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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5년 가을 수양회 주제 1강 하나님의 사랑에 거하는 자 (요한일서 2:1-17)2025-11-03 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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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가을 수양회 주제 1강


하나님의 사랑에 거하는 자 


말씀: 요한일서 2장 1절-17절

요절: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15)


  요한일서는 예수님의 제자 중 가장 어린 것으로 알려진 요한이 쓴 편지입니다. 이 편지를 쓸 때의 그는 나이가 들어 머리가 희어지고 키도 작아졌습니다.  평생 사명을 감당하는 삶을 살았으니 이제는 쉬어야 할 것 같은데, 교회 안에 들어온 거짓 사상이 그를 쉬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참된 구원은 ‘특별한 지식’에서 온다고 하였습니다. 육체와 영혼을 분리하여, 육체가 한 일은 영혼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이 거짓된 주장에 맞서서 노사도는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편지를 씁니다. 오늘은 그 가운데 세 가지 당부를 확인하고자 합니다.  


첫째. 대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심을 기억하라 (1-2) 


  1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요한일서 1장은  우리가 하나님의 빛 안에서 살아가는 길을 안내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 용서받고 하나님과의 사귐을 회복하는 길은 미쁘신 예수님을 믿고 자신의 죄를 자백하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아버지의 마음으로 우리가 죄를 범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물론 우리도 죄를 범하지 않고 싶습니다. 그런데 실상은 매일 죄 가운데 허덕입니다. 정욕, 게으름, 시기, 미움, 욕심 등등 그리고  죄를 범하면 자학과 불의에 빠집니다. 자포자기 하여 죄의 수렁에 더 깊이 빠지기도 합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빛 안에 있는 것이 부담스러워 영영 숨고 싶습니다. 


   이 때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대언자, 즉 변호사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검사인 사탄은 우리의 죄를 낱낱이 밝히지만, 예수님은 우리를 변호해 주십니다. “하나님, 이 사람이 죄를 지은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제가 이 사람을 대신해서 심판을 받고 형벌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도 나를 믿는 자는 어떤 죄인이라도 용서하신다고 약속하셨지 않습니까?(요 3:16)” 


  예수님은 어떻게 변호사가 되십니까? 2절을 다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그는 자신의 피로 하나님의 진노를 멈추게 하셨습니다. 

 ‘화목제물’이란 죄의 값을 치르고, 하나님과의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키는 제물 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 값을 치르기 위해 채찍질을 당하여 온 몸이 찢어졌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이사야서 53장 6절은 말합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예수님은 우리 뿐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 되십니다. 예수님이 흘리신 피는, 온 세상 그리고 온 시대와 비견할 수 없이 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죄를 범하고 나서 예수님에게 나가고, 또 죄를 범하고 예수님에게 나가고…. 너무 염치없는 일 아닐까요?” 염치 없는 일 맞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오직 그것 뿐입니다. 우리는 대언자 예수님께 나가고 또 나가야 합니다. 대언자 예수님을 믿고 나가는 사람이 언제까지나 죄에 머무르는 일은 없습니다. 염치 없더라도 계속해서 예수님께 나오면 하나님의 성령이 그를 도우시고, 죄에 대하여 점차 강한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우리가 늘 대언자 예수님께 나아가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형제를 사랑하라 (3-11)

  3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그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세상에는 거짓 사상들이 많은데, 우리는 스스로 구원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습니까? 요한은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킬 때,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그것이 우리에게 확신이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헬라어에는 우리말 ‘안다’로 번역되는 단어로 ‘오이다’와 ‘기노스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오이다’는 경험을 해보지 않아도 아는, 직관적인 앎을 뜻합니다. ‘기노스코’는 관계와 체험을 통해서 깊이 알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여기에 계신 대부분의 분들은 나이지리아 라는 나라에 대해 ‘오이다’ 하실 것입니다. 가난하고 살기 불편한 나라라고 ‘오이다’ 하시죠? 그런데 저는 나이지리아에서 7년간 살면서 ‘기노스코’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가난을 보았고, 불편한 삶을 살아 내면서 그 곳에 사는 양들을 ‘기노스코’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계신 윤안드레, 레베카 목자님의 ‘기노스코’는 저의 ‘기노스코’ 보다 더욱 깊을 것입니다. 


  요한일서 2장 3절부터 6절 사이에 쓰인 ‘안다’라는 단어는 모두 ‘기노스코’입니다. 그들의 앎은 배움을 통해 형성된 것이 아니라 겪어보며, 체험하며 형성된 것입니다.


