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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5년 고린도전서 3강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고린도전서 3:1-23)2025-10-13 0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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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3 강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


말씀/ 고린도전서 3:1-23

요절/ 고린도전서 7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에서 다툼과 분쟁 가운데 있는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온전히 합하라’ 했고, 2장에서는 사도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개척할 때 두렵고 떨리는 상태였는데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개척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3장에서는 ‘오직 하나님만이 교회를 세우시고 자라게 하신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사역자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동역자다’ 그리고 두 가지로 묘사하는데, 하나는 ‘하나님의 밭에서 일하는 일군’,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집을 짓는 건축자’라고 합니다. 사역자는 단지 하나님께서 쓰시는 도구일 뿐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 중심의 교회관을 분명히 하고, 그 가운데 나의 역할이 무엇인지 배우길 기도합니다. 


먼저 바울은 1절부터 4절까지 고린도 교회의 현 상태가 어떠한지를 이야기합니다. 형제, 자매 순으로 읽겠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육의 사람이 아니리요” 고린도 교회 상태가 어떻다고 말하나요? 영적으로 성숙하지 못하고 아직도 어린아이와 같다고 합니다. 영적 세계에서는 세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첫째는 ‘육에 속한 자’입니다. 아직 거듭나지 않아서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입니다. ‘자연인’이라고도 부릅니다. 둘째는 육적 그리스도인입니다. 성령을 받았지만 자기 생각이나 세상 풍조를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본문에서는 ‘육신에 속한 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세번째는 영적 그리스도입니다. 범사에 성령을 따라 행하는 사람입니다. 본문에서는 ‘신령한 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과거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개척할 때 그들은 육신적이며, 세속적이었습니다. 1년 6개월동안 그곳에서 머물면서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먹이지 않았습니다. 기본적인 복음 진리만을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5년이 지난 지금 그들은 성장해 있어야 마땅했습니다. 영적인 그리스도인이 되었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떠합니까? 겉보기에는 은사도 많고 활발한 공동체였습니다. 하지만 바울의 눈에는 여전히 젖이나 먹고 밥은 지금도 감당하지 못하는 어린아이와 같은 상태였습니다. 


어린아이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아주 작은 일, 사소한 것으로 서로 시기하고 토라지고 싸웁니다. 송주현 목자님네 집에는 두 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서로 장난감을 차지하기 위해 싸운다고 하였습니다. “이거 내거야”, “왜 맨날 형아만 갖고 놀아” 서로 양보를 안합니다. 그러다가 화가 나면 엄마한테 가서 “엄마, 형아가 혼자만 장난감 가질려고 해. 형 혼내줘~” 우리도 어렸을 때 이런 모습이지 않았습니까? 겉 모습은 어른인데 행동은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을 뭐라고 부르죠? ‘어른 아이(adult child)’라고 합니다. UBF식으로 말하면 ‘양 같은 목자’입니다. 그는 ‘000목자님~’으로 불려지는데, 그의 행동이나 삶의 모습은 양과 같습니다. 전혀 변화 성장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어떤 청년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난 말이야 양이 좋아. 목자가 되면 남을 섬겨야 되잖아~ 난 계속 양으로 남을래~ 난 섬김만 받을래~ 난 이해 받을래” 자, 어떻습니까? 세월이 흘렀는데도 만약 아이의 몸이나 지능이 성장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부모가 얼마나 근심하겠습니까? 그렇다면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이 세월이 흘러는데도 성장하지 못하고 여전히 육적인 상태로 머물러 있는 것을 보고서  얼마나 근심이 되었겠습니까? 어떤 점에서 고린도 교회가 육적입니까? 그들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것이 바로 육신에 속한 것 아닌가? 성령을 따라 행하지 않고 사람을 따라 행한 것 아닌가?” 반문합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살지 않고 사람 앞에서 살고, 하나님을 자랑하지 않고 사람을 자랑하고, 하나님을 내세우지 않고 사람을 내세워 ‘나는 바울에게 속했다’, ‘나는 아볼로에게 속했다’ 편가르기 했습니다. 바울은 “이것이 바로 영적 미숙아, 육의 사람이라는 것을 반증하는 것 아니냐”고 되묻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를 여전히 젖이나 먹이고 밥을 먹이지 못하겠구나” 탄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을 가르침에 있어서 밥과 같은 말씀을 주지 못하고 젖과 같은 말씀으로 제한하고 있습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훌륭한 청중이 훌륭한 설교자를 낳는다.” 왜냐하면 설교자는 청중의 눈높이에 맞추어서 설교하기 때문에 청중의 수준이 높아야 설교자도 수준 높은 설교를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한 달전 저는 영국의 위대한 기독교 사상가이자 설교가인 ‘마틴 로이드 존스’의 설교문 전문을 읽었습니다. 읽으면서 두 가지 점에서 깜짝 놀랬는데요. 첫 번째 놀란 것은 성경 두 구절을 가지고서 설교를 하는데, 얼마나 깊고 심오한지, 또 세상의 모습을 어쩜 저렇게 잘 이해하고 잘 드러내는지, 또 신구약을 넘나들면서 그리스도에 관하여 어쩜 저렇게 잘 해석하고 드러내는지, 참으로 놀라웠습니다. 두 번째로 놀란 이유는 설교 내용이 결코 쉬운 내용이 아니었습니다. 골똘히 생각해야만 이해가 되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어떤 부분은 제가 많은 시간을 들여 보고 또 보고, 생각해서 겨우 이해가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과연 이 설교를 듣는 청중들은 내용을 이해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로이드 존스가 청중들의 눈 높이에 맞추어 분명 설교를 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설교를 듣는 청중들의 수준이 얼마나 높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수준높은 청중들로 인해 놀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저를 포함해서 우리는 계속하여 영적으로 성장을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과 그를 닮아가는 성품에서 우리가 성장해야 합니다. 어떻게 자랄 수 있는가? 사람을 따르면 자라지 않습니다. 성령님을 따라야 자랍니다. 뭐라고요? 사람을 따르지 않고 성령님을 따를 때 자랍니다.


