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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5년 고린도전서 4강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린도전서 4:1-21)2025-10-20 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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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고린도전서 제4강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말씀 / 고린도전서 4:1-21

요절 / 고린도전서 4:16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우리가 배운 바와 같이, 고린도전서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실제적인 문제들을 돕고자 보낸 편지입니다. 고린도 교회에는 여러 가지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분열, 음행, 세상 법정에 소송하는 것,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 자기 은사를 자랑하는 것 등 많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 1~9절에서 인사말을 하였습니다. 그후 1:10절부터 그들 가운데 있는 여러 문제 중에서 가장 심각한 분열 문제를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4장 말씀은 그 분열 문제에 대한 마지막 부분입니다. 분열 문제의 뿌리는 교만 문제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자신이 어떻게 예수님의 십자가의 도를 실천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를 말합니다. 그는 예수님을 본받느라 만물의 찌꺼기가 되기까지 하였습니다. 바울은 성도들에게 이런 자신을 본받으라고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목자 바울의 삶을 배우길 기도합니다. 


1절입니다.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앞의 3장에서, 바울은 자신이나 아볼로는 하나님의 밭과 집을 섬기는 사역자에 불과하다고 말했습니다. 자기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나 하나님이 자라게 하셨습니다. 씨를 심는 거나 물을 주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식물을 자라게 하는 일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생명을 잉태하고 자라게 하는 일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역자들을 높이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1절에서 바울은 자신을 그리스도의 일꾼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일꾼”은 원어로 "휘페레타스"인데 갤리선의 노 젓는 노예를 말합니다. “벤허” 영화를 보면 그가 갤리선에서 발을 쇠사슬에 묶인 채 노를 젓는 모습이 나옵니다. 한마디로 사역자는 그리스도의 종으로 아주 낮은 위치에서 섬기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여기서의 ‘일꾼’은 그저 의미 없이 중노동만을 하는 노예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입니다. "하나님의 비밀"은 복음을 말합니다. 바울은 복음을 맡았습니다. 복음을 전하여 죽어가는 영혼들을 구원하는 직분을 받은 것입니다. 누가 그 직분을 주었습니까?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직분을 받은 자에게 요구되는 바가 무엇입니까? 2절입니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여기서 맡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비밀, 곧 복음을 전하라는 사명을 맡은 것입니다. 이런 그에게 요구되는 것은 다름 아닌 “충성”입니다. 우리나라는 유교 문화권에 있기에 '충성'이라고 하면, 고려에 충성한 정몽주 같은 분을 생각합니다. 전두환 정권 때 경호실장을 지냈던 장세동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분은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충성을 다한 사람입니다. 그는 5공 비리 국회 청문회에서 적극적으로 전두환 정권을 옹호했습니다. 그는 감옥에서 나온 후 즉시 전두환을 찾아가 큰절로 인사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언론에서는 그를 “의리의 화신”, “충성의 모범“이라고 합니다. 이와 같이 주군을 무조건 따르는 것을 “충성”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여기 1절에서의 “충성”은 원어로 “피스토스“, 영어로는 “loyalty”가 아니라 “faithfulness”입니다. “주인에게 마음으로 다하여 일관되게 맡은 일을 감당하는 태도”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신실하여 믿을만한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직분을 받은 것은 얼마나 영광스런 일입니까? 그래서 처음에는 큰 감사함으로 일을 합니다. 그런데 직분을 계속 섬기다 보면 익숙해집니다. 점점 마음을 별로 안 쓰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습관적으로나 타성적으로 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은 충성이 아닙니다. 언제든지 하나님의 역사에 경외심을 갖고 마음을 다하는 것이 충성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직분을 받은 사람은 변함없이 하나님을 마음을 다해 섬기는 자세가 요구됩니다. 사람에게 충성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입니다. 


