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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5년 고린도전서 7강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고린도전서 8, 9장)2025-11-23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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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고린도전서 제 7 강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말씀 / 고린도전서 8, 9장

요절 / 고린도전서 9:23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오늘 본문은 고린도전서 8장과 9장입니다. 8장은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에 관한 내용입니다. 당시 고린도와 같은 로마제국의 큰 도시에는 이방 신전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 신전에 희생 제물로 드려진 짐승의 고기는 제사장들이 일부 취하였지만, 그 양이 많아서 대부분 시장으로 유통되었습니다. 그래서 시장에서 파는 많은 고기들이 우상에게 드려졌던 제물들이었습니다. 크리스천이 이런 고기를 먹어도 되는가 먹으면 안 되는가 하는 문제를 8장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9장은 사도의 권리에 대한 말씀입니다.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께 직접 부르심을 받은 사도입니다. 그는 사도로써 교회로부터 생활비 등 여러 경제적 지원을 받을 권리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런 권리를 쓰지 않았습니다. 이는 복음에 참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가 오늘 제목인데, 우리가 그 의미를 배우고 우리도 복음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8:1절입니다.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고린도전서에는 "..에 대하여는"이라는 표현이 자주 나오는데 이는 고린도 성도들이 바울에게 질문한 내용에 대해 답변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7장에서는 결혼에 관해 답변하였습니다. 이제 8장에서는 우상의 제물에 대해 답변합니다. 바울은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안다"라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을 포함한 고린도 성도들을 말합니다. 우상의 제물에 대해 우리가 다 알고 있는 지식이 무엇입니까? 이는 4, 5절에서 말하듯이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상은 돌이나 나무로 사람들이 만든 물건이요 실체하는 생명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를 아는 고린도 성도들이 교만하게 행한 것이었습니다.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야.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은 그냥 음식이야. 자유롭게 먹어도 돼” 하며 먹었습니다. 물론 그 사람은 자기의 바른 지식에 따라 행한 것이므로 문제될 게 없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교회에 즉, 성도들에게 덕을 세우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사랑으로 행하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2절에서와 같이 이런 그는 자기가 무엇을 안다고 하여 자유롭게 행하였지만, 아직도 마땅히 행할 바, 곧 다른 사람을 배려해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인 것입니다. 


4-6절입니다.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 밖에 없는 줄 아노라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불리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 우상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사람들이 신이라 주라 부르는 대상은 많이 있지만 온 우주에 참 신은 다만 한 분밖에 없습니다. 그분은 여호와라 이름하는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다른 것들은 모두 상상의 신, 나무나 돌로 만든 형상들일 뿐입니다. 


7절입니다. "그러나 이 지식은 모든 사람에게 있는 것은 아니므로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 고로 그들의 양심이 악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 고린도 성도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우상은 신이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지식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우리 나라에서도 조상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람은 조상의 영혼이 와서 음식을 먹고 간다 그러니 정성스럽게 차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전에 제사드리는 것을 보았는데 절을 한번 하고는 숟가락으로 밥을 떠서 국에 넣고, 다시 절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이유를 물으니, 조상의 영혼이 밥을 먹었는데 이제는 밥을 국에 말아 먹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여하튼 어떤 사람들을 그렇게 믿습니다. 고린도에도 그동안 이방신을 섬겨왔던 사람 중에 크리스천이 되고 나서도 여전히 이방신이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제우스 신이 살아있어, 포세이돈을 화나게 하면 우리 사업이 망한다고”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말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9절입니다. "그런즉 너희의 자유가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성숙한 신자는 바른 지식이 있어 음식에 대해 자유롭다 하더라도, 그렇지 못한 형제들, 곧 믿음이 약한 사람들을 위해 자기의 자유를 절제하라는 것입니다. 만일 지식 있는 자가 우상의 집에 앉아 자유롭게 먹는 것을 믿음이 약한 자들이 보면 “아, 저 목자님이 저렇게 맛있게 먹으니 우리도 먹자” 하면서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됩니다. 그러고는 집에 가서 “아, 내가 우상의 제물을 먹었어, 나는 죄를 지었어, 이제 나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거야!” 합니다. 믿음이 약한 자가 이와 같이 양심이 더러워질 수 있습니다. 자책감과 정죄 의식에 괴로워하다가 믿음을 떠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으므로 바울은 결론적으로 말합니다. 13절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로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 바울은 형제가 실족하는 일이 없도록 필요하다면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합니다. 


