수님을 본받아 이타적인 삶을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물론 실제로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우리 자신보다 더 사랑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자기만큼 사랑하면 됩니다. 나의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려고 하다 보면, 비방을 받기도 하고 손해를 보기도 합니다. 초 이기적으로 살아도 경쟁에 뒤 처질 것 같은 세상에서 이타적인 삶을 사는 것은 너무 손해를 많이 볼 것 같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손해 볼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이미 하나님의 상속자로, 온 세상을 다 얻었는데, 이미 하나님 나라에서의 영원한 생명을 얻었는데, 도대체 우리가 잃을 것이 무엇입니까? 세상의 것을 좀 잃는다 해도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우리가 이미 받은 엄청난 보물을 감사하며, 기쁨으로 이웃과 나누고 섬기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4절입니다.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이것도 놀라운 말씀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내용들이 우리의 교훈을 위한 것이라고 하십니다. 무슨 말입니까? 이는 우리가 성경을 잘 읽고 공부하여 교훈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목적으로 성경이 기록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을 보면 수백 명의 사람들의 이름이 등장하고 수백 건의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각 사람들이 무엇을 어떻게 하였을 때 어떻게 다루셨는지 다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그 사람들, 그 사건들을 통해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구체적인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로 그렇게 교훈을 받고록 하시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성경이 주시는 인내와 위로를 덧입어 소망을 갖는 것입니다. 이 소망은 썪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산 소망, 곧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이 소망을 굳게 붙들고 살아갈 때, 우리는 자기를 낮추고, 자신을 내어주는 이타적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때 나의 이웃이 살아나고 힘을 얻습니다. 공동체가 든든하게 세워집니다. 나 자신도 이로 인해 기쁨이 충만해집니다. 하나님께서 큰 영광을 받으십니다.
5. 서로 받으라 5,6절입니다. "이제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한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이는 바울의 기도입니다. NIV는 "May the God who gives .." 기도문으로 시작합니다. 기도는 간절한 소원을 올리는 것입니다. 바울의 간절한 소원이 무엇입니까?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give you a spirit of unity among yoursleves”입니다. 하나됨의 정신, 곧 온전히 하나 되도록 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성도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 우리 신자들의 인생 목적입니다. 본문에서 볼 때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길입니까? 하나됨을 통해서입니다. 우리 신자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서로 사랑하는 한 공동체를 이룰 때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7절에서도 이 내용이 반복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예수님은 그의 전 생애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셨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받기 어려운 우리들, 영접하기 어려운 죄인들을 받으셨습니다. 겸손하게 받으시고 섬기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하나님의 사람들로 세우셨습니다.
5-7절을 보면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분명합니다. 이는 서로 다른 성격, 다른 특성, 다른 스타일의 우리가 서로를 존중하고 겸손히 받아 하나가 되라는 것입니다. 하나된 공동체를 이루어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하나님은 가장 기뻐하십니다. 요한복음 17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를 생각해 보십시오. 겟세마네 기도는 예수님의 지상 최후의 기도로서 가장 간절한 마음을 담고 있습니다. 제자들과 세상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실 때 예수님은 무엇을 위해 기도하셨나요? 하나됨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7장 11절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21절 "..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22절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예수님은 제자들이 큰 역사를 이루도록 기도하지 않으셨습니다. 큰 교회를 짓고 세상적으로도 성공하는 자들이 되도록 기도하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제자들이 하나 되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저는 말씀을 묵상하면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셨다는 말씀이 마음에 크게 와 닿았습니다. 제가 하나님으로부터 큰 은혜를 받은 자로서 일생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원합니다. 그런데 요절 말씀을 통해 예수님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신 방법이 하나됨을 이룸으로써라는 것을 새롭게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됨은 그저 우리가 마음 편하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명예와 영광이 달려 있는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서로를 존중하며 온전히 영접하는 것입니다. 서로 영접하여 하나 되지 않으면서 아무리 하나님의 역사를 열심히 한다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그런 일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만 기쁜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에 순종하여 서로 받음으로 온전히 하나되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세상에는 갈등과 분열이 많습니다. 이런 세상의 모임과 신자 공동체의 차이점은 하나됨에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요 자매들입니다. 가족입니다. 사탄 마귀와 영적 싸움을 함께 싸우는 전우요, 캠퍼스 개척과 세계선교를 위해 함께 부르심 받은 귀한 종들입니다. 세상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귀한 동역자들입니다. 이런 우리들이 서로 받고 뜨겁게 사랑함으로 한 마음 한 공동체를 이루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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