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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5년 로마서 19강 복음의 동역자들(로마서 16:1-27)2025-09-07 2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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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로마서 제 19 강

 

복음의 동역자들

 

말씀/ 로마서 16:1-27

요절/ 로마서 16:16

“너희가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가 다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오늘 말씀은 로마서의 마지막 장입니다. 사실 로마서는 15장으로 끝내도 무리가 없습니다. 15장 마지막 절이 33절인데 "평강의 하나님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계실지어다 아멘." 자연스런 마무리 인사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로마 성도들에 대한 개인적인 인사를 16장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보통 편지의 마지막 인사는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라고 끝냅니다. 예전에는 "이만 줄입니다"라는 뜻으로 "이만 총총(悤悤)"으로 마무리했습니다. 우리가 선교사님들에게 보낼 때는 "주 안에서 강건하소서" 정도로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로마에 있는 24명 성도들의 이름을 일일이 부르며 문안 인사를 합니다. 바울과 함께 문안하는 사람 8명의 이름도 나옵니다. 우리는 바울하면 불사조와 같은 개척자, 사명을 위해 자기 몸을 던지는 사도로 여겨집니다. 사역에 올인하여 다른 사람에게는 그다지 관심이 없는 분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보면 바울이 얼마나 동역자들 한 사람 한 사람과 깊은 인격적인 관계성을 맺고 있는가를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 복음의 동역자들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사도 바울의 마음을 배우길 기도합니다. 


1,2절입니다. “내가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으로 있는 우리 자매 뵈뵈를 너희에게 추천하노니 너희가 주 안에서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고 무엇이든지 그에게 소용되는 바를 도와줄지니 이는 그가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음이라.” 바울이 로마 성도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면서 제일 먼저 언급하는 사람이 '뵈뵈'입니다. '뵈뵈' (Phoebe)는 그 이름이 "밝다", "빛을 발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녀는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이었습니다. 겐그레아는 고린도에서 동쪽으로 약 11 Km 떨어져 있는 작은 항구 도시입니다. 사도행전 18:18을 보면 사도 바울은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습니다. 이는 그의 서원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이 무슨 서원을 했었을까요? 고린도는 개척하기가 매우 어려운 도시였습니다. 그는 고린도에서 약하고 두려웠으며 매우 떨었습니다(고전2:3). 이때 그는 나실인과 같이 헌신하기로 결단하고 하나님께서 고린도 개척을 도와주시길 간구하였습니다. 1년 반 동안 머리를 깎지 않고 지냈습니다. 고린도 개척을 이루고서는 겐그레아에 와서 수리아 안디옥으로 떠나기 전에 머리를 깎은 것입니다. 고린도나 겐그레아는 지금은 거의 폐허가 된 상태입니다. 성지 순례하는 관광객들만 오는 곳이 되었습니다. 바울 당시 겐그레아 교회는, 고린도 성도 중에 어떤 사람이 가서 개척을 하였거나, 아니면 뵈뵈 같은 자매님이 고린도에 왔다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개척이 되었던 것으로 봅니다. 뵈뵈는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이었습니다. 여기서 일꾼이라는 단어는 "디아코논"인데 여집사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로마 성도들에게 뵈뵈를 추천하며 그녀를 성도의 합당한 예절로 영접해 달라고 합니다. 뵈뵈가 로마에 가는 데 그녀를 환영해달라는 것입니다. 지난 강의에서도 보았듯이 바울은 로마에 가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그들을 방문하여 복음을 다시 전하고 신령한 은혜를 나누어 주길 원했습니다. 그러나 미개척지역 복음역사에 너무 바쁘고 또 지금은 마게도냐와 아가야 성도들의 연보를 예루살렘에 전달하러 가기에 시간이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로마서 편지를, 마침 로마에 가게 된 뵈뵈를 통해 전달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특별히 뵈뵈를 성도의 합당한 예절로 영접해 달라고 합니다. 이는 로마 성도들이 그녀를 그렇게 영접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로마는 당시 제국의 수도였습니다. 겐그레아는 로마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작은 도시에 불과했습니다. 로마 사람들이 보기에는 어디 들어보지도 못한 시골에서 온 사람일 수도 있었습니다. 또한 당시는 가부장적인 사회로 특히 유대 문화권에서는 여자들을 수에 넣지도 않던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뵈뵈는 복음의 동역자로 아주 귀한 사람이니 그녀를 정중히 예절을 갖추어 영접하도록 바울은 요청합니다. 우리는 마음만 있으면 되지 형식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외적인 매너는 내적인 존중함의 표현입니다. 사랑은 무례하게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합당한 예절로 대우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때때로 선교사님들과 이방 목자님들이 우리 쎈타에 오십니다. 그때 우리는 이들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합당한 예절로 잘 영접해야겠습니다. 