그렇다면 아볼로와 바울은 무엇입니까? 5절을 읽겠습니다.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 그들은 주께서 각각 주신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라고 합니다. ‘사역자(diakonoi)’란 원어적 뜻은 ‘주인이 밥 먹을 때 식탁에서 시중드는 사람’입니다. 헬라 철학자 중에 이런 말을 하였어요. “사람이 남을 섬기는 일을 하면서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겠는가?” 헬라 사람들은 ‘디아코노이’를 하찮은 존재로 보았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무익한 종’이란 말과 비슷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 단어를 자기 자신과 아볼로에게 사용합니다. 따라서 바울과 아볼로는 존경의 대상이 될 수는 있을 언정, 신앙의 대상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위해’ ‘주님에 의해’ 일하는 종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렇다면 교회의 주인이 누구이며, 복음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 누구입니까? 다 같이 6,7절을 읽겠습니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개척했기에 심은 것입니다. 그 후에 아볼로가 계승했기에 물을 준 것입니다. 하지만 교회를 자라게 하신 분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입니다. 사역자는 씨를 뿌려서 씨와 흙이 서로 접촉하게 하고, 물을 주어 씨와 물이 접촉하게 하는 일을 할 뿐입니다. 그 씨에 생명을 주고 자라게 하는 분은 오직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 즉 생명을 주고 생명을 자라게 하는 것은 인간의 지식과 능력을 초월합니다. 이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목자들의 수고가 아무 의미가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목자들의 헌신과 희생을 통해 일하시지만 하나님이 하신 일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something 정도가 아니라 nothing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랑할 게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다 하셨습니다”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신약시대에 정말로 자랑할 것이 많은 사람이 누구이겠습니까? 사도 바울입니다. 그러나 그가 뭐라고 고백합니까?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 했습니다. 


UBF 창시자 중에 한 분인 사라베리 선교사님이 십수 년 전에 광주에 있는 UBF 역사관 개관 때 참석하셨습니다. UBF 개척자로써 한마디 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러자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저는 할 말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다 하셨습니다.” 참석한 모든 이들이 숙연해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녀는 평생 사람의 영광을 구하지 않고 사람들의 평판에 좌우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성령의 역사에 쓰임받은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도 그래야 하겠습니다. 모임에서 누가 인정받고 누가 쓰임받느냐에 따라서 비교하거나 시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직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모든 영광을 받으셔야 합니다. 교회의 주인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동역자들을 어떻게 생각해야 합니까? 8절입니다. “심는 이와 물 주는 이는 한가지이나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복음의 씨를 심는 사람이나 물 주는 사람이 한가지 추구하는 바가 뭐겠습니까?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그들은 결코 경쟁자가 아닙니다. 기능적으로 보완 관계입니다. ‘원팀(one team)’입니다. 누가 높거나 누가 낮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상을 주실 것입니다. 그 상은 각자가 일한대로 각 사람에게 주십니다. 세상의 상은 그 상을 얻기 위해서 서로 치열하게 경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상은 각 사람이 행한대로 줍니다. 경쟁자가 있다면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을 경쟁과 대립으로 몰고 가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입니다(9). 하나님의 밭에서, 그리고 하나님의 집에서 일하는 일군입니다. 바울은 황무지 같은 곳에서 복음을 전하면서 사람들의 마음에 말씀을 심고 교회를 개척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아볼로는 바울이 개척한 곳에 가서 물을 주고 가꾸는 양육의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바울이 개척한 곳에 아볼로가 와서 열매를 따먹는 것처럼 보입니다. 남이 해 놓은 곳에 숟가락만 얹은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또 바울이 개척한 곳에 와서 섬기기에 빛이 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이런 인간적인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각자의 장점을 살려 하나님의 동역자로서 하나님의 양떼를 돌보았고 서로를 존중하며 서로의 역할을 인정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이처럼 아름다운 동역으로 이루어집니다. 


