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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5년 고린도전서 8강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고린도전서 10:1-11:1)2025-11-30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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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고린도전서 제 8 강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말씀 / 고린도전서 10:1-11:1

요절 / 고린도전서 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이제 하루 만 더 지나면 12월 입니다. 연말에는 방송국마다 각종 시상식을 합니다. 종종 시상 소감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하는 배우가 있습니다. 그러면 이를 보는 사람들이 “이 사람도 기독교인이었구나.” 알게 됩니다. 이런 경우처럼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면 남들이 쉽게 하지 못하는 큰 상을 받거나, 대단한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쉬운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늘 요절 말씀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하면서 앞에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곧 어떤 대단한 일이 아니라 우리가 밥을 먹거나 커피를 마시는 것과 같은 일상 가운데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야한다고 말씀합니다. 신자들은 왜 먹고 마시는 것 같은 일상적인 것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까요? 또, 먹고 마시는 것을 통해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을까요? 오늘 말씀을 통해서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형제님들이 읽겠습니다.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하나님께서 일방적인 은혜로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키셨습니다. 불기둥으로 인도하셨으며, 홍해를 가르시고 바다를 마른 땅같이 건너게 하셨습니다(출 13:21, 22;14:19,24). 그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와 인도하심을 받아 출애굽하여 구원받았습니다.


  2절을 자매님들이 읽겠습니다.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이스라엘 백성은 홍해를 건너는 사건을 통해 모세와 연합되는 세례를 받았습니다. 바울은 이 사건을 오늘 날 우리가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것의 모형이라고 설명합니다.


  3, 4절을 형제, 자매 순서로 읽겠습니다. “다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 /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홍해를 건넌 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정말로 굶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2백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있는 그곳에서 도대체 어떻게 매일 먹을 것을 구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 주셨습니다. 사람이 준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려주신 신령한 음식이었습니다. 또한 광야는 사막과 같습니다. 물을 찾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반석을 쳐서 물이 터져 나오게 하셨고, 온 백성이 그 물을 마실 수 있게 하셨습니다. 바울은 이 반석을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이라고 말합니다. 원문 헬라어 시제가 미완료형인데,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계속해서 그들과 함께하시고, 그들을 따라다니시면서 계속해서 그들에게 생명을 공급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즉, 광야의 반석은 단순한 돌덩이가 아니라 언제나 백성과 함께하시며 공급하시는 그리스도를 예표한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은 정말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기적을 보고, 하나님이 주시는 음식을 먹고, 그리스도의 돌봄을 실제로 체험했습니다. 


  5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므로 그들이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놀랍고 충격적인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은 은혜를 받았지만, 그 은혜를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했고, 결국 광야에서 멸망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사건이 단순한 과거가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경고라고 말씀합니다.


  6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이러한 일은 우리의 본보기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그들이 악을 즐겨 한 것 같이 즐겨 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바울은 이 일이 우리의 본보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본보기’란 거울처럼 오늘 우리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준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또한 붕어빵을 찍어내는 틀처럼 똑같은 일들이 오늘 우리에게 반복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출애굽 백성은 분명히 하나님으로부터 보호받고 모든 일에 인도하심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우상을 쳐다보고 의지하며 섬겼습니다. 또 그들은 신령한 것을 먹고 마셨는데 여전히 육신적인 것을 갈망하였습니다. 이와같은 고린도 교회의 모습은 출애굽 한 이스라엘을 그대로 닮았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바울은 네 가지 구체적인 경고를 제시합니다. 7절을 형제님이 읽겠습니다.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 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고 일어나서 뛰논 사건은 십계명을 받은 직후에 금송아지를 만든 사건을 가리킵니다. 모세가 십계명을 받으러 시내산으로 올라가 40일을 지체하자 백성들은 참지 못하고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신이로다”고 하며 그 앞에 단을 쌓고, 앉아서 먹고 마시고, 일어나서 춤추고 뛰놀았습니다(32:1-6). 이 때 하나님께서 진노하사 온 이스라엘을 진멸하고자 하셨습니다. 모세의 중보기도로 하나님은 그 뜻을 돌이키셨으나, 염병으로 치셨습니다. 이때 우상숭배자 3,000명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바울은 그러므로 우상의 신전에서 열리는 축제에 참가하여 먹고 마시고 춤추는 우상숭배자가 되지 말라고 고린도성도들에게 경고합니다.

