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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5년 고린도전서 6강 흐트러짐이 없이 주를 섬기라(고린도전서 7:1-40)2025-11-10 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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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고린도전서 제6강


흐트러짐이 없이 주를 섬기라


말씀 / 고린도전서 7:1-40

요절 / 고린도전서 7:35

“내가 이것을 말함은 너희의 유익을 위함이요 너희에게 올무를 놓으려 함이 아니니 오직 너희로 하여금 이치에 합당하게 하여 흐트러짐이 없이 주를 섬기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분열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5장에서는 음행 문제, 6장에서는 신자들이 세상 법정에 소송하는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이제 오늘 7장은 결혼에 관한 말씀입니다. 결혼에 관한 말씀이라고 하여 결혼에 대한 모든 성경적인 진리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고린도 성도들이 바울에게 결혼 생활과 관련하여 몇 가지 질문한 것에 대해 답변하는 내용입니다. 결혼 생활에 대한 말씀이기에 우리 청년 대학생들에게 관련이 없게 보입니다. 하지만 고린도와같이 음란한 이 시대에 누구나 배워야 할 말씀입니다. 성경적인 결혼관을 갖고 앞으로의 결혼을 바른 가치관을 갖고 준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바울은 우리가 어떤 처지에 있든지 흐트러짐이 없이 주님을 섬기도록 권합니다. 이는 그것만이 가장 가치 있는 일이며 영원히 남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 흐트러짐이 없이 주님을 섬기기를 기도합니다.


1. 음행을 피하기 위해서 결혼하라

1절입니다. "너희가 쓴 문제에 대하여 말하면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 우리가 배웠듯이 고린도는 음행이 만연한 도시였습니다. 도시 중심에 있었던 아프로디테 여신전에는 약 1천 여명의 여사제가 있었고, 그들은 성전에서 음행을 행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고린도아조마이", 곧 “고린도인처럼 사는 사람”이라는 말은 음란한 사람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이런 영향으로 고린도 교회 내부에도 음행의 영향력이 있었습니다. 지난 5장에서도 보았듯이 심지어 어떤 사람은 자기의 아버지의 아내를 취한 자도 있었습니다. 이런 문제들로 인해 고린도 성도들이 바울에게 결혼문제에 대해 질문하였습니다. 그 질문은 대략 이런 것으로 추정됩니다. "사도 바울님, 남녀 관계는 음란한 것이므로 우리 중의 청년 대학생들은 결혼하지 않고 그냥 독신으로 사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우리 중에 어떤 부부는 남녀 관계를 부정하게 보고 같은 집에서 살지만 방을 같이 쓰지 않는 사람이 있는데 이를 어떻게 보시는지요?"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질문에 대해 바울이 대답합니다. 


2절입니다. "음행을 피하기 위하여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 여기서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는 것은 결혼하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음행을 피하기 위해 결혼하라고 합니다. 물론, 결혼의 목적이 음행을 피하기 위한 것은 아닙니다. 당시 고린도의 음란한 분위기에 말려들지 않기 위해서는 결혼하는 것이 좋다는 말입니다. 


결혼에 관한 내용은 제일 먼저 창세기 2장에 나옵니다. 창세기 2장 18절을 봅시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은 혼자 사명을 감당하고 있는 아담을 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무슨 말씀인가요? 사람은 결혼하는 것이 좋다는 것입니다.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 결혼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결혼하여 자녀를 낳고 후손을 번성케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또한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십니다. 무슨 말인가요? 여자는 남자를 돕는 배필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돕는다는 것은 종속적인 위치에서 허드렛일을 도와준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동등하게 지으셨습니다. 동등한 인격체입니다. 여기서 돕는다는 것은 남자가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도록 영적으로 카운슬링하고 격려하며 부족한 부분을 보충해 주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여자가 더 성숙해야 합니다. 


또한 창세기 2장 21~24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하나님은 여자를 남자 몸의 갈빗대를 취하여 지으셨습니다. 둘이 원래 한 몸이었습니다. 잠시 분리되었다가 결혼을 통하여 다시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결혼의 목적은 동역하여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같이 잘 감당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위해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이를 볼 때 우리의 결혼 대상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우선은 당연히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 같은 사람입니다. 그런 대상은 우리가 속한 같은 공동체 안에 있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고린도는 음행의 영향력이 매우 강했습니다. 청춘 남녀들이 순결을 지키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음행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결혼하도록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2. 분방하지 말라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고린도 교회에는 음란한 시대 분위기에 대한 역작용으로 남녀 관계를 부정하게 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결혼한 이후에도 상대방에 대한 의무를 소홀히 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말합니다. 3~5절입니다. ”남편은 그 아내에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 아내는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그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가 절제 못함으로 말미암아 사탄이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서로 분방하지 말라고 합니다. 남편과 말다툼하고 이불을 싸서 다른 방에 가서 혼자 잠자지 말라는 것입니다. 부부싸움은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습니다. 특별히 신혼부부들은 서로 이해를 못 해 말다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 경우 곧바로 먼저 사과하고 풀어야 합니다. 


