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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5년 고린도전서 2강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고린도전서 2:1-16)2025-10-06 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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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고린도전서 제2강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말씀 / 고린도전서 2:1-16

요절 / 고린도전서 2:4, 5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지난 1강에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의 분쟁을 책망한 후 같은 마음으로 온전히 합하라고 권하였습니다. 이제 바울은 오늘 2장에서 자신이 고린도 교회를 개척할 때를 회상합니다. 그는 5년 전 고린도에 도착하였을 때 약하고 두려워했습니다. 이교도의 영적 세력들과, 강한 인본주의, 그리고 도덕적 타락상을 볼 때 심히 떨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서 1년 반을 머물면서 놀라운 개척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바울은 현재 에베소에서 그때의 일을 생각하며 어떻게 그 일이 가능했는지를 말합니다. 한 마디로 십자가의 도를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전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이방 문화의 세력과 인본주의, 쾌락주의가 막강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이런 시대에 어떻게 능력 있게 복음 역사를 섬길 수 있는지를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절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 하였나니.” 바울이 이 편지를 쓰고 있던 때는 그의 제3차 전도 여행 중인 AD 55경이고, 장소는 에베소였습니다. 고린도를 개척한 지 약 5년이 지난 때였습니다. 바울이 고린도에 처음 도착했었을 때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증거하였다고 말합니까?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 하였나니.” “하나님의 증거”라는 말은 "the testimony of God"으로 하나님의 말씀 곧, 복음을 말합니다. 1장에서도 보았듯이 그는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부르심이 세례를 주기 위함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기 위함이라고 하였습니다. 당시 고린도는 전형적인 로마 도시였습니다. 사람들은 능숙한 언변과 지혜를 숭상하였습니다. 미사여구를 사용하여 수사학적으로 웅변을 잘하는 것이 당시 최고 출세의 길이었습니다. 


사실, 바울도 말을 잘하려고 하면 얼마든지 잘할 수 있었습니다. 고린도후서 10:10을 보면 "그들의 말이 그 편지들은 무게가 있고 힘이 있으나 그가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그 말도 시원하지 않다 하니"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로 인해 바울이 말을 잘하지 못했다고 하는데 이는 바울을 시기하고 비난하는 거짓 교사들의 말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수사학적인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 단순하게 십자가의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그런 비판을 한 것입니다. 그는 로마제국의 대도시 다소에서 출생하였습니다. 로마 시민권자였습니다. 유대의 저명한 가말리엘의 문하생으로 교육을 받았습니다. 로마서와 같은 아주 논리적인 책을 썼습니다. 사도행전 22장에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체포될 때 히브리어로 유대인들에게 증거한 연설을 보십시오. 사도행전 26장에서 바울이 총독 베스도와 아그립바 왕 앞에서 변론한 유창한 변론을 보십시오. 그는 루스드라에서 전도할 때 웅변의 신인 ‘헤르메스’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행14:12) 바울은 말을 잘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도 수사학적으로 멋지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말하지 않기로 작정을 한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언변이 좋은 사람이 전하면 그 내용보다 그 사람의 말솜씨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은 그 자체가 보물입니다. 금은 도금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복음 자체를 증거하는 것이 가장 잘 증거하는 것입니다. 질그릇에 보배를 담았다는 표현처럼 보배가 보배로 잘 드러나기 위해서는 화려한 치장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복음의 가치를 잘 알았기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증거하지 않았습니다. 


