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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5년 부활절 특강 2강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으리라(고린도전서 15:35~58)2025-04-28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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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특강 2강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으리라


말씀 : 고린도전서 15:35~58

요절 : 고린도전서 15:49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으리라”


  고린도전서 15장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부활에 관해 질문한 것을 답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질문은 12절에 나오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답변으로 바울은 이미 1-34절에 걸쳐 부활의 확실성을 증거하였습니다. 두 번째 질문은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며 또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곧 부활의 성격에 관한 질문입니다. 이에 대한 답변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먼저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는가"(35~41)를 다루고 이어서 "어떠한 몸으로 오는가"(42~49)에 관하여 말씀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승리의 개가를 15장 전체에 대한 결론으로 맺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무엇보다 우리에게 부활의 영광과 최후 승리에 대한 확신을 심어 줍니다. 본문을 통하여 우리가 장차 어떤 몸을 입을지 곧 부활의 성격에 대해 배우며, 참된 소망 가운데, 주님을 힘써 섬기기를 기도합니다.


1. 어떻게 다시 사는가?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자신이 받은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들은 복음 진리를 단순히 믿고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당시 헬라철학은 크게 위세를 떨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영은 선하지만 육체는 악하고 죽으면 결국 소멸한다고 말하였습니다. 또 고린도교회 성도들도 지금까지 사람이 죽고 시체가 땅에 묻히면 썩어 소멸되는 것을 보아왔습니다. 이들은 이렇게 흙이 되어버린 몸이 어떻게 다시 재조직되어 부활 후 새 몸이 될 수 있는가 생각할 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전하는 부활의 메세지는 그들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맞지 않아 보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렇게 질문하였습니다. 35절입니다.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오늘날 우리가 생각해도 충분히 이해가 되는 질문입니다. 이와같은 질문을 챗-GTP에게 했다면, “네, 매우 좋은 질문입니다.”라고 했을 겁니다. 그러나 바울은 말합니다. 36절을 보십시오. "어리석은 자여 네가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이 말씀의 원문은 '너'가 강조되어 있습니다. 원뜻을 살려 번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어리석은 자, 너여! 네 자신이 늘 씨를 뿌리면서 그 씨가 죽어야 새 움이 트고 자라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농사에 익숙했던 당시 사람들은 씨가 뿌려지고 자라나는 것을 쉽게 보고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도 씨의 비유는 어렵거나 낯설지 않습니다. 바울은 사람들에게 매우 익숙한 씨의 비유로 몸의 부활을 설명합니다. 씨가 땅속에 심겨져 싹이 나오고 줄기가 자라 꽃이 피고 열매를 맺습니다. 이것은 초등학생도 학교에서 콩을 키우고 자라는 것을 관찰하기에 다 이해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과정에서 ‘씨가 죽는다.’고 표현합니다. 예수님도 요한복음 12장에서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심으로 씨가 열매 맺는 과정에서 죽는다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한번 씨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십시오. 어느날 농부가 자신을 캄캄하고 축축하고 답답한 흙속에 파묻어 버렸습니다. 씨는 ‘누가 날 꺼내줘, 거기 누구 없어요?’ 외치고 싶지만 말할 수도, 움직일 수도 없어 흙 속에서 괴롭고 힘든 시간을 보냅니다. ‘내가 이렇게 죽는구나...’ 그런데 삼일째 되던 날 씨는 자신의 몸에서 뿌리가 나오고 싹이 트는 것을 보게 됩니다. ‘어 이게 뭐지?’ 그러더니 서서히 줄기가 올라오더니 캄캄한 흙을 뚫고 나오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흐르자 씨가 처음 땅속에 심겨질 때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습니다. 대신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아름다운 꽃이 핀 형체가 되어 있었습니다. 만일 꽃이 된 씨가 말을 할 수 있었다면 이렇게 말 했을 겁니다. ‘아 죽길 정말 잘했다.’ 이와 같은 놀라운 일이 이땅에서 한해에도 셀 수 없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자 보십시오. 하찮은 들의 풀과 곤충에게도 이렇게 놀라운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이, 하물며 자신의 독생자도 아낌없이 내어주신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새 몸을 입혀주시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은 누가복음 12장 30절에서 제자들에게 말씀 하셨습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들어갈 들풀도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들을 입히시지 않겠느냐?”. 


  바울은 이어서 대답합니다. 37, 38절을 보십시오. “또 네가 뿌리는 것은 장래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맹이 뿐이로되 하나님이 그 뜻대로 그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 농부가 사과나 장미를 심을 때, 초소형 사이즈의 사과나 장미를 심지 않습니다. 대신 작고 까무잡잡한 씨앗을 심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각 종자에게 그 뜻대로 형체를 주십니다. 그 결과는 처음 심을 때 씨앗과는 비교할 수 없이 아름답습니다. 