창세기의 요셉은 충성스러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아버지에게 충성하였습니다. 형들의 안부를 알아보라는 부탁을 받고 도단까지 수소문하여 찾아갔습니다. 보디발의 집에서 가정 총무로 충성하였습니다. 감옥에서는 일을 맡긴 간수를 위해 충성하였습니다. 애굽의 총리로서 바로를 충성스럽게 섬겼습니다. 이는 실상 요셉이 그들을 세우신 하나님께 충성한 것이었습니다. 신약의 요셉, 곧 마리아의 남편 요셉도 충성스러운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그는 한마디도 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언제나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보호하였습니다. 자기를 숨기면서 하나님이 일하실 수 있는 환경을 적극적으로 만들었습니다. 자기가 맡은 직분에 충성한 것입니다. 우리 각자도 직분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맡기신 직분 중에 크고 작은 것이 따로 없습s니다. 중요하고 안 중요한 것이 따로 없습니다. 하나님의 교회 공동체를 세우는 데 있어서 다 크고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가 직분을 맡은 자로서 각자 있는 위치에서 하나님 앞에서 충성하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공동체를 세우는 데 쓰임 받기를 기도합니다. 


바울이 하나님 앞에서 충성하였을 때 그는 사람들의 판단에서 자유로웠습니다. 3절입니다.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그는 직분을 맡기신 하나님 앞에서 살았습니다. 장차 하나님 앞에서 결산할 것을 알고 하나님의 판단을 의식하고 살았습니다. 물론 이는 그가 다른 사람들의 말을 무시하거나 그들의 권고나 조언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다른 사람의 조언을 겸손히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자기를 심판하실 분은 하나님이심을 알고 그 하나님 앞에서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이런 그는 사람들의 판단에 매이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자책감이나 정죄 의식에 매이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이런 그는 양심상 떳떳하였습니다. 물론 그렇다고하여 그가 스스로 의로운 자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심판하실 것을 알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심판 때에 하나님은 무엇을 보십니까? 5절입니다.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심판자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속하셨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일을 맡기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직분자로 세우셨습니다. 사람이 다른 사람을 판단할 권한이 없습니다. 지난번 로마서 14장에서도 배웠습니다.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으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 (롬14:4) 사람을 세우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판단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그의 심판 때에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시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십니다. 세상에서는 보이는 결과로 판단합니다. 수치로 계산하여 비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마음의 뜻을 보십니다. 우리 마음의 동기와 목적을 보십니다. 그렇습니다. 외적으로 나타나는 결과는 하나님의 뜻하신 바에 따라 당장 나타나기도 하고 나중에 나타나기도 합니다. 우리는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부탁하신 일을 최선을 다해 감당할 따름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어떻게 섬겼습니까? 6절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들어서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가지지 말게 하려 함이라." 바울과 아볼로는 사역자로서 하나님께 충성하는 자세와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않는 면에서 겸손의 본을 보였습니다. 무엇보다 고린도 성도들이 교만하지 않도록 기록된 성경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예를 들어 잠언서 3:34, "진실로 그는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나니", 시147:6 "여호와께서 겸손한 자들은 붙드시고 악인들은 땅에 엎드러뜨리시는도다" 등의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분명히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넘어가 임의로 행하지 않도록 경계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말씀을 넘어가 버렸습니다. 서로 대적하며 교만한 마음을 품었습니다. 


