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1강
온전히 합하라
말씀 : 고린도전서 1:1~31 요절 : 고린도전서 1:10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로마서도 어느새 마치고, 고린도전서를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고린도전서는 교리보다는 죄사함의 은혜를 덧입은 사람들의 삶을 가르치는 목적으로 기록되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가 당면한 여러 가지 문제들에 대해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문제들은 복잡했습니다. 성도들 사이에 분쟁이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아내, 즉 계모와 동거하는 심각한 음행 문제도 있었고, 우상의 제물을 먹는 문제로 성도들 간에 갈등이 있었습니다. 예배와 성만찬에서 생겨난 갈등도 있었습니다. 은사를 문제로 영적인 질서가 무너졌습니다. 몸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사람이있었습니다.바울은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처방으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절대 진리를 제시합니다.(고전 12:27).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에 교회는 하나가 되어야 하고,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에 교회는 거룩해야 하고,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에 서로 사랑해야 하고,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에 성례를 거룩히 지켜야 합니다. 우리 2부 공동체 역시 그리스도의 몸으로 부르심을 입었습니다. 우리가 가을학기 고린도전서 말씀을 통해, 우리 각자가 그리스도의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음을 새롭게 배우고, 온전한 그리스도의 몸을 이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Ⅰ. 바울의 인사 (1-3절) 1절을 형제 분들이 읽겠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과 형제 소스데네는" 바울은 자신을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Apostle)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소개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자발적으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부르심을 받았음을 강조합니다. 그는 과거 교회를 핍박하던 자였으나 예수님이 이런 그를 용서하시고 사도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교회 공동체를 개척하고 세우는 일에 쓰고 계십니다. 소스데네는 원래 고린도 유대인 회당장이었으나, 복음을 영접한 후 바울을 대신하여 매를 맞았던(행 18:12-17) 동역자로 추정됩니다.
2, 3절을 형제, 자매 순서로 읽겠습니다.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라고 부릅니다. 왜 굳이 이런 표현을 썼을까요? 추측하건데, 고린도 교인들이 고린도 교회를 자신들의 교회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와같은 그릇된 인식에서 고린도 교회 안에는 많은 문제들이 파생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의도적으로 고린도 교회를 ‘하나님의 교회’라고 부름으로 고린도 교회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세계 각지에 세워진 하나님의 교회 중 하나의 교회였습니다.
우리 공동체는 어떻습니까? 우리 공동체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우리는 우리가 속한 공동체가 특정 선교단체이거나 특정 지부이기 이전에,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세워진 '하나님의 교회'라는 사실을 깊이 인식해야 하겠습니다.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는 어떤 자들이었습니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진 자들’입니다. 또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 입니다. ‘성도’란 거룩한 무리라는 뜻입니다. 고린도 사람들은 원래 거룩함과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습니다. 고린도는 고대 사회에서도 손꼽히는 향락과 쾌락의 도시였습니다. 고린도는 본래 그리스의 도시였으나, 로마와의 전쟁에서 패하여 기원전 146년에 파괴되었습니다. 로마는 본보기로 고린도를 아주 철저하게 파괴하였습니다. 그로부터 80년 후 율리우스 시저에 의해 고린도는 복구되었고, 이후 급속히 재건되어 아가야 지방의 수도가 되었습니다. 고린도는 항구도시로서 음란과 방탕, 우상숭배가 극에 달했습니다. 고대문헌에 의하면 아프로디테 신전에는 1,000명의 신전 창녀가 상주했다고 합니다. '고린도 사람처럼 산다(Korinthiazomai)'는 말은 곧 '음행에 빠진다'는 뜻으로 통용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죄악의 도시 한복판에 사도 바울을 통해 고린도 교회를 세워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고린도 성도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하여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성도)’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는 그들이 잘나거나 특별해서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영적으로 연합했기 때문에 얻게 된 결과 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어떤 시대에 살고 있습니까? 