  39~41절을 읽겠습니다.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나는 새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의 육체라 /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 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며 별의 영광이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이처럼 하나님은 꽃의 씨 뿐만이 아니라 사람, 짐승, 새, 물고기의 육체를 저마다 다양하고, 이 땅에서 살기에 적합하게 만드셨습니다. 생명체 뿐만 아니라 하늘에 있는 행성과 별들도 저마다 고유한 형체가 있습니다. 밤 하늘에 빛나는 수 많은 행성들도 우리가 멀리서 보고 있어서 다 비슷해 보일 뿐 저마다 다른 형체를 갖고 있습니다. 해와 달이 다르고, 별과 별이 다 다릅니다.

 

  바울은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다고 말씀합니다.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죽은 후에 우리가 누리게 될 부활의 영광이 저마다 다르다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성경에서는 신자들이 저마다 다른 하늘의 상급을 받게 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본문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각 종자들에게 그에 맞는 몸을 주신 것처럼, 부활 후에 신자들이 하나님 나라에서 살기에 적합한 몸을 주신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 둘 사이의 간격은 씨와 꽃의 아름다움의 차이보다 훨씬 큰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서 입게 될 새 몸은 이땅의 그 어떤 몸보다 훨씬 아름답고 영광스럽습니다. 장차 우리에게 새 몸을 약속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2. 어떠한 몸으로 오는가? (42~53)


  바울은 이땅에서의 몸과 차원이 다른 새로운 몸이 있음을 말하지만, 동시에 이땅에서의 몸과 하나님 나라에서 입게 될 새 몸의 연관성을 이야기 합니다. 마치 씨가 죽어 피게 된 꽃이 씨와 전혀 다른 존재 같지만, 실제로는 본질상 동일한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부활 후에 입게 될 새 몸은 이땅에서 우리가 입고 있는 몸의 연장선 상에 있다는 겁니다.


  42-44절을 보십시오.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 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 현재 우리 몸의 특성이 어떠합니까? 그리고 이런 우리의 몸이 장차 부활 후에 어떻게 달라집니까? 먼저 우리의 현재 몸의 특징 중 하나는 썩는다는 겁니다. 즉 우리의 몸은 결국 언젠가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갑니다. 보통 20대 중반을 넘어가면 우리 몸은 노화가 시작된다고 합니다. 이때부터 우리 몸은 서서히 흙으로 돌아가기 시작하는 겁니다. 정유석 목자님은 비타민이나 건강식품을 먹을 때마다 ‘나는 죄인이다’ 라는 생각이 든다고 합니다. 죄로 인해 흙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이 속도를 늦추기 위해 비타민을 먹고 있다는 겁니다. 우리 청년 회장이 이렇게 영적입니다. 맞습니다. 사람들은 현대 의학기술이나 건강식품의 도움으로 노화 속도를 늦추기 위해 애쓰고 나름대로 효과도 보니다. 하지만 대세를 거스를 수는 없습니다. 언젠가는 반드시 흙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모든 자연법칙이 거스를 수 없는 또 하나의 법칙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몸의 부활입니다. 그날에 우리의 몸은 영원히 썩지 않을 몸으로 부활합니다. 