  우리는 매주 성경을 공부하고, 예배를 통해 영적인 양식을 공급받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깨닫고 진리를 분별하게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멈추면 안 됩니다. 우리가 배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순종해야 합니다. 그 때, 하나님을 온전히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5절은 말씀을 지키는 자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온전하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실천할 때, 우리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성숙해지고, 우리가 예수님의 행하심을 닮아가게 될 것입니다. (6)


 우리 주위에는 ‘나의 하나님’을 얻었다 하는 간증이 많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예외없이 말씀하시는 하나님, 그리고 그 말씀에 순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저는 국민학교 4학년이 되는 해 3월 엄마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시고, 같은 해 12월 아빠가 사고를 당해 병원에 오래 입원해있으며, 고아와 같이 지낸 시간들이 있었습니다. 그 이후 저는 가난하고 고단한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대학생이 된 저는 성경 공부를 통해 주관자 하나님을 알았지만, 그 분의 선하심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그분은 나를 고난 가운데 내버려두셨던 분 아닙니까? 그러나 창세기 50장 20절의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요셉의 형들을 위로하는 말을,  크고 작은 사건 앞에서 기억해내었습니다. 불평하는 마음이 생길 때마다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 말씀을 떠올리며 저를 말씀 앞에 복종시켰습니다. 그러자 참으로 하나님이 선하신 분임을 깨달아졌습니다. 많은 일이 선하게 해석되었고, 나의 고달픈 어린 시절이 저를 어둠으로 몰아넣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지켜야 할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주신 ‘새 계명’ 입니다. 7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가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예수님은 우리에게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13장 34절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새계명이 있다면 옛계명도 있겠죠? 옛계명은 무엇일까요? 


  구약 성경 신명기 6장 5절에는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기록되었고, 구약 성경 레위기 19장 18절에는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기록되었습니다. 


그럼 오래되었지만 중요한 계명이라고 하지 않으시고, ‘새 계명’이라고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8절을 읽겠습니다.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그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둠이 지나가고 참빛이 벌써 비침이니라” 


  구약 시대에도 하나님의 계명이 있었고, 그 계명은 신약의 그것과 비슷하였습니다.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을 행할 힘이 없었습니다. 혹 행하더라도, 행하는 동기는 벌을 피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자동차는 스쿨존을 천천히 달려야 합니다. 법이 스쿨존을 정한 이유는 혹시라도 어린아이가 튀어나와 사고가 날까 하여 그 사고를 막기 위한 것이지만,  그 곳을 달리며 어린이들을 생각하는 운전자는 거의 없을 것입니다. 운전자는 따따블로 부과되는 벌금에 신경을 더 많이 씁니다. 벌칙을 피하기 위한 최소한의 순종 그것이 계명을 지키는 구약 시대 사람들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럼 신약 시대를 살고 있는, 예수님 안에 사는 우리에게 계명은 어떤 것입니까? 예수님은 하나님께 순종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그  사랑은 힘이 있어 우리를 변하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사랑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싶습니다. 심판에서 자유로워졌지만, 계명을 잘 지켜 하나님 안에 머물고자 합니다. 


  9절은 우리가 형제를 미워한다면 빛 되신 예수님 안에 있지 않다고 합니다.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가야할 길을 명확히 알고 있으며 거리낌이 없으나,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에 있어서 갈 곳을 알지 못하는 영적 소경과 같다고 요한은 단호하게 선언합니다. 


  제가 장막 생활을 할 때 크고 작은 갈등이 있었습니다. 장막 생활을 같이 하던 선배 언니는 제 기준 부잣집 딸이었는데, 부모님이 보약을 해주어서 장막 냉장고를 가득 채웠습니다. 어느 날 제가 냉장고에 무언가를 넣어야해서 약 중 몇 개를 꺼내 놓았습니다. 이를 발견한 언니가 ‘이거 누가 꺼내놨어?’라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아이 헤이트 유’라고 뱉었습니다. 저는 크게 상처를 받았습니다. 가까운 사람에게 받은 상처는 기억에 오래 남습니다. 사실 그 언니는 저에게 좋은 것도 많이 주었습니다. 제가 나이지리아에 갈 때 예승이 책과 장난감을 많이 들고 갔는데 대부분 그 언니에게 받은 것이었습니다. 