바울이 특별히 뵈뵈를 잘 영접해 주기를 부탁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2절 하반절을 보면 "이는 그가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보호자는 원어로 "프로스타티스"로, "후원자", "구원자"라는 뜻인데 보통 남성에게만 쓰인 단어입니다. 신약 성경에서 여기에서만 유일하게 여성에게 쓰였습니다. 헬라 문화권에서 "프로스타티스"역할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사회적으로 유력하고 물질적으로 부유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뵈뵈를 "프로스타티스"로 언급한 사실을 볼 때, 그녀는 겐그레아의 유력하고 부유한 여성이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녀는 바울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성도들도 희생적으로 섬겼습니다. 바울은 뵈뵈로부터 섬김받은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녀에게 진 사랑의 빚을 기억하고 감사하였습니다. 오늘의 우리가 있기까지도 우리를 섬겨주신 많은 분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분들의 섬김을 잊지 않고 늘 감사한 마음을 갖기를 기도합니다.


바울이 로마에 있는 성도들 중에 제일 먼저 안부를 전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3절입니다.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바울은 먼저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합니다. 그들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이라고 합니다. 앞 절에서 뵈뵈에 대해서는 "우리 자매 뵈뵈"라고 하였습니다. 5절에도 내가 사랑하는 "에배네도"라고 합니다. 8절에서 "내 사랑하는 암블리아", 9절에서 "나의 사랑하는 스다구"라고 합니다. 이런 표현이 계속됩니다. 그는 동역자 한 사람 한 사람을 깊이 사랑하였습니다. 사랑이 넘쳐나 그냥 이름만 부를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 자매, 나의 동역자, 나의 사랑하는 누구.. 라고 불렀습니다.


브리스가(또는 애칭으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그들의 이름이 신약 성경에 6번 나옵니다. 두 사람의 이름이 같이 언급될 때는, 4번이 브리스가가 먼저 언급이 되고, 1번만 아굴라가 먼저 언급됩니다. 특히 사도행전 18장을 보면 성경에 능통하고 언변이 좋지만 요한의 세례만 알았던 아볼로를 데려다가 복음을 더 정확하게 풀어 가르칠 때 브리스가의 이름이 먼저 나옵니다. 브리스가가 여성이지만 더욱 빼어난 성경 지식이 있었던 것으로 봅니다. 브리스가와 아굴라는 본래 로마에 살던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런데 AD 49년에 글라우디오 황제가 모든 유대인들은 로마에서 나가라는 추방령을 내렸습니다. 그때 브리스가와 아굴라는 고린도에 오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직업은 텐트 메이킹을 하는 일이었는데 같은 일을 하던 바울을 만나 생업의 동업자요 또한 복음의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AD 54년에 글라우디오 황제가 죽고 네로가 황위를 계승하였는데, 브리스가와 아굴라는 그때 로마로 돌아가서, 바울이 이 편지를 보낼 때에는 로마에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이 어떤 사람들이라고 합니까? 4절입니다. "그들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도 내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그들에게 감사하느니라." 여기서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도 내놓았다"는 말의 원어를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바울의 목이 사형 집행자의 도끼 밑에 놓였는데) "그들이 대신 그 도끼 밑에 목을 내 놓았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어떤 사건을 말하는지 분명하지는 않습니다. 아마도 바울이 에베소에서 데메드리오 폭동으로 인해 목숨의 위협을 받았을 때, 그들이 큰 위험을 무릅쓰고 바울을 구했던 것으로 봅니다. 여하튼, 그들은 바울을 동역하기 위해서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들이 이렇게 하기까지에는 먼저 바울이 자기의 생명을 바쳐 그들을 사랑하고 섬겼을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을 받은 이 부부는 동일한 사랑으로 목숨을 바쳐 바울을 동역하였습니다. 이런 동역자들을 둔 바울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를 보면, 시카고 UBF에 계셨던 정요셉, 정에스더 선교사님들이 생각이 납니다. 정요셉 선교사님은 전요한 박사님과 전남대 의대 동기생이십니다. 그런데 정요셉 선교사님이 늦게 대학에 들어가셔서 전박사님보다 두 살위이십니다. 정요셉 선교사님이 보실 때 전박사님은 두살 적은 동기생인데, 아무래도 사람이 허물이 전혀 없겠습니까? 그런데도 자기를 UBF로 인도한 전박사님을 언제나 목자님이라고 깍듯이 부르며 동역하셨습니다. 제가 수년 전에 시카고에 있을 때, 이분과 대화를 하였는데 나이가 많이 드신 노년에도 늘 전박사님께 감사하고 존경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정요셉 선교사님은 또한 아내인 에스더 선교사님을 뜨겁게 사랑하셨습니다. 우간다에 같이 실버선교사로 가시고자, 에스더 선교사님을 설득하기 위해, 그녀가 좋아하는 맛있는 고구마를 사 오신 에피스도는 참 아름답습니다. 예전에 이사무엘 선교사님도 이런 정요셉 선교사님을 존경하고 그를 "형님"이라고 부르셨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바울의 동역자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를 보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 이러한 동역자들로 쓰임받기를 기도합니다.