  또 우리의 현재 몸은 욕 됩니다. 욕되다는 말은 'in dishonor' 곧 불명예스럽다 치욕스럽다는 뜻 입니다. 우리는 좀 거룩하게 살고 싶어도 타락한 본성을 온전히 벗어버릴 수 없습니다. 다른 지부의 한 목자님이 단기 선교로 아프리카에 갔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 나라에 경제적인 어려움이 닥쳤고, 함께 장막생활에서 공동체 생활을 하던 현지 목자들은 돈을 벌지 못해 끼니를 굶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 목자님은 한국에서 가져온 돈이 좀 있었기에 빵이라도 사 먹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넉넉하지는 않았고, 결국 굶고 있는 다른 형제들이 볼까봐 방문을 잠그고 혼자 빵을 먹었습니다. 목자님은 그래도 자기가 목자인데, 내가 지금 뭐하고 있는가 하는 생각으로 비참하여 울면서 빵을 다 먹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머리로는 고상하게 살고 싶지만 삶은 뜻대로 안될 때가 많습니다. 가만히 있어도 천박하고 정욕된 생각이 어느새 마음에 들어와 있습니다. 우리의 지난 날들을 돌아보면 온갖 죄악으로 얼룩진 삶의 연속이었음을 부인 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부활의 믿음이 없으면 욕된 몸이 요구하는 대로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삶을 살게 됩니다. 요즘은 SNS의 발달로 세계 각지에서 일어나는 끔찍한 사건과 사고를 수시로 접하게 됩니다. 세상이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지고, IT 기술이 발달해도 부활의 믿음이 없으면 사람들은 욕된 본성을 이기지 못하고 욕된 삶을 살아 갑니다. 오히려 새로운 기술을 활용하여 신종 범죄를 양성합니다. 그러나 그날에 우리는 욕되지 않은 몸으로 부활합니다. 그날에는 자기를 부인하며 양식을 먹거나 소감을 쓰지 않아도 됩니다. 본성이 변화되어 자기가 하고 싶은 일 자체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천국에는 ‘자기부인’이라는 말 자체를 더 이상 쓰지 않게 됩니다. 늘 감사와 찬양이 넘쳐납니다. 거룩한 몸으로 창조목적에 부합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또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삽니다. 현재 우리의 몸은 약합니다. 조금만 과로해도 감기 몸살로 앓아눕습니다. 또 끊임없이 질병에 시달립니다. 육신만 약할 뿐 아니라 마음도 약합니다. 상대방이 악의없이 툭 뱉은 말에도 쉽게 상처 받습니다. 또 상처를 줍니다. 뭔가 일이 잘 풀리면 내가 잘나서 그렇지 하며 교만한 마음이 올라오고, 잘 안 되면 하나님이 안 도와 주셔서 이렇게 되었다면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연초에 새벽기도와 양식먹기를 결단하고 도전하지만 며칠을 못 갑니다. 매년 부활장을 암송하는데, 한번 햇갈린 부분은 계속 햇갈립니다. 정욕에 약하여 쉽게 무릎꿇고 절망합니다. 끓어오르는 혈기와 분노의 감정을 참지 못해 막 쏟아내고 후회합니다. 기껏 참으면 아 그때 한마디 할걸 하며 또 후회합니다. 다른 분 이야기가 아니라 다 제 이야기 입니다. 그러나 부활의 몸은 강합니다. 피곤하지 않고, 그 지긋지긋한 정죄감이나 사탄의 고소에 더 이상 시달리지 않습니다. 온 힘을 다해 하나님을 찬양해도 목이 쉬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각종 질병에도 걸리지 않고, 디스크, 관절염, 신경통, 치매, 충치, 무좀, 비염, 알러지, 천식, 변비 등 육신의 병은 물론이거니와 우울증, 불면증, 각종 스트레스성 질환 등 정신적인 어려움도 다 사라집니다. 


 44절을 보십시오.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 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 여기서 육의 몸이란 육체의 본성에 지배를 받는 자연의 몸을 의미합니다. 인간은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삽니다. 현재의 우리의 몸은 지상의 환경에 살기에 적합한 몸입니다. 하나님을 겸손히 의지하고,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며 믿음을 배우기에 적합한 몸입니다. 그러나 부활의 몸은 영적 환경에 적합한 몸입니다. 부활의 몸은 예수님과 함께 왕노룻하며 주님과 함께 영광을 누리기에 적합한 몸 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은 공간의 구애를 받지 않고, 이곳에서 저곳으로 신속히 움직이실 수 있었습니다. 또 잠겨진 문을 그대로 통과하실 수 있었습니다. 또 음식을 드실 수도 있었고,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의 몸을 손으로 만지고 촉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요 29:9-29). 이처럼 우리는 장차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같이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게 됩니다. 천사와 같이 아름답고, 거룩하고,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여 주와 함께 영원히 거할 것입니다. 


 45절을 보십시오.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첫 사람 아담에 비교합니다. 첫 사람 아담은 영혼을 가진 육체적 생명체의 시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른 사람을 살려주는 영적 생명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님은 살려주는 영이 되셨습니다. 즉, 그리스도는 자신의 부활을 통해 자신이 영원히 살아있는 존재가 되었을 뿐 아니라 다른 생명체를 영원히 살게 하는 영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공동번역은 이 부분을 “생명을 주는 영적 존재(Life giving SPIRIT)”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첫 사람 아담은 육있는 자였지만 예수님은 신령한 자였습니다. 아담은 땅에서 났으며, 흙에 속한 자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늘에 속한 신령한 분이십니다. 