사람이 교만해지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개구리가 올챙이 시절 기억하지 못한다는 말처럼 우리는 과거를 쉽게 잊어버립니다. 내가 원래부터 성경을 잘 알고 가르치는 목자였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를 감당해 주신 주님과 선배 목자님들의 은혜를 쉽게 잊어버립니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왕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으로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 (단 4:30) 그러자 그는 그 즉시로 왕위에서 쫓겨나 소처럼 풀을 먹는 수광병에 걸립니다. 7년을 그렇게 삽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십니다. 하나님의 대적이 된다는 것은 얼마나 끔찍한 일입니까! 사람의 대적이 되면 하나님이 구해주시지만 하나님의 대적이 되면 누가 구원해 주겠습니까? 교만해지지 않기 위해서 우리를 늘 진실되게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서서 회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실제적인 제언으로 우리는 언제나 우리 자신을 다른 사람의 아래 위치에 두는 것이 좋습니다. 자기가 왕 노릇하지 않은 위치에 자기를 두는 것이 안전합니다. 그럴만한 분이 위에 없으면, 다른 사람들을 자기 위에 두는 것이 좋습니다. “Hold yourself accountable to”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신의 삶과 사역을 보고하는 대상을 두라는 것입니다. 소감모임 같은 신뢰할 수 있는 소그룹에 정기적으로 자기의 삶을 보고하는 위치에 자기를 두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만이 자기를 속이는 것을 방지하는 좋은 비결입니다. (옵1:3)


그러나 고린도 교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교만해졌습니다. 특히 그들은 자기들의 풍성한 지식과 지혜를 자랑하였습니다. 인간적으로 그런 점들이 뛰어난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지식과 지혜, 은사와 능력은 모두 하나님이 주신 것이었습니다. 원래부터 갖고 있던 것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자랑하며 교만해서는 안 됩니다. 오직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을 자랑해야 합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인들은 배가 불렀습니다. 인간적인 풍성함을 의지했습니다. 왕 노릇하였습니다. 왕은 최고의 위치에 있는 자입니다. 그들은 마치 가장 높은 지위에 있고 아무것에도 제어되지 않는 권력을 가진 자처럼 행동하였습니다. 


고린도 성도들을 교만하였지만 바울의 삶은 어떠했습니까? 9절입니다. "내가 생각하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된 자 같이 끄트머리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여기서 “끄트머리에 두셨다”, “구경거리가 되었다”는 말은 로마의 개선 행진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로마 제국은 힘을 숭상하였습니다. 황제가 되기 위해서는 로마 제국을 위해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우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줄리어스 시저는 이런 공을 세우기 위해 수년간 Gaul 지역을 정벌하였습니다. 당시 전쟁에서 승리하여 로마시로 들어오는 개선 행진은 대단한 구경거리였습니다. 제일 앞에 개선장군이 위풍당당하게 입성합니다. 그 뒤에 로마 장교들, 그 뒤에 군병들, 그 뒤에 금은보석 등 전리품을 실은 마차들, 그리고 제일 끝에 쇠사슬에 묶인 포로들이 들어옵니다. 로마 사람들은 개선장군에게는 큰 소리로 영광을, 맨 끝에 들어오는 포로들에게는 조롱과 저주를 퍼부었습니다. 포로들은 원형 경기장에 던져져 맹수들의 밥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이를 비유하며 하나님이 사도들을 죽이기로 작정된 포로들 같이 죽음의 퍼레이드의 맨 마지막에 두셨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구체적인 형편이 어떠합니까? 10~13절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으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나 우리는 비천하여 바로 이 시각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모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즉 참고 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 바울은 당대의 지성인이었습니다. 학문이 높은 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위해 사느라 어리석은 자처럼 되었습니다. 고린도 성도들은 스스로 지혜롭다고 뻐기며, 강하고 존귀한 자로 자처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의 양들을 위해 약하고 비천에 처하였습니다. 