에베소 4:26,27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신자도 사람이기에 화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화를 내면 그 순간 마귀의 공격에 취약해집니다. 감정적이 되어 내친김에 질러버리라는 유혹에 빠질 수 있습니다. 또한 분을 품은 상태로 잠을 자면 밤새도록 악한 생각이 더욱 꼬리를 물고 일어납니다. 무의식도 영향을 받아 영육 간에 아주 피폐해집니다. 그러므로 그날의 감정은 그날 풀고 분방하지 말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분방하면 정욕의 유혹에 노출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이 자기와 같이 독신으로 지내면서 주님을 섬기는 것을 가장 이상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마다 받은 은사가 다르니 각자가 사려 깊게 잘 판단하여 행하도록 합니다. 


3. 이혼하지 말라

10, 11절입니다. "결혼한 자들에게 내가 명하노니 (명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주시라) 여자는 남편에게서 갈라서지 말고 (만일 갈라섰으면 그대로 지내든지 다시 그 남편과 화합하든지 하라) 남편도 아내를 버리지 말라." 결혼한 사람들은 이혼하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앞의 창세기 2:24절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에서 보았듯이 결혼은 둘이 한 몸을 이루는 것입니다. 한 몸 곧 한 생명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혼은 한 몸을 찢어 놓는 것입니다. 영적 살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마19:6 “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 결혼 행위는 하나님이 세우신 결혼제도에 언약을 하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 언약은 "내가 이분과 결혼을 하는데 어떤 경우에도 헤어지지 않겠습니다"라는 것입니다. 이 언약은 서로에 대한 언약 이전에 각자가 하나님과 맺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이르노니 나는 이혼하는 것과 옷으로 학대를 가리는 자를 미워하노라" (말2:16a) 


저는 일주일에 한 번 잠깐이나마 제 손녀들을 돌봐줍니다. 2살, 3살의 그 아이들을 보면 얼마나 귀엽고 사랑스러운지 모릅니다. 한 번은 만일 이 아이들에게 엄마가 없다면? 아빠가 없다면? 라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그런 생각은 정말 제게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오, 노! 말도 안 돼!“ ”아이들이 얼마나 불쌍할까! 누가 이 아이들을 엄마 아빠와 같이 보살펴 줄 수 있단 말인가!“ 이혼은 어린 자녀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슬픔과 상처를 줍니다. 오늘날도 고린도 시대와같이 음란한 시대입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부정을 행하여서 가정이 깨어지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2024년 통계를 보면, 결혼한 쌍이 22만 2천 건이고 이혼이 9만 2천 쌍이라고 합니다. 이혼율이 40%가 넘습니다. 실로 고통하는 시대입니다. 믿음과 사명을 중심으로 결혼하는 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우리 모임의 청년 대학생들이 모두 성경적인 결혼관을 잘 확립하여 복된 가정을 이루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13절입니다. "어떤 여자에게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있어 아내와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그 남편을 버리지 말라." 고린도는 이방 도시였습니다. 이런 도시에 바울이 복음을 전함으로 믿는 사람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그들 중에는 아내만 믿고 남편은 믿지 않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서로 가치관이 다르자 사사건건 부딪치기 시작했습니다. 남편은 일요일에 등산을 가기 원하는데 아내는 꼭 교회를 갑니다. 남편이 벌어온 피 같은 돈에서 아내가 헌금을 냅니다. 집에 직장 친구들을 초청했는데 상 위에 소주나 맥주는 없고 콜라와 사이다만 있습니다. 이에 남편이 아내를 핍박합니다. 성경책을 숨겨 놓고 교회를 못 가게 합니다. 헌금을 드리지 못 하게 생활비를 안 줍니다. 카드로만 쓰라고 합니다. 그러나 아내가 착하기 때문에 남편은 아내와 계속 같이 살기 원합니다. 이런 경우 아내는 남편과 같이 살라는 것입니다. 같이 살면서 말과 삶으로 남편에게 감동을 주어 남편도 구원을 얻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15절입니다. "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애될 것이 없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 이런 경우를 말합니다. 남편이 신앙생활 문제로 너무 아내를 심하게 핍박합니다. 심지어 폭력을 쓰기까지 하며 이혼을 요구합니다. 아내는 하루하루 사는 것이 너무 힘듭니다. 그럴 경우에는 남편이 원하는 대로 이혼을 해 주라는 것입니다. 평화로운 결혼 생활을 영위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고 피차에 괴롭기만 하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한번 결혼하면, 이혼하면 안 되지만 성경은 두 가지 경우에 소극적 예외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배우자가 간음을 행한 경우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마19:9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 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 그리고 오늘 말씀과 같이 믿지 않는 배우자가 믿는 배우자의 신앙으로 인해 이혼을 강력하게 요구하는 경우입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모두,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자세가 요구됩니다. 또한 상대방이 음행을 행한 경우에도 하나님의 사랑으로 용서하고 가정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호세아 선지자에게 음란한 여인 고멜을 데려다 아내로 삼게 하셨습니다. 고멜이 결혼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다시 나가서 음란한 삶을 살게 되었지만,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다시 그녀를 데려와 같이 살도록 하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혼은 도저히 이상 가정생활을 이어 갈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경우에만 제한적으로 허락되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여러 면에서 맞지 않더라고 같이 살면서 믿음을 갖도록 돕는 것이 크리스천 배우자의 도리입니다.