 아담이 처음 지음 받을 때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졌지만 타락 이후에는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이후 모든 인간은 다 아담의 형상 곧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었습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바울도 아담의 형상을 입었습니다. 이로서 모든 인간은 흙에 속한 자가 되었습니다. 그러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태어났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이제 하늘에 속한 자가 되었습니다. 사람이 신령한 존재, 영적인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순서 아담이 먼저요 그리스도가 다음입니다. 현재 우리의 몸은 저 흙에 속한 아담과 같으나 우리의 본질은 신령한 자로 이미 거듭났습니다. 그러므로 장차 우리가 어떠한 몸을 입게 됩니까? 49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으리라” 우리는 모두 부활의 날에 하늘에 속한 영광의 몸을 입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자기 뜻대로 하늘에 속한 형체를 주시고, 각 사람에게 가장 합당하고 알맞은 영광을 누리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주께서 재림하실 때 아직 살아 있는 성도들은 어떻게 됩니까? 그들은 혈과 육의 몸을 그대로 입고 있는데 그러면 그들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받을 수 없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 바울은 51, 52절에서 대답합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주께서 재림하실 때 나타날 이러한 일은 우주의 비밀입니다. 이제 때가 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것입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십니다(살전 4:16,17). “빰바라 밤~” 예수님의 재림 나팔 소리가 온 땅에 울려 퍼지면 제일 먼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썩지 아니할 몸으로 부활합니다. 동시에 그때 살아남은 신자들도 홀연히 다 신령한 몸으로 변화됩니다. 곧 살아있는 자는 육체의 죽음이나 몸이 썩는 것을 거치지 않고 신령한 몸으로 변화됩니다. 이 모든 일은 순식간에 일어납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 살아있는 자는 나팔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변화되어 공중으로 들려집니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여 항상 주와 함께 있게 됩니다. 썩지 않고 죽지 않을 몸을 입게 됩니다(53). 


3. 승리의 개가(54~58)


 바울은 이 영광스러운 비밀을 말한 후에 최후 승리의 그 날을 생각하며 감격에 넘쳐 승리의 찬가를 부릅니다. 54-56절을 보십시오. 다 같이 읽겠습니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사망은 아담의 범죄 이후 세상의 절대적인 폭군이요, 지배자였습니다. 아무도 이 사망의 정체를 파악하지도, 그것을 외면할 수도, 또 그것으로 부터 도망갈 수 없었습니다. 사망은 영적 생태계의 최상위 포식자였습니다. 그런데 사망에는 쏘는 것이 있습니다. 쏘는 것이란 원어로 ‘켄트론’ 인데 화살을 의미합니다. 사망은 인생이 죽도록 마구 화살을 쏘아 대는데 그것이 ‘죄’입니다. 사망이 독화살을 쏘듯이 사람에게 죄를 쏘면 죄가 우리 몸에 꽂힙니다. 그러면 ‘죄’가 꽂힌 곳에 율법이 관여합니다. 율법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윤리적, 신앙적 요구를 담고 있는 것인데 인간의 죄인 됨을 깨닫게 하고 정죄하여 죽음을 선고합니다. 결국 죄와 율법의 권능 때문에 사람은 사망에게 굴복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썩을 몸, 죽을 몸이 썩거나 죽지 않을 몸을 입을 때 생명은 사망을 삼키고 승리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사망은 완전히 멸절하게 됩니다. 사망이 멸망하니 죄도, 율법도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합니다. 이 사망의 사망은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시작되어 성도들의 부활에서 완성됩니다. 그날에는 사망이 인간을 괴롭힐 수 없습니다. 죽음 자체도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여하게 됩니다(계 20:13). 이를 생각할 때 바울은 감격에 차 승리의 개가를 부릅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부활의 때에 신자들은 사망이라는 원수가 더 이상 없는 나라 곧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살게 됩니다.

 