11절을 보면 "바로 이 시각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다“고 합니다. 바로 이 시각은 에베소에서 이 편지를 쓰고 있는 시점입니다. 그의 고난은 고린도를 개척할 때 한때 겪었던 과거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지금도 받고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우리가 부활장 암송할 때 이런 말씀이 있었습니다. "내가 사람의 방법으로 에베소에서 맹수로 더불어 싸웠다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고전15:32a) 여기서 맹수와 더불어 싸웠다는 것은 맹수와 같은 복음의 대적자들을 의미합니다. 사도행전에 바울이 실제적으로 맹수와 싸웠다는 기록이 없고, 또한 바울은 로마 시민권자였기에 검투장에 던져질 가능성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바울이 에베소를 개척할 때, 그가 그냥 두란노 서원에서 일대일을 열심히 했더니 온 아시아에 사는 사람들이 다 말씀을 듣고 큰 역사가 일어났다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는 에베소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는 사도의 특권을 내려놓고 친히 일을 하며 생활비를 마련했습니다.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 맞으며 정처가 없었습니다. 사람의 가장 기본적인 필요인 의식주가 전혀 보장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매를 맞았습니다. 죄가 없이 매를 맞는 것은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이런 가운데서도 바울은 모욕을 당해도 축복해 주었습니다. 박해를 받아도 참았습니다. 비방을 받은즉 권면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삶이 어떠하다고 말합니까?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 세상의 더러운 것이 무엇입니까? 오물입니다. 사람들이 더럽다고 쳐다보지도 않는 것입니다. 그는 만물의 찌꺼기 (the scum of the earth)가 되었습니다. 설거지를 하고 나면 수챗구멍에 음식물 찌꺼기가 쌓입니다. 샤워를 하고 나면 수챗구멍에 머리카락 같은 것들이 잔뜩 끼어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그런 오물 찌꺼기 같은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왜 그러한 비천한 삶을 살았을까요? 이는 그것이 예수님이 가신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40일간 금식하며 마귀의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지만 머리 둘 곳 없이 사셨습니다. 수시로 산에 가셔서 밤새 기도하셨습니다. 무엇보다 우리들의 죄를 위해 채찍을 맞으셨습니다. 가시관을 쓰고 십자가에 매달려 벌레 같이 되셨습니다. 옆구리는 창에 찔려 물과 피를 다 흘리고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의 죄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전능하신 성자 하나님이 인간의 몸으로 오셔서 그 모든 모욕과 조롱과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신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를 위해, 또 온 인류를 위해 그러한 고난을 받으신 예수님을 생각하면 너무나 감사하고 감격하였습니다. 죄악된 자기가 천번 만번 예수님이 가신 길을 가더라도 조금도 자랑할 것이 없음을 알았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제자로 예수님을 본받고자 하였습니다. 이를 위해 기꺼이 더러운 걸레처럼 되었고 만물의 찌꺼기같이 되었습니다. 


14절입니다.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 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 바울이 위와 같이 자기가 얼마나 비천에 처하였는지를 말하는 것은 이를 통해 그들을 부끄럽게 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들이 자녀같이 사랑하여서 교만한 마음을 버리도록 권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복음 전파를 위해 많은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고난받은 것을 무용담처럼 말한 적이 없습니다. 언제나 자기가 고난받은 사실을 숨겼습니다. 여기에서도 고린도 성도들을 자녀들과 같이 사랑하여 그들을 권하기 위하여 조금 말한 것뿐이었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에 나오는, 그의 고난 당한 모습도 거짓 교사들에게 속고 있는 성도들을 돕기 위해 어쩔 수없이 말한 것이었습니다. 그가 받은 모든 고난은 실로 주님만이 아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를 처음 부르실 때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셨습니다. 그 말씀대로 그는 고난의 종이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을 아버지와 같이 섬겼습니다. 15절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 여기서 ‘스승’이라는 말은 우리로 하여금 “스승의 날”, “스승의 은혜”라는 말을 떠올리게 하여 존경하는 마음을 갖게 합니다. 그러나 이 단어는 "파이다고고스"로 “교사”라는 뜻입니다. 고대 로마 사회에서, 부유한 집의 노예 중의 하나로 주인의 아이를 학교까지 데려다주고 데려오는 일을 맡은 사람입니다. 오늘날의 돌보미, '가디언'(Guardian)을 말합니다. 돈을 받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사람은 당시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의 아버지였습니다. 아버지가 자녀를 돌보는 자세는 돌보미의 자세와 완전히 다릅니다. 아버지는 자녀가 교육을 잘 받고 훌륭한 사람으로 자라도록 온 마음과 힘을 쏟습니다. 자기를 희생합니다. 자신은 고생하더라도 자녀들의 비싼 등록금과 사교육비를 기꺼이 감당합니다. 늘 노심초사하며 자녀를 위해 기도합니다. 바울은 그런 아버지의 마음으로 그들을 섬겼습니다. 