특별히 그는 무엇을 증거하기에 힘썼습니까? 2절입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 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바울은 고린도 개척 역사를 섬기면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 하기로 작정"하였습니다. “작정”했다는 것은 굳게 결심한 것입니다. 십자가의 복음이 아무리 미련하게 보인다 하더라도, 사람들이 조롱하고 모욕하더라도, 그는 오직 예수님이 그리스도 되심과, 그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만을 알기로 작정하고 그것만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첫째, 그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알기로 작정했습니다. 예수님을 배우고 예수님을 가르치는 것에 집중했습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그 사실에 집중한 것입니다. 2년 전에 소천한 미국 New York에서 사역한 Tim Keller 목사님이 계십니다. 아주 큰 영향을 끼친 분인데 이분이 설교하는 특징이 3가지입니다. (1) 강의안을 완전히 암송하여 100% 청중과 eye contact를 하고 전하십니다. (2) 스피치하는 시간은 언제나 딱 30분, 정확합니다. (3) 마지막 2~3분 정도의 ending part는 언제나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는 모든 성경이 예수님을 증거한다고 믿었습니다. (요 5:39) 실제로 그것을 드러냈습니다. 우리도 말씀을 전할 때 항상 예수님에게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을 알고 배우고 그의 형상을 닮는 사람들이 되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입니다. 예수님을 아는 것이 영생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님을 배우고 예수님을 가르치는 것에 집중했습니다. 


둘째, 바울은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만을 알기로 작정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만 증거한 이유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복음의 핵심이요, 구속 역사의 비밀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면 왜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하나님의 복음의 핵심입니까? 이는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죄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말은 우리가 많이 들어 피상적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는 정말 중요한 사실입니다. 


예전에 제가 아프리카 지부장 수양회에 참석한 적이 있었습니다. 수양관이 비교적 언덕 높은 위치에 있었는데, 아래로 저 멀리 큰 도로가 보이고 많은 차들이 다녔습니다. 그때 저와 같이 발코니에서 밖을 쳐다보고 있던 우간다의 정요셉 선교사님이 어린아이같이 웃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하하, 차들이 저쪽으로 막 가네... 또 이쪽으로 막 오네.." 그 분위기와 뉘앙스를 표현하기 쉽지 않은데, 한 마디로 사람들은 다람쥐가 쳇바퀴 돌듯이 계속 어떤 일을 반복하며 인생을 다 보낸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세상을 분주히 살고 있지만 대부분 똑같은 일을 반복합니다. 그 일들은 세상에서만 잠시 의미가 있습니다. 이 세상의 삶이 끝나면 다 연기와 같이 사라질 일에 몰두하며 시간을 보냅니다. 우리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잠시 잠깐의 삶 이후에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죄 문제입니다. 인생을 깊이 생각해 본 사람은 다 이런 근본 문제에 직면하였습니다. 그래서 많은 종교가 생긴 것이기도 합니다. 천지를 만드신 유일한 신이신,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주셨습니다. 온 인류의 죄를 그에게 덮어씌우시고 피 흘려 죽게 하셨습니다. 그의 십자가의 대속의 죽음을 믿는 자들에게 예수님의 의를 전가해주시고, 죄인들이 의롭다고 여겨 구원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이는 참으로 온 우주가 놀랄만한 소식입니다. 십자가를 통한 죄 사함,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것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진노에서 우리를 구원하는 길이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길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바울은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증거하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3절입니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바울이 처음 고린도에 도착하였을 때 그는 약하고 두려워하였습니다. 천하의 믿음의 용사 사도 바울도 두려워서 심히 떨었습니다.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고린도 시내 곳곳에는 이방 신전이 가득하였습니다. 고린도 사람들이 가장 많이 숭배한 태양신인 아폴론 신전, 그리고 800미터 높이의 아크로 고린도에 세워진 아프로디테 신전, 옥타비아 신전, 포세이돈 신전 등 수많은 신전이 있었습니다. 물론 고린도전서 10:20 말씀과 같이 우상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 뒤에 귀신들이 있습니다. 고린도는 한 마디로 귀신들의 세력이 막강한 도시였습니다. 또한 철학자, 웅변가, 수사학자, 궤변론자 소피스트들이 길거리에 넘쳤습니다. 무엇보다 고린도는 매우 음란한 곳이었습니다. 항구도시로서 동서양의 무역선이 끊임없이 모여들었고, 술집이 많았고 매음이 성행하였습니다. 아프로디테 신전에는 1,000명의 여사제가 있었는데 그들은 제사 의식의 일환으로 음행을 행하였습니다. 그래서 헬라어에 "코린티아조마이"(Κορινθιάζομαι)라는 단어가 있는데 이는 “고린도 사람처럼 산다”라는 뜻으로 음란하게 산다는 의미였습니다. 이교도의 강한 세력, 인본주의와 성도덕의 타락이 만연한 이 도시에서 바울 혼자 해볼 수 있는 것이 전혀 없게 보였습니다. 두려워 떨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때 그는 어떤 자세로 복음 역사를 섬겼습니까? 