  사실 저는 지금까지 이 일에 관해 한번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사이 좋은 선후배로 주욱 지내왔습니다.그런데 가슴 한켠에 박아 두었던 그 미움을 메세지를 쓰며 예수님 앞에 온전히 꺼내어 놓자, 그 묵은 감정은 옛 것이 되었습니다. ‘선배도 많이 어렸었구나.’ 이해가 되고, 그가 저를 챙겨주려 애쓰던 모습이 떠올라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형제를 미워할 수 있는 이유는 다양합니다. 형제가 미움의 원인을 제공하였고 그 원인이 사라지지 않아서 ‘미워하는 일’이 정당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사랑을 하면 미움이 사라집니다.사춘기가 된  딸은 저에게 매일 버릇없이 굴지만, 성장하는 중이라는 생각만 할 뿐 미움이 남지 않습니다. 


  우리가 빛 가운데 거하며 형제를 사랑하기를 기도합니다. 미워하는 마음을 들고 예수님 앞으로 나아가기를 기도합니다. 새 계명을 지키며 그 안에서 하나님의 온전하신 사랑을 누리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 (12-17)


  12절부터 14절에서 요한은 세 부류의 신자들을 부릅니다. 바로 아이들, 아비들, 그리고 청년들입니다. 이들은 모두 하나님 안에서 이미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을 알며, 악한 자를 이긴 사람들입니다.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에 있다는 요한의 글을 읽었을 때, 많은 사람들은 ‘내가 빛 가운데 있는가? 아직 어둠 가운데 있는건 아닌가?’ 고민하였을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근심하는 그들에게 ‘그들이 누구인가’ 정체성을 확인해줍니다. “너희는 이미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야, 너희는 하나님과 동행해왔고, 사탄의 세력을 이긴 사람들이야.”라고 격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빛 가운데 거하는 우리는 세상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15절 상반절 ‘사랑하지 말라까지’ 읽어보겠습니다. “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여기에서 세상은 ‘하나님을 배척하고, 하나님 없이 자기를 높이려는 모든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사랑한다’는 것은 그것에 관심을 두고 마음을 바친다는 뜻입니다. 그것을 최우선으로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첫째,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머무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15절 후반부를 읽겠습니다.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예수님은 마태복음 6:24절에서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설령 우리가 재주가 좋아서 하나님과 세상을 겸하여 사랑하는 척할 수 있을지라도, 하나님은 그런 이중적인 사랑을 결코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할 것인가 세상을 사랑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조화의 문제가 아니라 결단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세상을 사랑하지 말아야 하며, 세상을 사랑하면 하나님을 잃을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 예수님을 주시며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보여주십니다.  그 사랑은 우리의 삶의 모든 것을 바꾸어 주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평안함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초청하시며 세상의 근심과 어려움을 내려놓고 쉬게 하십니다. 

  우리를 강하게 하여 죄와 싸울 힘을 주었고, 우리는 죄로 인한 두려움에서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안에서 귀하고 가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자녀의 외모나 능력 때문이 아니라, 자녀의 존재 자체를 귀하게 여기고 사랑합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우리가 못하는 것이 있어도, 실수를 하더라도 괜찮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빛나게 합니다.  


  2016년 4월 어느 날,  저는 청소를 하다가 먼지 구덩이에서 금반지를 발견했습니다. 당시 만 3세이던 딸은 집의 구석구석 잘 뒤졌는데, 딸이 예승이 돌반지를 발견하고 꺼내어 갖고 놀다가 휙 내던진 것으로 짐작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 반지를 주워서 제자리에 잘 가져다 놓았습니다. 이처럼 귀한 것을 버릴 수 있는 것은, 그 가치를 알지 못하는 아이만이 할 수 있는 행동입니다. 


  우리는 아버지의 사랑을 귀하게 여기고 있습니까? 은혜로 값 없이 주셨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세상과 비교할 수 없는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의 가치를 알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세상을 사랑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세상은 아버지로부터 온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16절을 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성경은 세상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합니다. 

  육신의 정욕이란 우리 몸이 원하는, 통제되지 않은 욕망을 말합니다. 쾌락, 안락, 물질적인 만족을 추구하는 것으로 성적 부도덕, 온갖 중독, 게으름 등으로 나타납니다. 

  안목의 정욕이란 눈으로 보고 탐내는 욕망을 말합니다. 눈은 마음의 문이 되어 세상의 가치를 끊임없이 마음으로 들여보냅니다.  SNS에서 다른 사람의 삶을 보고 ‘나도 저거 가져야 해.’ 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보여지는 나를 위해서 외모를 가꾸고, 있는 것을 자랑하고, 없어도 있는 척을 합니다. 