그러면 이상의 말씀이 오늘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일까요? 우리는 더 이상 로마제국 시대에 살고 있지 않습니다. 우상에게 바쳐졌던 음식이 슈퍼마켓에 나오는 것도 아닙니다. 본문에서 바울이 말하는 우리가 배울 바, 그 정신은 무엇일까요? 이는 자기의 자유를 사용하되 다른 형제를 배려하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는 혼자 있을 때는 마음대로 하되 다른 사람이 있을 때는 그들의 눈을 의식해서 위선적으로 행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공동체를 사랑하여 사려 깊게 행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가장 중요한 명령은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 (신6:5)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보이지도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몸, 즉 교회를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우리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인 공동체를 말합니다. 교회를 사랑하는 것은 우리의 말과 행위를 통해 다른 사람에게 힘과 위로와 격려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지난 화요일 안소망, 진화 목자님 가정에 소망 Jr가 태어났습니다. 그 소식이 카톡에 뜨자마자 50여 명의 동역자들이 축하의 문자 폭탄을 퍼부었습니다. 저는 그것을 보면서 마음이 흐믓했습니다. 동역자님들의 사랑을 보았습니다. 진화 사모님 가정이 큰 위로와 힘을 얻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러한 것뿐만 아니라 교회를 사랑한다는 것은 더 나아가 나의 말과 섬김을 통해 내 주위의 형제자매 한 사람 한 사람의 믿음이 자라고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더욱 건강하고 성숙해지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게 함께 교회 공동체를 가꾸어 가는 것-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때로 나 자신의 자유를 제한합니다. 마땅한 권리도 행사하지 않기도 합니다. 내가 먼저 나서서 섬기고 희생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좋은 것이든, 안 좋은 것이든 교회 공동체에 영향을 미칩니다. 교회 공동체에 좋은 영향을 끼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나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진실되고 겸손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삶, 낮아져 섬기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우리들이 서로 동역할 때 우리 교회 공동체가 서로를 격려하고 축복하는 아름다운 모임으로 성장합니다. 우리가 이런 마음으로 함께 교회 공동체를 가꾸어 나가길 기도합니다. 


9장에서 바울은 사도의 권리에 대해 말합니다. 1절입니다. "내가 자유인이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 바울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율법에서 벗어난 자유인이었습니다. 그는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마찬가지로 믿음의 범위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한 그는 사도였습니다.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바울의 사도됨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그는 분명히 부활하신 예수님으로부터 친히 부르심을 받은 사도였습니다. 무엇보다 그의 사도 됨의 증거는 고린도 성도들 그들 자신이었습니다. 이는 그들이 사도 바울의 사역의 열매였기 때문입니다. 이런 그는 사도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었습니다. 전 인생을 드려 선교 역사를 섬기는 만큼 고린도 교회의 물질적 지원을 요구할 수 있었습니다. 안정적인 써포트를 받으며 사도의 직분을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물질 지원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5절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믿음의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없겠느냐." 여기서 우리는 초대교회 모습의 일면을 볼 수 있습니다. 본문의 “다른 사도들”은 예수님의 12 사도들을 말합니다. 주의 형제들은 예수님의 육신의 동생들,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를 말합니다. (마13:55) 사도들 중, 다는 아니겠지만, 게바를 포함하여 여러 사람들이 그들의 아내를 믿음의 동역자로 데리고 다녔습니다. 그들의 자녀들도 같이 데리고 다녔을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그들 각 가정이 교회로부터 생활비를 지원받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일을 하면서 스스로 자비량하였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예가 통상적인 것이 아님을 여러 비유로 말합니다. 군인은 자기 비용으로 군복무를 하지 않습니다. 국가에서 먹여주고 재워줍니다. 요즘은 병장 월급이 200만 원이라고 합니다. 오래 전에 제가 병장으로 제대할 때는 월급이 3,900원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라에서 다 먹여주고 입혀주고 재워주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영적 군사입니다. 의식주 문제를 지원받는 것이 마땅합니다. 