4, 5절입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첫째, 그는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복음을 전하지 않았습니다.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이란 NIV에 "wise and persuasive words"로 되어 있습니다. 인간적인 지혜와 유창한 말이라는 뜻입니다. 한 마디로 바울은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 그의 말재주를 이용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둘째, 그는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는 그가 오직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여 전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을 말할까요? 성령은 어떤 신비한 힘이나 에너지가 아닙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3위인 성령 하나님을 말합니다. 삼위일체는 사람이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인데,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 한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삼위일체를 이런 식으로 설명합니다. 우리 최문주 목자님이 직장에서는 우체국 팀장이시고, 집에서는 자상한 아빠이고, 교회에서는 평신도 목자시다. 이와 같이 한 사람이 세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렇게 설명하는데 이를 양태론 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삼위일체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성부 하나님도 한 인격이고, 성자 하나님도 한 인격이고, 성령 하나님도 그러합니다. 곧 세 분입니다. 그런데 세 분이 한 하나님이십니다. “Three persons, one God.” 이는 하나님이 계시하여 주셔서 우리가 비로소 알게 된 것이고, 인간의 이성으로는 이해가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다만 하나님이 계시하는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입니다. 


예전에 어떤 산 기도회 집회에 가 보면 설교자가 "우리가 다 불같은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하면서 "성령 받아라!" 하며 야구공 던지듯이 던지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것은 성령에 대한 모독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이십니다. 성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성자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를 우리 성도들에게 적용하여 실행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물론 성령 하나님은 보이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을 믿는 신자들 속에 계십니다. 그분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 가운데 역사하십니다. 바울은 바로 이 성령 하나님을 의지하여 복음을 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성령을 의지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을 말할까요? 첫째는, 성령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역사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십니다. 성령은 성경의 저자이십니다. 성령님은 그 성경 말씀을 통해 역사하십니다. 자, 여기 성경책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종이에 잉크로 쓰여 있습니다. 흰색은 종이, 검정색은 글자입니다. 죽은 글자 같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역사하시면 그 글자들이 벌떡벌떡 일어납니다. 우리 내면에 살아 역사합니다. 히브리서 4:12절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죄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렘23:29도 말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 말이 불같지 아니하냐 바위를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 성령 하나님이 역사하실 때 하나님의 말씀은 불같이 뜨겁고 방망이처럼 타격합니다. 큰 능력으로 임하여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성어거스틴 (AD354-430)의 생애는 참으로 파란만장합니다. 그는 북아프리카의 타가스테 (오늘날 알제리)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정욕을 이기지 못하여 17세 경부터 한 여인과 동거하였습니다. 아들도 낳았습니다. 그는 카르타고에서 수사학을 가르치다가 밀라노로 갔습니다. 그는 장래의 출세를 위해 귀족의 딸과 결혼하고자 동거하던 여인을 북아프리카로 돌려보냈습니다. 귀족의 딸과 약혼했는데 문제는 그녀가 너무 어린 것이었습니다. 10살이었습니다. 