  이생의 자랑이란 자신의 업적, 지위, 능력 등을 하나님 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이룬 것처럼 내세우고 뽐내는 교만한 마음입니다. 타인보다 우월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노력하여 얻은 것’은 앞의 두 정욕보다 고상해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자랑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이 주신 바탕 위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명문대생은 분명히 열심히 공부를, 노오력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게 공부를 할 수 있는 환경과 지혜 그리고 그 동기 모두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교만하기 전에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입니다. 육신의 정욕을 사랑하면 거룩하신 하나님을 잃고, 안목의 정욕을 사랑하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잃고, 이생의 자랑을 사랑하면 영원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잃습니다. 

 

  셋째, 세상을 사랑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이 세상이 지나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17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 이 세상도 그 정욕도 다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은 변천과 쇠퇴를 반복하면서 다 지나갑니다. 올해 3월 넥슨의 창업주였던 김정주 이사가 엄청난 재산을 남겨두고 유명을 달리했습니다. 그는 서울대와 카이스트를 나온 재원이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세상에서 아무리 많은 것을 얻는다 해도 그것은 다 지나갑니다. 

  로마서 2장 7절은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라고 했습니다. 영원히 영광스럽고 썩지 않는 것은 하나님뿐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만이 하늘나라에 영원히 거합니다.

  여기에 계신 여러분과 제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여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기를 기도합니다. 


  이생의 자랑을 추구하던 저를 부르셔서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을 깨닫도록 인도하셨습니다. 


  저는 목자님이 ‘우리는 모두 죄인이야’라는 말에 심하게 반발하던, 아무것도 모르는 양 중의 양이었습니다. 그러나 꾸준한 성경 공부, 그리고 수양회 가운데 일어나는 성령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그 앞에서 죄인임을 인정하고 예수님이 주시는 죄사함을 맛봄으로 세상이 알 수 없는 기쁨에 취하여 살았습니다. 

  대학교 4학년, 임용고사를 앞두고 있을 때, 이사야서 41장 10절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는 말씀을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는 약속으로 붙들었습니다. 저는 등록금이 저렴하다는 이유로 교대로 진학을 한, 가난한 집 딸이었습니다. 의지할 것이라고는 나의 성실 밖에 없는데, 나의 하나님이 되어주시겠다는 약속은 참 든든했습니다.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면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 되셔서 나를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실 것이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모든 국가고시가 그러하듯 임용고사도 공부해야 할 양이 엄청 났습니다. 하루 종일 도서관에서 다리가 퉁퉁 붓도록 공부를 하는데, 머릿속에 남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도서관은 숨죽이며 공부하는 학생들의 열기로 뜨거웠습니다. ‘이렇게 열심히 공부하는데…’ 이 가운데 절반이 떨어진다는 생각에 다들 두려워하였습니다. 친구들은 쉬는 시간에 모여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무섭다고 했고, 두려움으로 우는 친구들도 종종 볼 수 있었습니다. 

  저도 두려웠습니다. 그런데 두려울 때마다 말씀을 붙들고 기도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 되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 제가 공부를 제대로 하고 있는지 몰라서 두렵습니다. 하나님, 하나님께서 저를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실 것을 믿습니다. 의지할데가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약속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신 약속, 기억하시죠?” 그렇게 기도하며 말씀을 붙들었을 때, 강한 손이 저를 붙들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깨달을 때 감격과 감사로 눈물을 흘렸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얼마나 풍성합니까? 하나님을 오해하여 원망할 때도, 하나님은 그 원망을 조용히 들어주셨습니다. 나의 죄로 죽을 것 같을 때, ‘내가 너를 위해 죽었다’ 말씀하시며 십자가를 바라보게 하십니다. 하나님을 바라볼 때, 나의 모든 불의가 사라집니다. 하나님이 나의 면류관이 되시며 하나님의 기쁨을 누리게 하십니다. 오늘의 어려움을 이길 힘이 되시고, 내일의 소망이 되십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세상의 것들만 알다가 죽을 죄인을 부르시고, 크신 하나님의 사랑안에 거하게 하심에 감사합니다. 

  

  

결론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 영지주의는 없지만 복음 진리를 흐리는 거짓 사상과 유혹이 난무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공부하고 교회에 나오고 있지만 복음 진리를 잘못 이해하고 그릇된 방향으로 신앙생활을 하기가 쉽습니다. 이런 시대에 첫째, 죄와 싸우며 대언자이신 예수님께 힘써 나아가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지식적인 신앙을 넘어서서 실제적인 한 말씀에 순종하고, 특히 예수님이 주신 가장 큰 계명인 새계명에 순종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화려해보이지만 하나님의 사랑이 없는 세상의 것들보다 생명과 기쁨과 영생을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선택을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