고린도는 사치, 향락, 음란, 방탕이 넘쳐나던 곳이었는데,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의 모습도 이와 다르지 않은 듯 합니다. 겉보기에 세상은 더욱 젠틀해지고, 세련된 듯 합니다. 하지만 스마트 폰을 통해 언제 어디서든 음란과 쾌락을 즐기며 나만의 공간에서 아프로디테 여신을 섬길 수 있습니다. SNS 통해 사람들은 과시적 소비('플렉스')와 사치를 자랑합니다. 현실 도피를 조장하는 온라인 도박과 마약이 청소년에게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일부 청소년들은 거액의 빚을 지고, 빚을 갚기 위해 성매매나 불법 도박 사이트 운영에 가담되기는 등 더 큰 범죄의 늪에 빠져들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혼란스러운 세상의 유혹과 방탕함 속에서 우리를 성도로 불러내셨습니다. 우리의 힘과 의지로는 이 세상의 거대한 문화적 흐름을 이기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거룩한 신분을 주셨습니다. 또한 이제 성령으로 함께 하사 능히 죄악된 세상 가운데서도 우리를 지켜주시고, 하나님과 함께하는 거룩한 삶을 살게 하여 주십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진 자들이요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답게, 고린도와 같은 세상에서 교회 공동체와 가정을 지키며, 주님 오실 날을 준비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Ⅱ. 바울의 감사(4-9절) 4절을 보십시오. 형제 분들이 읽겠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바울은 먼저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선한 뜻과 부르심을 돌아보며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들에게 주신 은혜가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5, 6절을 형제, 자매 순으로 읽겠습니다. "이는 너희가 그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언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 / 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중에 견고하게 되어" 고린도 성도들은 헬라 문화의 강점이었던 ‘언변(말하는 재능)’과 ‘지식(복음 진리의 이해)’에 풍족했습니다. 이들이 복음을 영접하고 나니, 그들이 원래 가지고 있던 재능들이 성령 안에서 새롭게 ‘은사(Gift)’로 승화된 것입니다.
우리 청년들도 저마다 귀한 장점과 은사가 있는 줄로 믿습니다. 어떤 분은 K-POP 가수 뺨 치게 노래를 잘 합니다. 어떤 분은 책을 읽고 깊은 사색을 하며 글쓰기를 좋아합니다. 어떤 분은 게임을 그렇게 잘하고 좋아합니다. 이 모든 재능이 주 안에서 은사로 승화되고, 주님의 몸 된 공동체를 섬기고 영혼을 구원하는 역사에 귀하게 쓰임받을 줄 믿습니다.
7절을 형제 분들이 읽겠습니다.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 고린도 교회는 치유, 예언, 방언 등 성령께서 주시는 다양한 은사가 풍성했습니다. 그와 동시에 그들에게는 재림 신앙이 확고했습니다. 그들은 살았을 동안에 주님께서 재림하실 것을 믿고 간절히 사모하였습니다. 바울은 소돔과 고모라 같이 유혹이 많은 고린도에서 복음을 영접하고, 믿음을 지키고 살고 있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생각할 때,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였습니다.
바울이 고린도 성도들의 여러 문제에 대해 전해 듣고서도 어떻게 그들을 향해 흔들리지 않는 소망을 가질 수 있었을까요? 8절을 자매 분들이 읽겠습니다.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리라."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의 부족하고 연약한 모습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끝까지 견고하게 하실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우리는 종종 연약한 분들을 보면 ‘과연 저 형제가 믿음을 끝까지 잘 지킬 수 있을까? 실족하지는 않을까?’ 염려합니다. 그 형제도 나를 보며 비슷한 생각을 합니다. 피차 간에 걱정합니다. 그러나 핵심은 이 모든 것이 우리의 능력에 달려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부르신 주님께서 심판의 날에 '흠잡을 데 없는 사람'으로 우리를 굳건하게 지켜주실 것입니다.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s)’이라 부릅니다. 즉 '한번 구원받은 사람은 끝까지 하나님이 지켜주신다'는 확신입니다. 이를 알때, 우리는 부족할지라도 서로가 서로를 믿음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부족하고 연약한 우리를 끝까지 붙드시고 함께 하여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 드립니다. 9절을 형제 분들이 읽겠습니다.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미쁘다’는 말은 일상에서 잘 쓰지 않는데, ‘신실하다(Faithful)'는 뜻입니다. 사실 ‘신실하다’는 말도 교회에서 쓰지 일상에서는 안 쓰는 말인데, 이는 ‘성실하다’, ‘믿을만 하다’ 라는 뜻입니다. 또한 여기에서 말하는 교제라는 말은 ‘코이노니아’라는 말인데, ‘참여하다’는 뜻입니다. 