 

  8절을 자매님들이 읽겠습니다. “그들 중의 어떤 사람들이 음행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음행하지 말자.” 이 사건은 민수기에 기록된 사건입니다(민 25:1-9). 싯딤에 머물러 있을 때 어떤 사람들이 미디안 여자들의 유혹을 받아 바알 신에게 제사하고 음행하였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바알에게 절한 사람들을 모두 죽이시고 전염병으로 이만 삼천 명을 멸하셨습니다. 고린도 사람들은 비너스 여신을 섬겼는데 그 신전에서 열리는 축제는 음행이 이어졌습니다. 교인들 중에도 그들의 초청을 받아 신전에 가서 우상을 숭배하고, 창기들과 함께 음행하던 자들이 있었는데 바울은 “우리는 저희와 같이 음행하지 말자”고 강력하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9절을 형제님들이 읽겠습니다.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시험하지 말자.” 민수기 21장 4~9절에 의하면 이스라엘은 에돔 사람들 때문에 지름길로 가지 못하고 먼 길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백성들이 마음이 상하여 하나님을 불신하고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출애굽의 은혜를 멸시하고, 만나도 신물이 나서 못 먹겠다고 불평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능력을 믿지 못하고, 의심하고 시험하여 하나님을 진노케 했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불뱀들을 보내어 물어 죽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고린도 교인들 중에도 구속의 은혜를 감사하지 않고, 불신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그들과 같이 주를 시험하지 말자” 고 경고합니다.

 

  10절을 자매님들이 읽겠습니다.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 이는 고라의 반역과 그를 따르던 14,700명이 염병으로 멸망한 사건을 가리킵니다(민 16:41,49). 이 사건 뿐만 아니라 광야 40년 동안 그들은 수 없이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출 15:24, 16:2 이하; 17:3; 민 11:1; 14:2∼; 16:11,41; 신 1:27 등). 특히 민수기 13장에는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온 열 두령들의 부정적인 정탐보고를 듣고 온 이스라엘이 밤새도록 통곡하며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어찌하여 우리를 출애굽시켜 처자식들이 광야에서 다 죽게 하느냐”고 모세와 아론을 원망했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심히 노하셨습니다. “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에게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 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민 14:27) 하나님은 그들이 염려하던 자녀들은 다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하시고, 원망했던 사람들은 다 광야에서 엎드러져 죽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조상들이 광야에 엎드러져 죽은 사건을 거울로 삼아, 원망하지 말라고 경고했습니다.