포도나무를 심는 농부는 그 열매를 기대하고, 양 떼를 기르는 목자는 그 양 떼의 젖을 기대합니다. 당연한 것입니다. 더욱이 모세의 율법에서도 말하기를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습니다. (신25:4) 이는 소들을 돌보라는 것뿐 아니라,복음의 일꾼들에게 먹을 것을 공급하라는 의미였습니다. 바울은 신령한 말씀으로 성도들을 섬겼습니다. 이런 그가 물질적인 지원을 받는 것이 과한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도 그런 권리를 가졌는데 바울의 경우는 더욱 마땅합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아무 지원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12b절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권리를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다."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었습니다. 전도자가 복음을 전할 때 피전도인의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전도자의 동기가 무엇인지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이 이 일을 직업으로 하는구나”, “이 일을 통해 월급을 받는구나”하는 생각이 들면 복음 전파의 순수성을 의심할 수도 있습니다. 


어느 기독교 이단에서 있던 일입니다. 인천 지역의 한 교회를 섬기던 목사가 역사를 섬기면서 자기가 속한 단체가 이단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가 자기 위의 책임자에게 자기 생각을 말했습니다. 그때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이단이든 아니던 무슨 상관이야? 네가 어디 다른 데 간다고 한 달에 400만 원씩 주는 데가 있어?" 결국 물질에 매여 한동안 더 거짓 교리를 계속하여 전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물질로 인해 그런 오해를 받을 일말의 가능성도 생기지 않도록 자기의 권리를 쓰지 않은 것입니다. 바울이 이와 같이 길게 자신의 권리에 대해 말하는 것은 이제부터 이런 지원을 해 달라는 것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그는 차라리 죽을지언정 자비량하면서 복음 역사를 섬기는 자기의 자랑을 헛되게 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그러면 바울의 복음 전파의 동기가 무엇입니까? 16절입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 바울은 열심히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의 전 인생을 바쳤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랑할 것이 없다고 합니다. 이는 그가 복음을 “부득불” 전했기 때문입니다. "부득불" 전했다는 것을 NIV에는 “I am compelled to preach”로 되어 있습니다. 그가 복음을 전하도록 강권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그를 강권하여 복음을 전하게 하였다, 그래서 자기가 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게 하신 일이다, 그래서 자기는 자랑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도 비슷한 말을 하였습니다. 예레미야 20:8, 9입니다. "내가 말할 때마다 외치며 파멸과 멸망을 선포하므로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 거리가 됨이니이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며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말할 때마다 그는 사람들로부터 조롱과 치욕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다시는 말씀을 전하지 않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그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며 답답하여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 전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부득불 전하는 것과 같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은혜를 잘 알았습니다. 사람들은 보통 하나님의 은혜를 잘 알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은혜의 감동이 약해집니다. 마음에 감사함이 사라지고 미지근해집니다. 그러나 바울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했습니다. 그의 만년에 쓴 디모데전서 1:15절에서 그는 말합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믿음이 커 간다, 영적으로 성숙해진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죄악 됨이 얼마나 심하고 그런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주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가를 점점 더 깊이 알아가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받은 은혜를 생각할 때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조롱과 치욕을 당해도 복음을 전했습니다. 돌에 맞아 죽기까지 되어도 복음을 전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강권된 이런 바울은 자기의, 자기 자랑이 전혀 없었습니다. 


더욱이 17절을 보면 그는 사명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무슨 사명입니까? 부활하신 주님이 주신 복음 전파의 사명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바울을 부르실 때 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행9:15) 그는 자기 같은 죄인 중의 괴수에게 사명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나 감사하였습니다. 그를 충성스럽다고 여기사 복음 전파의 직분을 맡겨주시고, 그 일을 능히 감당하도록 하시는 주님께 다만 감사할 뿐이었습니다. (딤전1:12) 그렇습니다. 복음 전파는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받은 자의 마땅한 반응입니다. 복음 전파는 취미도 아니요, 시간이 나면 한번 해 보는 여러 일거리 중의 하나도 아닙니다. 직업도 아닙니다. 받은 은혜에 강권되어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소명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사 멸망 받을 우리를 구원하신 십자가의 은혜를 깊이 기억하게 도우시길 기도합니다. 이에 대한 감사한 마음, 중심이 뜨거운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길 기도합니다. 