이는 카톡을 주고 받거나, 가끔 식사를 같이 하는 수준의 교제가 아닌 전인격적인 교제를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과의 교제는 그리스도와 전인격적으로 결합하고,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 나라의 모든 특권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굳이 비유하자면, 고아였던 아이가 사랑이 풍성한 양부모에게 입양되어 친자식처럼 대우 받고 재산까지 상속 받는 것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하나님과 상관 없던 우리를 그 분의 영적인 자녀로 삼으시고, 아빠 혹은 아버지라 부르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지부의 한 목자님은 어린 아들을 교통사고로 주님 품에 안겼습니다. 목자님은 자녀 없이 수년 간 지내시다가, 최근 초등학생 자녀를 입양하였습니다. 목자님은 아이에게 “이제 내가 너의 아빠야, 아빠라고 부르렴”라고 하였고, 아이는 수줍게 ‘아빠’라고 하였습니다. 이후 목자님은 친 자식으로 여기고 키우고 계십니다. 얼마전 목자님이 아이와 전화 통화를 하는 것을 들었는데, 아이가 자연스럽게 ‘아빠’라고 하며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서스럼 없이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고아 였던 아이는 이제 목자님과 사모님의 손을 잡고 다니며 한 가정의 귀한 자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또한 이와 같은 은혜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의 보호자가 되셔서 우리를 돌보시고 키워가십니다. 이 하나님은 절대로 변치 않는 믿고 신뢰할 만한 분이십니다. 바울이 연약한 고린도 성도들을 보면서도 감사할 수 있었던 것은, 미쁘신 하나님이 그들을 친히 돌보시고 지켜주실 것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 우리를 이곳에 불러모아 주신 하나님 아버지께, 다 같이 “하나님 아버지”라고 불러보겠습니다. 아직 아직 안 불러 봐서 어색하신 분들도 한번 불러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이제 내가 너의 아버지란다. 나를 아버지라고 불러도 된다.” 말씀 하셨습니다. 우리를 자녀 삼아 주시고,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 찬양드립니다.
Ⅲ. 바울의 권면(10-31절) 요절 말씀인 10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바울은 서론을 마치고 즉시 본론으로 들어가 강력하게 권면합니다. 그는 예수님의 권위를 힘입어 고린도교회 모든 성도들에게 명령에 가까운 어조로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인간적인 권면이 아닌, 사도라는 공적 신분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는 일종의 예수님의 이름으로 된 직인이 찍힌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영적인 공문서라고 볼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내용의 핵심은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는 겁니다. 바울은 글로에의 집 편으로 고린도 교회 가운데 분쟁(찢어짐)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12절을 보면 그 분쟁의 원인이 드러납니다.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는 파벌 싸움이었습니다. 우리가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소위 ‘라인’이라는 것이 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회사 설립 멤버이고 실세인 전무님 라인을 타야할지, 얼마 전 새롭게 등극한 회장님 조카인 유학파 상무님의 라인을 타야할지 잘 선택해야 합니다. 대학원도 마찬가지입니다. 대학원은 보통 본교 출신들과 타 대학 출신들의 라인으로 나뉩니다. 때론 대학별로 3개 이상의 라인으로 갈라지기도 합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어디에 줄을 서야 할지를 잘 선택해야 한다고 합니다.
먼저 바울파는 고린도교회의 개척 조상들로 구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바울이 일 년 반 동안 생명을 바쳐서 개척할 때 복음을 영접하고, 변화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주로 이방인들로서 바울이 전해 준 복음을 단순히 믿고 신앙을 출발한 사람들입니다. 바울이 전해 준 복음의 자유를 깊이 받아들였고, 우상의 제물도 거리낌 없이 먹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바울을 너무 존경한 나머지 다른 지도자들을 배척하였습니다.
그 다음 아볼로파가 있었습니다. 그는 알렉산드리아 출신으로 학문이 많고 구약성경에 능통한 자였습니다(행 18:24). 알렉산드리아 출신이라하면 당대 최고의 교육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요즘으로치면 하버드 출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의 가르치는 형식은 바울보다 훨씬 더 세련되고, 호소력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볼로파는 대개 세련되고 교양이 있는 지식인들이 중심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 아볼로 선생님이 최고라니까, 사도 바울 선생님이 복음을 전할 때에는 꿈쩍 안하던 유대인들을 아볼로 선생님이 다 제압해 버렸잖아?”, “찢었다니까!” 그들은 바울을 무시하고 아볼로를 지도자로 치켜세웠습니다.