당시 로마법상 최소 12살이 되어야 결혼할 수 있었기에 어거스틴은 2년을 기다려야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 기간을 참지 못하여 다른 여인과 관계를 맺습니다. 이런 그는 암브로스의 설교를 들으며 내적으로 갈등했습니다. 그러나 정욕의 세력을 이길 힘이 없었습니다. 하루는 정원에 앉아 자기 머리를 쥐어뜯을 정도로 탄식하며 괴로워하였습니다. 그러던 중에 담 너머 들려오는 아이들이 놀며 말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Tolle Lege, Tolle Lege” (“집어서 읽어라!”) 그는 벌떡 일어나 집 안으로 들어가 성경책을 갖고 나왔습니다. 성경을 열었는데 그의 눈에 한 말씀이 들어왔습니다. 롬13:12-14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이 말씀은 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분명한 방향을 주었습니다. 동시에 그 순간, 그 말씀이 그에게 능력으로 나타났습니다. 그토록 끈질기게 자기를 옭아매고 있던 정욕의 세력이 끊어진 것을 알았습니다. 태풍은 지나가고 모든 것이 고요해졌습니다. 참회록을 보면 그가 회심하기 전의 갈등은 치열하게 기록하였지만, 성령의 능력이 나타난 후의 상황에 대한 기록은 아주 간단합니다. 모든 것이 정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후 그는 북아프리카로 돌아가 위대한 하나님의 종의 삶을 삽니다. 일생 동안 변함없이! 성령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것은 이와 같이 성령님이 말씀을 통해 능력의 역사를 이루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둘째, 성령을 의지한다는 것은, 성령님께 간절히 기도하며, 실제적으로 역사해 주실 것을 믿고 행하는 것입니다. 이점에 대해 성어거스틴은 우리의 실제 삶에서 성령을 구체적으로 의지하며 행하는 4단계를 말했습니다. 첫째, 어떤 일을 행하기 전에, "주님, 제가 이 일을 할 능력이 없습니다." 고백하라. 둘째, 성령이 도와주시길 기도하라. 간절히! 셋째, 성령이 역사하실 것을 믿고 담대히 행하라. 넷째, 승리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라. 성령은 모든 믿는 사람 안에 계십니다. 우리의 기도를 반드시 들으시고 도우십니다. 우리는 성령을 의지하지 않고는 결코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오직 성령의 능력을 의지한다고 하여 합리적인 이론은 불필요하다, 자세히 설명하여 이해를 시키는 것이 불필요하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필요합니다. 반지성주의는 복음주의가 아닙니다. 우리는 성경 본문을 잘 읽고 이해해야 합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였습니다. (행17:11) 먼저 성경 말씀이 이해되고 영접이 되어야 합니다. 문제는 성령의 역사하심이 없으면 거기까지라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말씀에 대한 지식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그 지식이 나의 믿음이 되게 하십니다. 말씀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 성령이 역사하실 때, 그 지식이 우리의 참믿음으로 자리 잡습니다. 그래서 5절도 말합니다.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귀신들도 지식이 있습니다. 바리새인들도 구약 성경에 대해서는 정통한 지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지식에 그쳤습니다. 예수님을 의지하고 사랑하는 믿음으로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요 5:40) 믿음을 주시는 분은 바로 성령이십니다. 


영국 런던 UBF에 George라는 형제가 있습니다. 현재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석사과정을 밟고 있습니다. 그는 지난 4년간 폴 목자님과 성경 공부를 하였습니다. 머리로만 이해하였고 실제 삶에 변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약 한 달 전쯤에 그의 심령에 성령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사람이 바뀌었습니다. 폴 목자님을 목자로 존중하여 그 앞에서 겸손해졌습니다. 기도할 때 마음으로 기도하며 회개하는 마음이 되어 눈물을 흘립니다. 작지만 아주 흥미로운 변화는 이것입니다. 그의 어머니는 이혼한 여자였고 자녀들에게 무심하였습니다. 성경 공부하는 아들 조지를 핍박하였습니다. 아들인 조지도 그의 어머니에게 무심하였습니다. 그런데 조지에게 성령의 역사가 있은 후 조지가 그간 “캐롤라인”이라고 불렀던 그의 어머니를, 이제는 “멈” (엄마)라고 부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는 마치 우리 김선형 목자님이 술에 취하신 아버지에게 전화하여 "아버지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한 것과 같습니다. 성령이 역사하시면 성경 말씀이 그 사람 안에서 강력으로 역사합니다. 사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킵니다. 거듭나게 합니다. 바울은 성경의 능력, 성령의 능력을 잘 알았습니다. 자기 힘은 거기에 비하면 만분의 일도 안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복음을 전하되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전하기로 작정하였습니다. 그 결과, 도저히 변할 것 같지 않던 고린도 성도들의 심령에 믿음이 생겼습니다.  