바울은 복음 역사를 위해 죽도록 충성하였습니다. 이런 그는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의 상을 받는 것이 마땅하게 보입니다. 물질적인 보상을 받는 것도 마땅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상에 대해 어떤 마음을 갖고 있습니까? 18절입니다.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게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다" 바울은 복음을 전할 때 값없이 전했습니다. “”값없이“는 NIV 번역에 보면 ”free of charge“입니다. 무료로, 아무 대가를 받지 않고 전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사도로서의 마땅한 권리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천막을 만들며 스스로 생활비를 조달했습니다. 복음도 전하고 동시에 일도 하는, 이중의 십자가를 지느라 많은 고생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보상을 받지 않았습니다. 상 받는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말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게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다." 내가 상을 하나도 안 받았는데, 바로 그것이 내가 상 받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받지 않았는데 바로 그것이 자기가 상이라고 합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마태복음 6장에 보면 예수님은 자기의 선행으로 인해 사람들로부터 상을 받으면 하늘에서 상이 없다고 하십니다. (마6:1-4) 그러나 비록 이 땅에서 보상이 없더라도 은밀하게 선을 행하는 자에게 하늘의 상이 있다고 하십니다. 바울은 비록 세상에서 자기가 보상을 받지 못한다 하더라도 장차 주님이 주실 상을 바라보았습니다. 그 상이 참된 상임을 알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를 위해 무슨 일을 하고 나면 사람들이 알아주기를 바랍니다. 하다못해 가벼운 선물이라도 받기 원합니다. 물론 서로를 격려하고 감사하기 위해 가벼운 보답을 하는 일은 좋은 일입니다. 그런 것까지 금하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우리 마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역사를 섬기고 나서 수고했으니 보상을 바라는 마음보다는 하나님의 상을 믿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많이 수고하고 나서 나만 수고했다는 손해 의식에 빠질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주님의 귀한 일에 나를 특별히 써 주신 은혜가 너무 감사하여 감사를 표시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런 믿음이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참된 상을 믿는 믿음을 주시길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바울에게 주신 소명은 어찌하든지 복음을 전하여 사람들을 구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 보니 사람들마다 선입견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바울이 결례 의식을 행하지 않으면 그를 만나고자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그들을 돕기 위해 바울은 유대인처럼 되었습니다. 이방인들은 바울이 유대인으로 자기들을 무시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바울은 이런 그들이 선입견들을 극복하도록 이방인과 같이 되었습니다. 약한 자들에게는 약한 자가 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19~21절에 반복하여 말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바울은 효과적인 복음 전파를 위해 피전도자와 같은 사람이 되어 모든 장애물을 제거하였습니다.  


영화 ”빠삐용“을 보면 스티브 맥퀸이 연기한 주인공 빠삐용이 탈옥한 후 숲을 지나 나환자 공동체에 들어갑니다. 그들 중의 한 리더가 그의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빠삐용에게 내밀어봅니다. “우리와 친구가 될 수 있나?”를 시험하는 것입니다. 빠삐용은 주저하지 않고 그 담배를 받아 물어 한 모금 피웁니다. 이를 보고 나환자 리더가 감동하여 빠삐용에게 보트를 제공해 그의 탈출을 돕습니다. 빠삐용이 나환자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그들처럼 된 것입니다. 그런데 빠삐용은 담배 한 모금 피운 것에 불과하였지만 실제로 나환자가 된 전도자가 있습니다. 그는 벨기에에서 하와이에 파송된 가톨릭 신부 다미앵입니다. 그는 나환자들을 대상으로 전도하였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나는 나환자들의 목자 이전에 이들의 형제요 친구다.” 그는 나환자들과 같이 먹고 마시고 일상적으로 접촉하였습니다. 그들과 공동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는 한동안 나환자가 되지 않은 자신에 낙심하였습니다. 그러다가 1884년 겨울 어느 날, 작업 도중 뜨거운 물을 그의 발에 쏟았지만 통증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나환자가 된 것이었습니다. 그는 나환자로거 일생동안 그들을 가까이서 섬겼습니다. 