 

4.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지내라

17절입니다.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내가 모든 교회에서 이와 같이 명하노라." 신자, 곧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 때문입니다. 교회라는 단어 '에클레시아'는 ”부름받은 자들의 모임“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사 그리스도의 몸, 곧 교회 공동체를 이루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사회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가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부름받은 그 위치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살면 됩니다. 


당시 고린도 교회에는 외적인 조건 개선에 몰두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유대인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백성이라고 하여 유대인처럼 되고자 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바울은 말합니다. 18~20절입니다. "할례자로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무할례자가 되지 말며 무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할례를 받지 말라 할례 받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요 할례 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 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중요한 것은 유대인이냐 아니냐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 곧 하나님을 마음을 다해 사랑하고 그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만이 중요합니다. 


또한 당시 로마 제국에는 종들이 많았습니다. 고린도만 하더라도 자유민의 두 배 정도가 종들이었습니다. 종은 거의 사람 대접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크리스천 종들 중에 자유인이 되고자 애쓰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에 대해 바울은 말합니다. "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네가 자유롭게 될 수 있거든 그것을 이용하라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인이요 또 그와 같이 자유인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당시에는 종이라도 돈을 모아서 자유를 살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종이 자유인이 되는 것을 금하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그 일이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겨 거기에 목매지 말라는 것입니다.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인입니다. 크리스천 종은 사람 주인을 섬기지만 주님을 섬기듯이 섬깁니다. 주인의 눈앞에서만 일하는 척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지 성실하게 일합니다. 이런 그는 외적으로는 종이지만 실제는 하나님 앞에서 사는 자유인입니다. 자유인이라도 그리스도의 종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자기의 자유를 사용하여 종의 자세로 다른 사람을 섬깁니다. 이런 점에서 외적으로 종이냐 자유인이냐 하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마음을 다해 주님을 섬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종이 자유를 얻을 여건이나 기회가 주어지면 언제든지 자유인이 되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바울의 이상의 말을 갖고 기독교는 노예제도를 옹호했다고 비판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은 노예제도 그 이상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외적인 신분에 매이지 않는 참 자유인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류는 불과 200년 전까지만 해도 노예제도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때는 2천 년 전입니다. 빌레몬서를 보면 바울은 그런 시대에 빌레몬의 종 오네시모를 참 아들도 받아들였습니다.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돌려보내면서 그를 "종과 같이 대하지 아니하고 종 이상으로 곧 사랑 받는 형제로 두라"고 합니다. (몬1:16) 오늘날 외적으로는 자유인이라 하더라도 종처럼 물질과 사람에 매여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바울은 모든 세대를 뛰어넘어 하나님을 섬김으로 참 자유인이 되는 길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23, 24절입니다.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형제들아 너희는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 사람들의 눈치를 보고 사람들을 기쁘게 하고자 하는 사람은 사람의 종입니다. 우리는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살며 우리가 현재 처한 위치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참 자유인이 되어야겠습니다. 