영적으로 거듭나는 것이 전적으로 진리의 말씀을 통한 성령의 역사에 달려 있음 같이 성화, 곧 신자들이 영적으로 성장하는 것도 그러합니다. 현대 교회의 문제는 신자가 적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닮은 신자들이 적다는 것에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교회 나온 지 10년, 20년이 되어도 영적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이들은 겉으로는 시니어가 되어 가지만 그 내면은 여전히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성장하지 않는 크리스천은 불행합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날마다 성장해야 합니다. 어떻게 성장할 수 있습니까? 진리의 말씀을 통한 성령의 역사로 가능합니다. 우리는 먼저 성경을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랑 없이는 절대로 영적으로 성장할 수 없습니다. 진리의 말씀을 머리로만이 아니라 마음으로 받고, 성령 하나님을 의지할 때, 성령께서 우리 안에 믿음이 생기게 하시고 믿음이 자라게 하십니다. (엡2:8)


시대가 어렵습니다. 복음 역사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역사를 보면 복음 전하기 쉬웠던 때는 없었습니다. 항상 어려웠습니다. 사람들은 십자가 복음 자체를 미련하게 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요즘에는 복음을 전한다고 감옥에 집어넣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래도 어려운 것은 사실입니다. 우리가 복음에 대해 수용력이 약한 이 시대를 어떻게 섬겨야 할까요?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섬겨야 합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적 전쟁을 하는 우리에게 성령의 검입니다. 이 검은 어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고후10:4, 5) 우리가 먼저 빼어난 성경 선생으로 성장해야겠습니다. 또한 실제적인 문제들 앞에서 간절히 기도하며 성령을 구해야겠습니다. 성령의 함께 하실 것을 확신하고 담대히 나아가야겠습니다. 그럴 때 반드시 승리하게 됩니다. 우리가 순간순간 성령을 의지하는 종들로 하나님께 귀히 쓰임 받기를 기도합니다. 


6절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는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에서 없어질 통치자들의 지혜도 아니요.” 여기서 온전한 자들이란 성령의 역사를 통해 십자가 복음을 깨달은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온전한 자들은 이 세상의 지혜를 말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없어질 통치자들의 지혜를 말하지도 아닙니다. 오직 사람을 구원하는 믿음을 주는 하나님의 지혜인 복음을 말합니다. 이 지혜는 오랫동안 은밀한 가운데 있었습니다. 감추어졌던 비밀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으로 우리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미리 준비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천사들도 알지 못한 비밀스런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내가 구원을 받은 것은 창세 전에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택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사실이 마음으로 믿어진다면 우리의 신앙은 반석과 같이 견고하게 주안에 뿌리를 박게 됩니다. 


9절입니다.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하나님의 지혜, 곧 십자가의 복음은 세상 사람들에게는 감추어져 있습니다. 눈으로 보지도 못하고, 귀로 듣지도 못하고,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합니다. 이 하나님의 비밀을 깨닫는 유일한 길이 무엇입니까? 10절입니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우리에게 깨닫게 해 주셔야 합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깊고 내밀한 일도 다 아십니다. 우리에게 그 하나님의 깊은 비밀을 알게 해 주십니다. 


결론적으로, 바울은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십자가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했을 때 개척하기 심히 어려운 고린도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성경의 능력을 믿고, 성령에 의지하여 담대히 복음을 증거하가를 기도합니다. 말씀을 통해 역사하시는 성령의 능력을 믿고 꾸준히 영적 성장을 이루기를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