종로 2부 공동체를 보면 참으로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 은사도 다양합니다. 이러한 요소들은 분열과 다툼으로 작용할 수도 있고, 아름다운 동역으로 작용할 수도 있습니다. 강영국 목자님은 사람을 즐겁게 하고 기분좋게 해 주는 은사가 있습니다. 탁구칠 때도 일명 ‘섬김 탁구’를 칩니다. 상대방이 잘 칠 수 있게 공을 넘겨줍니다. 겸손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도 강영국목자님과 금방 친해집니다. 김여호수아목자님과 송명의 목자님은 말씀을 사랑하고, 말씀을 잘 주해하며, 본문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잘 캐치합니다. 그래서 말씀공부할 때 풍성하게 해 줍니다. 또 어떤 분은 믿음이 뿌리내려진 사람을 훈련하여서 더욱 믿음을 갖게 하고 성장하게 하는 일을 잘 합니다. 또 어떤 분은 섬김의 은사를, 어떤 분은 긍휼의 은사를, 어떤 분은 문제점을 잘 파악하여 해결책을 잘 제시합니다. 어떤 분은 친교를 잘 합니다. 우리 모임에서 소중하지 않은 분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UBF에서 보통 한 명의 양이 목자로 세워지기까지 7-8명의 목자의 섬김과 동역 필요하다고 합니다. 우리 공동체에 있는 이러한 다양한 은사들이 아름다운 동역의 연합으로 성령을 통한 생명의 역사가 활발히 일어나길 기도합니다.


바울이 이제까지 사역자의 위치와 역할을 밭의 일군으로 묘사했다면, 이제는 건축자로 묘사합니다. 


10절을 읽겠습니다.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울까를 조심할지니라.” 사도바울은 자신을 지혜로운 건축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가 사람의 지혜가 아닌, 하나님의 지혜로 교회의 터를 닦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철학이나 지식을 교회의 터로 삼지 않았습니다. 더더군다나 자기 자신의 이름을 교회의 터로 삼지 않았습니다. 그가 터로 삼은 것은 오직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11).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시고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신 예수님만이 교회의 터가 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4:12절은 말합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 고린도 교회를 세웠습니다. 


바울이 닦아 둔 터 위에 이제부터 어떤 집을 짓느냐는 다른 사역자의 몫입니다. 그 위에 집을 지을 때 어떻게 하라고 합니까? ‘조심하라’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12,13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여기서 전자의 세 가지 재료 곧 금과 은, 보석은 불에 타 없어지지 않는 견고한 재료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지혜를 상징합니다. 반면 후자의 세 가지 재료 곧 나무와 풀, 짚은 금방 불에 타는 약한 재료들입니다. 이는 세상 지혜를 상징합니다. 얼른 짓기는 나무나 풀이나 짚을 사용하는 것이 쉽고, 빠릅니다. 반면에 금, 은, 보석 등을 사용하면 어렵고 시간도 많이 걸립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불에 타는 재료로 집을 짓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요? 자기의 육신의 소욕대로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은 비가 오고 어제 늦게까지 게임하느라 피곤한데 오늘 주일예배는 쉬자. 비디오로 보자’ ‘이번 주는 추석 연휴니까 소감은 패스하자’ 또한 세상 풍조를 따르는 것입니다. 오늘날 대표적인 것 중에 하나가 ‘혼합주의’입니다. 물질도 섬기고 하나님도 섬기는 것, 교회에서도 인정받고 세상에서도 인정받고자 하는 것, 여호와 신앙과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동일한 가치를 두고 살아가는 삶입니다. 또한 요즈음 ‘소비주의’가 대표적인 세상의 풍조입니다. 신앙생활조차 소비로 봅니다. 나의 귀를 즐겁게 해 주고, 나를 만족케 해 줄 그런 교회를 찾아다닙니다. 만약 맘에 안들면 언제든지 다른 교회로 떠날 준비를 합니다. 주일예배에 오는 것도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해 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대접을 받고 자기가 섬김을 받기 위해 나를 위해 옵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 내게 도움이 될 만한 것들만 골라 교회 생활을 합니다. 이러한 신앙생활의 행태는 주와 복음을 위해 고난 받는 것을 꺼려합니다. 하나님께서 불로 테스트할 때 남는 것이 있을까요? 그 결과는 마치 안데르센동화에 나오는 ‘벌거벗은 임금님’과 같이 부끄럽게 될 것이 뻔합니다. 다만 불가운데서 구원은 받겠지요. ‘구원받으면 됐지~’ 이렇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런 의미로 이 말씀을 준 것이 아니잖습니까? 경계의 말씀으로 엄중하게 받아드려야겠습니다. 