5b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에배네도에게 문안하라 그는 아시아에서 그리스도께 처음 맺은 열매니라." 바울은 많은 고난 가운데 아시아 지역 개척역사를 섬겼습니다. 이런 가운데 하나님께서 처음 열매로 에배네도를 주셨습니다. 바울은 그를 특별히 사랑하였습니다. 5b부터 15절까지 20명의 이름이 실명으로 나옵니다. 6절에서 바울은 마리아에게 문안하라고 합니다. 신약 성경에 마리아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7명 등장합니다. 6절의 마리아는 어떤 사람인지 더 알 수는 없습니다. 여하튼 로마 성도 중에 처음으로 언급한 자매님인 것을 볼 때, 빌립보 교회의 조상 루디아와 같이 로마 교회의 개척 조상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7절입니다. "내 친척이요 나와 함께 갇혔던 안드로니고와 유니아에게 문안하라 그들은 사도들에게 존중히 여겨지고 또한 나보다 먼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라." 안드로니고와 유니아는 부부로 여겨집니다. 그들은 바울의 친척이요 바울과 함께 투옥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도들에게 존중히 여김을 받았습니다. 또한 바울은 그들이 자기보다 먼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라고 합니다. 그들은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 회심하기 이전부터 그리스도를 섬긴 신자들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주님의 부르심을 직접 받은 사도이지만, 평신도 목자 가정인 그들을 신앙 선배로서 존경하였습니다. 


9절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동역자인 우르바노와 나의 사랑하는 스다구에게 문안하라" 주석학자들(Godet, Hendriksen, Murray)에 의하면 “우르바노”는 노예들의 이름이라고 합니다. 반면에 "스다구"는 귀족의 비문에 자주 나타나는데, 주석학자 Gifford는 그가 황제 가문에 속한 자라고 합니다. 이를 볼 때 어떠합니까? 바울이 문안하는 사람들을 보면 남녀노소, 빈부귀천의 차별이 없습니다. 노예나 황제 가족이나 다 같은 형제입니다. 실로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 평등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그렇지 않을까요? 우리가 장차 이어받을 하나님의 나라, 그리고 믿음으로 이미 우리가 이 땅에서 누리는 하나님의 나라, 그 나라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모두 평등합니다.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존중받는 귀한 동역자들입니다. 우리는 늘 주기도문을 고백합니다. "나라가 임하옵시며."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도 이루어주시길 기도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가운데, 이러한 만민평등, 만민존귀의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충만히 이루어지게 하여 주시길 기도합니다.