  바울이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서 깨우쳐 주고자 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11, 12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 /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그 일어난 일이 기록된 것은 우리에게 본보기가 되고,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고린도 성도들도 예수를 믿음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성만찬’에 참여하며 신령한 떡과 신령한 포도주를 먹고 마시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악을 즐겨하게 되면 멸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세례를 받고 성만찬에 참여하는 것이 구원을 보장해 주지 못합니다. 성례는 우리의 신앙을 견고케 해 주는 보조수단에 불과합니다. 그것이 우리를 구원해 주지 못합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너고 만나를 먹었다고 그들의 구원이 보장된 것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서 믿음의 순결을 지켜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실패를 거울삼아 호기심으로라도 우상을 숭배하는 종교의 축제에 참여하지 말아야 합니다. 요즘은 실제적으로 우상을 섬기는 종교가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타로나 카드 점을 보는 곳을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고 합니다. 중요한 면접이나 취업 준비를 앞두고 점을 보거나 무당을 찾는 분들도 많다고 합니다. 디지털 부적에 별다섯개 리뷰만 3만개가 넘습니다. 일부 수험생은 시험을 잘 보기 위해 일타강사의 사진을 몸에 지니고 다닙니다. 이 역시 우상숭배에 속 합니다. 또, 음행하지 말아야 합니다. 요즘은 꼭 사람을 상대로 하지 않더라도 AI 여친을 비롯한 디지털 음란물이 판을 칩니다. 호기심으로라도 ‘에이 정도는 괜찮겠지’ 하며 즐기다가는 망하는 수가 있습니다. 혹 연약하여 넘어지더라도 바로 회개해야 합니다. 또, 주를 시험하지 말아야 합니다. 에이, 내가 예수를 믿지 말았어야 했는데, 목자로 살지 말았어야 했는데, 이와 같은 구원의 은혜를 망령되게 여기고, 부르심의 은혜를 욕되게 하는 말을 삼가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원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신앙경력이 있고, 은사가 있고, 열매가 많은 분들, 곧 선 줄로 생각하는 분들, 자랑할게 많은 분들은 특히 넘어질까 조심해야 합니다. 바울처럼 더욱 겸손히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가끔 큰 사고로 끔찍하게 망가져 있는 사고 차량이 전시되어 있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그 옆에 이런 문구가 쓰여 있습니다. “졸음 운전의 종착지는 이 세상이 아닙니다” 이런 캠페인의 목적은 운전자들에게 졸음 운전이나 과속 운전에 경각심을 심어 안전운전을 하도록 돕기 위함입니다. 운전 중에 금해야 할 대표적인 4가지는 핸드폰 사용, 졸음운전, 음주운전, 과속운전 입니다. 이는 한 순간에 망하게 할 수 있는 위험천만한 것들 입니다. 혹시라도 이중 하나라도 습관적으로 하고 계신 분이 있다면 이 시간 당장 버리시길 바랍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천성을 향한 믿음의 여정 중인 여러분에게 바울은 위험천만한 나쁜 습관 4가지를 버리도록 엄숙히 경고합니다. 우상숭배, 음행, 하나님을 시험하는 일, 원망 입니다. 하나님의 엄중한 경고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이를 지속적으로 행하는 자들의 종착지는 하나님 나라가 아닐 겁니다. 모든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여 구원을 얻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가 하나님의 경고를 겸손히 받아들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까? 13절을 보십시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시험이라는 말은 유혹(temptation)이나 시련(trial)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유혹은 사단이 우리를 죄에 빠지도록 유혹하는 것이고(마 6:13; 눅 11:4; 계 2:10), 시련은 하나님이 우리를 연단하기 위해 허락하시는 고난입니다(마 5:4,10; 약 1:12; 벧전 4:12). 욥이나 요셉 같은 경우 입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가 따로 따로 오기도 하지만 복합되어 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기 욕심에 끌려 죄를 짓고 그로 인해 시련을 겪는 경우가 많습니다(약 1:14). 다윗과 같은 경우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시련도 쓰셔서 우리를 연단하십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신실하셔서 감당하지 못할 시련은 허락하지 않습니다. 시험의 높이를 조절하십니다. 시험하는 기간, 그 시험의 내용, 시험의 무게 등 일일이 간섭하십니다. 이 시험의 물결이 너무 높으면 더 이상 올라가지 못하도록 막으십니다.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허락하십니다. 또 시험 당할 때에 반드시 피할 길을 내어주십니다. 그래서 시련을 능히 견디게 하십니다. 


  바울은 이어서 고린도 성도들에게 간곡한 심정으로 권면합니다. 14절을 다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그런즉 내 사랑하는 자들아 우상숭배하는 일을 피하라” 우상숭배는 싸워서 이기는 문제가 아닙니다. 우상숭배가 애굽의 병거처럼 대대적으로 덮치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바이러스처럼 슬며시 침투합니다. 요즘 독감이 유행인데, 독감과 싸워 이기고자 하시는 분 계십니까? 이미 걸렸으면 수액을 맞거나 약을 먹고 싸워야 하겠지만, 걸리기 전에는 피하고 예방하는게 상책입니다. 우상숭배도 마찬가지입니다. 우상의 신전에서 우상 숭배하는 그 자리에 내가 있는 것 자체가 우상숭배는 아닙니다. 그런데 굳이 그런 자리에 있는 것보다 가지 않는게 우상숭배에 빠질 위험이 적습니다. 그래서 우상숭배 하는 자리를 가급적 멀리하는게 좋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지혜와 신중함이 요구됩니다(15). 16, 17절에서 바울은 이해를 돕기 위해 성찬을 예로 듭니다. 성찬의 떡과 잔에 참여하는 것은 그리스도와 교제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상의 제물에 참여하는 것은 그 배후에 있는 귀신과 교제하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우상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그 배후에는 영적 세력이 있습니다. 