5. 흐트러짐이 없이 주를 섬기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늘 예수님의 재림을 의식하며 살았습니다. 주님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와 같습니다. 부지불식간에 언제 주님이 오실지 모릅니다. 또한 우리가 언제 이 세상을 떠나 주님 앞으로 갈지도 모릅니다. 바울은 이러한 종말론적인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이런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세상일에 매이는 것이 아닙니다. 고린도 성도 중에 어떤 처녀는 결혼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이미 이혼한 사람은 다시 결혼해야 하는가 고민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처지와 조건에 쉽게 매입니다. ”이것만 해결되면 내가 신앙생활 잘 할텐데“ 합니다. ”아, 취직만 되면“, ”결혼만 하면“, ”물질이 좀 더 있으면“ 마음껏 주님을 섬길텐데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30, 31절에서 말합니다.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갑니다. 외적으로 아름답게 보이는가 아닌가, 결혼했는가 안 했는가, 높은 지위에 있는가 아닌가, 세상 물건이 많은가 적은가, 아파트 큰 평수에 사는가 작은 평수에 사는가, 이런 것들은 다 지나갑니다. 잠시 잠깐 후면 남는 것 없이 다 사라집니다. 그래서 무엇입니까? 우리는 사라지지 않는 것, 영원히 남는 것을 위해 힘써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35절입니다. "내가 이것을 말함은 너희의 유익을 위함이요 너희에게 올무를 놓으려 함이 아니니 오직 너희로 하여금 이치에 합당하게 하여 흐트러짐이 없이 주를 섬기게 하려 함이라." 바울이 말하는 우리에게 유익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흐트러짐이 없이 주를 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치에 합당한 길, 곧 올바른 삶 ("a right way")의 길입니다. 흐트러짐이 없이 주를 섬긴다는 것을 NIV는 "Undivided devotion to the Lord"라고 번역합니다. 곧, "나누어지지 않은 마음", 34절에서와 같이 "갈라지지 않은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인간 조건을 개선하고 안 하고, 결혼을 하고 안 하고 하는 그러한 것들로 인해 주님을 섬기는 마음이 나누어지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님은 흐트러짐이 없이 아버지 하나님을 섬기셨습니다. 빌립보 2:6-8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온 마음을 다해, 흐트러짐이 없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흐트러짐이 없이 섬겼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행20:25) 


한편, 요한계시록 2, 3장을 보면 예수님이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 주시는 말씀이 나옵니다. 일곱 교회 중에 가장 심한 책망을 받은 교회는 라오디게아 교회입니다. 예수님은 그 교회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계3:15,16) 토하여 버린다는 것은 참으로 쇼킹한 말씀입니다. 주님이 왜 토해 버리십니까? 이는 그들의 마음이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않았기 때문, 곧 갈라진 마음, 두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겼기 때문입니다. 나누어진 마음, 하나님도 섬기고 다른 것도 섬기는 마음을 하나님은 받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여김을 받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두 마음으로 섬기는 것은 우상숭배와 같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의 현재의 인간 조건이 어떠하든지 온 마음을 다해, 흐트러짐이 없이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 되기 원하였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섬기면서 마음이 갈라질 때가 있습니다. 온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다가도 이런저런 근심 걱정이 들어옵니다. 이러다가 나만 뒤 쳐지는 것은 아닐까? 이러다가 나만 손해 보고 실패자가 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생깁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흐트러짐이 없이 섬길 때 우리 아버지이신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아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우리를 사랑하고 축복해주지 않으시겠습니까? 하나님을 흐트러지지 않는 마음으로 섬길 때 우리의 심령에는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인한 하늘의 기쁨이 넘칩니다. 세상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를 누립니다.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약속으로 소망이 충만해집니다. 마귀는 여러 교묘한 방법으로 우리의 마음을 빼앗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마귀의 궤계를 분별하여 물리치고 흐트러짐이 없이 주님을 섬기기를 기도합니다. 

 

사도 바울은 본 장을 마치기 전에 두 가지를 간단히 언급합니다. 첫째는, 처녀 딸에 대한 것입니다. 36절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누가 자기의 약혼녀에 대한 행동이 합당하지 못한 줄로 생각할 때에 그 약혼녀의 혼기도 지나고 그같이 할 필요가 있거든 원하는 대로 하라 그것은 죄 짓는 것이 아니니 그들로 결혼하게 하라." 여기서 "자기의 약혼녀"로 되어 있는데 예전 개역 성경에는 "자기의 딸"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헬라어 원문은 “틴 파르테논”(τὴν παρθένον)으로 "처녀에 대한 일"이라고 되어 있기에 두 가지로 한글 번역이 가능합니다. 전체적인 흐름을 보면 아버지가 약혼한 딸에 대한 내용으로 보는 것이 무난합니다. 약혼한 딸이 혼기가 차면 결혼을 시켜도 된다는 것입니다. 38절은 과부의 재혼에 대한 말씀입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나 과부가 된 여인은 자유롭게 재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 안에서만, 곧 믿는 자와만 재혼을 해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갑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겠습니까? 영원토록 남는 가장 귀한 일은 주님께 헌신하는 것입니다. (고전15:58) 주님을 위한 헌신은 즐거운 일이요 영원에 이르기까지 자신에게 가장 유익한 길입니다. 이 땅에서 진정으로 행복하고 자유로우며 하늘에 상급을 쌓는 삶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순수하고도 강렬한 영적 소원을 주셔서 흐트러짐이 없이 주님을 섬기는 복된 백성들이 되게 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