사도 바울도 그러한 스피릿으로 모든 사람을 섬겼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모든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는 그들 중에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었습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구령(영혼 구원)은 최고의 가치였습니다. 영혼 구원이 최고의 가치라는 것- 마땅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세상에서 우리가 이루는 모든 성공, 성취, 인류와 국가 및 사회에 대한 업적, 자신의 편안하고 안락한 삶, 이 모든 것은 결국 다 지나갑니다. 영원히 남는 가치는 죽어가는 영혼들을 복음으로 구원하는 일입니다. 바울은 이를 잘 알았습니다. 오직 영혼 구원에 그의 전 생애를 걸었습니다. 


23절입니다.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바울이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한 이유는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었습니다. 복음에 참여한다? 무슨 말인가요? 이 말씀이 오늘 요절이고, 제목인데 어쩐지 강렬하게 그 의미가 다가오지 않습니다.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는 말은 새번역에는 "복음이 주는 복에 동참하려는 것이다“라고 번역합니다. 공동번역은 "복음의 축복을 나누려는 것이다", NIV에는 "I may share in its blessings"로 되어 있습니다. 복음에는 복이 있습니다. 그 복은 진짜 복입니다. 세상에 많고 많은 복이 있지만 모든 복 중에 최고의 복은 복음으로 인한 복입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 의로우신 그분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실입니다. 복음은 사상이 아니라 한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우리의 죄를 해결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분은 죽으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신 것뿐만 아니라 친히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누구든지 이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의 복음 사건을 믿는 자에게 하나님은 죄사함과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세상의 그 어떤 복도 이와 같은 복은 없습니다. 바울은 먼저 이 복을 받았습니다. 그의 모든 죄를 사함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이제 바울은 그 복음의 복을 나누어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복음이 주는 복을 받도록 최선을 헌신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복음에 참여하는 것은 단지 죄사함과 영생을 얻는 것뿐만이 아닙니다. 그는 복음을 전하면서 더욱 복음에 깊이 뿌리내렸습니다. 복음 되신 예수님을 배워나갔습니다. 예수님과 같은 거룩한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복음이 주는 복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복음의 복을 나누어 주는 것, 이 귀한 복음으로 생명을 구원하는 일에 참여하는 것은 바울에게는 최고의 영광이요 특권이었습니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하나님께서 크신 은혜로 복음의 종들을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그들을 통해 복음을 듣고 복음의 복을 받았습니다. 복을 받을 뿐만 아니라 이 복을 나누어 주는 일에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 부르심에 순종함으로 생명을 구하는 거룩한 직분을 섬기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세상에서 우리는 어떤 프로젝트에 참여할 수도 있습니다. 환경 개선 캠페인에 참여할 수도 있습니다. 사회 정의 실현을 위한 운동에 참여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영원토록 가장 고귀한 일은 복음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이 일보다 더 고귀하고 영광스런 일은 없습니다. 우리가 이를 영접하고 힘써 복음의 복을 누리고 나누는 일에 참여하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바울과 같이 복음에 참여하는 인생들로 축복해 주시길 기도합니다. 


바울은 어떤 자세로 복음에 참여하였습니까? 24절입니다.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바울은 육상 선수가 1등을 차지하고자 하는 자세로 전력 질주하였습니다. 26절을 보면 그는 상대방을 정확히 가격하는 권투선수처럼 영적 싸움을 싸웠습니다. 무엇보다 다른 사람을 구원한 후 자신이 버림을 당하지 않도록 힘써 자신을 쳐 복음에 복종시켰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여러 가지 일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일 중에 복음에 참여하는 일이 가장 귀함을 믿습니다. 우리를 이 귀한 일에 불러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복음에 참여한 종들을 통해 우리가 복음의 복을 받았는데, 우리도 힘써 이 복을 나누는 자들이 되도록 축복해 주시길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