  18,19, 20, 21절을 보십시오. 형제, 자매, 형제, 자매 순서로 읽겠습니다. “육신을 따라 난 이스라엘을 보라 제물을 먹는 자들이 제단에 참여하는 자들이 아니냐 / 그런즉 내가 무엇을 말하느냐 우상의 제물은 무엇이며 우상은 무엇이냐 / 무릇 이방인이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 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식탁과 귀신의 식탁에 겸하여 참여하지 못하리라” 어떤 제물을 먹는다는 것은 그 제단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만찬에 참여하는 것은 그리스도와 교제하며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은 우상에게 하는 제사에 참여하는 것이 됩니다. 바울은 앞에서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니며, 우상의 제물도 그냥 음식일 뿐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20절에서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니지만 그 배후에는 귀신이 존재하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상숭배의 축제에 참여하는 것은 그 뒤에 숨어 있는 귀신에게 제사하는 것입니다. 당시 헬라인들이 섬기던 쥬피터(Jupiter)나 아폴로(Apollo), 비너스(Venus) 등 신화에 근거한 신들은 실재하는 신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신화적 존재들의 배후에는 귀신의 세력이 역사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실 수 없습니다. 주의 식탁과 귀신의 식탁에 겸하여 참여할 수 없습니다. 두 주인을 동시에 섬길 수 없듯이 주의 상과 귀신의 상에 동시에 손님이 될 수 없습니다(고후 6:14-18). 그러므로 우리는 귀신의 존재를 부인해서도 안 되고, 얕잡아 보아서도 안 됩니다. 우상 숭배자의 말이나, 점쟁이의 말이나 무속인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서도 안 됩니다. 또 늘 하나님과 사람을 원망하고 불평하는 사람들의 말에도 귀를 기울이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가장 강하고 두려운 주님의 말씀만 붙들고 사는 것이 지혜입니다(22).


  23, 24절을을 형제, 자매 순서로 읽어보겠습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 /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고린도교회 안에는 지식을 자랑하는 마음 때문에 다른 사람의 양심 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함부로 행하는 신자들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지식을 자랑하는 자들은 ‘너희들은 신전에 앉아 고기도 못 먹지? 난 먹어. 왜 이렇게 믿음이 없어~ 에이 바보 같은 것들’ 이런 마음을 품었습니다. ‘바울 선생도 이야기했어. 우상이 어디 있냐고. 신은 하나님 한 분 뿐이라고’ 이런 주장을 했을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바른 지식이 있다면 자유를 누릴 수 있고 담대히 행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더 중요한 지식은 교회를 세우는 지식이고 다른 사람의 유익을 고려하는 지식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지식이며 지식을 올바로 사용하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25~30절에서 바울은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에 관한 실제적인 조언을 합니다. 우상의 신전에 받쳐졌던 음식이라 할지라도, 우상의 신전에서 먹는 것이 아니라 시장에서 파는 것에는 큰 문제가 없습니다.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모두 주님이 창조하신 것이요 주님의 것들이지 우상과 관련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믿지 않는 불신자들 중에 어떤 이가 우상에게 드려졌던 고기로 음식을 차려놓고 신자들을 초대한다면, 가서 함께 식사를 해도 좋습니다. 이 음식이 우상에게 드려졌는지 먼저 확인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어느 누군가가 “목자님, 그런데 제가 알기로 저 고기는 우상에게 드려졌던 고기인데... 그걸 먹어도 괜찮나요?” 묻는 다면 그것을 알게 한 그 사람과 또한 양심을 위해 그것을 먹지 말아야 합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양심’이란 다른 사람의 ‘양심’을 의미합니다. 사람이 양심을 따라 산다고 하면 누구나 자기 양심을 말합니다. 그것도 귀하고 훌륭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한발 더 나아가 자기 양심도 아니고, 남의 양심까지 고려해서 행동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니, 바울 사도님, 내 양심도 지키지 어려운데, 다른 사람의 양심까지 지켜주라고요? 너무 많은 걸 바라시는거 아닌가요?” 산너머 산 입니다. 그런 억울함과 답답함을 호소하는 이들을 위해 바울이 말합니다. 