이런 그는 고린도 성도들에게 말합니다. 16절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어떤 분은 이 말을 듣고 말합니다. "바울이 좀 교만한 것 아니야? 예수님을 본받아야지 어떻게 자기를 본받으라고 하지?" 그런데 여기서 바울이 말한 바는 그저 자기를 배우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배우는 자기를 배우라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1:1절에서도 그는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앞의 11절에 나오는 "바로 이 시각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는 13절의 "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같이 되었도다"라는 고백 자체가 바울이 예수님을 배우고 있는 것을 말해줍니다. 바울은 무엇을 하든 예수님을 배우고자 했습니다. 예수님의 성품, 예수님의 인격, 예수님의 사랑을 배우고자 하였습니다. 예수님과 같은 사람이 되고자 하였습니다. 이것이 그의 인생 목적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롬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의 형상을 본받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배우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양을 치고 전도를 하고 역사를 열심히 섬겨야 합니다. 세계 선교에 나가고 제자 양성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보다 우선되고 기초가 되어야 하는 것은 예수님을 배우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겸손으로 서로 동역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전도하고 양을 치고 선교사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이 말씀은 그의 삶을 본받으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할 뿐만 아니라 복음을 살아내었습니다. 복음을 가르치고 그대로 행하였습니다. 복음이 그의 삶을 통해 능력으로 나타났습니다. 우리는 말로 가르치기는 잘합니다. 그러나 살아내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나를 본받으라“ 라는 말을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나를 배우지 마, 예수님을 배워!“라는 말로 마음에 부담을 덜어냅니다. 그러나 우리도 예수님을 힘써 배우는 가운데 ”너희는 나를 본받으라!“라고 말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을 배우는 것은 좀 막연합니다. 눈에 보이는 어떤 분이 예수님까지 가는 중간 목표가 되면 우리에게 도움이 됩니다. 우리가 모두 예수님을 힘써 배우는 가운데 예수님에 이르는 좋은 중간 목표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17절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을 돕기 위해 디모데를 보냈습니다. 고린도 성도들이 교만해진 이유 중의 하나는 사도 바울이 다시 오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현재 에베소 사역이 너무 바빠, 그의 건강도 좋지 않아, 그러니 그가 이곳에 다시 오지는 못할 거야" 라고 생각하며 왕 노릇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말합니다. 19, 20절입니다. "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교만한 자들의 말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보겠으니,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하나님의 나라가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능력이라고 하면 기적을 행하는 능력 또는 치유의 능력을 생각합니다. 물론 그런 것도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능력“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의 삶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난 모습을 말합니다. 즉, 그들이 배운 복음이 삶에서 나타나 사랑과 겸손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공허한 웅변이 아니라 거룩함과 화평함을 이루는 실제적인 모습을 말합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가서 그들의 실제적인 삶에서의 변화가 없이, 말쟁이처럼 교만한 모습을 보이면 엄히 징계하겠다고 합니다. 그러니 매를 들고 가지 전에 회개하여, 그들에게 가서 사랑과 온유로 섬기도록 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결론적으로, 바울은 예수님을 본받는 삶을 살았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의 길, 십자가의 길을 걸었습니다. 양들을 섬기기 위해 만물의 찌꺼기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의 목적은 예수님을 배우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의 사랑과 겸손, 그의 믿음을 배우는 것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예수님을 배워 이 시대의 작은 예수들로 살아가기를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