그렇다면 불에 타지 않는 재료로 집을 짓는 것은 무엇입니까? 첫째, 내 인생이 내가 원하는대로 풀리지 않을지라도 말씀을 붙들고 씨름하는 것입니다. 손해보더라도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생명의 말씀, 영존하시는 하나님의 말씀만이 진리이며, 참된 가치이며,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둘째, 성령을 따라 사는 삶입니다. 바울이 2차 전도여행때 아시아 지역을 전도하고자 하였으나 성령이 막으셔서 안되었습니다. 드로아에 갔을 때 ‘유럽으로 건너와 우리를 도우라’는 성령의 방향을 받습니다. 이때 바울은 계획에 없었지만 성령에 순종하여 유럽으로 건너가지 않았습니까? 건너갈 때 유럽 사람들이 “웰컴~ 바울” 했습니까? 전도도 쉽지 않았고, 유대인들의 박해 때문에 매도 맞고 감옥에 갇히고 죽을 고비를 여러번 넘기고 자의반 타의반 쫓겨 다녔습니다. 헬라철학과 견고한 우상과 음란한 문화에 바울은 숨이 막힐 지경이었습니다. 복음 전파는 마치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과 같이 느낌이었습니다. 급기야 고린도에 왔을 때 그렇게도 용맹했던 바울은 두렵고 떨었습니다. 위축되었습니다. 연약해졌습니다. 입이 닫혔습니다. ‘아니 유럽으로 들어와~ 들어와~ 했으면 복음역사가 순풍에 돛단 듯 순탄해야 하지 않는가? 이게 뭡니까?’ 바울이 불평할 수도 있지 않았겠습니까? 이때 성령께서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이 성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였습니다. 그때 바울이 어떻게 합니까? 자기 생각이나 느낌이나 힘듬을 부인하고 성령께 굴복하여 1년 6개월동안 고린도에 머물면서 육신적이고 세속적인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결과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고린도 교회를 개척한 것 아닙니까(18:9-11)? 이처럼 어떤 상황과 형편가운데서도, 두렵고 힘들지라도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 때 그 모든 수고가 상급으로 고스란히 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없어지지 않는 견고한 재료인 금과 은과 보석으로 집을 지어야겠습니다. 개인뿐 아니라 교회도 세상의 지혜가 아닌 하나님의 지혜로 집을 계속 지어가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고린도 교인들의 정체성은 무엇입니까? 16절을 읽겠습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또한 교회가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이 그곳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터와 맞지 않는 설교를 한다든지, 교회 안에서 당파를 만들어 공동체의 질서를 어지럽힌다면 하나님께서 가만 계시지 않습니다. 교인도, 또 그 공동체도 하나님께서 멸하십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기 때문입니다.(17). 


우리가 주의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18절입니다. “아무도 자신을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어리석은 자가 되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 고린도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다고 착각했습니다. 분쟁의 뿌리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지혜를 헛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19-20). 정말로 하나님 앞에서 지혜로운 사람은 세상에서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 생각을 주장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기 때문입니다.  


그런즉 우리는 무엇을 자랑하지 말아야 합니까? 21절을 읽읍시다.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사람 목자’를 자랑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도 가졌기 때문입니다. 사역자가 교인을 위해서 있는 것이지, 교인이 사역자를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교인은 특정 사역자를 중심으로 당파를 만드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도 다 교인들의 것입니다(22). 그리고 교인들, 즉 교회는 누구에게 속해 있습니까? 23절입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속해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하나님께 속해 있습니다. 


결론입니다. 교회의 주인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의 이름만이 높임을 받고 주님만이 영광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교회를 함께 섬기는 종이요, 동역자입니다. 교회는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믿음의 기초를 견고하게 놓아야 합니다.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지지 않는 하나님의 지혜인 말씀과 성령을 따라 행하는 우리 교회 공동체가 되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