또 게바파는 베드로를 추종하는 세력으로서 주로 유대인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을 것입니다. 아마 이들은 예루살렘에서 베드로에게 세례를 받고 고린도로 건너 온 신자들인지도 모릅니다. 이들은 유대교의 율법을 존중하고, 율법을 무시하는 것 같은 이방인 신자들을 무시했을 수도 있습니다. 바울의 사도권을 인정치 않고, 자기들만이 정통보수파라고 주장했는지도 모릅니다. 또 그리스도파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를 추종하는 세력이거나 보다 엄격한 유대주의자들이었다고 추측합니다. 그들은 자기들과 예수님은 특별한 관계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고후 10:7). 독신주의를 주장하며 결혼을 하지 않고 주님을 섬기는 자들이야말로 진짜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바울은 분쟁의 핵심을 꿰뚫습니다. 13절을 형제 분들이 읽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냐?" 바울은 성도들이 분쟁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찢는 중대한 죄이며, 그리스도 대신 인간 지도자를 추종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헛되이 하는 죄악임을 깨우쳤습니다.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파벌 조장은 정작 사역자 당사자들의 의도가 아니었습니다. 바울, 아볼로, 게바는 서로를 존중하며 동역했습니다(벧후 3:15). 문제는 그들을 추종하는 성도들이 사람의 지혜를 가지고 지도자들의 이름을 껍데기만 빌려와 분쟁의 도구로 사용했다는 데 있습니다.
17절에서 바울은 자신의 사명을 통해 교회의 문제를 진단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함이라"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 '말의 지혜'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말의 지혜는 고린도인들이 좋아했던 세련된 수사학이나 논쟁술을 의미합니다. 고린도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보다 얼마나 논리적으로 세련되고 듣기 좋은 말인가에 더 큰 가치를 두었습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 세상의 지혜가 들어오자,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인 십자가의 복음이 미련하고 어리석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바울은 이제 십자가 복음의 본질로 돌아가 교회의 분쟁을 해결하고자 합니다. 18절을 보십시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십자가의 도(Logos of the Cross)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 담긴 복음 진리입니다. 당시 십자가는 흉악범을 처형하는 가장 수치스럽고 고통스러운 형틀이었습니다. 특히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나무에 달린다는 것은 하나님께 저주를 받고 버림 받았다는 것을 의미하였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택한 자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려 죽는다는 것을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로 여겨졌습니다. 유대인의 관점에서나, 세상의 지혜나 논리로 볼 때 십자가에 처형당한 자를 구원자라고 믿는 것은 미련한 일로 치부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십자가의 도는 사람들을 멸망과 구원이라는 두 부류로 나눕니다. 그리고 믿는 자들에게는 온전히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됩니다.
고린도 성도들은 바울이 선포한 십자가 복음 진리를 단순히 믿고 받아들여 구원을 얻은 자들입니다. 그들은 세상적인 지혜로 볼 때, 말도 안 되는 복음을 겸손히 영접하였습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 안에는 언제부터인가 세상의 지혜가 들어왔습니다. 그들은 세상의 지혜로 자신이 속한 분파의 사역자는 필요 이상으로 치켜 세우고, 자신이 속하지 않은 분파의 사역자는 화려한 언변으로 깍아 내렸습니다. 말의 지혜가 교회에 들어오자, 하나님의 지혜인 십자가 복음이 미련하고 투박하게 여겨지기 시작했습니다. 점차 투박한 하나님의 말씀보다 세련된 말 솜씨의 사람의 말이 더 큰 권위를 갖게 되었습니다. 누군가가 논리적이고 화려한 말솜씨로 바울을 비판하면 이를 받아들였습니다. 고린도 성도들은 복음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말의 지혜를 의지할 때 점차 멸망하는 자의 관점으로 십자가를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십자가를 말하고 그 말씀대로 사는 것을 점점 미련하고 어리석게 여겼으며, 대신 세상의 지혜자들이 추구하는 합리적이고 세련된 삶의 방식을 따라가고자 했습니다.