 바울은 이제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57절을 보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죽음이란 자연스런 것이 아닙니다. 죄 값입니다. 그러므로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한 죽음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노릇 하는 삶을 살았습니다(히 2:14,15). 그러나 그리스도는 죽음을 자신의 죽음으로 죽이셨습니다. 누구든지 그를 믿을 때 죽음의 문제를 해결 받습니다. 사망의 세력에서 해방됩니다. 두려움 없이 이 세상을 살다가 기쁨으로 영생에 들어가게 됩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임종 시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무디는 “땅은 물러가고 하늘은 열린다” 요한 안드레는 “불 수레가 왔으니 나는 올라타야겠다.” 맥크라켄은 “아, 방이 어떻게 이리 밝은지! 천사들이 가득하구나” 메리 프라센스는 “아! 내가 지금 소유한 기쁨을 너희에게 알려줄 수 있으면 좋겠구나! 하나님께서 내게 오셨다. 그가 오셨다.” 종로2부에 계셨던 육민심 사모님은 암으로 투병하시다가 40대에 소천하셨습니다. 이 분의 임종을 지켜보셨던 당시 2부 책임 목자이셨던 문엘리야 목자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모님은 갑자기 부활 찬송을 불러 달라고 하셨는데 찬송을 부르니 마치 천사들의 찬양을 지휘하든 지휘하며 더 크게 더 크게를 외치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잠시 후 자신이 어떻게 복음의 일꾼으로 부르심을 받으셨는지 그리고 어떤 삶을 사셨는지 고백하고 천사와 같은 얼굴로 평안히 소천하셨다고 합니다. 이러한 죽음에 대한 최후 승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망을 이기게 하시는 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이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부활의 찬송을 크게게 부르며 개선장군처럼 영광스런 천국입성하시길 축언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장차 우리에게 일어날 놀라운 일들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영화로 치면 엔딩을 미리 본 겁니다. 우리의 미래가 어떻게 된다고요? 부활의 영광 가운데 최후의 승리를 합니다. 그러한 영광스러운 미래를 약속 받은 자로서 우리는 오늘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죽은 자의 부활과 최후 승리를 믿는 자들에게 바울은 어떤 삶을 살도록 권면하고 있습니까? 58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라“ 때로 열광주의자처럼 보이기도 하고 사변가처럼 보이기도 한 바울은 본 장을 실제적이고 실천적인 문제로 종결합니다. 그는 간곡하고도 표용적인 어조로 두 가지를 권면합니다.

 

 첫째,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라”. 견실하다는 것은 스스로 확신을 굳게 하는 것입니다. 흔들리지 말라는 것은 남에 의해 흔들림을 당하지 말라는 것입니다(엡 4:14). 특히 이단 교사들의 가르침에 미혹되어 흔들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믿는 자들은 최후 승리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결코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더욱 더 복음 진리에 믿음의 뿌리를 견고하게 박아야 합니다. 1,2절에서도 말했듯이 복음은 단순한 것입니다. 그러나 절대 불변의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어떤 헛된 철학이나 합리적인 이론에 속아서는 안됩니다. 특히 죽은 자의 부활을 부정하는 어떤 사상에도 흔들려서는 안됩니다. 바울은 골로새 성도들에게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골 2:6,7)“ 우리가 예수님을 주로 영접하였습니다. 우리가 그 안에 우리의 인생의 뿌리를 견고히 박는 가운데 조금도 흔들리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라.” 세상 일들은 열심히 수고해도 지내고 보면 헛된 것이 많습니다. 설사 남은 것이 좀 있어도 죽음과 함께 모두 허무로 돌아가 버립니다. 우리는 각자의 삶의 영역에서 학업과 직장 일, 자녀 육아 등을 열심히 감당하고 있습니다. 이것만으로도 피곤하고 지치는데, 아무리 몸의 부활을 믿는다 하더라도 주의 일에 더욱 힘쓰라는 말씀은 부담으로 다가 옵니다. 그것도 조금만 더 힘쓰는 것도 아니라 더욱 그것도 항상 힘쓰라고 하니 말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주의 일을 우리의 삶의 현장과는 별개라고 생각하는 오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교회 일만 주의 일이 아닙니다. 어떤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믿음으로 한다면 주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연습”으로 알려진 로렌스란 분이 있습니다. 그는 수도사가 되고자 했으나 교육이 부족해서 대신 수도윈 부엌에서 설거지나 잡일을 하는 평수사로 평생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그는 늘 하나님을 사랑하고 교제하려 애썼고, 주님께 대접하는 심정으로 수도사들을 정성스런 음식으로 섬겼습니다. 그는 비록 설거지나 청소, 수도사들의 신발을 수선하는 등의 허드렛일을 하였지만, 다른 어떤 수도사보다 영성이 뛰어나 ‘부활의 로렌스’ 또는 ‘주방의 성자’로 불리웠습니다. 우리도 로렌스와 같이 어떤 일을 하든 마음의 동기가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믿음이라면 그 자체로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주 안에서 한 수고는 하나님께서 기억하십니다. 또한 영원토록 그 가치가 남는 일이기 때문에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반대로 사람들이 보기에는 놀라운 성취를 이루었다 하더라도, 마음의 동기가 자기와 세상 영광으로 가득하다면 죽음과 함께 모두 헛수고가 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육체의 죽음 후에는 반드시 영광스러운 부활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는 그 날에 우리 믿는 자들은 모두 다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하여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것입니다. 이 최후 승리를 믿고, 믿음에 견고하며, 더욱 더 주님께서 맡기신 캠퍼스 개척과 세계 선교 사명을 힘써 감 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멘!