10a절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인정함을 받은 아벨레에게 문안하라." 아벨레는 그리스도 안에서 인정함을 받은 사람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그는 교회 공동체가 그의 믿음을 인정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아마 어떤 극심한 시련을 받았을 것입니다. 사람은 시련을 통과할 때 그의 믿음의 진수가 드러납니다. 진짜 믿음은 진짜로 드러나고 가짜 믿음은 가짜인 것으로 드러납니다. 진짜 믿음의 사람은 시련 가운데도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인내합니다. 감사해합니다. 결국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그러나 가짜 믿음의 사람은 시련의 날에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내가 이런 고생하려고 하나님을 믿었냐며 믿음을 버립니다. 아벨레는 큰 시련 가운데서도 믿음을 지켰습니다. 믿음이 더욱 순수하고 강해졌습니다. 이를 통해 교회의 신임을 받게 된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재키윤 사모님은 케냐에서 34년간 온 청춘을 바쳐 아프리카 젊은이들을 섬겼습니다. 한국에 들어왔을 때 이미 흰머리가 나는 60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제 그의 남은 인생동안 손주들 보며 잘 쉬며 지내게 하시는 것이 마땅할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갑자기 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지난 1년반 동안 시련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시련 가운데 그의 참된 믿음이 드러났습니다. 투병 중에 인내하였고 하나님께 감사하였습니다. 이런 일을 통해 우리는 그의 믿음을 인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벨레는 바로 믿음으로 극도의 시련을 이겨낸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10b부터 나오는 이름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아리스도불로는 헤롯 대왕의 손자로 아그립바왕의 형제입니다. 바울은 그 집 사람들에게 문안합니다. 헤로디온 역시 헤롯 가문에 속한 사람으로 봅니다. 나깃수는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로 부터 자유를 얻은 부유한 사람으로 봅니다. 12절의 드루배나와 드루보사는 귀족 계급의 쌍동이 자매라고 학자들은 말합니다. (Godet, Dunn, Robertson) 


13절입니다.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의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의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 마가복음 15:21은 말합니다.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부터 와서 지나가는데 그들이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구레네 사람 시몬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것을 보고 있던 무리들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신체가 건장하였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더 이상 지고 갈 힘이 없는 것을 보고 로마 군병은 시몬을 끌어다가 억지로 십자가를 지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시몬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직접 메고 골로다까지 갔습니다. 그 시몬은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였습니다. 바울이 이 편지를 쓰던 당시 시몬에 대한 인사가 없는 것을 볼 때 그는 아마 이미 세상을 떠났던 것 같습니다. 여하튼 이 일로 그의 아들 루포는 로마 교회에 잘 알려진 사람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루포의 어머니를 "내 어머니"라고 합니다. 바울은 그가 전도 여행을 하던 기간에 그녀로부터 엄마와 같은 섬김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신약 성경에는 바울의 가족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습니다. 생질에 대한 언급이 한 번 있는 것을 볼 때 바울의 누이가 예루살렘에 살고 있었을 것이라는 정도만 우리는 압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실로 모든 것을 버리고 자신을 하나님께 내어 드렸습니다. 그러나 그도 사람입니다. 그도 인간적인 위로와 사랑이 필요하였습니다. 이럴 때 루포의 어머니가 엄마와 같이 바울을 섬겼던 것 같습니다. 바울은 이런 그녀를 "내 어머니"라고 부릅니다. 


16절입니다. "너희가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가 다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입맞춤으로 문안하는 것은 당시 그리스 로마 시대의 풍습이었습니다. 주로 형제끼리, 또는 자매끼리 상대방의 이마나 볼, 또는 어깨에 가볍게 입맞춤을 하였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악수를 하거나 허그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성도들끼리 서로 문안하며 지내는 것은 아주 중요하고 아름다운 일입니다. 우리는 평소에 바쁘다는 이유로 동역자들 사이에서 무관심하게 지낼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 믿음의 동역자들이야말로 이 죄악된 세상에서 말씀대로 살고자 애를 쓰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들입니다. 너무나 귀하고 소중한 찐 가족들입니다. 이런 우리가 수시로 주 안에서 서로 문안하며 사랑의 관계성을 굳건히 해야 하겠습니다. 또한 세계 각지에서 수고하시는 우리 선교사님들에게도 자주 문안해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애정 어린 문안이 선교사님들에게 큰 힘이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 이상에서 바울이 문안하는 것을 볼 때 세 가지를 배웁니다. 첫째, 바울이 문안한 24명의 실명 가운데 최소한 8명이 여성입니다. 뵈뵈, 브리스가, 마리아, 유니아, 드루베나, 드루보사, 버시, 루포의 어머니입니다. 바울은 여인들의 섬김을 귀하게 여기고 그 이름을 남겼습니다. 당대에는 수에 치지도 않았던 여인들의 이름이 신약성경에 기록되어 영원히 남게 된 것입니다. 바울의 사랑과 겸손, 그리고 그의 열린 마음을 배우게 됩니다. 믿음 안에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존귀합니다. 우리가 이런 마음과 자세로 동역자들을 존중하고 사랑하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본문을 보면 "주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이 여러 번 반복됩니다. 특히 8절부터 13절을 보면 7번이나 반복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하나의 가족입니다. 존귀하고 평등합니다. 우리가 이러한 한 가족됨을 누리는 이유는 오직 우리를 부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때문입니다. 