19, 20절을 형제, 자매 순서로 읽겠습니다.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지혜 있는 자는 그리스 철학자를 의미합니다. 선비는 서기관을 뜻하는데, 오늘 날로치면 학자로 볼 수 있습니다. 변론가는 요즘으로치면 영향력 있는 논객이나 칼럼 리스트라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이 이들이 어디 있느냐고 반문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의 모든 지혜가 구원에 이르지 못하게 하셨음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21절은 이를 분명히 합니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복음은 인간의 이성과 지성으로는 결코 깨닫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깨닫고 믿게 된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시간 이미 복음을 영접하신 분들에게는 그 깊이와 너비가 더 해지고, 아직 복음을 깨닫지 못한 분들 가운데는 깨달아지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와 같은 복음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사건이 구약성경에 있습니다. 열왕기상 5장에는 북이스라엘 선지자 엘리사가 활동하던 시절, 문둥병에 걸렸던 아람 사람 나아만 장군이 치유 받는 사건이 나옵니다. 나아만 장군은 포로로 잡혀온 이스라엘 여종을 통해 북이스라엘에 하나님의 사람이 있다는 소문을 듣습니다. 그는 문둥병을 고치기 위해 많은 예물을 가지고 엘리사 선지자의 집 문 앞에 찾아갑니다. 그러나 선지자 엘리사는 높은 신분의 장군이 먼 곳에서 예의를 갖추고 왔음에도, 문 밖에 나와 보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사환을 시켜, 나아만 장군에게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씻으라”고 하였습니다. 나아만 장군은 적어도 엘리사 선지자가 나와서 자신을 영접하고 기도라도 해 줄 것이라 기대했습니다. 엘리사 선지자의 이와 같은 반응에 그는 마음이 상했고, 그냥 되돌아 가고자 하였습니다. 문둥병이 낫는 것과 요단강에서 7번 씻는 것이 무슨 상관이 있단 말입니까? 하지만 이때 슬기로운 부하가 “밑져야 본전이니 그냥 한번 해보시죠”하고 도와 무례하고 비합리적이고 미련해 보이는 엘리사의 방향에 순종합니다. 그리고 그때 치유를 받게 됩니다.
22, 23절을 보십시오. 형제, 자매 순으로 읽겠습니다.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에게 십자가는 '나무에 달려 죽은 저주'의 증거입니다. 그래서 거부감이 들었습니다. 지혜를 구하는 헬라인에게 힘 없이 사형을 당한 죄수가 인류의 구원자 메시야라니 말도 안되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왜 이 십자가를 전파하였습니까? 24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십자가는 세상의 기준으로는 가장 멍청하고 어리석으며 약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어떠합니까? 25절은 선언합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하나님은 사람의 눈에 어리석고 미련해 보이는 십자가를 통해 죄인들을 구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고린도 교회의 구성원을 어떤 가운데서 택하셨습니까? 26~29절을 형제, 자매, 형제, 자매 순서로 읽겠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만일 하나님께서 세상의 엘리트, 부유한 자들을 우선적으로 구원하셨다면, 그들은 자신의 조건 때문에 구원받았다고 착각하며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를 자랑했을 것입니다. 또 고린도 교회는 당대 유명한 철학자, 학자, 변론가들로 채워져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 조건으로 구원의 비밀을 깨닫는 길을 원천적으로 봉쇄하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이유는 우리의 잘남이 아니라, 우리가 가장 약하고 흔들리며 지혜가 없어 방황했을 때,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받았음을 알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이 잘 나갔던 때를 떠올리며 살아갑니다. 그때를 생각하고, 자랑할 때 힘이 생기고 기쁨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구원받은 사람들은 자신이 가장 힘 없고 연약하고 지혜가 없어 방황했을 때를 생각 합니다. 그때 나를 불러주시고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약하고, 흔들리고, 지혜가 없어 방황할 때 부르셨습니다. 세상의 지혜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절실하게 깨달을 때 부르셨고 그때 능력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때 우리는 주님을 만났습니다.
30, 31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우리의 정체성과 자랑의 근거를 선포합니다.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을 때 의로워지고, 거룩해지고, 구원을 얻습니다. 우리의 모든 자랑의 근원은 주님이시기에, 오직 주 안에서 자랑해야 합니다. 십자가는 나 같은 죄인을 살리기 위해 가장 귀한 독생자를 희생시킨 하나님의 미련하고 어리석은 선택이었습니다. 이 은혜에 감격한 우리는 이제 세상의 지혜(내가 살기 위해 남을 밟고 올라가는 길)를 버리고, 십자가가 말하는 하나님의 지혜(남을 살리기 위해 내가 손해 보고 죽는 길)를 선택해야 합니다. 세상이 미련하고 어리석다고 여길지라도, 십자가의 말씀을 따르는 순종적인 삶이 바로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가 우리 삶에 충만하게 드러나는 길입니다. 이번 가을 학기에 고린도전서 말씀을 통해 세상의 지혜와 능력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선택하고, 이를 깊이 체험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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