  요절 말씀인 31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먹는 문제, 마시는 문제 나아가 어떤 문제이든지 하나님께 영광돌리고자 하는 마음으로 하라는 말입니다. 남의 양심까지 지켜주는 것이 그 사람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혹은 두려워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내가 우상의 전에서 열리는 연회에 초대를 받았을 경우 하나님께 영광이 되겠는가 안 되겠는가를 따져보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길,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을 선택하라는 겁니다. 또 직장에서 술을 권해 받았을 경우,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겠는가 분별해서 행동하라고 합니다. 우리 신자들의 삶의 목적은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먹고 마시고 대화하는 일상까지도 죄냐 아니냐의 수준을 넘어서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가 되지 않는가가 삶의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Westminster Shorter Catechism)은 우리가 속한 개혁주의(장로교) 전통에서 가장 중요하고 널리 사용되는 신앙 교육 문서입니다. ‘소요리(小要理)’는 짧고 핵심적인 교리 문답이라는 뜻입니다. 소요리문답 제1문에서는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우리 신자의 삶의 목적은 영원토록 하나님을 즐거워하며 하나님으로 만족하고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무엇보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 덕을 세우는 것입니다. 어린시절 부모의 사랑을 받으면 자라는 것도 기쁨이지만, 부모가 되어 어린 자녀를 키우는 것에도 힘들지만 더 높은 차원의 기쁨과 보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제서야 나를 힘들게 키워주신 부모님의 마음을 알게 됩니다. 아직 믿음이 연약한 영적인 어린 아이입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누리십시오. 이제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십니까? 바울처럼 자원하여 기쁨으로 스스로의 자유를 제한하고, 형제들과 아직 믿음이 어린 양들에게 덕을 끼치시기 바랍니다. 나의 자유를 누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나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에서 더 큰 즐거움과 기쁨을 누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기도합니다.


  바울은 먹고 마시는 일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행하든지 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고 합니다. 헬라인들에게는 늘 유대인들의 깐깐함이 걸림돌이고, 유대인들에게는 헬라인들의 자유분방함이 늘 걸려 넘어지게 하는 돌인데 서로 상대방의 양심을 먼저 신중하게 고려하고 존중하랍니다. 33절을 보면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 우리가 입술로 복음을 전하는 것만으로 사람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그들의 양심을 고려하고 그들을 위하여 나 자신의 권리와 자유를 포기하고 그들의 종이 될 때, 그리하여 그들을 유익하게 할 때 그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사는 비결이 무엇일까요? 11장 1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먹고 마시는 문제를 바울이 지금까지 말씀한 것과 같이 내 식성이나 내 욕망보다는 나의 기준이나 나의 도덕심보다는 상대방의 눈높이에서 살피는 일입니다. 신령한 일들을 날마다 경험했던 이스라엘조차 무엇에 넘어졌는지 연구하고 기억하여 자기를 쳐 복종시키는 일입니다. 우리 학생들 시험 준비 할 때, 많은 학생들이 쉽게 틀리는 부분이라고 교수님이 알려주시면 더욱 꼼꼼히 공부하여 준비하지 않나요? 많은 사람이 실패했다고 해서 나도 실패할 확률이 크다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생활은 확율이 아닌 확신으로 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성령이 내주하셔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처럼 나를 신실하게 인도하십니다. 감당치 못할 일은 반드시 피할 길을 내십니다. 오늘도 내일도 신령한 떡과 신령한 음료로 우리를 먹이시고 마시게 합니다. 그렇게 살면 원망이 가득할 것 같은데 오히려 감사가 넘치고, 그렇게 살다가는 망가질 것 같은데 넉넉히 이깁니다. 자기만족을 위해 사는 사람들은 잠깐 기쁘다가 금방 허탈해지고 허무하지만 주님의 영광을 위하는 삶에는 영원한 기쁨이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이미 경험을 누렸고, 누리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날마다 일상 속에서 먹든지 마시든지 무슨 일을 하든 주님의 영광을 위해 하길 축언합니다.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목자님들과 형제 자매님들 안에 주님 주시는 감격과 감동이 날마다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