셋째, 바울은 하나님의 역사를 합심 동역하여 섬겼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동역의 역사입니다.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혼자서 하나님의 역사를 섬길 수 없습니다. 우리 말에도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협력하면 훨씬 쉽습니다. 혼자 일하게 되면 슬픔과 기쁨을 나눌 동역자가 없기 때문에 쉽게 지치게 됩니다. 마음의 스트레스를 나눌 사람이 없다면 이는 참으로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복음의 동역자가 있으면 함께 나눔으로 슬픔은 반이 되고 기쁨은 배가 됩니다. 서로 격려함으로써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상에서 바울은 로마 성도들에게 사랑의 안부를 전했습니다. 그런데 로마 교회에는 그런 동역자들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문제를 일으키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17절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배운 교훈을 거슬러 분쟁을 일으키거나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그들에게서 떠나라." 로마 교회에서 어떤 사람들이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성도들이 사도들로부터 배운 교훈, 곧 복음을 거슬렀습니다. 그들은 비본질적인 문제로 성도들과 분쟁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본질적인 이슈에서 달랐습니다. 그들은 유대 율법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음으로만이 아니고 모세의 율법도 지켜야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였습니다. 할례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러한 본질적인 문제를 거스르는 자들, 곧 이단에 속한 자들과는 거리를 두어야 합니다. 디도서 3:10도 말합니다.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


유대 율법주의자들의 근본 문제가 무엇입니까? 18절입니다. "이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들의 배만 섬기나니 교활한 말과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합니다. 말을 잘합니다. 그래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합니다. 그 목적은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배를 섬기는 것입니다. 자기 배를 섬긴다는 것은 자기 유익을 구한다는 것입니다. 율법주의는 자기 행위를 내세웁니다. 자기를 자랑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구한다고 말은 하지만 실제로는 자기 유익과 자기 영광을 구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하나님의 은혜만을 자랑합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립니다. 바울은 로마 성도들이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기 원합니다. 선한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순종하되 세상의 악을 행하는 일에는 차라리 미련하라고 합니다. 이러한 신자들을 도우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탄을 상하게 하시고 성도들에게 최후의 승리를 주실 것입니다.


21-23절은 바울과 함께 문안하는 사람들입니다. 디모데, 누기오, 야손, 소시더바입니다. 22절은 특이한 기록입니다. 21절에 나오는 "나의", 또 23절에 나오는 "나와"는 모두 바울을 가리킵니다. 로마서 전체에서 '나'는 바울을 말합니다. 그런데 22절에서 갑자기 대필자가 튀어 나와 1인칭으로 말합니다. "이 편지를 기록하는 나 더디오도 주 안에서 너희에게 문안하노라." 이런 정황으로 보입니다. 시력이 나쁜 바울을 위해 더디오가 대필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 편지 마지막 부분입니다. 바울이 더디오에게 말합니다. "자네도 로마 성도들에게 한마디 하게." 그러자 더디오가 자기 이름을 밝히면서 문안하는 것입니다. “나 더디오도 주 안에서 너희에게 문안하노라." 이 작게 보이는 것에도 바울의 섬세한 섬김이 있음을 봅니다. 바울은 더디오가 그냥 대필하는 기계 같은 사람이 되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그도 바울의 동역자의 한 사람으로, 그의 이름이 편지에 남기를 원했습니다. 그도 로마 성도들에게 사랑의 안부를 전함으로 바울의 동역자로 존중받도록 하였습니다. 


23절입니다. "나와 온 교회를 돌보아 주는 가이오도 너희에게 문안하고 이 성의 재무관 에라스도와 형제 구아도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가이오는 고린도에서 가정 교회를 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에라스도는 "이 성" 곧 고린도의 재무관이었습니다. 그는 고린도시의 재정을 책임지고 관리하는 고위 공무원이었습니다. 바울의 동역자의 범위가 참으로 넓습니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자를 폭 넓게 섬기며 좋은 동역자로 삼았습니다. 25-27절에서 그는 편지를 마무리합니다. 복음을 계시하시고 그 복음으로 모든 믿는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은 유일하게 지혜로운 분이십니다. 바울은 복음으로 구원하시고, 복음으로 끝까지 성도들을 견고하게 하실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립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주 안에서 하나 된 형제자매들입니다. 사탄과 싸우며 하나님의 역사를 함께 섬기는 복음의 동역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서로를 귀히 여기고 사랑하며 거룩한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의 마음으로 생명의 동역을 하는 아름다운 공동체로 빚어주시길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